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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7화 : 포옹(抱擁) (2)

“완! 역시 네가 맞구나!”랑우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환희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가까이 오지 마!”차갑게 내리꽂히는 음성.그러나 랑우는 포기하지 않았다.“…걱정했어, 많이….”한 걸음.또 한 걸음.떨리는 그의 손끝이 이완의 뺨에 닿으려는 순간.“…그만!”이완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은빛 광채가 번뜩거리며 뿜어져 나왔다.랑우의 몸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더니, 마치 통나무처럼 이완의 앞에 맥없이 쓰러졌다.잠시 후.“…완!”거친 외침이 어둠을 흔들었다.랑우가 급히 몸을 일으키자, 수풀이 들썩였다.문득, 그의 시선이 바위 하나에 닿았다.그 뒤편에, 잠잠히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숨어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맑은 기운.“…완… 진짜, 너구나….”랑우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이완은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타들어 가는 목처럼,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랑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가려는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거기 서. 가까이 오지 마.”“…완… 네가 이렇게 살아 있어서 너무 기뻐….”“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다음번엔 정말로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이완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속에는, 곪아서 터져 나온 상처의 잔해가 섞여 있었다.“완…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이렇게 다시 보기를 내가 얼마나….”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천천히 다가오며 이완에게 손을 뻗었다.순간, 이완이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뽑아 그의 심장에 단단히 겨누었다.“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그러나 랑우는 두 팔을 벌리며 이완에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았다.“오지 말라고! 다시 말하지 않겠어!”그러나 랑우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다.“인제야 겨우 너를 만났어… 그런데… 정말 많이 컸구나! 그래도 얼굴은 그대로야… 그 머리칼도…!”“그만 멈춰!”그의 왼쪽 가슴팍이 이완이 겨눈 칼끝에 ‘턱’하고 닿았다.“널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이완의 칼끝이 서서히 그의 갑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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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8화 : 연인(戀人) (1)

허물어진 담장 너머. 창호지는 세월에 누렇게 바랬고,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방바닥에 길게 흘러내렸다. 묵은 흙과 마른풀 냄새, 오래 비워진 집의 차가운 공기 속에,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선명했다. 그 언젠가, 오래전 기억처럼… 이완은 간절하게 랑우의 품에 안겨왔다. 그의 몸이 거침없이 닿아오자, 랑우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의 체취를 맘껏 들이마시며 기대던 그 아이가, 아니, 이제는 완전히 성인이 된 한 남자가… 욕망을 숨기지 않은 채, 주저함 없이 제 품에 파고들고 있었다. 랑우는 절로 가빠오는 숨을 억지로 눌렀다. 이완은 더 이상, 여리디여린 아이가 아니었다. 한없이 가볍고 가냘팠던 오랜 기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길쭉한 팔과 단단한 어깨에는 힘이 서려 있었고, 제 품에 눌린 가슴께는 날렵한 근육마저 느껴졌다. 이완의 서늘한 체온과 들뜬 맥박이, 랑우의 가슴에 또렷이 닿았다. 그 숨결이 제 목덜미를 훑고, 얇은 속옷 사이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더 이상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강하게 욕망하고 있는… 완벽한 어른의 몸이었다. 랑우는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는 그의 손끝을 가만히 붙잡았다. “…많이 그리웠다.” 짧은 말이 공기 속에 떨어지자, 파문처럼 이완의 온몸이 울렸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입술로 랑우의 몸을 느끼며 거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가지런한 손끝이 랑우의 심장 위로 얽혀 들었다. 여전히 가늘지만, 거친 손 마디 하나하나가… 버티고 살아남은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랑우는 아직도 냉궁 속 어린아이에 대한 생생한 기억 때문에, 문득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빛에 비친, 그 아름답게 상기된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로의 이마와 코가 닿았고, 곧 숨과 숨이 섞였다. 조심스레 스치는 뺨, 뜨겁게 밀려드는 체온. 랑우의 땀방울이 뿜어내는 은은한 나무 향기는, 지금의 이완에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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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8화 : 연인(戀人) (2)

랑우의 뜨거운 혀끝이 닫는 곳마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치솟았다. “…하아아…!” 이완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깊게 숨을 토해내자, 랑우는 그대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여인처럼 곱고 가는 이완의 허리선을 감아 잡고, 골반을 힘 있게 끌어당겼다. 가슴이, 뱃살이, 허벅지가 서로 부드럽게 맞닿았다. 체온이 뒤섞이고, 서로의 심장이 피부를 그대로 두드렸다. 이완의 손끝이 자신의 등에 파고들자, 랑우는 그가 더 깊이 자신을 잡도록 바짝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그 여린 입술을 물고, 혀끝을 집어삼켰다. 숨이 막혀도 괜찮았다. 아니,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과 혀로, 몸과 체온으로, 말이 필요 없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고요하던 계곡의 밤이, 두 사람의 거친 신음으로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그대로 삼켜버릴 듯. 더 깊고 더 탐욕스럽게.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끝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격렬한 몸짓과 전율이 멈춘 뒤에도, 그들은 떨어지지 못한 채 서로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랑우는 그를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맥없이 안겨 있는 이 고운 몸이,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이완이 먼저 침묵을 깨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왜….” 가느다란 탄식처럼 흘러나온 목소리. 차가운 피부가 랑우의 가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왜 돌아오지 않았어….” 랑우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널 많이 기다렸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말을 삼켰을까.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홀로 견뎌왔던 걸까. “매일… 그곳에 있었어. 냉궁의 소나무 위에서, 그렇게 너만을 기다렸어.” 랑우의 눈꼬리가 떨려왔다. “하아… 나도… 하루라도 빨리 네게 돌아오고 싶었어.” 말끝이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북벌이 그렇게 길어질 줄 전혀 몰랐어…. 대장군이신 아버지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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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9화 : 밀회(密會) (1)

새벽녘에 이완이 산채로 들어섰을 때, 곳곳에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부상자는 몇 있었으나, 이번에도 은월단 전원이 무사 귀환했다.그간 이완의 지시로 도주 훈련을 거듭해 온 덕분이었다.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들은 피로에 절어있었지만, 서로 무사함을 확인하며 웃음이 번졌다.“다행입니다, 두목님… 이리 무사하셔서. 늦어지셔서 모두가 걱정했습니다.”비원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토벌군 놈들이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간담이 다 서늘했소. 이번에도 두목 덕에 살았지.”“우리 두목의 지략이 아니었으면, 벌써 다 죽었을게요!”다른 무리도 맞장구치며 웃었다.부상자들 곁에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천을 감던 경렬이, 고개를 들어 이완을 유심히 바라봤다.잔뜩 지쳤을 법한데도 얼굴은 깨끗했고, 숨결도 안정돼 있었다.그보다… 표정과 눈빛에 이상하리만큼 힘이 있었다.‘뭐지, 저 기색은….’하마터면 수하를 모조리 잃고 이완 자신도 죽을 뻔한 위기 직후인데, 그 표정에는 좌절감이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무언가… 기뻐 보였다.‘저런 얼굴을 보겠다고, 힘들게 이번 판을 또 준비한 건 아닌데….’경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이완,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제가 봐 드리죠.”“다행히 큰 상처는 없습니다, 의원님.”경렬은 탁자 위에 작은 약사발을 내려놓았다.진한 갈색의 액체에서 은근한 향이 피어올랐다.“새로 달인 보약입니다. 애를 많이 썼으니, 오늘 같은 날에 꼭 필요할 겁니다.”이완은 사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오늘은 몸이, 오히려 평소보다 가뿐합니다.”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경렬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거부해…?’이완이 그의 약을 거절하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도 혹시 모르니 드시는 것이….”“아닙니다, 의원님.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짧게 말을 마친 이완은,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던 경렬은, 천천히 약사발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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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9화 : 밀회(密會) (2)

문이 닫히자마자, 땀에 젖은 두 남자의 몸이 서로에게 거세게 부딪혔다.“랑우…!””…완!“이완의 손끝이 랑우의 검고 긴 머리카락과 단단한 목덜미를 다급하게 더듬었다. 들뜬 입술은 참지 못하고 뜨거운 숨을 흘렸다.”…하응…“마치 귀 옆에서 뛰는 듯한 심장 박동에 맞추어, 뜨거운 랑우의 입맞춤이 옷을 벗길 새도 없이 이완의 목과 가슴골을 타고 내려갔다.“아읏…! 이완의 몸이 랑우를 향해 열리며 진한 향기를 토했다. 랑우의 깊은 체취가 다시 한번 그를 감쌌다. 재회의 간절함은, 그렇게 두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각인됐다.“하아… 랑우… 그리웠어….”떨리는 목소리.랑우의 어깨에 깊숙이 얼굴을 묻은 이완의 손이, 넓고 탄탄한 등 위로 얽혀 들었다.“…완….”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 이완의 은발을 부드럽게 적셨다.랑우의 손이 허리를 감싸며 이완의 몸을 단숨에 들어 올리자, 숨이 고르지 않게 끊겼다.입술이 포개지자… 억눌러온 숨이 터져 나왔다.”흐으…““하… 너무 위험해.”랑우가 입술을 떼며 낮게 중얼거렸으나, 이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파고들었다.“…상관없어.”그 짧은 대답이 불씨가 되어, 억눌러온 모든 욕망이 무너졌다.매끈한 허리선을 넘어선 손길이 옷섶 아래로 스며들었다.이완의 갈비뼈를 부드럽게 훑던 손바닥이 복부 아래로 더 깊숙이 내려가자… 가느다란 허리가 저절로 곡선을 그리며 꺾였다.“…아흑!”거칠게 터져 나온 소리가 랑우의 목덜미에 그대로 닿았다.랑우는 그럼에도 전혀 멈추지 않았다.한 손으로는 이완의 은밀한 곳을 단단히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무릎 위로 완전히 걸터앉혔다.옷과 옷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이 서서히 한계까지 달아올랐다.입술이 부딪히자, 거칠고 짧은 숨이 랑우의 입안으로 오롯이 삼켜졌다.혀끝이 얽히고, 뜨겁게 젖은 서로의 숨이 완전히 섞였다.랑우는 이완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대로 힘 있게 제 몸을 밀어 넣었다.”…아으!“이완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사타구니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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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20화 : 파국(破局) (1)

산기슭의 버려진 오두막.그 작은 공간 안에서는…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경렬은 기척을 죽인 채 그곳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이완이 누군가를 계속 은밀히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현웅의 보고를 듣고도 반쯤은 믿지 않았다.자신을 위해 오롯이 쓰여야 할 검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그러나 낡은 문틈 너머로 비치는 장면이, 그 모든 부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희미한 밤빛 속에서, 이완이 한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아니, 그는 그 사내를 맹렬히 탐하고 있었다.“하아… 으응… 아읏….”얇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끊임없이 흘렀고, 달빛이 흘러내린 땀방울에 부딪혀 반짝였다.사내의 손이 이완의 아름다운 허리선을 타고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내려갔다.이완은 한순간 힘이 풀린 듯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더니, 숨을 길게 내쉬며 절박하게 이름 하나를 불렀다.“하아… 랑우….”경렬의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불빛이 닿지 않는 산길.바람 소리만이 스치는 고요함 속에서, 경렬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조금 전에 이완의 목소리로 제 귀에 꽂힌 이름이 뇌리를 후벼 팠다.랑우.그 이름을 들은 건,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이완이 사람을 찾아달라 했던 그때에도, 사실 그는 이미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아니,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혹한의 설원 위, 북군의 깃발을 등에 지고 선 검은 늑대.건장한 군인들 틈에서도 압도적인 체구와 기운.한 번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심장이 얼어붙는 위압감을 지녔다고 알려진, 이미 상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청년 장수.북군 대장군 랑찬의 아들, 랑우.전장에서 태어나 전장에서 자랐고, 북벌 중 그 부친의 전사로 인해 오랜 세월을 변방에서 돌아오지 못했던 자. 그러다 귀환 후엔,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미친 듯이 냉궁 괴물을 찾고 있다는 것까지.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저 모른다고 했다.감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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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20화 : 파국(破局) (2)

첫 공격은 바로 랑우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그는 재빨리 몸을 비틀며 바닥에 놓였던 검을 집어 들었다.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그림자들.칼, 창, 도끼, 그리고 날숨에 섞인 살기.그는 분명히 알았다.자신을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이려는 것임을.창과 칼이 엇물릴 때마다 불꽃이 튀고, 문짝이 날아가고, 발밑이 패였다.랑우는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그는 짐승같이 거친 몸짓으로 어둠을 가르듯 검을 휘둘렀고, 나가떨어진 자객들은 그대로 숨이 끊겼다.그러나 적의 수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랑우가 숨도 쉴 틈 없이 암살자들과 싸우던 바로 그 시각.은월단 산채에서는 울음 섞인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올랐다.토벌군의 급습이었다.이미 이곳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길목을 포위한 채, 불길과 함성을 몰아 들이닥쳤다.이완이 다급히 외쳤다.“모두 살아서 나가야 한다!”은월단 무리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아이들과 부상자를 등에 업고 달리는 자, 불타는 창고를 헤치고 나가는 자….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완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토벌군이 이곳저곳을 꿰뚫듯 훑고 있었다.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부수며, 아이들이고 여자들이고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있었다.이완은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손끝이 천을 풀어내자, 불빛이 그의 머리칼을 타고 흘렀다.빛나는 은발과 벽안이 말갛게 드러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순간 얼어붙었다.모든 토벌군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냉궁 괴물…!”“저놈이 은월단 두령이로구나! 잡아라!”이완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그는 일부러 넓은 길을 택해, 병사들을 유인해 냈다.그러나 너무나도 어두운 밤.달빛은 여전히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몸속에 숨어버린 힘은 아무리 불러내려 애써도 잠잠했다.그는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그러나 다가오던 이들을 물리친 만큼, 더 많은 무리가 이완에게로 몰려들었다.“잡아라, 이놈이 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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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21화 : 역적(逆賊) (1)

(다소 폭력적이고 비자발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음)질퍽한 흙 위로 사정없이 끌려가는 몸.발목과 손목은 거칠게 묶였고, 뒤에서 누르는 무게가 갈비뼈를 짓눌렀다.목덜미에 닿는 장갑 낀 손은 숨통을 막을 만큼 무거웠다.머리를 통째로 가린 천 사이로 불빛이 스며들었다.무겁고 습한 공기 속에는 쇠와 피, 땀 냄새가 뒤엉켜 있었다.곧 거친 숨소리와 낮게 웃는 목소리가 얽혔다.“이게 은월단 두목이라고?”“그러게, 덩치가 별로 안 커 보이는데?”얼굴을 가렸던 천이 거칠게 벗겨지고, 결박이 풀렸다.수십 개의 눈이 여기저기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오… 이것이 그 유명한 냉궁 괴물인가!”“은발에 푸른 눈이라… 정말 소문 그대로군.”“이리 엉망이 됐는데도, 기가 막히게 아름답군! 이 정도일 줄이야!”이완은 몸을 틀어 벗어나려 했지만, 즉시 엎어진 채로 팔과 어깨가 땅에 박혔다.등 뒤에 누군가의 무릎이 꽂히고, 목덜미는 짐승처럼 움켜잡혔다.갑옷과 장식이 부딪히는 금속음, 제 몸을 가렸던 얇은 천이 마구 찢어지는 마찰음이 귀에 박혔다.이윽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훑자, 등골이 오싹하게 식었다.이완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햐… 이거 완전, 여인보다도 고운 몸이군.”“어디 보자….”사내들의 손 여러 개가 찢어진 옷 안으로 다짜고짜 파고들었다.이완은 거세게 몸을 비틀었으나, 곧 사방에서 발길질이 쏟아졌다.허리와 무릎, 발목과 팔이 사정없이 땅에 짓눌렸다.“…으윽!”“당장 죽기 싫으면, 더 움직이지 마라.”목덜미에 불이 붙은 듯한 압박감이 내려앉았다.또 다른 손이 이완의 목덜미와 턱을 잡아 억지로 돌려, 여러 쌍의 굶주린 눈과 마주 보게 했다.빛을 점점 잃어가는 푸른 눈에 공포가 어렸다.“발버둥 치는 것마저 예쁘구나…!”“여기도 얼굴만큼 고울까?”순간 발목이 잡히고 그대로 벌어졌다.차가운 땅과 뜨거운 숨결이 허벅지 사이를 동시에 파고들었다.“으읍!“이완의 손가락이 바닥의 젖은 흙을 움켜쥐었다.시야가 물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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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21화 : 역적(逆賊) (2)

(다소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음)흙탕물과 피에 뒤엉킨 은빛 머리카락.창백한 얼굴과 어깨가 무력하게 바닥에 박혀 있었다.그 위로 덮인 수많은 그림자가, 비웃음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요동쳤다.랑우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그리고 그 숨은, 다시 내쉬어지지 않았다.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었고, 잿빛 눈동자 안에서는 생기마저 사라졌다.신중하고 조용하던 발소리 대신, 이제는 지축을 울리는 폭발이 터졌다.순간 귀신 수백이 몰려온 듯한 살기가 좁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그제야 뭔가 수상한 기운을 느낀 사람들이 허리춤을 잡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뭐… 뭐야?”두툼하고 긴 랑우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어깨뼈와 쇄골 사이를 꿰뚫었다. 그러고는 칼이 채 빠지기도 전에 몸을 틀어, 상대의 허리를 가르며 두 동강을 내었다.랑우는 기둥을 받친 밧줄을 휘감아 매달린 채 그 반동을 이용하여 달려드는 창끝을 비켜내고, 팔꿈치로 사내 하나의 콧대를 으깨며 무릎으로 흉골을 부쉈다.“아아아악!”사방에서 피부가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 뒤엉킨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도망치는 등짝에 검이 날아가 꽂혔다.허리까지 관통한 그 칼은 사람을 바닥에 대못처럼 고정했다.비명이 길게 늘어지다, 단칼에 끊어지듯 뚝 잘려 나갔다.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벽에 얼룩처럼 번졌다.소리를 지르려던 목은 이미 잘려 나가 공허한 바람 소리만 새어 나왔고, 도망치려던 발은 서로 엉켜 시체 위로 나동그라졌다.그러나 랑우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한 번 휘두를 때마다 뼈와 쇠가 함께 갈라졌고, 살점이 뜯기는 둔탁한 소리 위로 단말마가 겹쳐 터졌다.그러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적들의 얼굴이 아니었다.피가 뒤섞인 흙탕물 속에 쓰러진 은빛 머리칼.미약하게 떨리는 손가락.차갑게 꺾여 있는 어깨….그 처참한 모습에, 랑우의 칼끝은 더욱 깊고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그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손과, 모든 입과, 모든 시선을 잘라냈다.다시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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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22화 : 부활(復活) (1)

은월단의 산채는 완전히 무너졌다.불길이 지나간 자리는 검게 그을렸고, 꺾인 기둥과 무너진 담장이 잔해처럼 흩어졌다.남은 사람들은 깊은 산속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피신했다.그들 앞에, 핏물에 젖은 장신의 무사가 나타났다.은월단 무리가 이미 여러 차례 전장에서 마주해,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그의 품에는 찢기고 터진 몸을 겨우 가린 채, 의식 없이 늘어진 자신들의 두목이 안겨 있었다.불안과 의심이 가득한 눈빛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우리 두목을 왜 저 군인 놈이 데리고 있어?”“…물어볼 것도 없어! 죽여라!”칼끝이 일제히 랑우를 향해 겨누어졌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변명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다만 이완을 안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순간, 비원이 급히 달려들어 검들을 막아섰다. 그의 몸 또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다들 그만해! 이 사람은 두목을 해칠 자가 아니다. 어디 한 번이라도 이 자가 우리를 제대로 공격한 적이 있었느냐? 지금도 두목을 저놈들 손에서 구해오지 않았느냐!”어리둥절해하던 이들 중에, 문득 한 사람이 말했다.“…소나무 향이야!”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쑥덕였다.“저 사람한테서 소나무 냄새가 나는데? 두목이 그리도 좋아하던….”“뭐야, 저 사람…? 두목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담담히 들려왔다.“…잠시만요, 여러분. 다들 진정하십시오.”모든 시선이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쏠렸다.무리 앞으로 나온 경렬은, 잠시 이완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다가 랑우에게 말을 건넸다.“저는 은월단의 의원입니다. 제가 그를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사람들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무기들은 어느새 하나둘 내려갔다.랑우는 이완을 품에 안은 채, 경렬의 인도를 받아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축축한 돌바닥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랑우는 여전히 이완을 품에서 놓지 못한 채, 바위벽에 등을 기댔다.경렬은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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