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여상사의 비밀 알바: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1. 그녀는 밤마다 다른 사람이 된다.

출근 시간 10분 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서윤은 숨을 죽인 채 탑승했다.7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함께 탄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익숙한 침묵 속으로 걸어들어갔다.'차서윤 팀장’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공기의 밀도는 언제나 차갑고, 정돈되어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금은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오히려 그건 그녀에게 필요한 갑옷이었다.무너뜨릴 수 없고, 들켜서는 안 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회사에 들어온 지 8년, 팀장이 된 지 2년.그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고, 업무를 미뤄본 적이 없으며, 누구와도 사적인 관계를 만든 적이 없었다.일만 하는 여자, 감정이 희미한 사람. 그리고, 말 못할 이중생활을 가진 사람.밤마다 그녀는 노트북 앞에 앉아 핑크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가장 뜨겁고 위험한 판타지를 쓴다.퇴근 후, 정장을 벗고 침대에 기대 노트북을 열면 현실과 전혀 다른 인물이 그녀 안에서 살아난다.사내연애, 계약결혼, 대표님과 비서, 의도된 갇힘, 휘청이는 마음과 함께 무너지는 체온.그녀는 낮에는 정적이지만, 밤에는 불을 쓰는 여자였다.그날 아침. 서윤은 예정보다 더 진한 컨실러를 눈 밑에 얹고 출근을 준비했다.지난밤 마감으로 새벽 세 시까지 글을 썼고, 댓글을 확인하느라 30분은 더 뒤척였다.이번 화는 독자 반응이 유난히 뜨거웠다.“대표님 미쳤어요”, “여주가 너무 부럽다”, “작가님 진도 언제 나가요?”그녀는 그 댓글들 속에서 고양된 감정을 눌러안고 다시 출근길로 나섰다.하루에 두 개의 인생을 사는 건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하지만 문제는 그날부터였다.“팀장님, 인사드립니다.”새로 배정된 계약직 신입이 인사를 건넸다.정하준. 27세. 이력서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단정한 외모, 날카롭진 않지만 묘하게 선을 넘을 듯한 웃음기.“홍보팀 정하준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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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그라운드에 띄워진 진심

그는 그녀를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그리고 그 눈은, 그녀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하준은 요즘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이상이었다. 그는 자주 그녀를 보고 있었다.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지어는 때때로 습관적으로.차서윤 팀장. 입사 첫날부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던 그녀.‘쎄다’, ‘무섭다’, ‘멋있다’, ‘일은 잘한다, 근데 감정이 없다’…그런데 하준에게는 그녀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분명 단정하고 또렷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어쩐지, 요즘 들어 그 또렷함 뒤로 미묘한 흐트러짐이 보이기 시작했다.하루 종일 회의실을 전전하며 시시콜콜한 기획안들을 검토하면서도, 그녀는 늘 어딘가 다른 공간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그건 피곤해 보인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흐트러짐이 아니었다.한참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던 도중, 그녀가 종종 허공을 보며 눈을 깜빡일 때가 있었고아무도 없을 때, 책상 아래로 손을 넣어 고개를 천천히 숙일 때가 있었다.한밤중,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지날 때, 그녀의 자리에서 희미한 백라이트가 비치는 걸 본 것도 세 번이나 됐다.정하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팀장님, 밤에 뭐 하시는 거지…”처음 의심을 품게 된 건, 며칠 전 야근하던 날이었다.하준은 홍보 자료 편집을 마친 뒤, 복도 쪽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캔커피를 고르고 막 뚜껑을 열려는 순간, 멀리서 작은 빛이 흘러나오는 걸 봤다.사무실 끝 쪽, 불 꺼진 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빛.그건 팀장 자리였다.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정장 재킷은 벗은 채, 셔츠 소매를 걷고, 안경을 쓴 모습.자세는 깊숙했고, 표정은 심각했다.그는 천천히 다가갔다.그녀가 몰입한 틈을 타서 들키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그 순간, 그녀의 노트북 화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불빛 아래 희미하게 보인 문장.그의 손끝이 허리를 따라 움직였다. 숨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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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마가 마음이 될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아낸다는 건 원래 이런 느낌일까.하준은 요 며칠 사이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마치 혼자서만 비밀의 방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처럼,어쩌면 눈앞의 이 사람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어떤 세계를자신만 슬쩍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그 기분은 묘하게 짜릿하면서도, 어딘가 찔리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아직은. 아니, 아직까진.그는 이 모든 걸 확신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그저 조금씩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그녀가 왜 밤마다 그렇게 늦게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지,왜 아침마다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는지,왜 커피를 마시는 손이 매번 미세하게 떨리는지.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이해해보고 싶었다.차서윤이라는 여자를.그날 오전. 서윤은 평소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출근했다.몸이 무거웠다. 전날 새벽까지 마감한 원고 때문이었다.밤 열두 시부터 쓰기 시작해 새벽 세 시 반까지.핑크문이라는 이름으로 새 글을 올리고, 댓글을 확인하며 반응을 체크하는 루틴은 이제 그녀의 일상처럼 굳어져 있었지만,그만큼 점점 아침의 그녀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입술의 틴트는 입가에서 조금 삐져나와 있었고,눈 밑 컨실러는 피로를 다 가려주지 못했다.옷차림은 여전히 정갈했지만, 셔츠 소매의 단추 하나가 덜 여며져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그 모습을, 정하준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에 담고 있었다.그는 커피를 두 잔 샀다. 하나는 진하고, 하나는 연한 걸로.“팀장님. 어제 늦게까지 일하셨어죠?”그는 그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꺼냈다.서윤은 그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건 피로 탓일 수도 혹은 '들켰다'는 당혹감일 수도 있었다.“…어떻게 아셨어요?”“야근하셨잖아요. 불 꺼진 사무실에서 팀장 자리만 불 켜져 있던데요.”서윤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받아 들었다.말은 없었지만,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흔들림을 그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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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너는 내 문장 속에 살고 있다.

이상했다. 정말로, 너무 이상했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였다.글 마감을 넘기고, 커피로 새벽을 버틴 뒤에야 겨우 눈을 붙이는 밤들.아무리 단련된 생활이라 해도, 이중생활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의 피로는 더 이상 수면 부족만이 아니었다.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말들. 누군가의 목소리를 닮은 대사들.그리고, 너무 잘 알고 있는 문장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들.서윤은 자꾸만 무언가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무대 위에 혼자 서 있던 배우가 무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갑자기 자각한 것처럼.그 시선은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했고, 그 기척은 농담 같지만 묘하게 진지했다.“팀장님, 오늘은 제가 커피 사올게요. 어제 마감하셨잖아요.”하준이 그녀에게 건넨 커피 컵은 서윤이 평소 쓰는 말과 똑같은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과 함께였다.“진한 커피가 필요할 땐, 설탕보다 눈빛이 더 낫다.”그녀는 숨을 멈췄다. 그 문장은 그녀가 불과 며칠 전 핑크문 신작에서 썼던 대사였다.남주가 여주에게 커피를 건네며 던진, 자극적인 멘트.그녀는 포스트잇을 아무렇지 않게 구긴 채 휴지통에 버렸다.하지만 손끝이, 그 종이의 감촉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가, 우연히 그런 말을 한 걸까?아니면 정말… 읽은 걸까?혹시. 혹시 정말, 알고 있는 걸까?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되뇌어도 몸은 자꾸만 의심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오후 회의. 서윤은 보고서에 집중하고 있었다.새로운 캠페인 기획안을 둘러싼 아이디어 회의였고, 모두들 아이패드나 노트북 앞에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런데 그 순간. 하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이 아이디어요. 마치... 그 장면 같네요. 회의실에서 문을 잠그고, 둘만 남았던 그 장면.”“…어떤 장면이요?”“아, 제가 요즘 읽는 소설 중에요. 팀장님은 그런 거 안 읽으시죠?”“무슨 소설이죠?”“핑크문 작가님이요?”모두의 시선이 순간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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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들키는 것보다 이해받는 게 더 무서워졌다

노트북을 켜지 않은 밤이 이틀째였다.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늘 펼쳐놓던 문서 파일을 열지 않았다.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문장들이 맴돌았다.남주의 대사, 여주의 시선, 침대 머리맡의 호흡, 불 꺼진 방 안에 맺히는 정적의 결.그건 그녀가 늘 써온 것들이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그런데 이제, 그 이야기들이 손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너무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걸 느끼고부터였다.정하준. 그는 확실히 단정한 사람이었다.처음 봤을 때, 외모보다 그 눈빛에 더 오래 시선이 붙잡혔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다.무례하지 않고, 들이대지도 않지만, 묘하게 선을 넘는 사람.그 선은 말로 확인되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닿는다.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작가냐’고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농담, 대사, 눈빛, 그 모든 것은 질문보다 더 정직했다.'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 대신 너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 거다.'그런 태도.서윤은 자주 입술을 깨물었다.그건 스스로를 붙들기 위한,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다.“팀장님.”점심시간이 막 끝나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그녀를 하준이 불렀다.“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왜요?”“어제 요청하셨던 PR 자료 설명드릴 게 있어서요. 5분이면 돼요.”그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 회의실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윤은 한 박자 늦게 그를 따라 걸었다.어쩐지 오늘따라, 그 회의실 문이 낯설게 느껴졌다.불필요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이 공간에서 지난 회차에 자신이 썼던 장면이 떠올랐다.'문이 닫히자,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회의실은 작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더 작았다.'딱 지금 이 상황 그대로였다.서윤은 애써 시선을 정면에 두며 자리에 앉았다.정하준은 프로젝트 브리핑이라도 하듯 노트북을 열더니 고개를 들어 물었다.“근데 팀장님, 문 잠가도 될까요?”“…….”“소리가 밖으로 나가면 곤란한 얘기면 어떡하나 싶어서요.”그 문장. 익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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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퇴고되지 못한 진심의 행방

노트북을 켜는 속도가 느려졌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손끝이 더 조심스러워졌다고 해야 했다.서윤은 예전처럼, 무의식적으로 문서를 열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문장을 쓰기 전에, 그 문장이 누군가의 입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정하준. 그는 분명 그녀가 쓴 문장을 알고 있었다.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빛과 말투, 농담과 침묵 사이에 그녀의 세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그는 읽고 있었다. 핑크문의 글을 그리고 어쩌면 핑크문의 마음까지.서윤은 노트북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다.창밖엔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빗소리가 묘하게 귀에 와 닿았다.그건 마음을 흔드는 소리였다. 더 이상 들키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이미 들켜버린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는 자기 자신이 무서워졌다.“팀장님,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점심시간 막바지, 하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서윤은 순간 멈칫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나요?”“같이 일하는 동료한테 밥 한번 사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그의 웃음은 익숙했다.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농담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운 표정이었다.“싫으면 말씀하세요. 억지로는 안 할게요.”그 말 한마디가 서윤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배려가 오히려 그녀를 더 조심스럽게 붙잡아두는 손 같았기 때문이다.“…좋아요. 딱 한 시간만.”저녁 7시. 회사 근처의 작은 식당, 조용한 조명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하준은 별 말 없이 따뜻한 국물을 먼저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고,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온기 속에서 잠시 시선을 피했다.이상했다. 같은 팀원, 같은 공간, 비슷한 루틴.그런데 이렇게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묘하게 숨이 막히는 공기가 있었다.하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핑크문 작가님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서윤은 숟가락을 멈췄다.“그 사람. 진짜로 회사원일 수도 있을까요?낮에는 냉정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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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알아채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들렸다.노트북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키보드를 치려다 멈춘 손가락의 망설임.심지어 자신이 들이마시는 숨결까지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서윤은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 앞에 앉아 있었다.기억을 더듬었다. 정하준의 말.그가 밤에 무얼 쓰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던 그 순간.그가 문득 보였던 표정 그건 궁금함보다 조심스러움이 더 짙은 얼굴이었다.무언가를 안다는 건, 침범일 수도 있었다.그런데 그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단지, 서윤이 스스로 그 비밀을 들고 걸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처럼.그 배려는 오히려 잔인했고, 잔인해서… 더 깊었다.다음 날 아침. 서윤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사무실 불이 켜지기 전, 차가운 공기와 조용한 조명이 오히려 좋았다.그녀는 텅 빈 회의실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피를 한 잔 내렸다.창가에 기대어 앉으니, 문득 어젯밤 썼다 지운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그는 기다렸다. 그녀가 자기 속을 꺼내어 보이기까지. 그래서 도망갈 수 없게 될 때까지.’서윤은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다시 읊조렸다.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들킨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들켜 있었던 것 같아서.오전 회의 시간. 서윤이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하준은 조용히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그는 서윤이 자리에 앉을 때마다 미묘하게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 눈빛은 말보다 먼저 말을 걸었다.그녀는 모르는 척,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하준 씨.”“네.”“…요즘 무슨 책 읽어요?”그는 가볍게 웃었다.“작가님 글이요.”“…….”“요즘은 밤마다 한 챕터씩 천천히. 음미하듯.”서윤은 눈을 들지 않았다. 웃음으로 넘기기엔, 그 말이 너무 선명해서.“그래서… 음미하면 뭐가 느껴지는데요?”“음…”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그 사람이, 되게 많이 외로웠겠구나. 그리고, 너무 조용하게… 사랑을 썼겠구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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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이 자란다. 들키지 않아도, 그 사람을 향해서

늦은 밤, 방 안은 조용했다.책상 위 스탠드 불빛만이 창백한 조명을 드리우고 있었고,노트북 화면엔 하얀 문서만이 덩그러니 열려 있었다.차서윤은 오늘도 키보드 앞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어쩐지, 글은 쓰지 못하고 있었다.무언가 바뀌고 있다는 건 늘 늦게야 감지되는 일이다.처음엔 작은 징후였다. 평소보다 느려지는 타자 속도. 생각보다 깊어지는 호흡.그리고, 문장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특정한 얼굴.그 얼굴.그 웃음.그 눈빛.이젠 글을 쓸 때마다 정하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문장 속 남주와 점점 겹쳐지고 있었다.그녀가 처음 그려냈던 남자는 강하고, 단호하고, 그러나 눈빛은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준은 그보다 훨씬 조용하게, 훨씬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침묵으로, 기다림으로, 그리고 짧은 눈맞춤으로.그 다음 날.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우연히 마주쳤다.서윤이 먼저 탔다. 그리고 그를 향해 눈을 들기 직전,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좁은 공간이 조용히 가라앉았다.말없이 서 있는 그와 나란히 선 순간,이상하게도 그녀의 숨결이 조금 어색하게 흔들렸다.하준은 말하지 않았다.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노트북 가방을 잠시 바라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밤마다… 많이 쓰세요?”그 질문은 조용했고, 따뜻했다.의심이 아니라, 염려에 가까운 말투였다.“…네.”“무리하지 마세요. 좋은 글도, 건강한 사람이 써야 하니까요.”서윤은 그 말에 짧게 웃었다. 감정이 엷게 스며든 웃음이었다.그 말 속에, 그녀는 위로를 느꼈다.들켰다는 두려움보다 알아주었다는 위로. 그게 더 컸다.오후, 그녀는 유난히 피곤했다.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자신도 모르게 로비 소파에 앉아 그대로 잠깐 눈을 붙였다.잠깐이라 믿었던 시간이었지만, 눈을 떴을 땐 20분이 지나 있었다.누군가가 자신의 옷 위에 가디건을 덮어놓은 걸 알게 된 건,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그리고, 곁에 앉아 조용히 보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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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덮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보여주고 싶었다.

늦은 퇴근길. 회사 건물 앞 가로수의 그림자가 인도 위로 길게 누워 있었다.봄의 끝자락, 여름이 오기 직전의 선선한 밤공기 속에서 서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녀의 손엔 노트북 가방이 들려 있었고, 그 속엔 막 마감한 신작 원고가 저장되어 있었다.'핑크문'의 38화.그녀는 이 회차를 유난히 오래 붙들고 있었다.이유는 단 하나. 이번엔, 주인공이 고백을 하는 회차였기 때문이다.그녀는 그 고백이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비틀린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오래 걸렸다.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혹시 이 문장들이 누군가에겐 나의 진심처럼 읽히진 않을까.이제는 더 이상, 문장을 마음의 바깥에서 쓰지 못하게 되어버렸다.사무실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야근을 하던 몇몇 팀원들이 정리 중이었고, 그 사이에 정하준도 있었다.“팀장님, 아직 안 가셨어요?”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웃었다.“하준 씨야말로요.”“팀장님 책상 위에 놓고 가려고요.”그는 작은 파일 하나를 책상에 올려두며 말했다.“팀장님이 지난번에 요청하신 자료 정리했어요. 예전에 쓰던 버전이랑 비교도 가능하게 했고요.”그녀는 다가가 파일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책상 위에 올렸다.그리고 아주 작은 실수 하나.노트북을 열자, 마지막으로 띄워져 있던 문서 창이 그대로 화면에 떠올랐다.'PM_38화_FINAL'하준은 그 순간, 화면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제목은 충분히 읽히고 있었다.핑크문. 서윤은 화면을 급히 닫으며 손끝으로 마우스를 눌렀다.“…죄송해요. 제가 개인 문서가 열린 채였네요.”그녀는 조용히 말을 흐렸다.그 말이 ‘실수였어요’라는 뜻인지,당신이 봤다는 걸 알고 있어요라는 뜻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하준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문서 이름이 예쁘네요.”“…예쁘다는 게…?”“그냥요. 어떤 이야기든 38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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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야기보다 당신

금요일 오후. 사무실 창가로 노을이 들어오기 시작한 시각.하루의 끝, 일주일의 끝, 그리고, 조금은 무거운 마음의 끝자락이 내려앉던 그 시간.하준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걸음으로 서윤의 자리로 향했다.“팀장님.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그는 지난 수십 번처럼, 같은 말투로 물었다.하지만 오늘의 물음엔 다른 감정이 실려 있었다.서윤은 무언가를 직감한 듯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디로 가요?”“팀장님이 아직 안 가보신 데로요.”그녀는 웃음을 삼켰다. 지금껏 수없이 들었던 대사였다.그녀가 써온 소설 속 남주들이 여주에게 수줍게 건넸던, 가장 평범한 고백의 서막.‘당신이 아직 몰랐으면 하는 곳으로 데려갈게요.’서울의 북서쪽, 오래된 골목의 끝자락.작은 단독 서점 겸 카페. 하준이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먼저 들였다.“여기, 제가 혼자 자주 와요. 책도 읽고, 생각도 정리하고… 그냥 조용해서 좋아요.”서윤은 아무 말 없이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빈 좌석 위에 널브러진 손글씨 메모지, 낡은 나무 책장, 고양이 그림이 붙은 작은 메뉴판.모든 것이 그를 닮아 있었다.조용하고, 세심하고, 딱 말을 아껴가며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는 사람.둘은 창가에 앉았다.초여름 바람이 유리창을 쓰다듬고 있었다.하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핑크문 작가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자극적이고 대사 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어요.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지더라고요.”“…이상해졌다는 건?”“글인데 감정이 너무 조용해서요.”그녀는 그 말을 가만히 되새겼다.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많은 말이 오가는데, 실제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되게 작잖아요.한 문장, 한 시선, 한 숨 사이에서 감정이 변하죠.”“…….”“그걸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읽으면서 자꾸 상상하게 됐어요.그리고 나중엔 그 사람이 궁금해졌어요.”그는 잠시 시선을 내려 두 손을 맞잡았다.“그러다 알게 됐어요.”“…뭘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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