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143 챕터

#51. [관자놀이가 젖어 드는 긴장의 온도]

사범대 강의동 복도. 낡은 자판기가 덜커덕거리는 소란을 피우며 캔 두 개를 뱉어냈다. 경신은 싱그러운 청포도 주스를, 기범은 서늘한 블랙커피를 쥔 채 복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기범아, 잘 마실게.”“이게 뭐라고. 다음에 제대로 된 밥 사줄게.”내 가방을 대신 들어준 것도 모자라 음료수까지 먼저 챙기는 기범의 배려가 못내 간지러웠다. 돈을 낸 건 기범인데도, 녀석은 마치 귀한 유리그릇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눈길로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신아, 너 정말 크게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다.”“응, 걱정해줘서 고마워.”현생의 고단함 속에서 마주한 소중한 친구는 그 존재만으로도 벅찬 위안이었다. 지난 생애, 그를 떠나보내고 얼마나 많은 밤을 후회로 지새웠던가. 고백이라도 해볼걸. 아픈 곳은 없는지 한 번 더 물어볼걸. 소속사에서 무리하게 일감을 몰아줄 때 앞뒤 재지 않고 말려볼걸. 후회는 늘 늦게 찾아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곤 했다.“···몸은 좀 어때? 어디 이상 있는 건 아니고? 소문에는 꽤 심각하다고 하던데.”“하하, 소문? 국어과 음침녀가 크게 다쳐서 입원했다더라고 그렇게 났나? 보다시피 나 아주 멀쩡해.”“뭐? 하하! 신아, 음침녀라니. 도도녀였지, 넌.”기범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짙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낯설고 신비한 생명체를 탐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기범이 원래 이렇게 다정했었나? 전생의 그는 어린 시절 이후 한동안 접점이 없다가, 소속사에서 곡을 주고받으며 비로소 다시 가까워진 사이였다. 지금 이 묘한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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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소리 없이 휘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기계 너머로 전해지는 음성일 뿐인데도,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 생생한 질감에 경신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아가들아, 도와줘. 엄마가 사고 쳐놓고 말 한마디 못 하고 있어. 세상에 이런 바보짓이 또 있을까···.’심장 근처에 머무는 아가들의 기운 덕분일까. 수 초간의 고요 끝에 간신히 엉켰던 호흡이 정돈되었다. 경신은 떨리는 입술을 떼어 겨우 첫 마디를 뱉었다.“고··· 고마워서요.”- 키스가?“읏! 키스 아, 아, 아니요! 샤, 샤인머스캣이요!”- 훗.낮게 깔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며 타고 내려왔다. 심장은 이미 제 속도를 잊은 채 널뛰고 있었다. 태하라는 남자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듯한 이 농밀한 장난기는 기분 탓일까.- Coma mucho(많이 먹어).다정한 명령은 늘 위험했다. 사람을 자꾸만 착각하게 만들고, 임산부의 심장에 해로울 만큼 설레게 하니까. 경신은 다시 한번 심호흡하며 화제를 돌렸다.“아, 고맙습니다. 저기··· 과외는 그럼 언제부터 갈까요?”- 당장.“저기요, 자꾸 농담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응답해 주세요.”수화기 너머로 태하가 설핏 웃는 소리가 들리자, 경신의 온몸은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다. 그가 즐거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고조되었다.- viernes(금요일)에 데리러 갈게.“아, 네. 그럼 그때 봐요. 그리고 또···.”- 키스도 또?&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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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반칙 같은 그대]

마지막 수업이 시작될 무렵, 태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강의가 끝날 시각에 맞춰 사범대 강의동 앞으로 마중을 나오겠다는 내용이었다.이미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터였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심장 박동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가 의식되는 걸까. 자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싱숭생숭하게 들썩이는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아가들아, 오늘부터 과외 시작이야. 월 600만 원이라니, 엄마가 정말 열심히 벌어볼게.’그야말로 꿈 같은 ‘꿀알바’였지만, 그 문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일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헬 게이트일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경신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다시 한번 가족회의를 소집했다.‘엄마가 행동은 진중하게 해야 할 것 같아. 조만간··· 몸도 마음도 아주 무거운 여자가 될 테니까. 돈 걱정은 절대 안 하게 해줄게. 염려 마.’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음에도 왜 이리 고민이 깊은 걸까. 이제 갓 2cm를 넘긴 아가들이 얼마나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벌써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을 짐작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화야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때, 강의실을 나오던 지제아가 경신을 발견하고는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어머, 경신아. 오늘 되게 바빠 보이네?”“제아야, 애들은 가라. 나 지금 알바하러 가야 해서 마음이 아주 복잡하거든.”“누가 보면 연애하러 가는 사람처럼 설레 보이는데?”아, 이런. 제아는 눈치가 백단인 걸까, 아니면 촉이 남다른 걸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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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욕망의 선을 넘는 사람들]

태하는 당혹감에 휩싸인 경신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반면 경신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한 상태였다.‘성인 남녀가 한 집에 단둘이 있겠다니!’통상 과외는 집에서 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미리 장소를 지정하지 못한 제 불찰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을 잃은 경신은 건물주님의 건물로 향하게 되는 이 기묘한 규칙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숙연하게 두 손을 배에 얹었다.‘아가들아, 엄마는 지금 일하러 가는 거야. 절대 이상한 상상 하면 안 돼.’자기 혼자 태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음을 반성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는 강남대로를 지나 테헤란로에 접어들었다. 금요일 오후의 공기는 완연한 봄을 품고 있었고, 경신은 자신의 선택이 후회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태하처럼 어린 나이에 도윤이나 현수 같은 이들이 곡을 받으려 줄을 서는 남자라면,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우량 고객님께 제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면 될 터였다. 묘한 딴생각을 품은 것은 제 쪽이었기에, 경신은 괜스레 배를 문질러댔다.“표정이 왜 그래?”태하의 질문에 경신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공사 구분 확실히 해서 잘 지도해 드릴게요. 태하 씨가 원하는 방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반영할 거고요.”“원하는 방향?.”태하의 눈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그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분위기를 풍기자 경신은 서둘러 정정에 나섰다.“저, 저기! 과외 이야기예요. 교재요!”“다른 짓은 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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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우리들의 시작을 환영해]

강남 테헤란로,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부이자 더블 역세권의 요지에 우뚝 솟은 신축 빌딩. 유리와 철강으로 뒤덮인 그 차가운 건축물들 중에서도 30층 맨 꼭대기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는 선택받은 자들만이 허락받은 성역 같았다.엘리베이터가 고요하게 열리고 전망 좋은 그의 거실에 발을 내딛는 순간, 경신은 무릎에 힘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이곳이 태하라는 남자가 가진 또 다른 안식처라니. 영화 속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신은 절로 혀를 내둘렀다. 전생과 전전생, 그리고 그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통틀어도 이토록 압도적인 공간은 본 적이 없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바닥을 채운 대리석은 마치 거울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와, 태하 씨. 제가 그동안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봤네요. 진정한 부자 맞으시군요. 저, 태어나서 이런 곳은 정말 처음 와봐요.”경신이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린 채 거실을 둘러보자, 태하가 그녀를 돌아보며 낮게 읊조렸다.“만우절 아닌데.”“네? 아,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갈수록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반응 사이에서 엇박자가 나는 일이 잦아졌다. 태하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잊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발끝을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그사이 태하는 익숙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가 샌드위치와 과일주스를 꺼내 쟁반에 정갈하게 차려내는 모습조차 마치 한 편의 광고 같았다. 소파 앞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은 최고급 호텔의 룸서비스처럼 완벽한 자태를 뽐냈다.경신은 조심스레 푹신한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방에서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서적들을 꺼내 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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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선율 끝에 닿은 금기]

태하는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는 경신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 공간에 그녀가 다시 존재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라, 자꾸만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이곳은 그에게 단순한 집 이상의 의미였다. 1월 28일, 그 뜨거웠던 밤을 함께 보낸 뒤 경신은 새벽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한 달 내내 그녀의 자취를 쫓아 온 서울을 뒤졌지만,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녀는 꼭꼭 숨어 있었다. 그 시린 겨울을 홀로 보내며 태하는 다짐하고 또 절망했었다. 그녀가 다시 이 거실에 서서 웃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몸은 정직했다. 경신이 생전 가장 좋아하던 이탈리아산 원두의 향기에 취해 무방비하게 서 있는 그녀를 보자, 태하의 심장 한구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조금 전 장난처럼 건넨 키스 제안에 왜 그리 진지하게 반응했던 걸까. 지금 저렇게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달콤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야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몸짓이라는 걸, 그녀는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향기 좋아?”“천상의 향기네요.”대답하는 알맹이는 예전과 똑같았다. 과거에도 그녀는 이 원두를 ‘천상의 향기’라 칭송하며 아이처럼 좋아했었다. 태하는 짐짓 덤덤한 척 머그잔 두 개를 꺼내 놓았다. 갓 내려진 커피의 강렬한 탄내와 치명적인 아로마가 거실을 가득 채우자 태하 역시 목이 탔다.하지만 커피를 따르려던 찰나, 경신이 미안한 듯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아, 태하 씨. 저는··· 사양할게요. 향은 너무 좋지만, 지금은 꾹 참아야 해서요.”태하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다. 변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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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키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던데]

태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제 감정을 전부 담아 경신에게 뜨겁게 퍼부었다.그녀의 감각을 하나하나 깨우고,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떠났던 야속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배려 따윈 없는 이기적인 키스를 이어갔다. 말캉한 입술의 촉감, 뜨거운 입속의 열기, 그리고 억눌린 듯 새어 나오는 그녀의 희미한 신음까지. 그 모든 것이 태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 순간이 아까워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집어삼켜 냈다.어느새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거실을 휘감던 선율이 사라진 자리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그 순간.경신의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랗게 열리며 태하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서울의 하늘은 비명을 지르듯 붉은 노을이 넘실거렸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찬란한 빛에 물든 도시의 풍경은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신에게는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내가 지금 뭘 한 거지?’분명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선율 속에만 빠져 있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난데없이 제 온몸을 휘감는 대단한 ‘어른의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니.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 남자였다. 태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당당한 시선으로 경신을 내려다보며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건넸다.“신, 환영해”잠깐, 뭘 환영한다는 것인지. 오늘부터 하기로 한 과외? 창밖의 노을? 아니면 우리의 관계? 그것도 아니라면, 방금 나눈 이 뜨거운 키스?태하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붉게 물든 찬란한 하늘과 더불어, 입술이 발갛게 부은 채 눈이 휘둥그레진 경신의 볼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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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달콤한 반칙의 순간]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찬란했던 노을은 집어삼킬 듯 밀려온 어둠에 잠식되어 사라졌다.갑작스러운 입맞춤으로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던 거실은, 태하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으며 다시금 부드러운 온기를 되찾았다. 한국어 교재를 펼쳐놓고 몇 가지 문법을 설명하거나 과제를 내어주기도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대화는 공부보다 서로의 공백을 메우는 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졌다.경신의 시선은 줄곧 창밖을 향해 있었다. 밤의 장막이 내린 서울의 풍경을 담은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훨씬 깊고 고요해져 있었다.“아름다운 것은 늘 짧네요.”“그러게.”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은 대개 유한하고 찰나의 순간에만 머문다. 좋은 시절 역시 그리 길지 않은 법이다. 서쪽 하늘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오렌지빛 잔영은 어느새 검푸른 어둠 속으로 완전히 빛을 잃었다.“매직 아워가 끝났어요.”“재미있는 표현이네.”“집이 워낙 대단해서 그런지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전혀 다르게 느껴져요.”태하의 집은 병적으로 결벽한 주인이 머무는 궁전 같았다. 그가 직접 관리하는 것인지, 관리인의 능력이 탁월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집 안은 당장 영화나 광고를 촬영해도 손색없을 만큼 완벽한 심미성을 자랑했다.“태하 씨는 참 좋겠어요. 매일 이런 예쁜 것들만 곁에 두잖아요. 덕분에 호강했네요.”태하는 대답 대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가 왜 저토록 허무한 눈빛을 하는 걸까. 경신은 그 침묵의 무게가 궁금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태하 씨도 분명 애쓴 부분이 있었기에 이런 경제적인 보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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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런 짓, 저런 짓이 시작되다]

과외가 끝난 뒤 금요일 한밤중.태하의 차는 이미 남부순환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째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가깝게만 느껴지는지. 깊은 밤의 도심은 낮의 소란을 지워낸 듯 한산했다.태하는 경신과의 이별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운 마음에 가속페달에서 힘을 빼보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어서 편히 쉬게 해줘야 한다는 배려가 사심을 앞질렀다. 사실 아까부터 그녀와 와인을 한잔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자고 가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차오르도록 밀어 올렸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랐을 그녀가 다시 거리를 둘까 봐, 태하는 짐승 같은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태하 씨, 매번 이렇게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돼요. 버스나 지하철 타면 금방이거든요. 바쁘신 분이 마중까지 나오시면 제가 민망해서요.”“난 안 바빠.”거짓말. 경신은 그가 건물을 가진 자산가이자 얼마나 치밀하게 살아온 사람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건물주님, 겸손도 정도껏 하셔야죠.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사셨겠어요? 저도 한 달 동안은 정말 열심히 일할게요.”“한 달?”“일단 과외 한 달은 해봐야죠. 원칙은 선불이지만··· 혹시 맘에 안 든다고 잘리면 환불해 드리기 번거로우니까, 특별히 후불로 할게요.”“한국말 어려워.”“하하, 돈 나중에 주셔도 된다고요.”선심 쓰듯 말하는 그녀는 머릿속으로 주당 150만 원이라는 거금을 4주로 나눌지, 달로 계산할지 분주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태하는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알맹이는 그대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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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수컷들의 영역 표시]

소속사의 빈 연습실. 태하는 기범과 마주 서 있었다. 단둘뿐인 이 텅 빈 공간은 차가운 적막이 흘러야 마땅했으나, 바로 옆방에서 방음벽을 뚫고 터져 나오는 열기 덕분에 분위기는 오히려 터질 듯 꽉 찬 느낌을 주었다.벽 너머에서는 에스트렐라의 신곡 음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고, 국내 최고의 안무가가 초빙되어 지옥 같은 레슨이 시작된 참이었다. 멤버들이 어찌나 열을 올리며 발을 굴리는지, 태하와 기범이 서 있는 곳까지 지면의 진동이 상당했다. 혈기 왕성한 건장한 사내들이 날뛰니 견고한 나무 바닥이 남아날 리 없었다.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오히려 태하에게 반가운 요소였다. 만약 이곳이 죽은 듯 적막했다면, 기범을 향한 그의 신경은 날카롭다 못해 베일 듯 예민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을 메운 거울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는 찰나를 수만 개의 각도로 반사해 냈다. 이 소속사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할 수 있는 태하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현역 아이돌을 해도 무방할 만큼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군림하는 위치에만 서 있었던 태하에게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압적인 아우라가 흘러나왔다.기범 역시 바른 정자세로 서서 태하를 마주했다. 하지만 기가 죽었다거나 태하의 눈치를 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범의 표정에는 전투적인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눈은 명백한 수컷의 것이었다.“태하 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해.”그동안 태하는 기범과 단독으로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태하는 녹음할 때만 잠시 나타날 뿐, 곡을 준 가수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며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그저 태하가 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고, 모든 소통은 마호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오늘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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