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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1화 : 월초(月草)

회복이 다 안 된 상태에서 너무 많은 힘을 쓴 탓인지, 이완의 몸은 다시 나빠졌다.경렬은 왜 이리 회복이 더딘지 모르겠다며, 정성스레 다린 약을 이완에게 가져왔다.작은 사기그릇 안에 담긴, 맑고 따뜻한 갈색의 탕약.“새로 만든 보약입니다. 당신같이 몸이 찬 사람에겐, 더없이 잘 맞을 겁니다.”“감사합니다, 의원님.”이완은 그릇을 쥐고 가만히 향을 맡았다.평소 자주 손질하던 여러 약초 향에 섞여, 무언가 알 수 없는 냄새가 스쳤다.“그런데… 처음 맡아보는 향이네요.”“이젠 당신도 약재에 많이 익숙해졌군요.”경렬은 품 안에서 마른풀 하나를 내어 보였다.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털이 촘촘하게 돋은 잎사귀가 대여섯 개 정도 달려 있었다.“‘월초’라고 합니다. 이번에 계곡을 내려가서 얻은 귀한 약초이지요. 태생적으로 음기가 강한 사람의 기력을 돋우고 정신을 맑게 하며, 상처 회복을 돕습니다.”이완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들이키기 시작했다.살짝 뜨겁고 묵직한 약탕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런데 놀랍게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통증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경렬은 그 후 며칠을, 아침마다 같은 탕약을 달여왔다.이완의 회복은 눈에 띄게 빨라졌고, 팔과 다리의 뻐근함도 곧 완전히 사라졌다.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변화도 있었다.언제부턴가,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처음엔 그저 가끔 숨이 가빴다.그런데 이제는 단지 옷깃이 스치거나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살갗 위로 소름이 올라왔다. 특히 경렬이 곁에 있을 때는, 유독 그의 숨결과 체온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이런 감각들은 이완에게 너무나도 낯설었고, 또한 무섭도록 자극적이었다.“오늘은 좀 어떠십니까?”경렬이 아침 탕약을 들고 이완의 방으로 왔다.“…괜찮습니다. 몸이 많이 나아진 느낌도 있고요.”그러나 지나치게 예민해진 감각에 관한 얘기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약초가 몸에 잘 받는 것 같으니, 오늘부터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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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2화 : 열기(熱氣)

경렬은 지금 이완의 상태가 어떠할지,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저 먼 극동에서부터 힘겹게 구해온 ‘월초’의 기운이, 저렇듯 이완의 혈맥을 따라 온몸으로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곧 흡족한 기분이 올라왔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며 냉궁에서 도망쳤다던 괴물.다행히 이완이 이곳 연무곡 근처에서 쓰러진 덕에, 경렬은 그를 다른 추격대보다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를 데리고 와서 처음 진맥했을 때, 바로 알아차렸다.이 자는 분명 사람이고, 또한 남성이나… 그 어떤 여성보다도 강한 음기를 지닌, 너무나도 특별한 체질이라는 것을.극한의 음기를 가진 월초라면, 그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이 과하면… 그 어떤 춘약보다도 강력하게 작용하게 된다.이완이 월초의 기운에 취해 감각이 흐려지고 판단이 둔해질수록, 양기가 특히 강한 화호족인 자신은 더욱 쉽고 또 완벽하게 그를 손에 쥘 수 있겠다고 여겼다.다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영력 때문에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던 중, 이제는 이완의 약점마저 파악하게 된 것이다.그를 월초로 무너뜨린 뒤 서서히 길들이며, 결국은 온전히 자신만을 따르는 칼로 만들리라는 치밀한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연무곡은 달빛 하나 스며들지 못하고 완전히 암흑에 잠겨 있었다.방안 작은 화로 안엔, 반쯤 꺼진 불씨만이 남아 흔들렸다.“…이완, 접니다.”경렬의 손엔 방금 달여내어 김이 피어오르는 탕약이 들려 있었다.방문을 여는 이완의 표정은 뭔가 힘들어 보였다.“오후의 검술 훈련이 좀 고되었나 보군요. 약 드실 시간입니다.”“…네… 의원님….”이완은 숨을 조금씩 몰아쉬며 말없이 약탕을 두 손으로 받았다.처음엔 깔끔하고 쓴 풀 내음. 그러나 목을 타고 넘어간 순간, 역시 가슴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요즘 제 몸이… 좀 이상합니다.”“이상하시다니, 어떤…?”이완은 비워낸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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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3화 : 산채(山寨) (1)

짙은 안개가 계곡에 가득하고, 비에 젖은 흙냄새가 산기슭을 짓눌렀다.좁고 외진 오솔길 끝, 오래된 나무 창고 안.작은 등잔 하나만 밝혀진 어둑한 그 안에는, 비린내와 담뱃재가 섞인 냄새가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검은색 도포 차림의 남자가 조용히 들어서서 복면을 벗었다.경렬이었다.“이제야 그 재수 없는 낯짝을 보여주는군. 그 볼 것 없는 의원이라도 아쉽다 이거냐. 죄다 불태운다고 협박해야 겨우 말을 알아들으니.”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산채 두목 ‘야귀(夜鬼)’였다.팔뚝과 손잔등엔 온통 칼자국이 얽혀 있었다.그는 반쯤 말라붙은 피가 묻은 손으로 술병 하나를 들고 앉아 경렬을 노려보고 있었다.“그 고아들, 매달 약속한 수만큼 데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 쪽 애들이 자꾸 사라지는 거지?”야귀의 거친 목소리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경렬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동자가, 등잔 옆에서 더욱 붉게 빛났다.“이 가짜 의생 나부랭이야! 네놈이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냉궁 괴물이고 뭐고, 그저 헛소문일 뿐이라고! 아무 힘도 없는 폐인이라고 했지!”야귀의 불끈 쥔 주먹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그래서 네 말대로 현상금 좀 타 보자고 애들을 더 보냈는데, 돌아온 놈이 단 한 명도 없어!”말끝마다 침이 튀고, 풀어헤친 머리가 어깨 위에서 출렁였다.“그런데 이번에 그 괴물 놈 잡으러 간 내 부하들이, 한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다섯이었다! 대체 거기서 무슨 작당을 한 것이냐? 이게 다 네놈 머리에서 나온 짓이지? …내 부하들은 대체 어디 있냔 말이다!”경렬은 상대의 말이 그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야귀.”경렬의 음성은 낮고 매끄러웠지만, 얼음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이완이나 고아들을 직접 대할 때에는, 단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던 서늘한 기운.“네 부하들이 어디 있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뭐, 하찮은 소문에 놀란 겁쟁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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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3화 : 산채(山寨) (2)

하늘을 찢어낼 듯한 비명이 연무곡을 울렸다.이완은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열기를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홀로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약초를 잔뜩 채집해서 돌아오자마자… 엉망이 된 별채, 피투성이가 된 경렬과 한 어린아이의 굳은 몸을 보았다.이완은 그 아이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자신의 은백색 머리카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며 살갑게 웃어주던 아이였다.검붉은 피가 스며든 방바닥 위로, 아직 미처 식지 못한 작은 손이 떨구어진 채 굳어 있었다.경렬은 이를 악물고 가슴 압박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현웅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송구합니다, 의원님.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그런데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이완이 피를 토하듯 탄식하며 물었다.경렬은 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산채의 두목인 ‘야귀’라는 자가 수하들을 또 보냈습니다. 아이들을 모조리 데려가려던 중에, 이 아이가 저를 지키려다 그만….”이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시처럼 맺히는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그는 결국 그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목을 묻은 채… 한참을 비통하게 울부짖었다.그날 밤.연무곡 위의 하늘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솟았다.이완은 말없이 칼을 들고 산을 올랐다.흙탕물이 고인 고갯마루를 넘어 산채를 향하는 동안, 푸른 두 눈동자에 내내 달그림자가 박혔다.산속은 모든 것이 기묘할 만큼 조용했다.그 깊은 고요 속에서도, 이완의 마음속에서는 뭔가 무겁고 어두운 것이 끓어오르고 있었다.그것은 분노였고, 죄책감이었으며, 또한 이전엔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고 싶다는 강한 살기였다.경렬과 현웅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역시 이완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산채는 연무곡 뒤편 산 능선 중턱에 숨겨져 있었다.얼핏 보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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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4화 : 살인(殺人)

이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달빛에 휘감긴 바람이 마치 그를 중심으로 맴돌 듯 소용돌이치고, 여기저기 걸린 천들이 떨어져 나갈 듯 힘 있게 나부꼈다.이완이 산채 중앙의 막사 앞에 도달했을 때, 덩치 큰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짐승의 털을 이어 만든 외투를 두르고, 손엔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싸늘한 이완의 목소리가 울렸다.“…네가 야귀라는 자냐.”“그, 그렇다…! 설마, 네가 그 냉궁 괴물이냐?"심하게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공포와 당황스러움이 뒤엉켜 있었다.이완은 대답 대신 조용히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거세게 울리던 바람이, 다시 한번 그의 은발을 타고 휘몰아쳤다.야귀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였다.“…목숨은 목숨으로 받겠다.”이완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 야귀는 무언가에 홀린 듯 크게 몸을 떨었다.그리고.우두둑.두툼한 다리가 꺾이듯 굽혀졌다.쾅!쾅!쾅!그가 자신의 머리를 흙바닥에 연신 찧어대기 시작했다.한 번. 두 번. 세 번….사방으로 피와 뇌수가 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아악…!”누군가가 울부짖었지만, 이완은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야귀는 마지막으로 부서진 머리를 힘겹게 들어 이완과 경렬을 번갈아 본 뒤… 그대로 고꾸라졌다.이완은, 그렇게 피범벅이 된 야귀의 시체를 한참 동안 노려보며 서 있었다.달빛을 받은 그의 은발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다.경렬은 황홀하다는 듯 밝게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이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이렇게 네가 내 것이 되는구나…! 무섭고도 아름다운, 나만의 칼….’***잔혹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산등성이에는 이슬에 젖은 풀 내가 감돌았다.이완은 야귀가 쓰던 막사 안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가슴 속의 분노와 열기가 천천히 가시고, 예민하게 들떴던 온몸의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그러나 야귀가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이마가 깨지고 뇌수가 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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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5화 : 의적(義賊) (1)

황룡가.상국 동남부 최대의 상업지.그러나 도박, 인신매매, 매춘, 살인 등… 은밀한 범죄가 일어나는 곳.그 안쪽 어딘가에 깊숙이 위치한 지하 회랑에는, ‘비류옥(飛流獄)’이라 불리는 비밀 노예 시장이 있었다.좁은 골목을 돌아 벽인 척 위장된 비밀 입구를 지나자, 썩은 짐승의 가죽 냄새와 비릿한 철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이완은 비원의 뒤를 따라 계단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뒤에는 현웅과 산적 세 사람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비원이 익숙하게 몇 마디 말을 건네며 ‘야귀’의 이름을 대자,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지하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횃불이 이어지는 긴 회랑 안에는, 맨발의 노예들이 마치 짐승처럼 우리 속에 앉아 있었다.“아마도 이곳에 아이들을 넘겼을 겁니다. 이전에 데려갔던 아이들도 그랬고요.”이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은발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두 개의 벽안은 여전히 달빛처럼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비류옥 곳곳을 한참 뒤진 후, 이완의 무리는 아이들이 갇힌 우리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몇몇 아이들은 이완의 눈빛을 알아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하얀 형아…?”“정말 형이다! 형아!”“…쉿!”이완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지만, 그 순간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어이, 거기! 뭣들 하는 것이냐!”경계를 서던 무사 하나가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현웅의 검이 번개처럼 오갔다.“커억…!”그의 비명은 목울대에 걸린 채 제대로 터지지 못했다.“침입자다!”멀찍이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자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갔다.장사치들과 보초들, 검을 든 무사들이 곳곳에서 몰려왔다.“저놈들 잡아라!”창과 도끼가 여기저기서 이완의 무리를 향해 어지럽게 쏟아졌다.산적들과 현웅이 차례로 검을 세워 들고 몰려오는 이들을 향해 달려갔다.깊은 지하.달빛의 힘을 쓸 수 없는 지금, 이완은 본연의 체력과 검술만으로 싸워야 했다.그러나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정확했고, 칼끝이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숨이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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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5화 : 의적(義賊) (2)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각.밤공기는 서늘했지만, 달은 아직 은빛으로 환했다.산채 입구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나무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취한 듯, 이완은 굵은 가지에 기대어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 노인들의 기침 소리.그러나 이완의 눈동자는, 오직 저 멀리 둥근 달 위에 머물러 있었다.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은발이 아름답게 흩날렸다.이완의 모습은, 마치 달빛에 잠긴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하고 은은했다.그때, 나무 아래에서 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목, 여기서 뭐 하십니까? 혹여 아이들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하신 거면….”“그런 건 아니다. 그냥 달빛이 좋아서….”이완은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다시 달로 시선을 향하며 나직하게 말했다.“…옛 벗을 그리던 중이다.”비원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이완을 올려다보았다.달빛에 젖은 그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했지만, 또한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비원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물러났다.“…어머니… 랑우….”이완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찔거렸다.“당신들을 찾으려고 이곳을 빨리 떠나려 했는데… 이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겨버렸습니다….”그의 말은 달빛에 실려, 멀리 계곡 물소리와 함께 은빛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그 늙은 소나무 위에서, 이완은 그렇게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에는 진한 그리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결심이 겹쳐 있었다.며칠 후.“비원.”이완은 모닥불 근처에 서 있던 그를 조용히 불렀다.“예, 두목님.”“황룡가의 비류옥 같은 노예 시장이 더 있나?”“중원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상국 안에서만 해도 그 수를 다 세지 못할 정도입니다, 두목.”“…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처럼 억울하게 잡혀 와서 사고 팔리는 이들이 더 있겠지.”“그렇습니다.”“그들 또한 구할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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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6화 : 재회(再會) (1)

처음 시작은 대수롭지 않았다.그저 노예상들의 집들만 골라 턴다는, 특이한 도적 떼들의 소문.그들은 달이 휘영청한 밤에 홀연히 나타나곤 했다.그런데 금은보화만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 있던 사람들까지도 죄다 데리고 나갔다.그 무리가 백성들에게 ‘은월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관아에서는 그저 웃어넘겼다.“호들갑 떨지들 말아라. 그래봤자 그저 좀도둑들 아니겠느냐?”그러나 어느 밤.상국 중부의 대영주 ‘금가(金家)’의 사병 훈련장이 통째로 불탔고, 노예로 길러지던 백성 백여 명이 풀려났다.심지어 무기와 화약고도 왕창 털렸다.그 이튿날, 남부의 고위 관료는 탐관오리라는 죄목으로 들보에 거꾸로 매달렸고, 관청 창고에는 빼돌렸던 세곡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었다.서북 변경의 황족 사병 군영.알 수 없는 이유로 병사들은 밤새 깊은 잠에 빠졌고, 아침이 되자 창고 안의 군량미가 모두 자취를 감췄다. 대신 마당 한가운데에는, “굶주린 자들에게 돌려주겠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나무패 한 장이 꽂혀 있었다.그 무렵 인근 마을 사람들은, 두건을 쓴 채 말을 몰고 달리는 한 무리를 보았다고 했다.그 중 한 사람의 삐져나온 머리칼이, 달빛 아래에서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는 증언 또한 뒤따랐다.그 도적 떼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대범해졌다.노예상에서 착취 귀족으로, 귀족에서 관리로, 관리에서 대감으로.그리고 마침내… 상국 황실의 후궁 하나가 밀거래하던 황금 수레가, 한밤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날 이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정말로, 저들이 그 수레를 털었다는 말인가.”기루 깊숙한 곳에 있는 밀실.붉은 비단 휘장 안에 모인 고관들의 얼굴엔 긴장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바닥 위에 펼쳐진 작은 두루마리 하나에 모였다.그곳에는, 이 새로운 도적 떼로 인한 여러 귀족과 고위 관료 십수 명의 피해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대체 어떤 놈들이 이리도 대담한가…?”“이번 사건만 해도, 오간 흔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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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6화 : 재회(再會) (2)

그날 밤, 달은 기이할 만큼 크고 둥글었다.하늘을 반쯤 가렸던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마치 누군가의 거대한 눈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은빛 달무리가 산 아래 골짜기를 덮쳤다.그러나 치밀히 준비하고 행동했음에도,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피에 젖은 비원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이건 함정입니다, 두목!”이완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외투를 벗어 땅에 던졌다.전혀 예상치 못한, 너무도 빠른 포위였다.노예상의 수레가 지나간다는 정보는 미끼에 불과했고, 숲속 깊은 곳에 늘어선 군사들은 이미 은월단의 행동반경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푸르스름한 달의 영기가 이완의 손끝에 어른거렸다.그러나 그는 야귀의 일 이후로는, 수하들의 목숨이 직접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달빛의 힘을 사용해 사람을 해하는 일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특히 오늘처럼, 커다란 보름달이 뜬 날엔 더욱 위험했다.야귀를 죽였던 때처럼 또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폭주하다, 자기 사람들까지 해치게 될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또한 영력을 사용하기엔, 수하들과 적들이 너무 가깝게 뒤엉켜 있는 상황이었다.그리고 아무리 선제공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일반 군병들의 목숨까지 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들 또한 그저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이는 것뿐.“전원 흩어져라! 비상 지침대로, 이제 각자 움직인다!”“…하지만, 두목!”“일단 다들 피해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예, 두목!”은월단 전원은 이완이 수십 번 훈련 시킨 대로,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찢어져 빛의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이완 자신도 깊은숨을 들이켜며 복면을 단단히 고쳐 쓴 뒤, 어둠 속에서 한 방향을 향해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숲.그런데 순간, 그의 뒤를 쫓는 기척이 느껴졌다.산짐승이 아니었다.날렵하지만, 기운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덩치가 큰 그 무언가.‘…사람이군. 한 명이다.’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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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7화 : 포옹(抱擁) (1)

“두목! 적들이 전방에 매복해 있습니다!”“…이번에도 놈들이 한발 빨랐구나!”최근 들어 은월단의 움직임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노출되고 있었다.숨은 거점은 연달아 발각되었고, 계획했던 노선마다 토벌군이 미리 진을 치고 있었다.다행히 이완이 작전마다 미리 짜둔 치밀한 동선과 도주 계획 덕에, 은월단 내에서 체포되거나 사망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냉궁에 틀어박혀 랑우를 기다리며 종이가 닳도록 읽었던 책 중에는 병법서도 많았다.물론 그렇게 습득된 지식이 이리 쓰일 줄은, 이완 자신도 전혀 몰랐지만.비원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요즘 정말 이상합니다, 두목. 마치 우리가 어디로 향하기도 전에, 저들이 죄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최근에 흘러들어온 무리 중에 간자(間者)가….”이완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아무리 기민한 토벌대라 해도, 이 정도의 정밀한 대응은 우연이 아니었다.누군가가 정보를 흘리고 있었고, 그 뒤에 분명 내부자가 있으리라는 것도 직감하고 있었다.“특별히 저들과 따로 접촉하는 이가 없는지 자세히 살펴야겠다. 비원, 산채를 오가는 모든 이들을 감시하고, 수상한 행태를 보이면 즉시 내게 알려라!”“예, 두목!”은월단과 토벌군의 충돌은 날로 늘어났다.숲과 산비탈, 강과 들판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다.그러나 그 치열한 전장마다… 두 개의 시선이 은밀하게 마주쳤다.항상 은월단의 선두에 서서 무리를 거침없이 지휘하는 자.두건 사이로 얼핏 비치는 은백의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눈빛.단 한 번이라도 그를 본 이들은 그 모습과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고고하고 아름답다고 칭송했다.그리고 토벌대의 선두에 선 여러 장수 중, 눈에 가장 먼저 띄는 한 사람.다른 병사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 같은 장발.웬만한 사람의 키만 한 장검을 뽑아 든 그의 모습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은빛과 잿빛.두 기운이 마주하는 순간마다, 전장은 한순간 정적에 잠겼다.은월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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