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43 챕터

#71. [왕관을 쓴 어느 남자의 고백]

경신은 그가 짓는 깊은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왠지 알 것 같았기에,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고마워요, 태하 씨. 맞아요. 전 지금 당당한 사람이에요.”배 속에서 아기들이 듣고 있는데, 초라하고 의기소침한 엄마로 남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늘 화야가 강조했던, 현실을 직시해야 할 순간이 왔다.“제게 마음 주지 마세요. 태하 씨는 저보다 훨씬 더 멋지고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야 해요.”경신은 마음이 아려왔다. 가슴 한구석에 날카로운 상처가 나는 듯 통증이 일었지만, 입술 끝을 올려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러려고 그동안 숱한 결심을 반복했던 게 아니던가. 아기를 가진 채로 연애니 사랑이니, 혹은 전생을 떠나서 이 대단한 남자를 무슨 염치로 마음에 품겠나 싶었다. 더는 여지를 주거나 착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순리였다.그러나 태하는 당당한 표정으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경신을 바라보더니,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었다.“따라와 봐.”***그 시각, MH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안은 짙은 에스프레소 향이 감돌고 있었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정체불명의 악보들과 계약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심에서 마호와 봉선규가 마주 앉아 있었다.“테소로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마음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그나마 태하 님이 강아지들을 맡아줘서 다행입니다.”봉선규가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마호는 창밖을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읊조렸다.“태하, 그놈이 원래 그래. 어린 시절에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제 처지랑 비슷한 것들에는 유독 마음이 약해지거든.”봉선규는 이미 대충은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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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기꺼이 오해받고 싶은 남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다.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왔던 경신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일방적인 순애보를 쌓아왔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일 터. 분명 과거의 그녀는 너무 대단해져 버린 이 남자가 부담스러워 밀어냈을 테지만, 지금의 태하는 경신 역시 그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이 죄 많은 몸, 아니 이 대단한 여자는 정말 매력적이었나 보네요. 세상에나, 제가 봐도 존경스러울 정도예요.”태하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경신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풋, 대단하긴 하지.”기억 저편의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경신은 손을 배 위에 살포시 얹었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배 속의 아기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그렇죠? 저 정말 멋진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환원하는 것, 정말 근사해요.”“그게 바로 너야.”“그래도, 감히 그런 생각을······.”“Arriesgó su vida para salvarme(목숨을 걸고 날 살렸잖아). 지금의 너도 똑같아.”“······.”사실 경신은 자기 자신이 꼭 미지의 세계에 머무는 존재 같아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태하는 과거의 경신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현재의 그녀도 오롯이 마주해 주고 있었다. 경신의 심박수가 다시 불규칙하게 요동쳤다.“태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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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그 폭스남의 영역 표시의 기술]

Rrr Rrr Rrr-.거듭 초인종이 울리는 다급한 순간.경신은 정기범을 이런 곳에서 마주한다면 대체 어떤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경황이 없는데, 정작 태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자신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손님들 오면 네 정체에 대해 확실히 해.”“무, 무슨 지금요?”연예계와 멀어지려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무릎까지 깊숙이 잠겨 있었다. 당장 답을 내야 하는 걸까? 태하가 일궈놓은 대단한 사회 환원 사업의 실체를 보았고, 무엇보다 홀몸이 아닌 처지에 아이들을 윤택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확실한 수입원이 필요했다.“내가 도와줄게.”인터폰 화면 속에서는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태하는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지독히도 여유로웠다.“지금 결정해.”하기야, 전설적인 공동 작곡가 'T.K'인 태하와 밀접하게 지내고 있다면, 이 밤중에 경신이 이곳에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모양새가 되긴 할 터였다. 하지만 태하는 지금 궁지에 몰린 그녀를 교묘하게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이리 급하게 몰아붙이시면···.”“나를 믿어.”이 남자는 대체 왜 이토록 급진적일까. 경신은 떨리는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간절하게 생각했다.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정정당당하게 돈을 번다. 그것도 태하라는 거대한 성벽 안에서.“¿Participará en la actividad económica(경제 활동 할 거잖아)?”태하는 마치 금단의 열매를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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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몸정 + 마음, 선율까지 나눌 사이]

 뭘 나눌 사이? 마음을 나눌 사이. 몸도 나눌 사이! 아니 태하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리 급발진하다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하하, 태하 한국어 과외 더 해야겠네.” “아이고, 놀라라.”마호와 도국이 그리 얼버무리며 넘어간 덕분에 태하의 뻔뻔한 직진이 그저 말실수라는 해프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게 되었다.경신이 원망의 시선을 태하에게 날카롭게 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태하는 남의 속도 모르고 즐거워 보였다.  그저 경신은 제 두 눈을 꼭 감고 이 재앙을 어찌 헤쳐 나가나 홀로 외로운 고민을 했지만, 태하는 뻔뻔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문을 열고 음식을 준비한 고용인을 맞이했다.  그는 여전히 승리자의 표정으로 강아지들과 이불이 펼쳐진 곳 근처에 커다란 상을 펼쳐 놓았다.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잔칫상을 차려 주었다.  젊은 남자들이 좋아할 법한 고기 안주는 물론 디저트와 과일, 샐러드 같은 경신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도 올려져 있었다.  술도 와인, 맥주, 위스키까지 등장했고, 생수, 주스, 탄산수 등 음료도 대단했다. 이 와중에 정신줄이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경신은 멍하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큰 소리로 고맙다는 둥, 잘 먹겠다는 둥, 산해진미는 오랜만이라는 기타 등등 호들갑스럽게 정체 모를 파티는 시작되었다. *** 즐거운 시간을 그리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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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비밀의 문고리를 잡아 쥐고서]

밝고 경쾌한 선율이 거실 한가득 채워져 갔다.유명한 피아니스트도 울고 갈 법한 그녀의 유려한 연주 실력은 모두를 감탄하게 하고도 남았다. 어지간한 전공자조차 갈채를 보낼 만한 실력이니 두말하면 잔소리였다.피아노를 치며 경신은 깊은 추억에 빠져들었다. 지금 연주하는 밝은 곡은 경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빚어냈던 곡이었다.세 번째 인생에서도 꽤 많이 웃고 지냈던 일들이 있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 곡과 관련된 기억은 기범과 함께했던 JJ 소속사에서의 추억이었다.짝사랑 중인 경신에게 대상이 누구냐고 물으며 이야기를 들어주던 동료들, 아이를 유산했던 스테파니 안무가 선생님을 향한 위로, 성격 탓에 아이돌로 풀리지 않아 보컬 트레이너가 된 김기린 선생님과 격려했던 순간까지.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가 각자의 삶이 힘겨웠기에 더 쉽게 친해졌었다.사회생활이 늘 그렇듯 공공의 적도 존재했다. 그리고 뚜렷하게 생각나는 악당들도 떠올려졌다. 그 사람들만 나타나면 상처받고 일이 꼬이곤 했다.다들 악녀, 혹은 마녀라고 불렀던 두 여자들. 그들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똘똘 뭉쳐 서로를 다독였던 그때의 정경이 경신의 머릿속에 하나둘 그려졌다.밝은 곡조였으나 경신의 손은 점점 느려졌고, 조금씩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에는 묵직한 힘이 실리고 있었다.경신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좋지 않은 기운이 온몸과 머릿속을 잠식해 나가던 그 순간, 스스로 연주를 서둘러 멈추었다.여기서 더 몰입하다가는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점멸하며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좋아, 오늘은 여기까지.’활기찬 그 곡의 마무리를 지으며 기범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했던 전생 역시 이렇게 서서히 갈무리되는 기분이었다.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현재로 추억을 다시 만들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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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벼린 칼날 뒤에 숨겨진 떨림]

 경신은 이제 학교에 나서기 전 밥 대신 샌드위치를 먹었고, 마지막으로 꼬물이들 우유를 먹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하는 경신을 기숙사로 데려다주겠다며 위해 집을 함께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을 향해가는 도중에도 둘은 거울 속 상대를 바라보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주말 참 길고도 길었네요. 아시죠? 제가 방문한 목적은 뭐다?” “숙제 잘할게.” “제가 드린 문학책 읽고 문제도 꼭 풀어놓으세요. 다음 주부터는 진짜 제대로 과외 돌입이에요.” “알았어.” 사실 어제 에스트렐라가 방문한 바람에 또 국어 공부를 찔끔찔끔하다가 그만둔 꼴이 되었다. 어떻게 봐도 과외 1회 차 분량이 되지 않아 이것도 시범 수업이 되어 버렸다.  “과외 이러다 평생 못하게 되면 어쩌나 두렵기까지 하네요.” “풋.” “태하 씨가 한국어 너무 잘해서 실은 제가 걱정은 없어요.” “하산은 멀었어.” 이젠 농담도 능숙해진 그였다.  경신은 태하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갈 때까지도 웃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익숙하게 그에게 손목을 잡히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고 그와 함께 있는 시간도 즐겁기만 했다.   ***  기숙사로 돌아온 경신은 자신을 반겨주는 화야를 기대했지만, 그녀 역시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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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의 크기]

“보살님!”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경신이 끝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자, 화야는 결국 그녀를 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음.”호통 소리에 겨우 눈을 뜬 경신은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벌써 밤 9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나 싶은 걱정이 밀려왔다.“보살님! 옷도 안 갈아입고, 냉장고 음식도 그대로던데. 식사도 안 하고 계속 잔 거 맞죠?”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노트 한 권을 빠뜨린 것이 생각나 기숙사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그때 이미 침대 위에서 이불에 파묻힌 채 곯아떨어진 경신을 본 화야는 도서관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잠든 경신이 신음을 흘리는 듯했기에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경신은 꿈속에서 늘 힘겨워 보였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절박하게 웅크린 채 중얼거리는 말들은 대부분 '두렵다', '무섭다', '힘들다' 같은 부정적인 단어뿐이었다.그렇기에 화야는 잠에서 깬 경신이 보여주는 밝고 활기찬 모습이 때로는 애처롭게 느껴지곤 했다.“···끙, 화야.”화야는 의식이 돌아온 경신에게 팔짱을 끼고, 그녀의 잠을 확실히 쫓아내기 위해 짐짓 까칠한 말투를 던졌다.“팜므파탈 보살님, 대화가 좀 필요해 보이는군요. 밤에 피는 장미인지, 불나방인지··· 마성의 룸메이트님, 이제는 외박을 아주 밥 먹듯 하시네요?”“읏, 대화? 아, 맞다! 나 기범이랑 이야기해야 하는데···.”화야의 직구에 경신은 이불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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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게]

태하는 경신의 드레스룸도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서류도 챙겨 가지 않았다.  이건 다시 오겠다는 뜻인가, 미련 없다는 건가. 이 방은 그대로인데 느껴지는 분위기는 더 쓸쓸하게 변한 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경신이 입었던 옷도 잘 개어져 침대 옆쪽에 올려져 있었다. 태하는 그 옷을 집어 들었다. 잘 빨아 놓고 싶어 세탁실로 향했다.  거실로 돌아오니 다 안다는 눈빛으로 마호는 태하를 향해 맥주캔 하나를 건넸다. 아주 제 집처럼 뭘 잘도 쑥쑥 빼먹고 있는 마호였다.  “참, 태하야. 너 스페인에서 부모님 한번 안 오시냐?” “글쎄.” “나는 왜 이리 불안하냐?” “뭐가?” “그분들이 너를 너무 아끼시니까 다시 스페인으로 데려가실까 봐.” 사실 태하는 운이 좋았다.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양부모를 만났으니까. 그런데 너무 사랑하고 너무 애지중지 한다는 게 문제였다.  “나 성인이야.” “네가 너무 똑똑해서 회사 너 물려주고 싶으실 것 같아 난 걱정이야.” “그럴 일 없어.” 태하는 다시 시원한 맥주캔을 가지고 강아지들 근처로 갔다. 맥주캔을 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너무 행복하다. 경신 양이 이곳에 다시 온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인다.” 그 말에 태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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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큐피트의 화살은 도대체 어디로]

 경신은 기범이의 행동에 두 손을 모아 쥐고 탄성을 뱉었다.  “와! 기범이 멋지다! 영국 신사 같아!”  기범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화들짝 떴다. 예전 경신이라면 부담스럽다고 한소리 했을 텐데··· 라고 홀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아 경신을 앉게 해준 건 고마운 일인데 그는 민망해했다. “벤치 먼지 털고 손수건 깔아 준 게 뭐라고.” “하하, 난··· 연애 뭐 그런 것이나 이런 친절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옛날 사람처럼 영국 신사가 뭐냐?” 경신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알맹이는 수십 년을 몇 번이나 산 옛날 사람이라 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에스트렐라가 대단하게 인쇄된 쇼핑백에서 잘 포장된 쿠키를 하나 꺼낸 경신은 톡톡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이거 안 달고 고소하니 맛있다.” “많이 먹어. 또 줄게.” “듣기만 해도 고맙다. 하하!” 허기가 져서 그런지 견과류가 많아서 씹는 재미도 있고 맛도 괜찮아 경신은 다시 한 조각 더 먹었다.  음식 이야기나 하자고 만난 것은 아닐 텐데. 지금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기범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기범아, 본론으로.” “급한 성격은 여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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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아슬아슬 위험한 거리]

경신의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칠게 날뛰는 맥박이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자신이 태하를 좋아한다는 것.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진실이 목을 옥죄어 오자 경신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침묵은 곧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그 지독한 고요를 읽어낸 기범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밀어닥친 절망 끝에, 기범은 기어이 품고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너 태하 님, 포기해.”“···무슨 말이야, 그게?”기범의 눈빛에는 서슬 퍼런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의 전생에는 정말로 태하가 존재했던 걸까.인간이란 참 얄궂은 생물이었다. 잘해보라 등 떠밀면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절대 안 되니 포기하라는 경고를 들으면 도리어 질척하게 매달리고 싶어지니까.이 죄 많은 몸뚱어리의 원래 주인은 태하의 애정을 받으면서도 어떻게든 멀어지려 발버둥 쳤었다. 그럴 만한 비극적인 이유가 있었을 테다. 아기를 품은 지금의 나 역시, 전생의 굴레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남자와도 얽히지 않으려 처절하게 자제하는 중이었다.게다가 배 속의 쌍둥이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연애는 무슨. 함부로 누군가의 곁을 탐낼 처지가 아니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사그라들 불씨였는데, 기범의 간절한 고백과 뜻 모를 경고가 묘하게 경신의 청개구리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경신은 가늘게 떨리는 숨을 삼키며 그를 응시했다. 오랜 시간 지독한 짝사랑을 앓아본 처지였기에,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기범의 마음을 모른 체하기가 힘들었다.“···기범아. 앞으로 내게 이런 말 하지 마.”“신아, 날 제대로 봐줘.”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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