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43 챕터

#61. [비밀을 공유하는 주파수]

경신은 휴폰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태하’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것을 느꼈다. 귓가를 울리는 고동 소리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야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이고, 이제 슬슬 씻어야겠네요.”화야는 역시 지혜의 여신다웠다. 눈치껏 편하게 통화하라며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대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경신은 긴장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온 신경을 왼쪽 귀에 집중한 채, ‘여보세요’라며 운을 떼려던 찰나였다.-신, 자고 있었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하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중저음이었다. 그 목소리가 닿는 순간, 불과 몇 시간 전에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간 감각이 묘하게 비틀렸다. 마치 며칠은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지독하게 궁금해졌다.경신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태하 씨 덕분에 화야랑 샌드위치 먹으면서 놀고 있었어요. 아, 화야는 지금 씻으러 가서 저 혼자예요.”묻지도 않은 말까지 주절주절 내뱉는 스스로가 한심해 경신은 제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자중하자, 자중해.’ 속으로 되뇌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박혔다.-맛은?“당근이 없어서 정말 좋았어요.”풉, 하고 태하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그의 고운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경신의 입꼬리도 씰룩거리며 제멋대로 호선을 그렸다. 조금 전 먹던 샌드위치를 바라보자 새삼 그에 대한 고마움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어디서 이토록 자신의 취향을 꿰뚫는 것을 구해왔을까. 그는 여실히 자상한 남자였다.“이 집 정말 맛집이네요.”-또 사줄게.무심한 듯 세심한 그의 대답에 경신은 다시금 화야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대로 그에게 휩쓸려 착각 속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경계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확실히 말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서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태하 씨, 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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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내 몸을 빌려 주고 싶은데]

경신은 이번 주 내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중간고사가 채 2주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소문난 ‘열공파’였다고 하지만, 지금의 경신은 예전 같지 않은 컨디션 탓에 글자 하나 눈에 담는 것조차 버거웠다.봄은 만개했는데, 경신의 계절은 혹독했다. 갑자기 심해진 입덧 탓에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들었다. 기운은 뚝 떨어지고 잠은 쏟아지는, 임산부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봄날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 침대로 다이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경신은 꾸역꾸역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가올 주말, 태하와 마주 앉아 과외를 하려면 양심상 미리 머릿속을 채워둬야 했으니까.S대 중앙도서관 관정관은 다행히 탁 트인 시야와 편안한 소파가 있어 임산부가 머물기에 그나마 쾌적한 공간이었다. 한 장, 두 장.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책장을 넘기던 그때였다.드르륵.맞은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사람의 이동이 잦은 곳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으나,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든 경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 어··· 태하 씨?”“반가워.”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경신은 연신 눈을 깜빡였다. 오늘 태하는 평소 즐겨 입던 서늘한 검정 셔츠를 벗어던지고, 청량한 데님 팬츠에 화이트 셔츠, 그리고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여대생의 로망인 ‘캠퍼스 남친 룩’의 정석이었다.“우와···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일반인은 출입 금지인데.”“난 가능해.”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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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자꾸 내게 다가오지 마세요]

태하는 자신의 카디건을 벗어 경신의 가냘픈 상체 위로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그러자 병원에서 잠들 때 익숙한 자세가 연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경신은 태하의 온기가 남은 옷자락 안에서 귀엽게 동그란 모양으로 몸을 말아갔다.잠결에 웅얼거리는 것을 보니, 그녀는 지금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지독한 입덧 때문에 며칠을 고생하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포만감이 돌아 그런 것이겠지.“귀엽긴. 어서 자.”“···잠깐만, 누워서 좀 쉴게요.”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투명한 햇살이 그녀의 하얗고 고운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 햇살 덕분에 경신의 피부는 마치 보석 가루가 박힌 듯 눈부시게 빛이 났다.“참, 태하 씨. 이제··· 완전히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 아니에요? 하산할··· 준비하세요.”“하산이 뭐야?”경신은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가물거리면서도, 아이처럼 묻는 태하의 태도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진짜 모르나? 음··· 산속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사부와 제자 사이에서··· 쓰는 말이에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게 되면··· 더 배울 것이 없으니···, 산을 내려가도 좋다는 ···뜻이요.”“난 아직 멀었어.”태하의 확신에 찬 대답에 경신은 배시시 웃으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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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 남자가 나를 웃게 해주잖아?]

“따라와.”태하가 낮게 읊조리며 경신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 온기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면서도 경신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는 걸까? 아까 들려온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경쾌하고 들떠 있었는데.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제 손을 감싸 쥔 태하의 커다란 손은 절대 놓아줄 기색이 없어 보였다.“오늘, 분명 웃게 될 거야.”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경신은 홀린 듯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차에 오르기 전, 태하가 문득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Tomé una gran decisión(내가 큰 결심을 했어).”“네? 무슨 결심인데요?”“그동안 고민 많이 했는데, 이제야 결정 내렸어.”“어머, 뭔지 몰라도 축하해요. 태하 씨가 내린 결정이라면 다 근사한 일이겠죠.”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태하를 보며 경신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늘 자신을 배려해주던 그였기에,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같이 가.”“아니, 그러니까 어디를요?”“뭐 하러 가는지 안 궁금해?”“읏, 그거 질문인가요?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해놓고!”“보너스.”효율적이다 못해 간결하기 짝이 없는 태하의 언어생활에 경신은 결국 체념하며 물었다.“어휴, 보너스는 좋은 거니까요. 자, 태하 씨. 우리 대체 뭐 하러 가는 거예요?”대체 무엇이길래 이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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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반짝이는 솜사탕 두 마리]

태하의 입가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활기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경신을 이끌고 들어선 곳은 거대한 동물병원과 애견 샵이 결합한 대형 동물 메디컬 센터였다.태하는 이곳이 마치 제 집 안방인 양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한 방 제대로 맞은 경신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어떻게 '인간 아기'를 입양한다고 생각한 걸까. 착각의 늪에 빠져 보냈던 그 짧고도 치열했던 고뇌의 시간들이 허무하게 흩어졌다.“오셨습니까? 드디어 결심을 굳히셨나 봅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태하를 알아본 남자 간호사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앞장섰다. 경신은 여전히 경황이 없어 좀비처럼 무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끌려갔다. 안내를 받아 다다른 곳은 투명한 유리 공간으로 분리된 동물 대기실이었다.“녀석들이 아직 낮잠 중이네요.”간호사가 멈춰 선 곳에서 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신을 향해 손짓했다.“신, 여기 봐.”경신이 태하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작은 생명체 둘이 고르게 숨을 들썩이며 잠들어 있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솜사탕처럼 엉겨 붙은 하얀 강아지 두 마리. 그 인형 같은 모습에 경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어머나··· 세상에.”태하가 경신의 손을 잠시 놓아주고는, 두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한 마리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경신의 두 손 위로 살포시 강아지를 얹어주었다.따뜻하고 부드럽고, 말캉한 존재. 세상모르고 잠든 작은 몸짓 속에서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경신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귀엽지.” “···너무 귀여워요. 정말 인형 같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사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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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꼬물이가 던진 덫에 걸리다]

엄마, 아빠라니.하지만 경신은 이 작고 하얀 솜사탕 같은 녀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차마 “전 이 아이들의 엄마가 아닙니다”라고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귓가가 화끈거렸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낯선 감각이 발끝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하하, 아빠가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 아이들이 복을 받았네요.”어색함을 감추려 대충 둘러댄 경신의 시선은 여전히 바구니 속에서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태하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 그런 경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아련한 미소로 지켜보더니, 이내 태하를 향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지난주에 워낙 힘든 일을 겪으셔서 견주분 마음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직 눈에 선하네요. 테소로, 참 씩씩하고 예쁜 녀석이었는데.”테소로? 경신이 의아한 눈빛으로 태하를 돌아보았다.“테소로는 마호 형의 반려견이었어.”태하의 나지막한 음성에 간호사는 숙연한 표정으로 강아지들을 내려다보았다. “Dio a luz a sus crías y murió(새끼들을 낳고 세상을 떠났지).”갓 태어난 생명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그 찬란함을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는 사실이 대기실 안에 묵직한 정적을 불러왔다.순간, 경신은 자신의 뱃속 한구석이 묘하게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작은 구멍이라도 난 듯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어미 개가 남기고 간 저 작고 여린 생명들이 마치 자신의 처지 같기도, 혹은 곧 태어날 제 아이들의 미래 같기도 해서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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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죄 많은 팜므파탈의 흔적]

이 남자와 손을 잡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던가. 모든 유러피언의 스킨십이 원래 이렇게 농도 짙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오직 태하만이 가진 특권인지 경신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태하는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행사하듯 경신의 손을 단단히 쥐고는, 갤러리처럼 넓고 적막한 거실을 가로질러 나갔다.“···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요?”평소의 그는 얼음 조각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본 그의 행동은 말도 못 하게 세심했다. 경신은 그 이질적인 매력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너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그의 발걸음은 큰 키와 긴 다리에 걸맞게 성큼성큼 앞서 나갔지만, 뒤따르는 경신의 보폭을 배려해 속도는 한없이 다정하고 느릿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룸 슬리퍼가 스치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만들었다. 갓 입양된 강아지들의 온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서늘했을 거대한 저택에 오늘따라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닌 듯했다.지난번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의 개인 작업실을 지나, 바로 옆에 굳게 닫혀 있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태하가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자, 경신은 그 안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순간 팔등 위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 남자에게 오늘은 정말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겠다는 결단이 필요할 정도로, 방 안의 풍경은 압도적이고도 노골적이었다.“아··· 이 방의 정체는 대체 뭔가요? 왜 나를···.”인테리어도 그렇고, 화장대와 화장품을 비롯한 침구까지도.&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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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신데렐라는 질색이지만]

태하와 함께하는 강아지 육아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차라리 처절하고도 숭고한 사투에 가까웠다.어느새 시침이 새벽 4시를 가리켰다. 꼬물이들의 우유 타임은 살인적일 만큼 정확했고, 또 살벌했다. 굳이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전해지는 작은 기척에 힘겹게 눈을 떴다. 거실 한복판에 넓게 펼쳐진 매트와 이불 위로 두 사람의 지친 몸이 널브러져 있었다. 각자 한 마리씩 품에 안고 젖병을 물리는 손길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부모 노릇, 보통 일이 아니군.”잠에 취해 갈라진 태하의 낮은 저음이 고요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경신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젖병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하하··· 멋진 아빠네요, 태하 씨는.”  “···너도. 훌륭한 엄마야, 신.”  “···제 희망 사항일 뿐이죠.”꿈결인지 현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혼몽한 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의지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경신은 강아지에게 우유를 물리면서도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다정하고 완벽한 이 남자를, 과거의 자신은 왜 그토록 밀어냈던 걸까.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눈앞에 실체로 존재하는데 말이다.‘하지만 너무 대단한 남자니까 내가 물러서지 않았을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경신의 시선이 태하에게 머물렀다. 그 역시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6시 타임은··· 제가 할게요. 태하 씨는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좀 자요.”  “너 혼자 두기 싫어.”태하 역시 인간인지라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경신의 곁을 지켰다.“···전 대학생이고, ···태하 씨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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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낙원이 다 아름답지는 않은 법]

아침부터 회의가 한창인 JJ 엔터테인먼트 세미나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도윤과 현수의 듀엣곡 발표를 앞둔 긴급 점검 회의였지만, 대표 서정우의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하나에 임직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서정우는 요즘 JJ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T.K.와 그가 속한 MH 엔터테인먼트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곡가 태하도 눈엣가시였지만, 에스트렐라라는 그룹은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왜 JJ의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마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것은 그에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마호, 그 여우 같은 놈이 대체 어디서 저런 보석들을 캐온 걸까.’돈을 쏟아부어 갈고 닦아놓은 자사 연습생들이 오늘따라 서정우의 눈에는 한참 미달로 보였다. 회의실 왼쪽에는 안무가 스테파니, 보컬 트레이너 김기린, 프로듀서 봉선규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도윤과 최훈 홍보 실장이 자리했다. 현수는 아예 배제된 자리였다.서정우가 전문가의 식견을 빌려 폭풍 같은 독설을 쏟아내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만 흘렀다. 오직 단 한 명, 도윤만이 그 서슬 퍼런 기세 속에서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사장님, 잘할게요. 현수랑 듀엣 시켜주셔서 감사해요. 후속곡도 꼭 내주셔야 합니다?”도윤은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스스럼없이 요구 사항을 던졌다. 서정우의 서슬 퍼런 시선이 도윤의 얼굴에 머물더니, 이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JJ에서 현재 가장 높은 주가를 달리며 사옥 건립에 일등 공신인 도윤은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예외가 허용되는 인물이었다.“너희 둘, 별로 안 어울려. 황도윤, 네가 아깝다고.”“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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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유리 구두를 벗은 찬란한 그녀]

빛 한 점 새어 들지 않는, 완벽한 방음이 보장된 밀실 같은 작업실. 태하는 이 방의 모든 조명을 환히 밝히고, 잠들어 있던 기기들에 생명을 불어넣듯 하나둘 전원을 올렸다. 기계들이 부팅되는 수십 초의 짧은 시간 동안, 공기 중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드라마 PD들, 내로라하는 아이돌, 심지어 대형 영화 제작사까지···. 최근에는 DY, 수, 그리고 네 친구 호랑까지 모두 T.K.의 곡을 원했어.”세팅이 끝나자 태하는 모니터 위에 수많은 음원 파일이 담긴 폴더를 열었다. 경신은 그의 설명을 듣다 문득 생경한 이름들에 멈칫하며 물었다.“네? 잠깐만요. DY? 수? 그리고 호랑? 그게 대체 누구예요?”태하는 마우스를 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경신을 바라보았다.“도윤, 현수, 기범. 그들이 업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이야.”“네? 그 사람들이··· 이미 유명한 가수였다고요?”“그래. 그것도 아주 영향력 있는.”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경신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찾아 쥐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의 가수 활동을 눈치채지 못했던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도윤, 현수, 기범··· 그 이름들이 예명이라니.”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기사들을 확인하던 경신은 일순 머리가 휘청거리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바닥과 천장이 뒤섞여 회전하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이었다.“Todos son muy famosos(그들은 모두 유명해).”태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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