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Chapter 11 - Chapter 20

102 Chapters

# 11화 - 새까맣게

각오가 필요한 건 윤재하 씨보다 자기 쪽이었다.수요일 오전부터 지안은 그 사실을 아주 성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메일 세 통을 동시에 열어 놓고, 킥오프 자료를 뜯고, 클라이언트가 전날 밤에 추가로 얹어 놓은 요구사항을 항목별로 잘라 팀원들한테 뿌렸다. 일이 많으면 생각이 줄어든다. 적어도 평소에는 그랬다."오지안, 이건 사람이 할 일정이 아니야."서연이 회의실 문에 기대선 채 자료철을 흔들었지만, 지안은 노트북에서 시선도 떼지 않았다."나한테 뭐라 하지말고 클라이언트한테 말해.""네가 좀 해 줘.""내가 하면 싸워.""그게 내가 원하는 그림인데?"지안은 그제야 서연을 봤다. "난 지금 웃길 기분 아니거든.""알아. 그래서 더 웃겨."정말 얄미운 동기였다. 지안은 대꾸 대신 팀 메신저 창을 올렸다."서연, 소비자 반응 정리본 세 시 전까지요. 감성어만 빼지 말고 실제 표현도 같이 묶어 줘.""네에, 대리님.""비꼬지 말고.""비꼰 거 아닌데."서연이 돌아서면서 작게 툭 던졌다."오늘 또 둘이 남겠네."지안은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데도 체력이 든다는 걸, 이번 주 들어 새삼 배우는 중이었다.***오후는 생각보다 더 빨리 어두워졌다.기획팀에서 붙은 대리는 외근이 길어져 자료만 넘기고 빠졌고, 팀장은 저녁 회의가 잡혔다며 일곱 시쯤 사라졌다. 서연은 여덟 시를 넘기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나 먼저 간다. 더 하면 내일 못 일어나.""가.""너는?""레퍼런스 정리만 끝내고."서연이 가방을 메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재하는 아직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채, 마우스보다 펜을 더 많이 쓰는 사람답게 스케치패드 한쪽을 이미 새까맣게 채워 놓고 있었다."재하 씨도 가요?""이것만 정리하고요.""이 회사 나쁜 데예요. 신입한테 첫 주부터 야근 시키고.""선배님도 있잖아요."그 한마디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지안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재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서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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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 설탕 반 스푼

신경이 쓰인다. 화장실을 갔는지, 전화가 왔는지, 먼저 간 건지. 그런 걸 왜 자기가 체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더 짜증났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선배님."재하가 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편의점 비닐봉지까지 손목에 걸려 있었다."뭐예요.""커피요.""보면 알아요.""그럼 맞는지 확인만 해 주세요."재하가 컵 하나를 지안 책상 위에 내려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뚜껑 옆에 설탕 스틱이 반쯤 뜯겨 있었다."왜 뜯어 놨어요?""반만 넣으시잖아요."지안 손이 컵에 닿기 전에 멈췄다."내가요?""어제 편의점에서요." 재하가 너무 쉽게 대답했다. "하나 다 안 넣고 버리셨잖아요."기억은 났다. 밤샘 PT 전, 너무 쓴 건 싫어서 습관처럼 반만 털어 넣었던 것. 그걸 봤다는 사실보다 그걸 기억하고 지금 가져왔다는 사실이 더 별로였다."관찰이 취미라더니.""이번엔 변명거리가 있죠." 재하가 자기 컵을 들고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야근하는 팀원 챙긴 거니까.""후배가 선배 챙기는 그림이 너무 익숙한데요.""선배님이 챙김을 받지 않는 타입이라서 그런가."지안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쓰지도, 너무 달지도 않았다. 딱 적당했다."이 정도면 업무 방해예요.""맛없어요?""그 반대라서."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지안은 아차 싶었다. 재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만 들었다. 장난을 더 얹을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게 더 위험했다."다행이네요." 그가 낮게 말했다.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지안은 괜히 메신저 창을 켰다 닫았다. 커피는 책상 위에 두고도 자꾸 손이 갔다. 손에 잡히는 게 있어야 했다."윤재하 씨.""네.""원래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요?"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너무 직접적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를 수는 없었다. 재하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아니요."한 단어였다. 가볍게 넘기지도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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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 집는 순간

이 남자는 질문도 끝까지 안 해서 사람을 미치게 했다.그 문장은 하룻밤 자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안은 목요일 아침 회사 로비를 지나면서 저도 모르게 휴대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밤새 온 메일은 네 통, 클라이언트 수정 요청은 두 건, 재하한테 온 개인 메시지는 당연히 없었다. 없는데도 확인한 자기 쪽이 더 짜증났다.그래도 일정은 사람을 살렸다. 오전 열 시 브리프 회의, 점심 전 내부 정리, 오후 방향 확정. 할 일이 분명하면 감정은 뒤로 밀린다. 적어도 지안은 늘 그렇게 처리해 왔다."야."서연이 커피를 들고 지안 책상 옆에 섰다."왜.""너 어제 몇 시에 들어갔냐.""열한 시 넘어서.""재하 씨는?"지안은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췄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같이 퇴근했잖아.""엘리베이터만 탔거든."서연은 커피컵 뚜껑을 닫으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케이. 더 안 물어.""묻지 마.""안 물을게. 대신 관찰은 하지."그 말이 꼭 경고처럼 남았다. 지안은 대꾸하지 않고 브리프 자료를 다시 열었다. 클라이언트는 신규 음료 브랜드를 더 젊게 보이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말은 보통 두 가지로 번역된다. 하나는 싼 티 나게 화려하게.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실체는 없는 무드로. 둘 다 지안은 싫었다.회의실에 들어가자 팀장이 먼저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서연은 벽 쪽 자리에 앉아 펜을 돌렸다. 재하는 노트북을 켜 둔 채 화면보다 화이트보드를 먼저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늘 먼저 전체를 본다. 그걸 알아차리는 쪽도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더 문제였다."오대리, 시작하죠."클라이언트 담당자가 브리프를 넘기자 지안이 바로 흐름을 잡았다."네. 우선 핵심은 리브랜딩 이유부터 명확해야 합니다. 지금 브랜드가 안 먹히는 건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 선택처럼 안 보이기 때문이에요."클라이언트 쪽 과장이 물었다."선택처럼 안 보인다는 게 무슨 의미죠?""무난하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마실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아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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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 더 선배님답게

지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논리는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재하답기도 했다. 사람 얼굴보다 행동을 한 컷으로 남기는 방식. 걸리는 건 그게 지안 머릿속에서 아예 없는 방향은 아니라는 거였다."카피가 세면 비주얼이 받아 줘야죠." 지안이 다시 말했다. "화면까지 비어 있으면 런칭 광고가 아니라 티저처럼 보여요.""비어 있는 거랑 숨 쉬는 거랑은 다르죠."이번엔 지안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윤재하 씨.""네.""지금 시적인 척하는 거예요?"서연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삼켰다. 팀장도 입가를 한번 눌렀다. 재하는 당황하지 않고 아주 멀쩡하게 답했다."아니요. 선배님이 답답한 거 싫어하시니까 쉽게 말한 건데."그 말이 나오자마자 지안은 입을 다물었다. 또 그거다. 꼭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매번 한 발 먼저 들어오는 말.서연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두 분은 벌써 번역이 되네." 서연이 태연한 척 끼어들었다. "난 아직도 재하 씨 말이 뭔지 반쯤밖에 모르겠는데.""간단해요." 지안이 곧장 받았다. "시안 두 버전으로 가면 됩니다. 하나는 제 방향, 하나는 윤재하 씨 방향."말은 실무적이었는데, 거의 선언처럼 떨어졌다. 재하가 그걸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점심 전까지 1차만요.""됩니다."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지안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못했다. 회의는 거기서 일단 정리됐다. 클라이언트는 오히려 만족한 표정으로 자료를 챙겼다. 방향이 둘이면 선택지가 생기고, 선택지가 생기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업계 사람들은 그런 착시를 좋아했다.회의실 문이 닫히자 서연이 제일 먼저 숨을 내뱉었다."와. 브리프 회의에서 이렇게까지 재밌을 일인가.""재밌으면 네가 맡아." 지안이 바로 쏘아붙였다."싫지. 난 구경이 체질이거든."팀장이 그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둘 다 말 되는 방향이긴 해요. 일단 시안 보고 판단합시다.""네.""네."대답까지 겹쳤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오후 내내 지안은 일부러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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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 다들 좋아하는

문제는 그 둘이 늘 같이 왔다는 거였다.재하의 말과 재하의 결과물, 재하의 표정과 재하의 타이밍. 어느 순간부터 하나만 떼어 생각하는 게 잘 안 됐다. 지안은 금요일 아침 메일함을 열면서도 전날 봤던 시안부터 떠올렸다. 더 선배님답게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일 얘기처럼 했는데, 일 얘기만은 아니었던 문장.그 때문에 더 신경이 긁혔다."야."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몸을 틀어 지안을 봤다."왜.""어제 그 시안.""왜.""좋았지?"지안은 마우스를 클릭한 채 대꾸했다."쓸 만했어.""쓸 만?" 서연이 그대로 따라 했다. "오지안 입에서 쓸 만 나왔으면 거의 고백이야.""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마.""헛소리 아니고." 서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신입 너한테 유독 다르잖아."손이 멈췄다. 딱 그 정도만."무슨 소리야.""무슨 소리긴. 너한테만 말 길이도 다르고, 톤도 다르고, 선 넘는 타이밍도 정확해.""박서연.""응.""프로젝트 스트레스 받으면 망상하는 버릇 좀 고쳐."서연이 피식 웃었다."부정이 너무 빠르다. 그건 좀 수상한데.""안 수상하거든.""그럼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 서연이 의자를 지안 쪽으로 조금 더 끌었다. "너도 그 신입 신경 쓰이지?"질문이 너무 정직해서 오히려 짜증이 났다. 지안은 이런 식의 추궁이 싫었다. 아니, 질문 자체보다 질문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더 싫었다."일 잘하는 후배면 원래 신경 쓰여.""그건 맞지." 서연이 순순히 끄덕였다. "근데 네 지금 표정은 일 잘해서 쓰이는 표정 아닌데.""내 표정 분석하지 마.""그럼 네가 설명하든가.""설명할 거 없어."서연은 더 밀어붙일 얼굴이었는데, 그때 팀장이 메신저 공지를 올렸다.`점심 같이 갑시다. TF도 있고 다들 고생했어요. 열두 시 반 로비.`서연이 화면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아, 됐다. 오늘은 밥 먹으면서 구경하면 되겠네.""뭘.""너랑 재하 씨.""너 진짜 맞을래?""점심 먹고."정말 한 대 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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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 물컵

지안은 물컵부터 집었다. 저 인간은 왜 아무 데서나 잘 어울리는지. 그것도 과하지 않게. 혼자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고, 딱 적당하게.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대화는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얘기로 넘어갔다. 막내들은 어제 시안 이야기를 했고, 팀장은 클라이언트 반응이 괜찮았다고 했고, 서연은 그 틈마다 사람 표정을 구경했다. 정확히 누구를 보는지는 굳이 확인 안 해도 알 수 있었다."근데 어제 재하 씨 시안 좋더라."제작팀 대리가 말을 꺼냈다."손으로 집는거, 그거 신선했어요.""감사합니다.""오대리랑 붙더니 더 빨리 는 거 아니야?"농담처럼 나온 말인데, 지안은 젓가락을 놓을 뻔했다. 재하는 웃기만 했다."선배님 기준이 높아서 그런가 봐요.""아휴, 또 선배님이래." 서연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듣는 사람까지 익숙해지겠네."지안은 바로 말을 잘랐다."회사에서는 선배님 맞잖아.""맞지." 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무 잘 붙여서 그렇지."팀장이 그 말을 별생각 없이 받았다."재하 씨가 원래 싹싹하잖아요. 어른들이 좋아할 타입."다들 또 웃었다. 재하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시선이 한 번, 아주 짧게, 지안 쪽을 스쳤다. 지안은 바로 국그릇을 들었다. 뜨겁지도 않은데 입천장이 데는 기분이었다.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대화가 조금 흩어졌다. 그게 차라리 나았다. 입에 뭐가 들어가 있으면 적어도 말을 덜 한다. 지안은 그렇게 믿었는데, 서연은 예외였다."야, 오지안.""왜.""제육 좀."지안이 접시를 밀어주자 서연이 아주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너 아까 표정 봤어?""무슨 표정.""남들도 재하 씨 칭찬하니까 네가 더 예민해지는 표정."지안은 고개도 안 돌리고 말했다."반찬이나 먹어.""그래. 맞나 보네.""진짜 죽는다."서연은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저 인간은 확신이 들면 오히려 조용해진다. 그 침묵이 제일 무섭다.반대편에서는 막내가 재하한테 또 말을 걸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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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 합리적 선택지

그게 오늘 점심에서 제일 기분 나쁜 순간이었다.더 기분 나쁜 건 그 뒤였다.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지안은 몇 번이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유리창 쪽을 봤다.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확히 그 타이밍에 눈을 마주치고, 딱 그 정도만 웃는 얼굴. 신경 안 쓰려고 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종류의 장면이었다."야."서연이 메신저 대신 직접 의자를 끌고 왔다."또 왜.""나 궁금한 거 생겼어.""안 궁금해.""너 아까 왜 먼저 피했냐."지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정확해서였다."누굴.""재하 씨 시선.""박서연.""응.""오늘 진짜 할 일 없지?""있지. 근데 너 구경이 더 재밌어."지안은 키보드를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피한 거 아니거든.""그래." 서연이 아주 순순하게 끄덕였다. "그럼 불편한 거네.""뭐가 달라.""많이 다르지." 서연이 몸을 기대며 말했다. "피하는 건 일시적이고, 불편한 건 계속 가거든."그 말이 더 싫었다. 계속 간다는 쪽이 맞을 수도 있어서.금요일 남은 시간은 이상하게 길었다. 재하는 늘 하던 대로 일했고, 필요한 말만 골라 했으며, 밝게 웃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 철저하게 평소 같은 모습이 점점 제일 수상해졌다. 아까 점심 직전 웃음과 지금 웃음이 분명히 다른데, 남들 눈엔 똑같이 멀쩡해 보일 거라는 사실까지 포함해서.퇴근 직전, 팀장이 공지를 하나 올렸다.`다음 주부터 전략기획팀 이태준 팀장님이 TF 같이 봅니다. 킥오프 전까지 방향 정리할 거라 월요일 오전 미팅 잡을게요.`서연이 그걸 읽자마자 지안을 쳐다봤다."합리적 선택지 등장.""미쳤냐.""내가 한 말 아니고 설정이 그렇게 생겼잖아.""입 닫아."서연은 웃기만 했다. 그런데 왠지, 지안은 그 말을 바로 지우지 못했다.합리적 선택지.그 표현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결국 금요일은 그대로 끝났다.***월요일 오전, 이태준은 정말 합리적으로 등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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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 한 박자

회의가 끝날 즈음 태준이 자료를 덮었다."오대리, 점심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같이 보시죠."지안이 시선을 들었다."점심이요?""네. 프로젝트 얘기 조금 더 하고 싶어서요. 자료로는 안 남는 쪽이 있잖아요."완전히 업무적인 제안이었다. 걸리는 건 그게 거절하기 애매하게 적절하다는 점이었다. 전략팀 팀장, TF 합류 첫날, 프로젝트 점검 명분.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했다."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서연이 장난처럼 끼어들었고, 태준은 웃었다."서연 씨는 다음에요. 오늘은 오대리 머릿속 먼저 빌려야 해서."회의실에 다시 한번 가벼운 웃음이 돌았다. 그 웃음 속에서 지안은 아주 짧게 맞은편을 봤다.재하는 웃지 않았다.정확히는, 입꼬리가 올라가기 전에 한 박자 멈췄다. 별거 아닌 변화였다. 모르면 못 보고 넘어갈 정도. 그런데 한 번 보이면 너무 분명한 종류의 미세함이었다."어떠세요, 오대리."태준 목소리에 지안은 다시 앞을 봤다."아, 네. 괜찮습니다.""좋습니다. 그럼 열두 시 반쯤?""네."재하가 그때서야 아주 평범한 표정으로 자료를 정리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방금 전 한 박자를 본 사람이면 더 그랬다.***점심은 사무실 근처 덮밥집에서 짧게 끝났다. 태준은 예상대로 편한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대화가 비지 않았고, 프로젝트 얘기를 하면서도 상대를 시험하는 느낌이 없었다."오대리는 카피 먼저 잡을 때 제일 강하더라고요.""AE는 원래 말부터 잡아야 하니까요.""근데 말만 잡는 사람이 있고, 말로 장면까지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태준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오대리는 후자 같아서요."지안은 그런 종류의 칭찬을 꽤 오래 들어 왔다. 일 잘한다, 판단 빠르다, 장면을 본다. 익숙한 말이고, 안전한 말이었다. 다만 안전한데도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지 않았다."과찬이세요.""아니요. 전략 쪽에선 그런 파트너 귀합니다."태준은 부담스럽지 않게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괜찮은 쪽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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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 출장 사진

"선배님, 태준 팀장님이랑 자주 식사하세요?"질문은 평범했는데 톤이 평범하지 않다. 지안은 파일에서 시선을 떼고 재하를 봤다. 저 인간은 꼭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긁는다."오늘이 처음이거든요."재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아."딱 한 음절이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그냥 받아 적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짧은 반응."왜요?" 지안이 물었다. "업무상 참고할 거라도 있어요?""아니요." 재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요.""업무 외 질문이 점점 많네요.""죄송합니다."사과는 빨랐고, 물러나는 것도 빨랐다. 오히려 찝찝했다. 지안은 파일을 다시 내려다봤다. 글자는 읽혔는데 의미는 잘 안 들어왔다.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대답은 했는데, 왜 굳이 했는지는 자기 쪽도 모르겠는 상태.재하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돌아갔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한마디쯤 더 붙였을 텐데, 이번엔 정말로 거기서 끝냈다. 그 얌전함이 이상했다.지안은 모니터 하단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아직 퇴근까지 멀었다.***다음 날 오전, 팀장은 갑자기 지난주 출장 자료를 다시 끌어오자고 했다."리브랜딩 제안서 앞쪽에 현장감 좀 넣죠. 너무 책상에서만 만든 느낌 나면 안 좋잖아요."서연이 바로 손을 들었다."현장감은 좋은데, 지난주 출장 사진이면 좀 난잡할 텐데요.""그러니까 정리해야죠." 팀장이 지안 쪽을 봤다. "오대리, 공유 드라이브에 폴더 있죠?"있었다. 너무 잘 알았다. 지안은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네. 있습니다.""좋아요. 오늘 안에 쓸 만한 거만 추려서 올려요. 공간컷, 사람컷, 저녁 톤 나는 거 있으면 더 좋고."저녁 톤이라는 말이 어딘가 거슬렸다.지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공유 드라이브를 열었다. 회의실 모니터가 아니라 자기 자리 듀얼 모니터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별로였다. 옆자리에서도 다 보이는 거리. 서연은 벌써 의자를 조금 끌어오고 있었고, 팀장은 뒤에서 커피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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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 맥주 거품

이 사람이 왜 내 걱정을 하지.메신저 창을 닫고도 이 생각은 한참동안 맴돌았다. 지안은 수요일 오후 내내 같은 파일을 두 번 열고, 같은 메일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별로 급하지도 않은 수정사항을 굳이 체크리스트로 다시 쪼갰다. 일이 많으면 보통 편해지는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자꾸 메신저 하단 이름 쪽으로 시선이 내려갔다.그러다 퇴근 한 시간 전, 팀장이 공지를 올렸다.`오늘 TF 회식 갑시다. 1차만 가볍게. 다들 고생했어요.`서연이 그걸 보자마자 의자를 돌렸다."가볍게는 무슨.""안 가면 안 되나?""너 지금 그 말 되게 수상해.""회식 싫어하는 사람이 회식 싫다는데 뭐가 수상해.""평소엔 싫어도 가잖아." 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왜 진짜 싫어 보이지?"지안은 대답 대신 모니터만 봤다. 설명할 수 없으니까. 회식 자체가 싫다기보다, 오늘 회식에서 뭘 또 의식하게 될지 그게 싫었다."걱정 마." 서연이 키득였다. "내가 분위기 띄워 줄게.""그게 제일 불안하거든.""알지."안다고 말하는 얼굴이 제일 불안했다.***회식 장소는 회사 근처 고깃집이었다. 팀장, 서연, 태준, 재하, 제작팀 둘, 영업팀 막내 둘. 사람 수가 애매해서 테이블 두 개를 붙였고, 그 애매함이 늘 문제를 만든다.지안은 태준 쪽 가까운 끝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막내 하나가 먼저 의자 하나를 빼면서 자리가 밀렸다. 서연은 반대편에서 아주 대놓고 지안을 불렀다."야, 여기 앉아.""거기 말고.""왜. 여기 편한데."편하지 않았다. 서연 옆, 그리고 맞은편이 재하였다. 너무 노골적인 배치였다."오대리, 빨리 앉아요." 팀장이 먼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고기부터 시켜야지."결국 지안은 앉았다. 재하는 맞은편이 아니라 대각선이었다. 안 보이지도 않고, 피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거리. 오늘따라 그런 거리만 계속 걸렸다."삼겹살 셋, 목살 셋 먼저요."서연이 메뉴판도 안 보고 외쳤다."소주요?""나는 맥주.""오대리는?"다들 자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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