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조명이 깔린 회의실 안. 눈을 맞추지 않고 말하는 사람,눈을 맞추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진은 테이블 너머로 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원고, 어디까지 쓴 거예요?”서윤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의자에 등을 기대려다 멈춘 몸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무슨 말씀이신지…”그녀의 말은 짧았고, 목소리는 낮았다.그러나 그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숨어 있었다.이진은 그런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결국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 그 소설 좋아해요.”그 말에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이진의 눈빛은 놀랍도록 담담했고, 동시에 깊었다.“우연히… 아니, 실은 예전부터 알았어요. 차서윤이 핑크문 작가라는 거.”숨이 멎는 것 같았다.서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조용히 물었다.“…어떻게요?”“너무 피곤한 얼굴로 출근하는 날들, 계속 열려 있는 노트북,이상할 만큼 디테일한 설정 회의, 회의실에서 흘리듯 한 문장들… 전부 다.”이진은 정리된 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혼란이, 그리고 오래된 단념이 스며 있었다.“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고,어느새… 당신의 문장을 기다리는 독자가 됐어요.”서윤은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감춰야만 했던 이유들, 들키지 말아야 했던 정체,그리고 그 위에 쌓아 올렸던 조심스러운 관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같았다.“팀장님… 죄송해요. 전..”“미안하단 말, 하지 말아요.”이진이 조용히 끊었다.“당신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너무 아파서.그날 오후. 하준은 복사기를 돌리며 무심코 벽에 붙은 게시물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무심히 흘러나온 동료의 대화 한마디가 귓가에 박혔다.“혹시 우리 회사에… 야한 글 쓰는 작가가 있다던 소문 들었어?”“어? 그거 진짜야?
Last Updated : 2026-04-2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