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가 필요한 건 윤재하 씨보다 자기 쪽이었다.수요일 오전부터 지안은 그 사실을 아주 성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메일 세 통을 동시에 열어 놓고, 킥오프 자료를 뜯고, 클라이언트가 전날 밤에 추가로 얹어 놓은 요구사항을 항목별로 잘라 팀원들한테 뿌렸다. 일이 많으면 생각이 줄어든다. 적어도 평소에는 그랬다."오지안, 이건 사람이 할 일정이 아니야."서연이 회의실 문에 기대선 채 자료철을 흔들었지만, 지안은 노트북에서 시선도 떼지 않았다."나한테 뭐라 하지말고 클라이언트한테 말해.""네가 좀 해 줘.""내가 하면 싸워.""그게 내가 원하는 그림인데?"지안은 그제야 서연을 봤다. "난 지금 웃길 기분 아니거든.""알아. 그래서 더 웃겨."정말 얄미운 동기였다. 지안은 대꾸 대신 팀 메신저 창을 올렸다."서연, 소비자 반응 정리본 세 시 전까지요. 감성어만 빼지 말고 실제 표현도 같이 묶어 줘.""네에, 대리님.""비꼬지 말고.""비꼰 거 아닌데."서연이 돌아서면서 작게 툭 던졌다."오늘 또 둘이 남겠네."지안은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데도 체력이 든다는 걸, 이번 주 들어 새삼 배우는 중이었다.***오후는 생각보다 더 빨리 어두워졌다.기획팀에서 붙은 대리는 외근이 길어져 자료만 넘기고 빠졌고, 팀장은 저녁 회의가 잡혔다며 일곱 시쯤 사라졌다. 서연은 여덟 시를 넘기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나 먼저 간다. 더 하면 내일 못 일어나.""가.""너는?""레퍼런스 정리만 끝내고."서연이 가방을 메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재하는 아직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채, 마우스보다 펜을 더 많이 쓰는 사람답게 스케치패드 한쪽을 이미 새까맣게 채워 놓고 있었다."재하 씨도 가요?""이것만 정리하고요.""이 회사 나쁜 데예요. 신입한테 첫 주부터 야근 시키고.""선배님도 있잖아요."그 한마디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지안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재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서연은
Last Updated : 2026-04-0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