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 Chapter 111 - Chapter 120

143 Chapters

#110. [이번 생애 잠자리는 처음이라]

지금 경신은 태하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중이다. 하지만 태하는 그런 경신의 복잡한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태하 씨······ 아까 한 말 중에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어요.”태하는 경신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따뜻한 시선을 건넸다. 설마 이 남자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꽁꽁 숨겨둔 그 불안마저 이미 읽고 있었던 걸까.“내가 떠나든, 네가 떠나든.”그동안 경신은 상처받기 두려워 다가오지 말아라, 좋아하지 말아라 하며 태하를 밀어내기에만 급급했다. 그 모진 거부에도 태하는 늘 괜찮다며, 기다리겠다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며 언제나 직진으로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별을 입에 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아가들아, 엄마가 그동안 태하 씨를 밀어냈는데······ 이제는 그가 정말로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졌어.’태하는 경신의 불안을 달래듯 이마와 눈등, 그리고 입술 위에 가볍게 깃털 같은 입맞춤을 내리며 말을 아꼈다.“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태하 씨, 정말 고단수네요.”“한국말 어려워.”“치······, 다 알면서.”“너도 정답을 알고 있잖아.”“정답이라······.”태하의 나지막한 음성에 경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기범에게 소리 높여 말했던 ‘인간의 삶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명제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임을 어렴풋이 깨달은 까닭이었다.태하는 지금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 있었다. 자신 역시 부모를 잃고 모진 죽음의 고비를 넘긴 기억이 존재했다. 멀쩡하게 웃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잔인한 인생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경신이 하도 깃털처럼 잡히지 않게 구는 탓에, 태하 역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녀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태하 씨, 오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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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임신부터 시작하는 로맨스는 처음이라]

지금 이 순간, 경신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태하를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아기 아빠와 나누는 온전한 교감이 어떤 감정인지 알아야 비로소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하루의 진심일지라도 평생을 버텨낼 의미가 되리라 믿었다.정적을 깨고 침실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끈적하게 탐색하던 애무가 끝나고, 마침내 날것의 본능이 맞물리는 순간이었다.“좀 아플 거야.”“······네.”낮게 가라앉은 경고와 함께, 태하의 뜨거운 열기가 경신의 안을 빽빽하게 파고들었다.“으윽, 하아······!”옅은 신음이 흩어지는 동시에 경신의 몸에서도 달뜬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생경하면서도 아릿한 통증 뒤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기묘한 쾌감이 머릿속을 하얗게 흔들었다. 이성이 마비되고, 사랑이 거친 본능으로 변해 마침내 온전한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대화가 끊긴 자리에는 서로의 체온만이 뜨겁게 맴돌았고, 처음 마주하는 생소한 감각들이 살갗 아래에서 꽃봉오리처럼 흐드러지게 터져 나왔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열감이 절정에 이르러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하의 눈동자만큼은 다정하고 따스한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단단한 시선이 경신을 더 애타게 만들었다.태하의 거친 숨결을 따라 경신의 입에서도 붉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묵직하게 밀어붙일 때마다 경신의 등이 활처럼 휘어지며 애달픈 탄성이 침대 시트 위로 흩어졌다. 임산부인 그녀를 배려해 속도를 늦추면서도,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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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두 번째 첫날밤이 재앙이라니]

큰일이었다. 아니, 재앙에 가까웠다.경신은 간밤에 태하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에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지 않는 상태였고, 심지어 차림새는 얇은 로브 딱 하나뿐이었다.반면 거실에 당당히 버티고 선 태하의 부모님은 지금의 경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데다, 범접할 수 없이 우아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아, 태하 씨! 눈치라도 좀 주지!’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만나기 부담스러운 존재들이 하필 이런 몰골일 때 나타나다니. 경신은 이 아찔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정중하게 눈인사를 건넨 뒤, 얼른 방으로 피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경신은 들이치는 마른한숨을 삼키며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태하의 부모님이 기다리는 거실 중심으로 한 걸음씩 향하는데, 콩닥거리는 긴장감 속에서 문득 배 안쪽이 작게 꿈틀거렸다.‘······태동?’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뱃속의 아가들까지 우리는 셋이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하늘이 번쩍 트이듯 아득했던 머리가 산뜻하게 개었다.‘난 죄를 지은 게 아니야!’주눅이 들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신은 이제 당당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엄마가 될 사람이 첫 만남부터 나약하게 기가 죽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신데렐라처럼 가련하게 동정받는 역할 따위는 질색이었다.태하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경신은 비로소 고개를 당당히 쳐들었다. 책에서 임신 15주에서 18주 사이에 첫 태동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번 주말이면 정확히 15주였다. 아이가 보내온 작은 신호가 거짓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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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짐승남과의 은밀한 추억은 안비밀]

경신이 제일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것은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태하는 차를 준비해 왔고, 그의 부모님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경신의 연주를 기다렸다. 태하는 오늘따라 유독 아무 말이 없었다.피아노 앞에 앉은 경신은 숨을 고르며 손끝을 건반 위에 올렸다. 가족을 잃은 위로를 건네야 하나, 아니면 자신과 태하를 긍정적으로 봐 달라는 호기로움을 표현해야 하나. 많은 고민이 경신에게 몰려왔다. 하지만 발로 콩닥콩닥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아가들을 생각하자, 단 하나의 감정이 선명해졌다.경신은 피아노를 치기 전 몸을 돌려 태하 부모님을 향해 바르게 섰다.“Gracias por cuidar a Thiago con amor(사랑으로 티아고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경신은 태하의 부모님께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태하의 부모님은 의아한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경신을 응시했다. 진심으로 경신은 태하라는 사람을 가슴으로 낳아 품어준 그의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로 향하던 소년 태하는 얼마나 마음이 쓸쓸했을까. 하지만 외국에서 새로운 부모를 만나 당당히 재력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너무나 근사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태하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부모님 덕분이었다.피아노 의자에 앉아 경신은 천천히 손을 건반 위에 두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연주하기 시작했다.장송곡처럼 무겁지도, 세레나데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연주였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가장 어두운 순간까지 함께해 준 이들을 위한 감사의 마음이었다.화려한 기교도 없었고 감정을 긁는 코드 진행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편안하게 사랑받은 클래식 고전의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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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4. [팜므파탈, 진도는 빛의 속도로]

수업이 끝나고도 제아는 정신이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간 경신에게 다가와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존경스러워.”이번에는 제아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은 어느 부분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남자를 단숨에 함락시키는 거야?” “하, 함락?” “키스 마크를 보니 남자가 너한테 애정을 듬뿍 쏟아부은 게 딱 티 나는데.” “아우, 부끄러워!”경신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제아를 올려다보았다.“뭘 부끄러워해? 다 큰 성인인데 키스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수 있지.” “······제아, 너 은근히 어른이네.”장난스러운 제아의 한마디 한마디가 경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묘한 위로로 와닿았다.자신이 오늘 아침 태하의 부모님께 건넸던 그 피아노 연주도 조금은 그분들께 위로가 되었을까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내가 태어나서 본 잘난 남자들은 왜 전부 네 옆에만 있는 걸까? 부러워 죽겠어.”누가 누구를 부러워한다는 건지 원. 하지만 지금 자신이 매일 기적 같은 날들을 쓰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래. 주변에 멋진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가끔 감당이 안 돼.” “그 대단한 정기범만 해도 소꿉친구라며? 저번에 실물 보고 감탄했잖아.”기범처럼 완벽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S대 출신에 거대 로펌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배경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고, 워낙 성품이 바른 녀석이라 미담이 넘쳐나는 것도 당연했다.“게다가 저번에 온 JJ 소속사 서정우 사장님은 또 어떻고! 완전 대박이잖아. 하늘에서 남자를 너에게 내려 줬나 봐.”과거 경신은 서정우를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늘 일에 매진하는 워커홀릭에 회사 경영 능력 또한 탁월했으니까. 두 손을 꼭 모은 제아는 이제 궁극의 남자를 언급했다.“그리고 저번에 너 데리러 왔던 그분이 사실 최고였어.”역시 태하였다.“그래, 태하 씨는······ 최고의 남자야.”자신의 온 뇌를 지배하는 남자이자, 이번 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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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5. [건물주님의 정체는 무엇?]

태하는 루이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경신은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잔잔한 감흥은 여전히 거실 안에 맴돌고 있었다.루이스가 마음에 둔 며느릿감이 스페인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태하는 경신을 그녀의 부모님에게 소개시켜드리고 싶었다.“Ella era una niña que vino a África contigo para hacer trabajo voluntario(그 아이가 자원봉사를 하려고 너와 함께 아프리카에 왔던 그 소녀였다니)······.”루이스의 음성이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태하 역시 카를로스와 마찬가지로 경신의 부모님을 따라 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갔다가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아프리카까지 부모를 따라와 봉사하던 꼬마 경신을, 태하의 부모님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태하는 이번에도 말문을 닫은 채 파블로가 펼쳐 놓은 서류만 들여다보았다. 오늘 태하가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을 때, 파블로와 루이스는 무척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들이 양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의 양만 보아도 아들의 초대가 얼마나 기뻤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태하와 카를로스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핏줄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입양한 순간부터 언제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강조했고, 이를 몸소 실천해 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재산까지 일찌감치 상속해 주었으니, 태하로서는 대단히 운 좋게 새 인생을 선물 받은 셈이었다. 카를로스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에게 이제 태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그래서일까, 태하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부모님과 한 공간에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집은 온기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었다.잠시 거실에 고요한 적요가 찾아왔고, 태하는 자리에서 바르게 서서 파블로와 루이스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Gracias por cuidarme con amor(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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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6. [내 인생의 1등 로또, 바로 너]

그를 좋아해서 보고 싶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는데, 무서워하다니.‘뭐지?’악몽이라면 더 괴롭기 전에 얼른 깨워야 했다. 화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경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잠이 아니라, 방금 전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는 그 남자가 아니겠는가. 화야는 경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얼른 일어나 보세요. 건물주님 오셨대요.” “응?”이건 뭐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이었다. 번쩍 눈을 뜨더니, 아직 잠이 덜 깬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화야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천천히 물러나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경신에게 짐짓 눈을 흘겼다.“그분 한정으로 눈이 이렇게 번쩍 열리다니.” “태하 씨가 왜?” “간식 들고 기숙사 앞에 오셨대요. 보살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규련 오빠한테 대신 연락이 왔더라고요.” “진짜?”경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슬리퍼를 꿰어 차고는 곧장 문으로 향하려 했다. 화야는 엉망이 된 경신의 몰골을 보고 기겁하며 앞을 막아섰다.“보살님, 놉! 최소한 세수하고 양치질은 하고 가세요!”역시 남자친구 있는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네 싶어, 경신은 아차 하며 타월을 챙겨 들고 욕실로 다급히 향했다.“역시 화야, 넌 지혜의 여신이야!” “네, 네. 얼른 씻기나 하세요.”화야는 정말이지 경신을 안 깨웠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욕실에서 씻는 동안, 화야는 경신의 옷장 속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미리 골라 침대 위에 꺼내 두었다.경신은 빛의 속도로 양치질을 끝내고 머리까지 감은 뒤, 정갈하게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건물을 나섰다. *** 기숙사 문을 열고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기분 좋게 경신의 뺨을 스쳤다. 샤워를 마친 후 새로 갈아입은 하얀 티셔츠가 살결에 닿는 촉감이 무척 상쾌했다. 기숙사 앞 익숙한 검은색 SUV 앞에 서 있는 태하의 모습이 보이자 주변의 모든 풍경이 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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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7. [그의 취향이 쿨한 이별인가?]

태하는 확실히 경신에게 있어 이미 당첨이 보장된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과분한 행운 앞에 서면 왠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고, 감히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하는 건 왜일까.긴장이 풀려 발끝에 힘이 빠지려는 순간이었다.“잠깐만.” “네?”태하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로움 대신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가죽 구두 밑에서 모래알이 파스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경신이 고개를 들자, 그의 깊은 눈동자에 어린 진지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잠시 뒤에, 네가 실망할지도 몰라.”갑자기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실망이라니. 혹시 우리의 관계를 딱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으려는 걸까. 여태껏 태하에게서 이토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본 적이 없었기에 경신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언제나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처럼 다정했던 남자가 왜 갑자기 얼어붙은 걸까.‘······밤을 함께 보냈어도 미래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걸지도 몰라.’제대로 자신과 선을 그으려고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건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달콤한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히는 밀도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경신은 전혀 웃음기가 없는 태하를 설핏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태하는 에스코트하듯 경신을 조수석에 태운 뒤, 가만히 안전벨트를 매어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지듯 출발한 차는 어둠이 짙게 깔린 교정을 가로질렀다. *** 차창 밖은 이미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곳곳에 가로등 불빛이 켜져 있었다. 똑같은 나무, 똑같은 건물, 늘 같은 시간에 마주했던 것들이 오늘따라 유독 특별하게 여겨졌다. 태하의 차는 기숙사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학부생들이 머무는 관악사 건물을 지나 차가 멈춰 선 곳은 조용한 운동장 앞 주차장이었다.차를 세운 태하가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운동장이네요?” “사람이 없길래.”조용한 곳을 찾으려 교정을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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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8. [아방가르드한 그대]

밤하늘은 아득히 높았고, 그 위로 수놓아진 별빛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그 찬란한 어둠을 배경 삼아, 태하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그야말로 천상의 연주였다. 지독할 정도로 아름답고 달콤한,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열렬한 사랑 고백과도 같은 음악이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그러나 음악이 감미로우면 감미로울수록, 경신의 마음은 역설적으로 더욱 아려왔다.‘실망이라니.’그가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 뱉었던 그 두 글자가 잔인한 웅웅거림이 되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직진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 연주는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사방이 고요한 S대 교정의 한 편.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이 완벽한 밤에 경신의 귀는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고, 아랫배 속의 아가들도 아빠의 연주를 알아들었는지 콩콩 발을 차대며 행복해하고 있었다.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토록 절정으로 아름다운 노래인데, 왜 가슴 한구석이 찌르듯 아파오는 건지 경신은 알 수가 없었다. 눈물겹도록 좋은 노래가 도리어 슬픈 예감처럼 다가와 그녀의 목을 메이게 만들었다.이윽고, 가슴을 울리던 마지막 기타 선율이 밤바람 속으로 잔잔히 흩어지며 연주가 끝났다.경신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태하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기타 연주를 들은 것은 진심으로 처음이었다.“······고마워요, 태하 씨. 이렇게 멋진 연주는 정말 처음 들어봐요.”진심 어린 감사를 전한 경신이 웅크리고 있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여전히 그 불길한 의문만큼은 떨쳐낼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데······ 아까 왜 제가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하신 거예요?”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면서도, 결국에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스페인의 그 세뇨리타에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뜻인 걸까. 애써 담담한 척 굴었지만 속마음은 이미 타들어 가고 있던 그때였다.태하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일생일대의 중대한 거사를 치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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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19. [그냥 내게 와, 제발]

4월 말의 토요일 밤, 그리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 교정.“와······ 태하 씨, 진짜 천재 뮤지션 맞네요. 소름 돋을 만큼 감동적이었어요.”경신은 행복한 보답을 태하로부터 받게 되었다.태하는 언제 진지한 연주를 했냐는 듯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와 기타를 가방에 정리했다. 그의 손이 자유로워지자, 경신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태하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이 곱고 귀티 나는 남자가 어쩐지 손은 왜 이렇게 거칠까 했더니.’손가락 끝을 살짝 쥐어보니 끝부분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만큼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물집이 터지고, 살점이 벗겨지고, 인이 박이는 통증을 견뎌냈을까. 그의 뜨거운 열정과 피나는 노력이 손끝에 고스란히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경신은 그 거친 손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태하 씨, 정말 대단해요. 앞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를 꼽으라면, 태하 씨를 무조건 세 손가락 안에 넣을 거예요.”그 말에 태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세 손가락?”숫자를 묘하게 의식하는 눈치였다. “하하! 쇼팽이랑 바흐, 그리고 태하 씨가 공동 1등!”그제야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태하가 만족스러운 듯 피식 웃었다.그는 조금 민망하고 멋쩍은지 시선을 돌리며 포크로 과일을 콕 집어 먹었다. 이 전위 예술을 표방한 도시락은 보기엔 완전히 으깨져 볼품없고 먹기에도 불편했지만, 맛 하나는 기가 막혔다. 최고급 식재료를 이토록 파괴적인 비주얼로 창조해 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눈을 감고 먹으면 그만이었다.“미안, 비주얼이 이래서.” “상관없어요.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똥이······.” “뭐?” “아니에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차마 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더구나 음식 앞에서 그런 적나라한 단어를 뱉을 수는 없었다. 흐지부지 말끝을 흐린 게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경신은 과일을 숟가락으로 크게 떠먹었다.달콤한 과육을 씹으며 경신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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