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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여상사의 비밀 알바: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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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침묵의 방으로 가는 문

“넌 결국 그 사람보다 더 앞서갈 거야. 그리고 언젠가 그가 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될 거고.”“그건 우리 둘이 감당할 일이야.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고.”서윤은 말하고, 뒤돌아 나왔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가슴 안 깊은 곳에서 어떤 무거운 것을 떼어낸 것처럼 숨이 트이는 걸 느꼈다.그날 저녁. 하준은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윤은 아무 말 없이 와서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오늘 처음으로, 누구 앞에서 당신을 ‘내 사람’이라고 말했어요.”하준은 미소 지었다.“그 말을 들으니… 참 고맙고, 조금은 두렵네요.”“왜요?”“내가 정말, 당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하준 씨는, 내가 가장 힘들 때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도 그 자리에 있어줬어요.”“…….”“그건 내가 쓰는 어떤 문장보다, 더 강한 의미예요.”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그저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은 채 긴 하루의 끝을, 다정한 정적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하준이 커피를 사러 사무실 근처 카페에 들렀을 때였다.카운터 앞에서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정하준 씨 맞죠?”낯익은 목소리, 낯선 눈빛. 류이진이었다.서윤의 편집자이자,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에 늘 서 있던 남자.“시간 잠깐 괜찮아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하준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이 대화가 결코 짧고, 가벼운 것이 아닐 거라는 걸.두 사람은 카페 가장 안쪽, 벽에 기댄 좌석에 마주 앉았다.이진은 여전히 정돈된 셔츠에, 무심한 듯 매만져진 머리카락,그리고 모든 말을 하기 전 단정히 정리되는 눈빛을 갖고 있었다.“서윤이랑… 요즘 잘 지내요?”하준은 짧게 대답했다.“네.”“고맙네요. 그렇게라도 대답해줘서.”이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요… 아마도 누구와 있어도 외로울 사람이에요.”“…….”“혼자 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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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금요일 오후. 하준은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커서가 깜박이는 문서창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그 안엔 아무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그저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싶었다.지금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문장도, 숫자도 아닌 지난 며칠 간의 침묵과 눈빛, 그리고 이진의 말이었다.“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침묵의 방까지 들어가야 해요.”하준은 그 문장이 단순한 질투의 말이 아니라,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들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그녀는 깊고 조용한 사람이다.자기 안에서 고요하게 흔들리는 사람.그 고요함을 무서워하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을까?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그녀가 없는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어색하다.그날 저녁. 하준은 평소보다 더 늦게 사무실을 나섰고,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다소 피곤한 목소리로 받았다.“하준 씨?”“…지금 어디예요?”“작업실. 오늘 원고 마감 있어서.”“……저, 지금 가도 될까요?”“……왜요?”그는 한참을 머뭇이다가 조용히 말했다.“그냥… 당신 얼굴을 봐야 오늘 하루가 끝날 것 같아서요.”그 말에, 서윤은 긴 침묵 끝에 작게 대답했다.“…올래요. 조용한 거 괜찮다면.”서윤의 작업실. 하준은 도착하자마자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그녀는 머리를 묶은 채, 책상에 마주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커피 끓일까요?”“됐어요. 그냥… 앉아요.”하준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조용한 공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둘은 서로의 숨결만 들었다.“하준 씨.”“……네.”“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있었어요. 내가 당신 옆에 있는 게 맞나, 스스로에게 물은 하루였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말은, 예상하지 못한 고백이었다.“그 사람 말 듣고 흔들렸어요.이진 씨가 했던 말들. 그게 다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내 안에서 이미 떠오르고 있던 생각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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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잊은 줄 알았던 말이 되돌아오는 날

월요일 오후.서윤은 평소보다 한 템포 늦게 메일함을 열었다.스팸처럼 쌓인 독자 메시지 중 유독 하나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RE: 그날 밤의 체온을 읽으며]오래전 연재했던 첫 19금 장편.그 작품은 지금의 ‘핑크문’을 만든 시작이자,서윤이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시기의 흔적이었다.손가락이 떨렸다. 그 메일을 열지 않아도, 이미 안에 담긴 문장이 상상되었다.“작가님, 그때 그 장면은 제 첫 경험을 바꾸어 놓았어요.”“그 인물의 욕망이 저였어요.”실제로 열어본 메일 안엔 그 모든 상상이 담겨 있었다."그날 밤의 체온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도 잊지 못해요.작가님이 처음 묘사했던 그 장면 저는 그게 현실보다 더 진짜 같았어요.그러니까… 작가님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었던 거겠죠?"서윤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그 문장은 감탄처럼 보였지만, 그 안엔 분명한 침입이 담겨 있었다.작가의 서사가 현실의 작가를 감싸고 들어와 감정과 욕망을 추궁하고 있었다.그건 누군가의 해석이자 누군가가 만든, 서윤이라는 허구의 여자를 향한 판타지였다.그날 저녁, 서윤은 하준과 마주 앉아 있었다.카페의 창가 자리. 햇빛은 지고 있었고, 그녀의 눈빛도 지는 빛처럼 점점 흐려져 갔다.“무슨 일 있어요?”하준이 물었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지금 이 말을 해도 될까. 그가 나의 ‘핑크문’ 시절을 알고도 지금처럼 나를 봐줄까.욕망을 쓴 사람, 감정을 파는 사람, 때로는 자극만으로 읽히는 사람그런 나를 여전히 사랑해줄까.“오늘, 예전 독자한테 메일 하나 받았어요.”하준이 고개를 들었다.“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작품이었는데…그 사람이 그 작품 속의 장면이 자기 첫 경험보다 더 진짜 같았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렇게 쓴 나는, 진짜 그 감정을 안다고 믿었다고.”하준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말은 조용했지만, 그 속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너무도 선명했다.서윤은 말했다.“그 작품, 사실 나도 지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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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처음으로 당신에게만

수요일 밤. 서윤은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새로운 시리즈의 첫 원고,10년 전 자신이 처음 썼던 문장의 흔적을 다시 꺼내어 다듬고, 고쳐 쓰고,그리고 이제는 덧씌우는 작업을 끝낸 순간이었다.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잔잔하고, 오래도록 내리는 비.그것은 마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문장처럼 소리 없이 마음을 적셨다.그녀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 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차서윤]오늘…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답장은 바로 도착했다.[정하준]언제든지요.[차서윤]내가 쓴 글을, 처음으로 당신한테만 보여주고 싶어요.원고를 공유해도 괜찮을까요?이내 짧은 침묵 후, 하준은 이렇게 답했다.[정하준]영광이에요.이틀 뒤. 금요일 저녁. 작업실에서 하준은 조용히 노트북을 열고 앉아 있었다.서윤은 말없이, 그 앞에 원고 파일 하나를 열어주었다.PM_2025_new_v1“읽어보고, 어떤 감정이든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줘요.괜찮다는 말도, 조심스러운 말도, 전부 다 괜찮아요.”하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서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았다.그의 눈은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갔다.거기엔 ‘핑크문’이 쓰던 자극적 장면도 있었고,그와는 다른 부드러운 감정의 결도 함께 섞여 있었다.‘그녀는 누군가를 원한 적 없었다. 그저, 어떤 날의 밤처럼 곁에 누워손끝 하나 닿지 않고 잠드는 감각을 알아줄 사람을 원했다.’그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그녀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외로움의 모양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다.서윤은 그가 읽는 내내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그가 어느 단어에서 머무는지, 어느 문장에서 눈을 감는지,그 전부가 그녀에게는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속도처럼 느껴졌다.읽기를 끝낸 후. 하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서윤은 그 정적을 견디기 어려워 작게 입을 뗐다.“…너무, 너무 나를 드러낸 글이었나?”하준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은 못 하겠어요. 왜냐면… 이건 ‘당신’이 쓰지 않으면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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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말하지 않아도 대신할 수 있다면

월요일 아침. 출근 직후, 서윤은 팀장 자리로 불려갔다.이진은 출판부 실장과 함께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엔 출력된 파일 몇 장이 놓여 있었다.‘PM_2025_new_v1’-핑크문 계정 외 비공식 문서 존재 의심-계약서 내 “전속 콘텐츠 외 병행 프로젝트 사전 보고 의무” 조항 참고서윤은 그 문서를 보는 순간 피부 위로 얇은 얼음이 스치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이걸 왜,어떻게 확인하게 된 건가요?”이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서윤아, 네가 작업실에서 남긴 임시 파일이 서버에 백업되면서보안팀 쪽에서 자동 플래그가 떴어. 누구를 고발하고 싶은 건 아니야.”그 말은 너무도 태연했지만, 그 안엔 분명한 감정이 있었다.‘나는 네 비밀을 알고 있다’는, 그리고 ‘나는 이걸 이용할 수 있다’는 어른스럽게 포장된 자격의 언어.실장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법적으로 지금 문제 삼을 단계는 아닙니다.다만 사전에 보고되지 않은 창작 작업이 있다는 건 계약서상 충분히 짚고 넘어갈 사안이에요.”서윤은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그 원고는 ‘계약된 작품’이 아니었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도 아니었고,그저 하준에게만 전하고 싶었던 감정의 기록이었다.“그건… 저 개인적인 글이에요. 수익을 위해 쓰인 것도, 공개를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에요.”“그건 당신 입장이죠.”이진의 말은 평온했지만, 그 안의 단어들은 날이 서 있었다.“회사 입장에선 작가가 회사 자원을 사용해 제작한 창작물이면,그건 개인과 별개로 볼 수 있어요. 이건 서윤 씨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서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순간.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하준이었다.“죄송합니다. 이 회의, 제가 참석해도 될까요?”실장이 눈을 치켜떴고, 이진도 예상치 못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여긴 사내 작가 계약과 관련된 회의입니다.”“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비공식 파일,그 원고를 제 메일로 받은 사람이 저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해석은 곤란하다고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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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경계를 그은다는 건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화요일 아침. 서윤은 출판부 실장에게 단독 미팅을 요청했다.실장은 그녀의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기운을 읽었다.“이야기해보세요, 차 작가님.”서윤은 가방에서 천천히 봉투 하나를 꺼내놓았다.‘핑크문 작가 – 편집자 교체 요청서 (내부용)’“저는 이번 책부터 편집자를 변경하고 싶습니다.”실장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류 팀장이랑은 벌써 5년 넘게 작업한 파트너잖아요.이제 와서 교체하겠다는 건, 단순한 의견 충돌 문제는 아니겠죠?”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감정과 업무가 분리되지 않기 시작한 순간부터 저는 더 이상 편하게 쓸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저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도 인정합니다.”그녀의 말은 단호했지만,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실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정식 보고 들어온 건 처음이지만…우리 쪽에서도 감지된 분위기는 있었어요.”“작가로서 남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과거 감정 대상’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는 사람으로요.”실장은 고개를 숙였다.“조율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진 쪽의 반응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일 테니까.”서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감당하겠습니다.”같은 시간. 하준은 층간 회의 후, 팀장의 호출을 받았다.“하 대리, 요즘 팀 분위기 안 좋은 거 알아요?”“…특별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팀장은 종이에 인쇄된 자료를 내밀었다.내부 평가 보고서였다.“사내 관계가 공적 업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요즘 몇 건 보고되고 있어요.당신하고 핑크문 작가 사이에 있는 건 다들 알고 있고.”하준은 차분하게 말했다.“저는 그 관계 때문에 업무에 감정 개입한 적 없습니다.”“그건 당신 입장이죠. 문제는, 그걸 보는 동료들의 시선이에요.”하준은 보고서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그래서, 저를 다른 팀으로 돌리시겠다는 건가요?”“그건 인사 쪽이 결정할 일이고. 다만 하 대리가 계속 이쪽에 있고 싶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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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내 이름으로 서는 시간

서윤은 두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이번엔, 내가 먼저 그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라면.”그날 오후, 복도 한편에 있던 하준은 내부 회의가 끝난 직후 팀장의 호출을 받았다.“하준 씨.”“네.”“요즘, 팀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와요. 당신이 핑크문 작가와 사적으로 가까운 거, 다들 알고 있고.”“사생활이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그래도 말이죠… 당신 업무 평가가 감정적으로 해석된다는 보고가 이미 몇 건 올라왔어요. 다른 팀에서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요.”하준은 묵묵히 팀장의 말을 들었다.“지금 상황에서 계속 이 출판부에 남고 싶다면,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할 겁니다.”“…그렇다면 저도 고민해보겠습니다.”“고민?”“이 조직 안에서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부터요.”저녁, 서윤과 하준은 함께 하준의 작업실에 있었다.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둑한 공간에서, 둘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편집자 교체했어요.”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알아요. 오늘 들었어요.”“그 사람이랑 일하면서 받은 게 많았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해준 사람이라서… 한참을 빚이라고 생각했는데요.”“그게 죄는 아니에요.”“그렇지만, 그 빚이 감정으로 변했을 때부터 무서워졌어요.”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그 사람은 당신을 작가로 본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든 사람처럼 여기기 시작했어요. 그런 시선은 결국 당신을 조절하려는 힘으로 바뀌죠.”“…맞아요. 이제서야 알았어요.”서윤은 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은요? 오늘 무슨 일 있었죠?”하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출판부에서 내가 당신과 가까운 걸 문제 삼기 시작했어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왜 그 사람이 정하준에게만 원고를 먼저 주는가’, '하준의 의견은 개인적 감정이 섞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이야기들.”“말도 안 돼…”“내가 더 이상 이곳에서 일 잘하는 직원이 아니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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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누구나 과거를 품고 살아가지만

출판사 본사 17층. 유리 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은 빛나고 있었지만,회의실 안의 공기는 한없이 조용하고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준은 제안서를 조용히 건넸다.사내 독립 레이블, 작가 맞춤형 기획 중심의 실험적 출판 구조.이 단어들은 기존 출판 체계에선 다소 낯설고 급진적인 제안이기도 했다.상무는 말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고,하준은 허리를 반듯이 세운 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재미있네요.”처음으로 입을 연 건 상무였다.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기존 체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재 시장 흐름을 정확히 짚었어요.작가 중심 플랫폼, 정체성 중심 기획… 요즘 이런 거 많이 들어오거든요.”“감사합니다.”“다만 하나 묻죠. 이걸 당신이 직접 하겠다는 건, 결국 당신이 특정 작가와 함께 하겠다는 의미 아닌가요?”그 질문은 명확했고, 직설적이었다.하준은 숨을 들이쉬고 정직하게 대답했다.“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가 저의 판단을 흐릴 정도는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기회는 드릴게요. 단, 레이블 이름도 직접 정하고, 첫 기획안도 당신이 올려야 합니다.그게 곧 당신의 방향을 말해주는 거니까요.”“…감사합니다.”서윤에게 이 사실을 전한 건 그날 저녁이었다.작업실 한쪽에 늘 놓여 있던 조명이 오늘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사내 레이블, 진짜 승인났어요?”서윤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응. 조건은 까다롭지만,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첫 기획안은?”“아직. 생각하고 있는 건 있지만…”“혹시…”“핑크문 말고, ‘너’의 진짜 이야기를 쓰게 하고 싶어.”서윤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그 말은, 오히려 그녀를 깊은 곳에서 울컥하게 만들었다.“…나, 괜찮을까?”“난 네가 그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다고 믿어.”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진심의 확인이었다.며칠 후, 출판사 복도.하준은 자료를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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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조율이라는 이름의 위협

“차서윤 씨 맞죠?”낯선 여자였다. 출판사 1층 카페, 회의 후 앉아 있던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여자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저, 박지현이에요. 정하준 씨랑 대학 동기였고… 지금은 기획팀에서 일해요.”서윤은 일어서는 순간 멈칫했다.그 이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아… 안녕하세요.”“사실, 언젠가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준이 예전엔 내 얘기 자주 했거든요.”박지현은 태연하게 커피잔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하준이… 요즘 많이 변했죠?”“…좋아진 것 같아요.”“응. 전에는 많이 조심스러웠거든.특히 감정 같은 거엔. 그게 꼭 나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그때는 나도 잘 몰랐던 마음이었으니까.”박지현은 일부러 말을 더듬지 않았다.오히려 자연스러운 말투로 서윤에게서 반응을 끌어내려는 듯했다.서윤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했다.“…전, 하준 씨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라요. 그리고 지금 어떤 사람인지만 중요해요.”그 말에 박지현은 살짝 웃었다.“멋지네요. 그런 태도. 괜히… 하준이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그녀는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나중에 회의 자리에서 또 봐요. 앞으로 종종 겹칠 것 같으니까.”그 말은 인사라기보다 경고처럼 느껴졌다.서윤은 혼자 남겨진 자리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바라보다 천천히 잔을 밀었다.저녁, 하준은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서윤이 써둔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오늘… 당신의 과거를 만났어요. 괜찮아요.다만 그 과거가 나를 미끄러뜨리지 않게. 오늘은 조금 일찍 잠들게요.’그 메모를 읽으며,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날 밤, 박지현은 혼자 사무실을 정리하다가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엔 감정도, 미련도 담기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손끝이 닿은 서류 위에 문장들 사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차서윤 작가님, 오늘 회의 동석 가능하신가요?”오전 10시, 하준의 메시지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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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과거를 지운다는 건 가능할까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흐렸고, 출판사 건물 창문은 엷은 물결처럼 흐려져 있었다.회의는 없었지만, 박지현은 기획안 정리를 이유로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하준도 예상보다 일찍 들어왔다.“안녕하세요.”지현은 그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진한 블렌딩, 예전 하준이 좋아하던 맛.“고마워.”하준은 짧게 인사했지만, 그 커피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요즘… 괜찮아 보여서 좋아.”지현은 모니터를 켜며 말을 이었다.“그때는… 너 참 힘들어했잖아.”그때. 그 말 하나에, 하준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그런 이야기 이제 굳이 꺼낼 필요 없잖아.”그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지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가? 그냥 요즘 네가 참 달라 보여서 말이야.그래서 문득 궁금했어. 그 변화가 누군가 덕분이라면… 그 사람은 네가 울던 밤도 알까?”그 말은 부드럽지만 선명한 칼날처럼 가슴을 베어갔다.하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현아. 우리가 공유한 시간은 부정하지 않아.하지만 그건 지나갔고,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 덕분에 웃는 거야.”“그럼 그 사람도, 네 아팠던 부분까지 품어줄 수 있을까?”지현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그게 참 힘들더라. 네가 그렇게까지 무너져 있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더라.”그 순간, 복도 맞은편. 작은 인쇄실 앞 복도에 서 있던 서윤은,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사실, 서윤은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기획팀에 전달할 자료를 출력하러 온 길이었다.하지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의 이름,그리고 무너졌던 밤이라는 단어들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울던 밤…?’‘그걸 함께한 여자…?’서윤은 단 한 번도 하준이 과거의 고통을 상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그는 항상 서윤의 어둠에만 천천히 귀 기울여주었지, 자신의 어둠을 들춰내는 법은 없었다.그 순간, 그녀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나는 그를 정말 알고 있는 걸까?그가 울었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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