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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6화 : 경렬(景列) (1)

주위가 너무나도 조용했다.겨우 눈을 뜨자, 천장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엉성하게 얽힌 나무 기둥과 거칠게 다듬어진 서까래.냉궁과는 너무도 다른, 그야말로 낯선 공간.“내가 왜 이런 곳에… 여기가 대체 어디야….”별로 넓지 않은 그곳은, 진한 약초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깨어나셨습니까.”순간 들리는 낯선 목소리.완은 황급히 일어나 앉았지만, 곧 어지러움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이마를 짚고 겨우 고개를 돌리자, 잿빛 도포를 걸친 사내 하나가 방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그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등 뒤로 단정히 묶어 내렸고, 손에는 김이 오르는 약탕기를 들고 있었다.단단한 이마 아래로 드러난 그의 차분한 눈매는, 얼핏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이틀을 연달아 주무셨습니다.”그는 약탕기를 내려놓으며 완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억지스러운 친절도, 거리감도 없는 자연스러움.“그만큼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아직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진중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다행히 뼈나 내장이 상한 곳은 없지만 말입니다.”그제야 완은, 온몸이 깨질 듯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으….”“통증을 가라앉힐 탕약을 달여왔으니, 식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낯선 남자, 낯선 공간.그러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 배인 냉기를 조금은 덜어주는 목소리였다.완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여긴 어디입니까.”사내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이곳은 연무곡(煙霧谷) 초입의 작은 의원(醫院)입니다. 저는 의생(醫生), 경렬(景列)이라 합니다.”“…의원이라고요…?”“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단 물부터 좀 드시는 게 좋겠군요. 그렇게 계속 말하다가는, 곧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올 겁니다.”사내는 가만히 물 한 잔을 건넸다.여전히 자연스러운 손길.완은 본능적으로 경계했지만, 이미 목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목례하고 조심스레 물을 받아 한 모금 삼켰다.남자는 부드러운 목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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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6화 : 경렬(景列) (2)

“…이 머리카락이며 눈동자, 그리고 상처들…. 이상하지 않으시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쓰러져 있었는지….”경렬은 이완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그 눈빛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그간 여러 병자를 돌보면서, 당신처럼 은백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를 지닌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특별하거나, 몸이 약한 사람들이 있지요.”이완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떨렸다.“…저 같은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시다고요?”“네,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돌봤던 아이 중에도,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하얗고 백발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덧붙였다.“다만… 당신 같은 벽안은 저도 처음 봅니다. 이런, 가까이서 보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답군요….”경렬의 적갈색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꿰뚫는 듯하여, 이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살짝 움츠려진 두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러나 경렬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당신이 이 연무곡 어귀에서 혼절해 있는 것을, 약초 심부름을 하는 자가 발견해서 저에게 알렸습니다. 머리카락이나 피부색은 그렇다 치고, 너무 마른 몸에다, 전체적으로 기력이 많이 약하신 듯하여… 의원 된 도리로, 일단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이완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로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제가 화타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시간을, 많은 병자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사람이 무슨 지병이 있다면 그것을 고칠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잠시 쉬다 가시면 그뿐이니까요.”“지병…이 있는… 사람… 이라고요….”이완은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귀신’, ‘짐승’, 또는 ‘괴물’이라 부르며 함부로 대하거나, 또 두려워했는가.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사람’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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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7화 : 연무(煙霧) (1)

연무곡 뒷산 어딘가에는 오래된 산채(山寨) 하나가 있었다.그곳에서는 백여 명의 산적들이 은둔해 있었고, 연무곡 주변의 숲에 매복해 있다가 오가는 상단을 털곤 했다. 이완도 약초를 캐러 갔다가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몇 번 몸을 숨긴 적이 있었다. 대부분이 중무장해 있었고, 얼핏 봐도 상당히 거칠어 보였다.건강한 어린아이들은 상국의 노예 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경렬은 가끔 산적들이 고아들을 노리고 내려올 때가 있다며, 종종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곤 했다.그러던 어느 밤.창호지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고요한 밤과 어울리지 않는, 풀숲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소리.이완은 가만히 눈을 뜨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긴장한 탓인지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의 예민한 귀에는, 별채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아이 하나의 입을 틀어막은 거친 손길.“가만히 있어!”“…으앙!”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울음소리.이완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마당으로 나와 달빛을 받는 순간, 무언가가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게감이 점점 달라졌다.자신이 성인이 되던 날, 냉궁에서 처음 느꼈던 감각.벽옥이 깨지던 소리와 함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뻗쳐오르던 능력.무언가를 완전히 부수어버리고 싶은 욕구.그 힘이 또 한 번, 당장 꺼내 달라는 듯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어느새 이완은, 아이 하나를 거칠게 끌어안고 마당을 나서려던 사내의 등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뭐야, 몸이 왜 이래…!”아직 이완을 발견하지 못한 사내는, 팔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당황했다.“아아악! 사람 살려!”그러나 이완이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쓰자, 곧 목소리마저 막혀 버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사내의 손아귀 힘이 스르르 풀리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별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밤하늘을 가르며 내려온 달빛이 다시 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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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7화 : 연무(煙霧) (2)

“그러면 제가 어찌해야 했습니까.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야 했나요.”경렬은 이완을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물론 아직도 쉽게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한 일 말입니다.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고도 말이지요.”“하아….”이완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그런데 이완… 당신은 지금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경렬이 모닥불 너머에서, 시선을 이완에게 단단히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설마 이 일로, 제가 당신을 무슨 ‘괴물’ 보듯 할지도 모른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이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경렬을 바라보았다.두 개의 푸른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하지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토록 잔인하게, 그것도 당신의 눈앞에서 말입니다.”경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사람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면 그를 영웅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영력 같은 것으로 마땅히 죽을 놈들을 응징하면 괴물이라 부르는 건… 그저 이 세상 사람들의 편리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괴물은 당신이 아니라, 아이에게 함부로 손을 댄 바로 그놈입니다.”이완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하지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머리카락, 이 눈동자….”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사람들은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저 귀신이나 짐승, 또는 괴물이라 불렀습니다….”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경렬은, 천천히 이완의 곁으로 다가왔다.“그렇다면,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이름….”이완은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이완.”꿈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경렬은 이어서, 한 마디 한 마디 정성껏 힘주어 말했다.“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고, 아이들을 저 나쁜 산적의 손에서 지켜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하지만 의원님… 당신은 저를 잘 모르십니다.”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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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8화 : 괴물(怪物) (1)

이완은 어느새 아이들이 엎지른 약탕기나, 널브러진 약초를 수시로 주워 정리하고 있었다.뒷간도 깔끔히 치우고, 별채의 이불들도 깨끗하게 빨아서 햇빛에 널어놓았다.물론 그 모든 것들은 누가 시키거나 부탁한 일이 아니었다.그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그리고, 경렬이 말한 ‘좋은 사람’에 정말로 가까워지고 싶었다.그러던 어느 날.경렬이 약초를 다듬던 손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이완, 이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그의 첫 부탁.그 말은 그저 일상인 듯 담담했고, 이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걷어붙였다.처음에는 그렇게, 단순히 마른 약초를 정리하는 일들이었다.세상을 냉궁 구석에서 궁녀들이 던져준 책으로 배운 이완은 비록 서툴렀지만, 특유의 영특함과 성실함으로 뭐든 빨리 배웠다.이젠 요리도 제법 잘해서, 근 스무 명분의 식사도 혼자서 거뜬히 준비하였다.밤에 아이들 잠자리를 봐주는 것도, 어느덧 이완의 몫이 되었다.아이들도 이제는 이완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깔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그중에는 오히려 바짝 다가와서,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당겨보는 놈들까지 생겼다. 어느새 그는, 아이들 앞에서 두건을 벗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경렬은 그런 이완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짓곤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이완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그의 눈빛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얹혀 있었다.아이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완은 별채 앞에 앉아 말없이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경렬은 그런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조용히 다가왔다.“밤마다 잠도 잘 자지 않고 계속 그러고 있으면 몸이 상합니다, 이완.”이완은 잠시 손끝을 멈췄다.“저는 괜찮습니다. 그놈들이 또 올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그리고 어서 익숙해지고 싶어요, 이곳 일에.”그 말에 경렬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당신도 이제 이곳 식구라는 뜻입니까? 이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건가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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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8화 : 괴물(怪物) (2)

모두가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이완의 발걸음이 ‘탁’하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굳었다.“붉은 여우의 후예가 다스리는 황궁에서, 은발과 벽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불길했지요… 황제께서 그 아기를 단칼에 죽이려 했으나, 경천대무녀가 말했답니다. 그 아이를 죽이면 나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그래서 그 아기를 죽이는 대신,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자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냉궁의 귀신’으로!”이완의 손끝이 거세게 흔들렸다.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금방이라도 쓰러져 기절할 것만 같았다.그 이야기꾼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심장 속을 파고들었다.“옥비는 그 저주받은 아기를 낳자마자, 피투성이로 쫓겨나면서도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더니 결국은 살인귀가 되어, 무고한 상국 백성들의 목숨을 끊어버리다니요!”순간, 이완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무릎이 꺾였다.입술을 억지로 다물었지만, 뜨겁게 솟구치는 무언가를 막을 수 없었다.“아니야… 다 거짓말이야….”그는 고개를 흔들며 연신 중얼거렸다.“살인귀라니… 아니야….”거세게 떨리던 푸른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그때였다.뒤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그의 어깨를 감쌌다.“…이완. 인제 그만, 돌아갑시다.”경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손끝에는 단단한 힘이 담겨 있었다.이완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누군가는 수군거리며 바라보았다.이완은 그날 그곳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자신이 지금까지 품어왔던,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리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그럼에도 자신을 저리도 저주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설 방법을 찾아야 한다.장터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이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경렬 또한 그의 옆에서 말없이 걸었다.의원에 당도했을 땐 밤이 이미 깊어,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이완은 마당 한가운데에 천천히 머물러 섰다.“…이완. 오늘 무척 괴로워 보이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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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9화 : 수련(修練) (1)

며칠 후 아침.뒤뜰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단단한 체격.흑색 두건으로 잘 감싸서 묶은 머리.낡은 도포 위로 무겁게 드리운 검 한 자루.마치 오랜 시간을 떠돌아다니느라, 바람과 흙먼지를 제대로 털지 못한 듯한 모습.“오랜만입니다, 의원님.”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투박하고 단단했다.“어서 오세요! 제 청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경렬이 곁에 선 이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이완, 이쪽은 ‘현웅(玄熊)’이라는 사람입니다. 저와는 오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이 사람이 앞으로 틈날 때마다,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찾는 일 또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이완은 낯선 무사를 바라보며 짧게 목례했다.“현웅, 제가 말한 이완입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병이 있어 외모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만, 검술을 익히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현웅은 이완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미묘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정파 무학 같은 화려한 가르침 따윈 모릅니다. 그러나 그저 죽지 않을 방법 정도라면, 최선을 다해 가르쳐 드릴 수는 있지요.”“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현웅은 정말 가차 없는 사내였다.그는 처음부터 조금도 이완을 봐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허리와 팔다리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잘못 두면, 곧장 그의 검집으로 얻어맞았다.또한 한 치라도 반응이 늦으면, 어느새 바닥에 거칠게 나뒹굴기 일쑤였다.그러나 이완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도 포기하지 않았다.넘어지면 곧바로 일어섰고,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와도 다시 목검을 들었다.그 모든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했다.살아남고야 말겠다.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그러나 이완을 바라보는 경렬의 눈빛은 어느새 싸늘히 가라앉아있었다.지친 이완이 잠시 처소에 들어가 숨을 고르는 동안, 뒤뜰에서는 경렬과 현웅이 마주 섰다.경렬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혀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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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9화 : 수련(修練) (2)

잠시간의 침묵 후에, 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실 그 이름은… 제가 아주 어릴 때 들었습니다. 십년도 넘었네요.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긴 한 건지…. 아니, 그 사람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지어낸 존재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혹여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긴 속눈썹 사이로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경렬은 그런 이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당신이 그리도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 동안 기억해 왔다면, 그 사람이 가짜일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반드시 존재했을 겁니다. 현웅에게 계속해서 찾아보라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이완은 고개를 돌린 채로 가만히 끄덕였다.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그에게 차마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경렬은 모르는 척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그리고, 송구합니다.”이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경렬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당신은 제게 사과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당신의 집이고,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요.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면, 곧 내게도 그러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이완이 고개를 들어 경렬을 보았다.촉촉하게 젖은 두 개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촛불처럼 물결치고 있었다.***수련은 더 치열해졌다.이완은 어느 순간부터, 현웅이 오기도 전에 미리 마당에 나와 검술 연습을 했다.해가 뜨기도 전부터, 또한 어둠이 깃든 하늘 아래에서도, 수없이 검을 휘둘렀다.어느새 그의 발밑 흙바닥은 눌리기를 거듭하다 단단히 다져졌고, 검의 손잡이에는 핏자국이 여러 겹 덧씌워진 채 말라붙었다.“오늘은 하루 건너뛰시죠.”현웅이 이완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제가 보니, 상처가 다 회복이 된 것도 아닌 것 같군요. 이러면 오히려 몸이 상합니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겠습니다.”하지만 이완은, 어딘가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마치 눈앞의 현웅도, 자신이 휘두르는 검도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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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0화 : 약점(弱點) (1)

연무곡의 하늘은 종일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달빛 하나 스며들지 못하는 어둠.숲은 온통 축축한 안개에 휩싸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현웅과 경렬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고, 의원에 어른이라고는 이완 혼자뿐이었다.그때 문득, 짙은 기척이 뒷문 너머로부터 스며들었다.‘…그들이 또 온 것인가!’이완은 재빨리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칼자루를 쥔 채 쏜살같이 뛰어나갔다.뒷문은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다.재빠르게 별채 쪽으로 내달리니, 그곳엔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들 여럿이 보였다.짐승 가죽과 천을 덕지덕지 꿰맨, 마치 누더기 같은 옷차림.칼과 몽둥이를 든 손으로,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부수기 일보 직전이었다.그들은 다가오는 이완을 발견하고는 순간 흠칫하며 물러섰다.“뭐야 저놈, 저거…!”“그냥 입 닫고 꺼지면 해치지는 않겠다.”그중 한 명이 무리 앞으로 나오며 칼을 세워 들었으나, 이완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그 아이들에게 손대지 마라!”칼을 겨누는 그 손엔 여유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만큼 날이 서 있었다.“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게, 어디서 굴러와서는 헛소리냐!”“킬킬킬… 저놈을 잡아다 비역질하는 놈들한테 팔아도 돈이 꽤 되겠구나!”복면인들은 잠시 비웃다가,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그에게 몰려들었다.검과 검이 맞부딪쳤다.팽!창!이리저리 튕겨 나가는 쇳소리가 계곡을 울렸다.그러나 연거푸 이어지는 공격.이완은 쉴 틈 없이 막아냈지만, 어느새 몸 곳곳이 베이고 찢겼다.사내 하나가 갑자기 다리를 걸어, 이완은 옆으로 구르듯 넘어졌다.그러나 그는 재빨리 일어서서, 거의 이빨을 새운 날짐승처럼 상대방에게로 몸을 던졌다.그는 어깨로 상대를 들이받고, 칼을 휘두르는 동시에 주먹으로 목을 찍고, 넘어지는 자를 무릎으로 눌렀다.그건 더 이상 무슨 검술이 아니었다. 그저 짐승처럼 엉키는, 생존을 위한 싸움 그 자체였다.순간, 적의 발길질이 그대로 이완의 옆구리를 찼다.“…윽!”숨이 턱 막히는 고통.칼자루가 손에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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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운명을 거스르다 - 10화 : 약점(弱點) (2)

이른 아침.경렬이 이완의 방으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약초 향기와 피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었다.잠에서 막 깨어난 이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몸은 좀 어떻습니까?”“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경렬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이완은 경렬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침입자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지키려다 좀 다쳤고요.”“하필 저나 현웅이 없을 때 그런 일이…. 또 산채 놈들이 아이들을 노렸군요.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까?”“그들이 제 머리카락과 눈을 보았습니다. ‘냉궁 괴물’이라고까지….”이완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제 목에 현상금이 걸린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언제 다시 이리로 몰려올지 모릅니다. 의원님과 아이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제가 여길 떠나야….”경렬은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그런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이완. 일단 회복이 우선입니다. 이런 몸으로는, 길을 나서는 건 무리입니다.”“하지만….”“어차피 당신을 숨겨줬다는 것만으로, 들키면 다 죽은 목숨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습니다.”그러나 경렬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차가웠다.“그런데, 이번엔 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친 겁니까? 제가 지난번에 보았던 당신의 힘이라면, 그놈들에게 이렇게 당할 리가….”이완의 긴장된 손끝이 이불자락을 가만히 움켜쥐었다.“…검술을 익혔으니, 굳이 그 힘을 쓰지 않아도 저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과신했나 봅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데….”“아무튼, 이만하길 다행입니다.”경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는 묻지 않았다.***며칠 후.오늘은 간만에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게 드러났다.검푸른 밤의 장막 위로 둥그런 달이 선명히 걸려 있었다.경렬은 의원 뒤편 언덕의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식은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말없이 달을 감상하는 듯했지만… 그 시선은 한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뒤뜰로 통하는 비탈길에는 이미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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