All Chapters of 사랑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Chapter 41 - Chapter 50

54 Chapters

41화

인연 팀이 좁은 부스 안에서 치열하게 상담을 이어가는 사이 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잔디 광장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낮의 온기가 가라앉은 대지 위로 서늘한 밤바람이 밀려왔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끝을 스치며 피곤으로 둔해져 있던 예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깨웠다.“인기 있는 팀들은 이미 순서가 끝났거든요. 지금 뒤에 몇 팀 안 남아서 관객들도 다 빠졌는데, 갑자기 의원님들이 오신다고 연락이 와서요. 저희도 머릿수 채우느라 아주 곤혹스럽습니다.”주무관이 군데군데 텅 빈 자리들을 가리키며 난감한 듯 덧붙였다.“화면에 잡혔을 때 빈틈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거든요.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앞에서부터 빈 곳에 흩어져 앉아주세요.”주무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축제장 곳곳에서 끌고 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각자 짝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인파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홀로 남겨진 예리가 누구와 보폭을 맞출지 고민하던 찰나였다.등 뒤에서 밀려온 거대한 실루엣이 예리의 그림자를 단숨에 집어삼켰다.“나 팀장님, 저랑 앉으시죠.”낮게 가라앉은 은호의 목소리가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귓가에 단단히 와닿았다. 예리가 고개를 돌렸다.조명을 등지고 선 탓에 은호의 얼굴은 어둠에 잠겼으나,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만큼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예리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은호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예리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무대 위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심장을 때리는 강렬한 드럼 비트와 함께 사방에서 날카로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쏟아지는 소음 속에서 은호가 예리 쪽으로 상체를 깊게 기울였다.“나 팀장님도 밴드 공연 좋아하십니까?”함성에 섞여 목소리가 흐릿하게 흩어졌다. 예리는 대답 대신 은호의 입가 근처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네? 죄송해요, 잘 안 들려서요.”4월의 어느 봄밤. 서늘한 바람을 뚫고 훅 끼어든 그녀의 온기가 은호의 숨결 깊숙이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혈관을 타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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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여보세요?“안녕하세요, 해진 씨. 아까 상담 진행했던 인연의 나예리 팀장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축제 현장을 빠져 나가는 인파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아, 팀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주셨어요?“부스에 소지품을 하나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혹시 하늘색 바람막이 지금 가지고 계세요?”-잠시만요. 아까 분명히 가방에… 어? 어머, 제 거 맞나 봐요! 다행이다, 저 잃어버린 줄도 몰랐어요.해진이 해맑게 대답했지만, 이상하게도 예리의 심장은 초조하게 뛰기 시작했다.“지금 어디세요? 제가 바로 가져다드릴게요.”-감사합니다. 여기가 그러니까… 어? 뭐라고?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아, 죄송해요. 민수 씨랑 지연 씨가 어디 좀 잠깐 다녀온다고 해서요. 저 지금 야외 주차장 밑에 있거든요. 해먹 존 바로 옆이요!그 순간, 민수가 읊조렸던 문장이 예리의 머릿속을 강타했다.‘우리 계획, 아는 사람 너랑 나밖에 없어.’외진 곳에 홀로 남겨진 해진, 지연과 민수의 은밀한 대화…, 그리고 민수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고들까지.머릿속에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점들이 단 하나의 선으로 완벽하게 연결되었다.그 서늘한 선은 곧 예리의 목을 옭아맸다. 소름 끼치는 전율이 목덜미를 거쳐 척추를 따라 거침없이 흘러내렸다.예리는 들이치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해진에게 당부했다.“해진 씨, 제 말 잘 들으세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계세요.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민수 씨건 지연 씨건, 절대 따라가지 마시고요.”-네? 그게 무슨 말….예리는 해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스 밖으로 튕겨 나가듯 달리기 시작했다.“팀장님! 이거 가져가셔야죠!”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람이 손에 들고 있던 하늘색 바람막이를 흔들며 소리쳤지만, 예리는 이미 야간 조명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예리의 뒷모습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류를 읽어낸 은호가 곧장 가람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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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콧물까지 흘리며 눈물을 쏟아내는 승호의 등을 예리가 토닥였다.“차가 언덕에서 갑자기 미끄러져 내려왔어요.”“차, 차가 갑자기요?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확인해 보셨어요?”승호가 당장이라도 자동차로 다가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소진이 그의 앞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위에서 내려올 때부터 운전석은 비어 있었어.”“네? 그럼….”단순한 기계 결함이거나, 혹은….“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했거나.”예리가 낮게 읊조렸다.그러다 문득 은호가 떠올랐다. 사고 직전, 자신을 처절하게 부르던 그의 목소리.“그나저나, 유 이사님은….”예리가 고개를 돌린 순간 겹겹이 쌓인 인파 너머로 홀로 멍하니 선 은호가 시야에 걸려들었다. 은호의 눈동자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텅 빈 채 허공을 표류하고 있었다.“은영 씨, 112에 신고 좀 부탁해요.”예리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에 보이는 그의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커다란 손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떨렸고 거친 호흡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사님?”예리가 코앞까지 다가서서 불렀음에도 은호는 미동조차 없었다.“유은호 이사님….”예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 나지막이 부르며, 경련하듯 떨리는 은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이 예리의 손바닥을 타고 밀려들었다.그제야 멎어 있던 은호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와 예리에게 닿았다.“…나예리.”은호가 부서질 듯 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팔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한 완력이었지만, 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떨리고 있었다.은호는 예리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은 채 울음 섞인 목소리를 뱉어냈다.“미안해……. 내가, 내가 또….”"이사님, 일단 진정하시고…."예리가 그를 달래기 위해 등 뒤로 손을 올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버티고 있던 은호의 전신에서 힘이 툭 빠지더니, 예리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기울어졌다.“이사님? 유은호 이사님!”예리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은호는 이미 의식의 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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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이를 지켜보던 해진이 다가와 민수의 팔을 부드럽게 쥐었다.“여보, 팀장님 지금 너무 놀라셔서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 감사 인사는 나중에 정식으로 드리자.”해진이 예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팀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조만간 저희가 따로 꼭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예리는 복잡한 눈빛으로 해진을 응시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그때 차 주변을 조사하던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해진의 얼굴을 힐끔 살피더니 수첩을 펼쳤다.“사고 당사자분 맞으십니까? 사고 당시 상황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수가 다급하게 해진의 어깨를 낚아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경찰관님, 제 아내가 너무 놀란 상태라 경황이 없습니다. 우선 병원부터 데려가도 괜찮을까요?”경찰관이 해진의 창백한 안색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일단 치료부터 받으시죠. 그럼,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나중에 담당 조사관 배정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민수가 경찰관에게 제 번호를 알려주는 사이 예리도 다가가 말했다.“저도 우선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진술 조사는 병원부터 들른 뒤에 받겠습니다.”“네, 협조 감사합니다. 조만간 연락드릴 테니 그때 출석 부탁드립니다.”경찰관이 수첩을 접고 멀어지기 무섭게 민수가 해진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며 서둘러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탁-. 예리가 손을 뻗어 해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악력에 해진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해진 씨, 옷 가져가셔야죠.”예리가 쓰러진 은호의 주변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바람막이를 들어 보였다.“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이것 때문에 저 찾아오셨던 거죠…?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해진이 옷을 받기 위해 예리에게 다가온 순간, 예리가 해진의 귀가에 바짝 다가와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서늘하게 속삭였다.“범인이 누군지 압니다.”“네? 그게 무슨….”깜짝 놀란 해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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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소진이 깜짝 놀라 예리를 쳐다봤다.“네?! 해진 씨, 눈빛이며 행동만 보면 민수 씨를 아주 끔찍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죠.”이내 소진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뭐… 문양 없는 결혼이야 저희 업계에선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그렇죠. 문양 없는 결혼뿐이라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죠.”예리가 소진에게 시선을 던지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그런데 진짜 문제가 따로 있어요.”“……?”소진이 대답을 재촉하듯 곁눈질로 힐끔 예리를 쳐다봤다.“오늘 사고 범인, 민수 씨예요.”“네?”예리의 입에서 ‘범인’이라는 단어와 ‘민수’라는 이름이 동시에 튀어나오자, 소진은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버렸다.끼이익—!급제동이 걸린 차가 쏟아지듯 앞으로 기울며 예리의 몸도 함께 쏠렸다.“아, 죄송해요. 팀장님. 너무 놀라서…. 괜찮으세요?”소진이 예리의 가슴 앞을 단단히 가로막았던 손을 치우며 물었다. 예리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강 비서님도 눈치채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 해진 씨한테 슬쩍 떠보셨잖아요, 주변에 원한 살 사람 있냐고.”예리의 말에 소진이 천천히 다시 핸들을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그건 사고가 우연이라기엔 너무 수상쩍어서 여쭤본 거고요. 설마 민수 씨가 범인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예리가 민수의 수상한 행적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아무래도 그동안 일어났던 사고들… 민수 씨가 온전한 피해자는 아닌 것 같아요.”“그게 무슨…. 그럼, 일부러 자기한테 사고라도 냈다는 말인가요?”“그것까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오늘 사고와 그동안 민수 씨가 겪은 사건들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건 분명해요.”“…팀장님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데요? 혹시 민수 씨가 직접 이야기하는 거라도 들으셨어요?”“네. 정확히는, 공범이랑 대화하는 걸 들었죠.”공범이라는 단어가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잠깐만요, 그럼 그 공범이라는 사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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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처참하게 휘청이는 차체를 따라 은호의 몸이 이리저리 사정없이 내던져졌다.룸미러 너머로 상만의 다급한 눈동자가 스치듯 맞물린 순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상만의 거칠고 단호한 호통이 귓전을 때렸다.“유은호! 빨리 자리에 앉아서 벨트 매!”은호가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가 겨우 안전벨트를 채워 넣는 걸 확인한 상만은 다시금 미친 듯이 브레이크를 짓밟았다. 하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줄기는커녕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구불구불한 빗길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차 안에서, 은호는 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부러져라 움켜잡았다.핸들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은 상만이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미처 은호와 눈을 맞추기도 전, 차창 앞으로 거대한 급커브길이 괴물처럼 들이닥쳤다.상만이 비명을 삼키며 온 힘을 다해 핸들을 틀었지만 결국 속도를 이기지 못한 차가 비명과 함께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쾅-!엄청난 굉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차가 절벽 아래로 사정없이 구르며 은호의 시야가 잔인하게 구겨졌다.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머리에서 붉은 피를 흘린 채 눈을 감아버린 아버지의 얼굴이 낙인처럼 눈에 박혔다.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를 끝으로 암전이 찾아왔다.딩동- 딩동-.은호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헐떡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베개 위로 이마의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아직 가시지 않는 잔상 탓에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었다.‘…안돼.’식어버린 과거의 파편들이 살아있는 칼날이 되어 꿈과 현실의 경계를 초토화했다. 그것들은 곧장 은호의 영혼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은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악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딩동-.다시 한번 현실을 일깨워 주는 소리에 은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온몸이 기분 나쁜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오한이 들었다.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탁자 위의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초록색 숫자는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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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예리는 은호가 의구심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체 없이 죽을 냄비 속으로 쏟아부었다.그러고는 여전히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은호를 향해 고개를 척 들어 올리며 으름장을 놓았다."이사님, 그렇게 뒤에 서 계시면 저 감시하는 걸로 오해합니다?"은호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그럼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려 주세요."예리가 턱끝으로 식탁 의자를 가리키자, 은호는 슬그머니 밀려나 잠자코 자리로 가서 앉았다.이내 가스레인지 불이 켜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예리가 냄비를 올리고 죽을 데우기 시작했다.주방 불빛을 받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예리의 뒷모습을 은호는 식탁에 앉아 가만히 눈에 담았다.아플 때 누군가 곁에 있어 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고가 있었던 후,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지독하게 시린 겨울이 있었다. 그해 겨울의 기억은 유독 선명했다.타오르는 고열이 억센 밧줄처럼 온몸을 꽁꽁 옭아맨 탓에 어린 그는 그저 침대 위에서 무력하게 호흡을 골라내야 했다. 귓가에는 이명이 일고 시야마저 흐릿하게 마비되어 가면서도 은호의 시선은 오직 굳게 닫힌 방문만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어쩌면 그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기대를 품었으나 어머니는 끝내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직 옆방에서 자신과 똑같이 앓고 있을 도현에게만 쏠려 있었으니까.온기라곤 증발해 버린 방 안에서 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일하는 아주머니가 머리맡에 두고 간, 차갑게 식어버린 밥과 약을 기계적으로 삼키는 것뿐이었다.그리고 그때 깨달았었다.앞으로는 이런 지독한 외로움이 내 일상이 되겠구나, 하고.그런데 지금, 예리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불 앞에 서 있었다. 그 작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달듯이 뜨거워졌다.어느새 죽을 다 데웠는지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예리가 찬장에서 그릇을 찾아내 정갈하게 담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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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원래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 누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약한 부분 하나쯤은 품고 살거든요."주방의 가라앉은 공기를 타고 예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울렸다."그런데 그게 아주 작아서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도, 가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를 집어삼키려 들 때가 있어요."창밖으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예리는 제 앞의 빈 컵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그 커다란 게 나를 삼키겠다는데 뭐 별수 있나요? 그냥 집어삼켜지지 않게, 나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수밖에요."은호는 컵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멈췄다. 예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제 자신의 무력감을 진심으로 안아주고 있었다."그래서 저는 이사님 원망 안 해요. 그날 이사님이 멈췄던 건 무능해서가 아니라, 타이밍 나쁘게 그 순간 조각이 커져 버린 것뿐이니까."“…….”"그러니까 이사님,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은호는 찰나의 숨을 삼키며 예리와 조심스레 시선을 맞췄다."그리고 그거 아세요? 그렇게 도망치고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조각이랑 내 덩치가 비슷해지는 날이 온다는 거."먼 과거를 회상하듯 예리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아득해졌다.“저도 그랬거든요.”‘저도… 그랬거든요?’은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완벽하고 당차기만 해 보였던 그녀의 이면에 자신과 똑같은 종류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다."그러니까 자책하는 대신, '나'라는 사람의 크기를 키우는 데만 집중해 보세요. 그 조각이랑 크기가 비슷해지기만 해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지 않겠어요?"예리가 아이처럼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싱그럽게 피어난 그 미소가 그림자 졌던 주방을, 그리고 평생 겨울일 것만 같았던 은호의 얼어붙은 세계를 서서히 녹여 내렸다.은호의 가슴속이 속절없이 울렁거렸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기분 좋은 일렁임이었다.'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팀장님처럼 단단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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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전 비서님 접니다. 당장 경찰 쪽 인맥 전부 연락 넣….”탁.예리가 다급히 손을 뻗어 은호의 휴대폰을 낚아챘다.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연타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붉어진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팀장님, 죽을 뻔했습니다. 두 사람, 하루라도 빨리 처벌받게 해야 합니다.""아니요, 지금은 안 돼요.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오히려 무혐의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아요."은호가 억지로 이성을 붙잡으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한참을 그 자세로 서서 생각에 잠겼던 그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그래도 당분간은 안 됩니다.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이사님.""그 사람들 계획, 나 팀장님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이성을 잃고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지만, 예리를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완강했다.지독할 정도로 단단한 시선에 예리는 무거운 공기를 환기하려 슬며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이 일 하면서 협박 한두 번 당해본 줄 아세요? 예전엔 저 죽여버리겠다고 칼 들고 찾아온 고객도 있었어요."“…네?!”은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날카로운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경악이 서렸다."그런데 제가 발차기 한 방에 날려버렸거든요. 저 보기보다 제법 강해요."허공에 펀치를 날려 보이는 예리를 보며 은호는 황당함에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하지만 곧, 은호의 미간이 더 단단히 좁혀졌다."그래도 안 됩니다. 경호가 정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직접 곁에 있겠습니다. 당분간 나 팀장님 모든 스케줄은 저랑 동행하시죠."“네?!”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이 말은 그러니까… 온종일 눈앞의 남자와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예리의 입꼬리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사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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