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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여상사의 비밀 알바: Chapter 11 - Chapter 20

66 Chapters

11. 다시 문을 두드리는 사람

한 번 삐걱였던 마음이 다시 다정해지는 데 필요한 건, 크고 특별한 말이나 선물이 아니었다.그저 하루 중 한 순간. 아무 말도 없이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서로를 다시 믿게 되곤 한다.서윤은 그걸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화요일. 출근길 아침 공기가 무척 부드러웠다.새벽 내린 봄비가 미세먼지를 씻어낸 듯 도시의 회색은 약간 덜 뿌옇고, 간밤의 감정도 약간 덜 날카로웠다.서윤은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 핸드폰으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정하준] 오늘 아침은 제가 한 발 먼저 다가갈게요. 커피 1+1 쿠폰 생겼는데, 같이 마실래요?단순한 농담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마음 하나가 담겨 있었다.'어제의 서운함을 알아요.''그래도 당신 곁에 있을게요.'서윤은 아주 짧게 웃었다.그리고 아래쪽에 짧은 답장을 적었다.[차서윤] 마셔요. 오늘은 단 거 땡기니까 카페라떼로.그건 어쩌면, '괜찮아요.' 보다 더 솔직한 화해의 표현이었다.점심시간, 회사 근처 작은 공원.바람이 잔잔히 흔들리는 테이블 위, 카페라떼 두 잔이 놓여 있었다.햇빛은 강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눈빛은 더 이상 긴장되어 있지 않았다.하준이 먼저 말했다.“어제… 팀장님이 메시지 보내줘서 고마웠어요.”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고마웠어요. 그 말… ‘보고가 아니라 말이었어야 했다’고 한 거 그게 위로가 됐어요.”“정말 다행이에요.”하준은 컵을 감싼 손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마음이 앞서는 걸 자주 겪으세요?”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백하듯 말했다.“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마음이 이렇게, 상대방보다 앞서서 움직인 건.”“그래서 더 겁났던 거예요?”“…네.”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걸, 상대가 모른 채 지나치면 속상하고, 알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면 더 서운하고…”“그래서 애초에 고백을 안 했던 거예요?”“네…왜냐하면… 고백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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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를 읽는 두 가지 시선

류이진. 그가 꺼낸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지금의 너, 그때보다 덜 쓸쓸해 보여.”그 말이… 어쩐지 마음속 깊은 곳을 찔렀다.밤이 오는 시간. 서윤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문장 하나 쓰려다, 손을 멈췄다.‘그녀는 조용히 울었다. 누군가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자신이 그 마음에 다 닿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읽다가 결국 저장하지 않고 꺼버렸다.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하준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며칠 뒤. 회사 근처 북카페.하준은 늦은 오후, 서윤에게 먼저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그녀는 조금 늦게 도착했고, 그 자리엔 다른 한 명이 앉아 있었다.류이진.서윤은 그 순간, 하준의 눈빛이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흔들리는 걸 보았다.“…하준 씨, 소개할게요.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이에요.”류이진은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류이진입니다. 작가 핑크문의 전속 편집자였어요.”그 말은 자연스럽고 단정했지만, 그 안에 작은 선언처럼 느껴졌다.이 사람의 비밀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하준은 그 손을 받아쥐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 안에는 작은 경계와 긴장이 담겨 있었다.서윤이 북카페에 도착했을 때, 하준은 이진과 이미 5분가량 마주하고 있었다.그 짧은 시간 동안, 하준은 눈앞의 남자를 조용히 분석하고 있었다.겉으로는 온화하고 예의바르며, 단정한 셔츠 깃과 깨끗한 말투.그러나 대화 중간중간, ‘알고 있음’을 내비치는 방식이 너무 익숙했다.“핑크문이 요즘 감정선을 꽤 눌러쓰더군요. 그래도 전 그 초창기 텐션이 아직도 그립긴 해요.”하준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게 ‘쓱’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건 낯선 사람 앞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당할 때 드는 감정이었다.그 사람이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있었고,나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나눈 사이라면 그 낯섦은 질투라는 단어로 바뀌기 충분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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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 세계 바깥에서

일요일 밤, 서윤은 문득 하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별일 없을 밤이었고, 별일 없는 하루였다.하지만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그가 보내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가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서로의 공간을 존중한다는 이유,조금은 쉴 타이밍이라는 이유.하지만 진심은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마음 어딘가엔 ‘지금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조용한 파장이 번지고 있었다.'그도 알까. 자신이 지금 자신의 글 앞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그날 낮, 서윤은 이진과 만났다.“어떻게 됐어? 생각 좀 해봤어?”이진은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서윤은 조용히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아직 잘 모르겠어. 지금은 그냥… 누군가의 여자친구로 살고 싶기도 하거든.”이진은 짧게 웃었다.“그 말, 넌 안 어울린다.”“…왜?”“넌 누군가 옆에 서는 사람이라기보단 네 세계를 쓰는 사람에 더 가까워.”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하지만, 그래도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막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데.같은 시각. 하준은 혼자 방 안에서 문서 파일 하나를 열었다.'핑크문, 초창기 단편집'그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오래된 다운로드 파일.그 안에는 지금까지 그가 보지 못했던 차서윤의 글의 원형이 들어 있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하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건 사랑이 아닌 쓰는 자신이었다.”하준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문득 멈춰버렸다.나는 그녀의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그녀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그는 기뻤다. 그녀의 비밀을 공유받은 기분이었고,그 세계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 것 같았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자신은 읽는 사람이다.그녀는 쓰는 사람이다.이 간단한 구조가 이토록 명확한 거리감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하준을 아프게 만들었다.월요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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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선택은 늘 말없이 시작된다.

월요일 오후. 서윤은 핸드폰으로 도착한 메일 한 통을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제목: 핑크문 복귀 기획안 제안서][보낸 이: 류이진]메일 내용은 단정했고, 현실적이었다.새로 런칭되는 플랫폼, 타깃 독자층, 장르 전략, 선공개 방식…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너의 문장을 기다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아. 이제, 너만 결정하면 돼.”그 문장은 강요가 아니었지만, 묘하게도 그 어떤 위협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이제, 너만 결정하면 돼.”그 말이 의미하는 건 돌아와가 아니라, 너는 돌아올 수밖에 없어에 가까웠다.그날 저녁, 하준과의 메시지.[차서윤] 오늘…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요. 같이 걸을래요?[정하준] 물론이죠. 어디든 함께 걸어요.해가 완전히 지기 전, 두 사람은 사무실 근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말은 없었다. 그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이 닿을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서윤은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준 씨, 혹시 내가 글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 사이가 달라질까 봐 걱정한 적 있어요?”그 질문에 하준은 눈을 들었다.“정확히는…나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했어요.”“…….”“팀장님이 핑크문으로 완전히 돌아가면, 내가 그 사람을… 지금처럼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서윤은 그 말에 작게 숨을 삼켰다.그건 결국 그녀의 ‘선택’이 하준에게는 거리의 시작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나는 아직 모르겠어요.”“뭘요?”“나는 사랑을 말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삶을 글로만 말하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둘을 함께 안고 살아야 하는지를.”하준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러다 말없이 그녀 손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모르면, 같이 모른 채 있어줘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냥 당신 곁에 앉아 있는 거예요.”그 말에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어쩌면 지금 자신이 가진 마음 중 가장 편안한 언어가, 바로 저 말일지도 몰랐다.그날 밤.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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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두 개의 문 앞에서

서윤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봤다.구름이 묘하게 뭉개져 있었고, 햇빛은 흐렸으며, 기분은 어딘가 뿌옇고 멀었다.바로 앞에 놓인 계약서. 그녀의 이름 아래, 작가명 '핑크문’이 인쇄되어 있었다.“생각은 끝났어?”이진의 질문은 짧았고, 톤은 무심한 듯했다.그러나 서윤은 알았다.이진은 지금 그녀에게 '선택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이미 선택된 사람에게 ‘이제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걸.“…솔직히 말하면, 결정이 아니라 인정인 것 같아.”“무슨 뜻?”“나는 결국 이쪽 사람이야. 다른 방식으로는… 숨이 안 쉬어져.”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오래 눌러왔던 ‘나로 살아가고 싶은 감각’이 배어 있었다.이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 한 구석에 펜을 얹어주었다.“그럼 시작하자.”서윤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오래된 문을 다시 열어젖히듯 천천히 사인을 남겼다.핑크문. 그 이름으로 다시 세상 앞에 서기로 그녀는 오늘 결정했다.그날 저녁. 하준은 사무실 근처 자리에 조용히 앉아혼자 텅 빈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무언가를 써야 했지만 글이 아니라 감정이 머릿속을 뒤덮고 있었다.그는 며칠 전 서윤에게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요즘… 팀장님이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요.”그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읽음 표시만이, 조용히 남아 있을 뿐.그녀는 조용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문 너머로.하준은 처음으로 ‘이 관계가 정말로 끝날 수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함께 있음이 아닌 존중으로 끝날 수 있는 종류였는지도 몰랐다.깊은 밤…서윤의 집. 그녀는 노트북을 열었다.새 원고 폴더를 만들고, 그 이름을 ‘PM_NEW_2025’로 적은 뒤 조용히 커서를 깜박이게 두었다.하준의 이름을 한 글자 쓰려다가 다시 지웠다.이 글 안엔, 그를 넣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왜냐하면, 그는 현실에 있는 사람이었고,이 이야기는 자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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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용한 거리

화요일 아침, 사무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간 하준은 예전처럼 눈을 맞추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그의 인사는 짧았고, 미소는 평소보다 1도쯤 낮았다.“안녕하세요, 팀장님.”서윤은 머뭇거리며 인사를 받아쳤다.“응… 잘 잤어요?”하준은 대답 대신 조용히 웃고 지나갔다.그 순간, 서윤은 깨달았다. 이건 분명히 거리였다.바쁘다거나 할 일이 많아서로 감춰지는 종류의 회피가 아니라,마음이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내는 거리감.서윤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노트북을 켰지만,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한 건 다른 어떤 문장도 아닌 하준의 무표정한 뒷모습이었다.며칠 전만 해도, 하준은 그녀가 힘들어 보이면 먼저 물었다.‘괜찮아요?’,‘무슨 일 있었어요?’,‘혼자 있고 싶어요, 아니면 같이 있어줄까요?’이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더 아팠다.그녀는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게 사랑이라 믿었다.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그의 감정을 저울질하게 만들었다.점심시간, 서윤은 하준이 혼자 커피를 사러 나가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보았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늘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했고 그녀는 머뭇거리다 따라 나섰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졌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남겨졌다.그들은 같은 사무실에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그날 저녁. 서윤은 모처럼 먼저 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차서윤]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볼 수 있어요?꼭 대단한 말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같이 걷고 싶어서요.메시지를 보낸 후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기다렸다.답장은 3시간 후 도착했다.[정하준] 미안해요. 오늘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그 말에 서윤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 조용히 숨을 삼켰다.예전의 그였다면, “그래도 팀장님 얼굴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라고 답했을 사람이었다.이제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그리고 그녀는 그의 ‘솔직함’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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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말의 속도

출장에서 돌아온 하준은 사무실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섰다.익숙한 풍경이었다.그가 매일 오가던 책상, 회의실, 커피 향기.그런데도 오늘은 어딘가 조금 낯설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예전의 그는 서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침묵하고 기다렸지만,이젠 그 기다림이 더는 ‘다정함’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이제는 말해야 했다.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하고 명확하게.그는 책상에 앉기 전 서윤의 자리 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후 조용히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퇴근 후에, 시간 좀 괜찮아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짧은 대답 안에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퇴근 후. 서윤은 그를 데리고 회사 근처 오래된 벤치가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이따금 회식을 마친 뒤, 조용히 걷던 그 길이었다.바람은 느리고 공기는 차분했다.“출장은… 잘 다녀왔어요?”서윤이 먼저 물었다. 하준은 짧게 대답했다.“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왔어요.”“…그중에 나도 있었어요?”“거의 대부분이 팀장님이었어요.”그는 그 문장을 끝내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윤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사실 그날 당신 메모 보고 많이 울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떨림 안엔 숨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나는 늘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어요. 그게 성숙한 관계라고 생각했어요.하지만 그건…내가 나를 숨기고 싶어서 만들어낸 착각이었어요.”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미안해요. 당신이 날 이해할 수 있도록 내 감정을 꺼내 보여줄 용기가 없었어요.”하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물었다.“지금은…말할 수 있어요?”서윤은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좋아해요.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같이 있는 게 더 좋았어요.”그 말은 이제서야 온전히 도착한 고백이었다. 하준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아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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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대 위의 이름

서윤은 텅 빈 작업실 의자에 앉아, 손에 쥔 인쇄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페이지 상단엔 큼직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더 로맨스 : 핑크문 단독 인터뷰 사전 질문지]하단엔 류이진의 메모가 휘갈겨져 있었다.“이건 공식적인 네 데뷔야. 이제 너도 너 자신을 설명할 준비가 되었잖아.”설명. 그 단어는 오랫동안 서윤이 피하고 살았던 언어였다.글 속에서 감정을 말하는 건 익숙했지만,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서술해야 한다’는 감각은 무겁고 날카롭게 느껴졌다.그날 저녁, 하준과 마주 앉은 서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진 씨가… 복귀 기념 인터뷰를 잡았어요. 외부 매체랑, 오프라인 촬영 포함해서.”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예상했던 일이에요.”“그런데…”서윤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 인터뷰 안에… 작가로서의 나뿐 아니라 사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도 담으려고 하더라고요.”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어떤 방식으로 영감을 얻는지…그리고 누구와 사랑하고 있는지도.”그 말에, 하준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서윤 씨, 혹시 인터뷰에서 내 존재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아니요. 말하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어요.”그 말은 마치 고백 같았다.그녀는 이제 그의 존재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동시에, 그를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준 씨가 원하지 않으면, 나 말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제 나는…”서윤은 눈을 들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 감추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그 순간 하준은 많은 말을 삼켰다.세상이 어떤 식으로 그녀를 소비하는지, 그 세계 안에서 남자친구라는 이름이얼마나 쉽게 조롱당하거나 침범당할 수 있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알고 있었다.이 사람은 지금, ‘숨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그건 보호를 구하는 신호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자아의 선언이었다.“…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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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목소리가 줄어드는 사람

출근 후, 정하준은 습관처럼 두 잔의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언젠가부터 당연해진 이 작은 일상은 둘 사이에 다시 생긴 작은 평온이기도 했다.서윤은 자리에서 하준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오늘도요?”“어제보다 진하게 타봤어요. 요즘 잠 못 잔다고 해서.”그 말에 서윤은 잠깐 눈을 피했다.“…응, 요즘 좀 복잡해서.”그 짧은 한마디는 사실 그보다 훨씬 많은 말들을 눌러 담고 있었다.복잡한 건 일이었고, 감정이었고, 그 안에서 서윤 자신이었다.오후, 이진과의 회의. 서윤은 회의실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있었고,이진은 평소보다 더 들뜬 말투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지금이야. 인터뷰 반응 괜찮고, SNS 전반적으로 ‘핑크문’에 대한 키워드가 좋아.”“…그래서요?”“이번에 시즌2 기획하면서, 작가 이미지 브랜딩도 같이 밀어보자고.단순한 글이 아니라 ‘핑크문=감정+관계+라이프’로.”“라이프요?”“일상, 연애, 창작. 너 그거 다 하고 있잖아. 이젠 그걸 보여주는 시대야.”서윤은 그 말을 들으며 손가락을 책상 아래에서 꼬았다.그가 말하는 건, 작가로서의 서윤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핑크문이었다.“난 아직… 내 일상이 그렇게 공개될 준비가 안 됐어요.”“이미 반은 넘어왔어, 서윤아. 이왕 노출된 거, 제대로 관리하는 게 낫지.”그 말은 친절하게 포장됐지만, 그 속엔 차가운 진실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이미 너는 너 자신을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퇴근길, 하준은 그녀와 함께 걷고 있었다.말수가 줄어든 서윤을 느끼며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회의 힘들었어요?”“…네.”“이진 씨가 또 뭔가 강하게 밀고 있나 봐요.”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그 순간 하준은, 그녀가 점점 대답이 줄어드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예전의 서윤은 질문을 받으면 망설였지만 대답했다.지금의 서윤은 질문을 받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이유는 말로 꺼내면 감당이 되지 않을 거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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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당신을 원하는 방식

저녁 여섯 시가 가까워질 무렵, 서윤은 편집부 사무실에 도착했다.류이진이 “간단하게 회의하자”라며 부른 자리였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곳엔 다른 스태프나 팀원이 없었다.“다들 퇴근했어요?”이진은 조용히 웃으며 와인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오늘은 우리 둘만의 회의야.”그 말이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 오히려 낯설었다.과거에도 그들은 둘이 앉아 글을 이야기했고,작가와 편집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하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달랐다.그건 일의 공기라기보단 감정의 밀도였다.“너 요즘, 하준이라는 남자랑 계속 만나고 있지.”서윤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이진이 알고 있으리란 건 처음부터 짐작한 일이었기에.“응.”“왜 그 남자야?”그 질문은 업무적인 톤으로 포장되지 않았다.그건 명백히, 한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 말이었다.“이진아, 그건 너랑 상관없는 얘기야.”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건넸을 때,이진은 한 모금 와인을 마시고 고개를 기울였다.“근데 있잖아, 나는 네 글을 처음부터 지켜봤고,네가 언제 가장 빛나는지도 알아.”“…….”“너, 누구 옆에 있을 때 가장 서툴러지는지 알아? 그 남자랑 있을 때야.”“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아니. 판단이 아니라 그게 불편하다는 내 감정이야.”그 순간, 서윤은 이진의 눈에서 처음 보는 사적인 서늘함을 마주했다.그것은 단순한 호감이나 아쉬움이 아니었다.그건 자신의 옆에서 떠나 ‘다른 무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느끼는 이기적이고 선명한 집착이었다.“너 지금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알아. 넌 결국, 혼자 있는 걸 택할 거야.”“…….”“그 남자는 널 기다릴 수는 있겠지. 근데 네 그림자까진 못 따라와.”그 말은 다정한 척, 그러나 내면엔 비수를 품고 있었다.서윤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나는, 누가 나를 더 잘 아는지를 따지는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그리고 이진아, 넌 지금 나를 돕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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