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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0화 : 단성(丹城) (2)

그날 밤.그는 이름 모를 산속의 한 개울가 바위 위에서,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가락 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사람들을 해치기 싫다고, 그러니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힘이었다.하지만 결국…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 다짐은 부질없이 무너졌다.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시간과 계절의 경계가 바스러지는 어두운 길 위에서, 그는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로 맘먹었다.목적지는 단성.전쟁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황량한 변방의 도시.그 안 어딘가에, 자신과 같은 뿌리를 가진 자들이 정말로 살아 숨 쉬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그래, 그곳에… 내가 찾는 답이 있을지도.”그 말은 바람에 섞여 흩어졌지만, 발걸음만큼은 더 머뭇거리지 않았다.***햇빛은 아직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지만, 단성 샛마을 장터는 이미 분주했다.밭에서 갓 따온 채소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온 여인들이 너른 멍석을 깔고 자리를 잡았고, 장정들은 삐걱거리는 수레를 밀며 서로의 목소리를 섞었다.“밭에서 막 딴 무입니다! 오늘 무가 아주 단단해요!”“싸고 질긴 포목, 구경만 하고 가세요!”생선 장수는 손님이 고른 펄떡이는 잉어를 붙잡아 ‘탁, 탁’하고 나무 도마에 내리쳤고, 과일 바구니를 든 노인은 손님을 부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장터 한가운데선 아이들이 엿장수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몰려다니고, 그 사이로 멧돼지 고기를 훈연하는 향내가 담벼락을 타고 퍼져나갔다.그 활기찬 분위기의 한가운데.검은 갓을 눌러쓴 청년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감긴 눈두덩 아래,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희미한 먹빛이었다.그의 앞에는 정갈히 말린 약초 꾸러미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바로 곁에선, 달걀을 파는 노파가 연신 큰 소리로 손님을 부르며 잔돈을 세고 있었다.그러나 그 청년은,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사람처럼 차분했다.그의 손끝은 쉴 새 없이 약초 줄기를 더듬고 있었다.냄새를 맡고, 결을 느끼는 모습이, 마치 식물 하나하나를 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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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1화 : 재회(再會) (1)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벽운은 약초 꾸러미가 든 봇짐을 지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눈은 감겨있었지만, 이제 좁은 장터는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그런데 순간, 코끝에 스치는 향기.‘…소나무 향? 이게 어디서?’바람 끝에 실려 온 익숙한 냄새에, 그의 발끝이 저도 모르게 툭 하고 멈췄다.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그는 아주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근 반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곳 단성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던 향.…그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벽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삿갓 아래로 살짝 눈을 떴다.그리고 마침내 눈에 들어온 것 하나.장터 한가운데에서, 마치 석상처럼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두 개의 짙푸른 눈동자가 어색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들킬세라 벽운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같은 시각.랑헌은 너무 놀라,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겨우 끌어모아 묶은 짧은 잿빛 머리칼이 무척 낯설었다.그러나 검은 삿갓 아래로 보이는 곱고 부드러운 턱선.낡은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어깨와 허리의 유려한 곡선은… 모두 랑헌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랑헌은 여전히 맹인처럼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의 걸음을 눈으로 가만히 쫓았다.단 하나의 몸짓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그가 계속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섣불리 다가가면 그가 그대로 뒤돌아 사라질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한 걸음.또 한 걸음.그러다 두 사람은, 결국 그렇게 소리 없이 서로의 곁을 스쳤다.벽운은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랑헌의 옆을 지나갔다.랑헌은 여전히 온몸이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였다.역시나 두려운 마음에, 차마 바로 뒤돌아보지 못했다.'…역시 그 사람이다.'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맸던… 나의 벽운.랑헌은 그제야 제정신이 번쩍 들어, 골목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를 급히 쫓았다.좁은 길의 끝.그곳에, 그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도망치지도,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그저 감긴 눈 그대로 고개를 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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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1화 : 재회(再會) (2)

장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허름한 여관방.벽운은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손끝에 묻은 약초 가루를 조용히 털어내고 있었다.그 사람을… 결국 다시 마주했다.사실, 이런 순간을 내심 고대해 왔던 것도 같았다.하지만…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기도 했다.그가… 이름 하나를 불렀다.낡은 기억 속으로 으스러져 가던 그 이름을.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웃던 순간들의 잔향이 담긴 이름을.‘…벽운.’그 두 글자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마음이 그대로 무너졌다.억지로 막아뒀던 기억의 둑이 터지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내렸다.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품.책을 읽어 주시던 음성,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손.청운사 길목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옷깃을 놓아야 했던, 마음 아픈 순간들.그리고.…명인.아니, 이제는 ‘랑헌’이라는 낯선 이름.목간의 물소리와 증기.서로에게 떨리던 눈길이 닿았던 순간.선묵의 사악한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그 단단하고 따뜻했던 품.그 모든 것이… ‘벽운’이라는 이름에 실려, 그대로 가슴속을 맹렬하게 덮쳤다.‘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그 말은 명백한 경고였지만, 동시에… 절실한 바람이었다.벽운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자신의 은발과 파란 눈동자 속에 깃든 진실의 무게가 어떤 피바람을 가져올지.순간 그의 귓가에, 단성 장터에서 처음 들었던 이야기꾼의 말이 선명하게 살아났다.“역적 랑우(狼雨)! 저주받은 흰여우를 감싼 그 검은 늑대에겐, 결국 죽음뿐이었다지….”바로 그 말을 듣던 순간… 벽운은 아버지의 곁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또한 그 현랑족 청년에게도 다시는 닿지 않겠다고, 스스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맹세했었다.백호족.순혈.저주받은 피.그 피를 감싸는 자는, 필시 파멸을 맞이한다는 운명.‘역시 나는 그들 곁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야. 떠나길 잘했어. 그들을 다시는 만나선 안 돼….’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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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2화 : 연강(延江) (1)

어두운 표정의 남자 하나가 침상에 반쯤 기대어 앉은 채, 서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그때 침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곧 한 사람이 복면을 한 채 무릎을 꿇었다.“분명 은발에 벽안이었습니다! 순혈이 맞습니다, 단주님!”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그대로 내려놓았다.그의 두 눈동자는 벌써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래, 역시 맞았더냐… 분명히 눈을 뜬 걸 확인했고?복면인의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졌다.그 순간,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기묘하게 일그러진 미소가 피어올랐다.“…드디어 찾았다.”그는 느릿하게 침상 밖으로 나왔다.“순혈… 이후 님의 아들….”가늘고 곧은 콧날이 들썩이고, 얼굴에 기쁨과 슬픔이 기묘하게 엉켜 올라왔다.백호족의 비밀 결사 환월단(還月團)의 수장, 연강(延江).그는 놀랍게도, 이후의 정실인 연화(延樺)의 사촌 동생이었다.언뜻 보기에 그는 결이 곱고 길쭉한 맵시의 사내였다.중년의 나이임에도 하얗게 윤이 도는 피부, 가늘고 매끄러운 손끝.언제나 잘 다려진 도포를 입고, 머리카락 한 올조차 함부로 흘러내리게 두는 법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정한 외양 너머에는… 그 누구보다도 복잡한 계산과 차가운 욕망, 그리고 집요한 의지가 숨겨져 있었다.환월단은 연강의 명으로, 오래전부터 이후의 아들을 추적해 왔다.단성에 백호족의 잔당이 있다는 소문 역시, 그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흘려진 미끼였다.만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스스로 이 단성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란 계산이었다.약 반년 전.청운사와 월성 일대에서 ‘백호족 순혈’이 목격되었다는 놀라운 정보가 환월단에 들어왔다.저주받은 흰 여우의 공격을 받아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문도 있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단성에 나타난 수상한 ‘약초꾼’.그에 대한 소문 역시, 연강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내력을 알 수 없는 젊은 맹인이라더군요.”“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눈을 피한답니다.”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연강은 반신반의했다.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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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2화 : 연강(延江) (2)

그는 숨을 죽이며, 병풍 뒤로 난 좁은 틈을 따라 몸을 밀어 넣었다.그 너머에는 놀랍게도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그 중앙에 가림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안에서는 몇 개의 인영이 동그랗게 모여있었다.“…그러니 그분의 고귀한 피를 받은 아드님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벽운은 저도 모르게 마른 숨을 삼켰다.“그렇습니다. 이후 님의 아드님을 우리 환월단이 상국 놈들보다 먼저 찾아야 합니다.”“맞습니다! 그분이 계신다면, 월성을 되찾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요.”“은발과 벽안의 순혈! 달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적통… 그분이 계신다면 우리 백호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벽운은 옴짝달싹 못 한 채, 그 자리에 통나무처럼 굳어 있었다.이후 님의 아드님.그 말은 낯설면서도, 또 동시에 너무도 익숙하게 들렸다.…아버지 랑하가, 대체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며 숨기려 하였는지.그 모든 것이, ‘이후’, 그 이름 하나로 설명되고 있었다.그때, 방 안 깊숙한 곳에서 서늘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문제는 ‘이영’이다.”낮고 단정했지만, 그 속에 드러난 증오는 너무나도 선명했다.“그는 지금 극동 백호부의 족장이다. 하지만 이후 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이영, 그 간악한 자는 변함없이 그분을 원망하고 증오했다.”그림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그 아드님마저, 태어나시자마자 오직 적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이려 들었지요.”순간, 벽운의 심장이 ‘투툭’ 하고 거칠게 요동쳤다.“그러니, 그자가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우리 환월단이 이후 님의 아드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지키자! 지켜야만 한다!”그 말들 하나하나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가슴을 꿰뚫었다.태어난 순간부터 도망쳐야 했고, 또 숨겨져야 했던 삶.어쩌면 자신이, 이들이 말하는 그 ‘찾아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순간 전율이 흘렀다.벽운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깨어나고 있었다.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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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3화 : 이후(李候) (1)

천막은 햇살을 반쯤 걸러낸 채 바람에 흔들렸다.그 아래에 앉은 벽운은, 여느 때처럼 묵묵히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그때였다.서서히 드리워지는 그림자 하나.“고뿔에 좋은 약재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나지막한 음성.단정한 말투였지만, 벽운의 귀에는 마치 칼날처럼 꽂혔다.며칠 전, 객잔 깊숙한 방 너머에서 ‘이영’이라는 이름을 냉정하게 말하던 바로 그 목소리.벽운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지만, 그 시선의 방향은 정확히 그를 향했다.“증상이 어떤지에 따라 다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기침이 오래가고, 밤이면 열이 오릅니다. 가래는 없는데, 기운이 쉽게 빠지기도 하고….”벽운은 잠시 말없이 몇 가지 약초를 집었다.손끝은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내면은 조용히 뒤틀리고 있었다.‘그가, 나를 알아본 걸까? 아니면, 그저 또 다른 우연?’“이 근처 약초꾼 중에서 당신이 제일 낫다고들 하더군요.”마치 속을 읽는 듯한 그 말에, 벽운은 잠시 멈칫했다.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대답을 이었다.“…그러셨습니까.”“네. 직접 보니, 실제로도 뭔가 다르단 생각이 듭니다.”짧은 침묵.그러다, 상대는 천천히 말을 바꿨다.“그런데 당신… 내가 아는 사람을 참 많이 닮았네요….”순간, 벽운의 손끝이 멈췄다.그는 종이로 약초를 감싸던 손을 놓고,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제가 누구를 좀 닮아 보인다 해도, 아마 착각일 겁니다. 전쟁통에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랐고, 남은 친인척도 없습니다.”벽운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분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그 말에 사내는 나지막이 웃었다.“훗…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너무나도 많이 닮으셨어요, 그분을.”벽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약초를 꾸렸다.“하루에 세 번 우려내어 드시고, 차도가 없으시면 반드시 의원을 찾으셔야 합니다.”약초 꾸러미를 받아 드는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벽운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벽운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손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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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3화 : 이후(李候) (2)

벽운은 그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의 모든 말들은, 이미 벽운의 마음을 흔들어대고 있었다.“이후라는 그 백호족을, 직접 본 적이 있으시다는 말씀입니까?”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사내는 짧은 침묵 끝에,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네.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이셨죠. 저처럼 그분을 잊지 못한 이들이, 대동 땅에 아직 많이 남아 있지요.”벽운은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남자는 약초 꾸러미를 받아 들고 일어선 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흘리듯 말했다.“그런데 당신을 보면 역시… 그분이 떠오릅니다.”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벽운은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다.그 사내의 말은 비록 조용하고 나긋했지만, 손등에 머물던 향보다도 더 오래 벽운의 가슴속에 남았다.그날 밤.객잔의 등불은 여전히 꺼져 있었지만, 문은 잠그지 않은 채 열려 있었다.벽운은 복면으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감춘 채, 조용히 객잔의 문을 밀었다.삐걱거리는 미세한 마찰음.“오셨군요.”어둠 속, 사내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마치 정해져 있는 절차를 확인하듯, 담담한 음성이었다.객잔 안에는 등잔불만 하나 피워져 있었고, 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그 공간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고요하여, 상대의 숨소리 하나까지 손에 잡힐 듯 들렸다.벽운은 등잔 옆 어스름에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당신이 백호족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당신들의 은신처라는 것도요.”벽운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그리고…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왜 장터에서 내게 접근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여전히 흔들리는 목소리.벽운은 잠시 입술을 꼭 다물고 숨을 고르다, 결심한 듯 말했다.“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복면 사이로 보이는 벽운의 두 눈동자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정말로 제가, ‘이후’, 그 사람의 아들입니까?”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일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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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4화 : 이념(李念) (1)

바람이 거칠게 옷깃을 헤집었다.담벼락을 딛고, 지붕을 넘으며, 벽운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달리고 있었다.…‘이념’.낯익고도 또 낯선 이름그 이름 두 글자는 마치 깊은 어둠 속을 맴도는 메아리처럼, 벽운의 머릿속을 쉬지 않고 울려댔다.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렇게 휘청이며 겨우 객잔을 빠져나온 그는, 동편 계곡까지 단숨에 달렸다.그리고 물가에 도착하자마자, 땀에 젖은 두건을 그대로 벗어 던졌다.달빛이… 은백의 머리칼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그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사실, 사람들에게 이완이나 이후 같은 순혈 백호족의 외양(外樣)에 관한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그런데 왜, 심장이 이토록 아픈가.왜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들었을 때…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을까.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물속으로 미친 듯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차디찬 물살이 허리까지 금세 차올랐다.벽운은 웃옷까지 벗어 물 밖으로 내던지고, 그대로 몸을 완전히 담갔다.귓가에 다시 살아나는 연강의 목소리.‘그렇다면 이념(李念)… 이것이, 당신의 진짜 이름이로군요.’손가락이 물속에 흩어진 은발을 움켜쥐었다.“이것이… 정말 내 이름인가….”벽운은 다리를 펴고 물 위로 다시 천천히 몸을 세웠다.물결이 철썩이며, 수면에 비친 형체가 흔들렸다.하얗게 흩어진 머리카락.그 아래, 얼음처럼 싸늘하게 빛나는 벽안.그 형상이… 너무나도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저도 모르게 몸을 돌리려던 순간.휘익…!그만 발끝이 미끄러운 돌을 헛디뎌, 그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물속 깊숙이 빠져들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마치 그대로, 계곡의 검은 물속에 삼켜지고 싶다는 듯.그때.“…벽운!”날카롭게 찢기는 외침.차가운 물살을 헤치며 다가온 누군가의 억센 팔이, 거세게 그를 끌어올렸다.몸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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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4화 : 이념(李念) (2)

“정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벽운. 그저, 당신이 잘 지내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내가 더 다가가는 순간, 당신이 또 나를 밀어낼까 봐… 아니, 아예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거든요.”이념은 그런 랑헌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들이, 제가 누군지 말해줬습니다.”그는 시선을 돌린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순 없겠지만…, 정말 그것들이 사실이라면, 제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정말로 다 거짓이고 의미 없는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혼란스러웠습니다.”이념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지금까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는데… 그걸 알게 된 지금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 가치는 있는 인간인지….”랑헌은 조용히 이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그럼, 지금부터 찾아보면 되지 않습니까.”랑헌의 목소리는 의연하고 단단했다.“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서 왔는지… 또한 벽운, 당신의 이 이름이 진짜든 아니든…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을, 절대로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이념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조용히 떨렸다.불빛 아래 비친 푸른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혼자였고, 낯선 이가 곁에 있는 게 두려웠습니다. 내 아버지… 나를 키워주신 그 분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제 존재를 감추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 믿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이념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침내 그 깊고 푸른 눈을 들어 랑헌을 담담히 주시했다.“진정한 나 자신을 온전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랑헌은 부드럽게 웃으며, 가만히 손을 뻗어 이념의 뺨을 감쌌다.“벽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저도 함께 지켜보겠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당신에 대해 알아가고 싶습니다.”랑헌의 손끝은 그의 미소만큼 따뜻했다.“그러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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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움에 입 맞추다 – 15화 : 과거(過去) (1)

이념의 표정이 당황함으로 일그러졌다.“지금 무슨 말을…!”연강은 그의 말을 바로 잘랐다.“다들 우리 백호족이 모두 극동으로 갔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백호족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환월단 또한 수많은 잔류 중 하나일 뿐이죠. 여기저기 흩어진 채로, 적들에게 조롱이나 받는 것… 그것이, 안타깝게도 지금 백호족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고, 예전 백호부의 영광을 되찾을 방법은 오직 하나….”연강은 낡은 깃발 하나를 내어 보였다.빛바랜 붉은색 천 위에 희미한 은여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진정한 순혈, 적통의 피. 그 피를 이어받은 자가 돌아올 때, 월성은 다시 깨어난다…. 이후 님의 혈육인 당신이야말로, 우리 백호족의 진정한 희망입니다.”“…그러나 그 존재가, 반드시 저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이념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저는 정말,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연강이 이념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그 눈빛은 마치 그 안의 오래된 상처를 들여다보는 듯 깊었다.“당신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념. 그러나 그 머리카락과 두 눈동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증거입니다.”이념은 혼란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대체… 제가 당신들 환월단을 데리고 뭘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연강은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일단 우리에게로 오세요. 더 이상 도망치지 마시고요. 당신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이젠 모두 되찾아야 합니다.”이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백호족은 이미 극동 백호부가 있지 않습니까?”연강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극동 백호부를 이끄는 이영은 적통(嫡統)이 아닙니다. 그는 이후 님의 이복형이고, 또한 서자(庶子)입니다. 그는 본시 질투심이 많고 무자비한 자였습니다. 힘겹게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찾는다면 아마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이념의 눈동자가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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