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143 챕터

#81. [심장에 해로운 남자]

약 한 시간 전.마호의 끈질긴 권유에도 태하는 맥주캔을 냉장고 깊숙이 밀어 넣었다.그의 주방은 작은 바를 연상시켰다. 와인 랙에는 붉은빛의 액체들이 줄지어 서 있고, 보드카와 위스키 병도 형형하게 빛을 반사하며 종류별로 자리했다.하지만 오늘은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술 대신 쇼핑백을 채워 나갔다.요즘은 경신과 거리가 가까워진 이후로 늘 비상 대기하는 사람처럼 술을 입에 대지 않은 나날이 늘어갔다.결국 태하는 차 키를 들고 마호에게 강아지들을 맡긴 채 집을 나서게 되었다.이유는 몰랐다. 그저 심장이 그리 원했다. 테헤란로를 벗어나 남부순환로를 거쳐 가면서도 그는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운전을 했다.태하는 이 도로를 얼마나 다녔던지. 말 그대로 눈 감아도 그는 제 집에서 S대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심지어 공부에 취미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음악학 전공으로 S대 대학원에 등록까지 했다. 최근 정세에 맞게 뮤직 프로덕션과 사운드 엔지니어링, 음향 공학, 영상 음악 등 새로운 분야를 포괄하는 교육과정이 생겨난 덕분에 태하도 숟가락을 얹었다.“내가 미쳤지.”그저 그건 핑계였다. 이미 제정신이 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제정신이 아닌 자신에게 욕인지 칭찬인지 거하게 한마디 뱉어낸 태하는 낙성대역이 보이자 저절로 입매가 풀려 호선을 그렸다.그의 표정만큼이나 차도 부드럽게 S대 기숙사로 향했다.“저런.”그냥 오고 싶더라니.기숙사 진입로의 가로등이 경신과 기범의 실루엣을 비추는 순간, 태하의 핸들이 무의식적으로 떨렸다. 브레이크를 밟는 그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꼭 연인들끼리 싸우고 남자가 여자를 달래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 태하는 순간 이성이 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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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내게 키스하지 마세요, 제발]

나지막이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고요한 교정의 공기를 잔인하게 뒤흔들었다.어둠 속에서 희미한 별빛마저 삼켜버린 칠흑 같은 밤. 창백한 가로등 불빛만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교정에서, 경신의 앞에 선 태하의 모습은 마치 달빛을 온몸에 뒤집어쓴 것처럼 눈부셨다. 초점을 맞추려 애써봐도 그의 압도적인 실루엣 앞에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키스를 한다니.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본능이 거부하길 거부했다.이유야 대라면 백 가지도 넘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핑계도 이 빛나는 남자를 밀어낼 구실이 되지 못했다. 경신은 대답 대신 느리게 눈을 깜빡깜빡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며, 도망칠 의지조차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태하의 커다란 손이 경신의 뺨을 깊숙이 감싸 쥐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의 뜨거운 손바닥 온기가 서서히 얼굴을 데워왔다.경신은 숨을 죽인 채 온 감각을 벼렸다. 그의 입술이 닿기 직전의 그 찰나, 태하가 한 걸음 더 밀착해 올 때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지막 한 걸음의 틈새마저 사라졌을 때, 낮고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이 그녀의 온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살며시 포개진 그의 입술은 생각보다 훨씬 말캉했고, 숨 막히게 달콤했다.입술과 입술이 닿은 순간 느껴진 묘한 자극에 감질이 났다. 저도 모르게 그의 아랫입술을 제 혀끝으로 은밀하게 맛보고 싶다는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온몸의 세포가 짜릿하게 반응하며 낯선 욕구가 본능의 바닥에서부터 꿈틀거렸다.세상에서 가장 탐스러운 과일을 탐닉하듯, 경신은 홀린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지독하게 갖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 그의 뜨거운 혀가 깊숙이 밀고 들어오자, 경신은 거칠게 숨을 삼키며 그의 목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벼려진 칼날처럼 예민해진 감각 탓에, 거칠게 얽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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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늑대가 여우같이 굴잖아]

과외를 오지 않겠다니.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품에 절박하게 매달려 숨을 나누던 여자였다. 이제 겨우 곁을 내어주나 싶었는데, 날카로운 거절의 칼날이 가슴을 베고 들어왔다. 이대로 끝내자는 잔인한 선전포고인가 싶어 태하의 온몸이 차갑게 굳어 들어갔다.“왜?”나직하게 가라앉은 태하의 음성에는 억누르지 못한 소유욕과 미세한 불안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경신은 순진무구한 눈을 깜빡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던지는 어조였다.“시험 기간이거든요.”아, 일시적인 도망이었나.긴장으로 빳빳하게 서 있던 태하의 어깨가 그제야 미세하게 이완됐다. 하지만 당장 일주일 동안 이 매끄러운 살결을 만지지도, 얼굴을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졌다.“아, 시험?”시험이 정확히 언제더라. 이번 주? 다음 주? 그렇다면 최소 2주는 이 감질나는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인가.“그동안 너무 공부를 안 해서 걱정돼 죽겠어요. 무조건 졸업해야 하는데, 만에 하나 펑크라도 나면 어휴, 상상하기도 싫네. 가을 학기를 더 다녀야 한다거나, 최악의 경우 휴학이라도 하게 되면 휴, 그럼 대체···.”경신의 하소연을 듣는 태하의 가슴 한구석이 거칠게 일렁였다.“한국말 너무 어려운데.”“혼잣말이에요. 태하 씨는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요.”경신의 시름이 깊은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조급해 보였다.태하는 매사 너무 성실해서 탈인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경신도 늘 그랬다. 시험 기간만 지나면 귀신같이 얼굴이 핼쑥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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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우리들의 입술이 맞물렸었지]

4월의 셋째 주 목요일.관악 학생생활관의 아침은 오늘도 지독하게 익숙한 풍경으로 시작되었다. 너무 자주 반복되어 이제는 기상 알람 수준이 되어버린, 한 여대생의 처절하고 절망적인 곡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보살님, 자자, 제발 이불에서 나오세요. 샌드위치 한 조각이라도 씹고 학교 가셔야죠.”“···윽, 망할 세뇨리타. 나쁜 세뇨리타··· 휴우.”“아니, 아침부터 왜 그렇게 세뇨리타 타령이에요? 벌써 며칠째냐고 그게.”“그냥 싫어. 이름도 모르는 스페인 여자가 뼈무치게 싫다고.”둠칫거리는 이불 덩어리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눈총을 쏜 화야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먼지가 파닥거리진 않아 다행이었지만, 이번엔 친구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한마디 따끔하게 쏘아붙였다.“오늘은 정말 못 참겠네요.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을 무고한 ‘세뇨리타’에게 사과부터 하세요.”“윽, 사과? 쳇, 싫은데. 내가 왜 꼭 그래야 하는데?”“보살님, 태교 포기하셨어요? 어서요.”‘태교’라는 단어가 치트키처럼 먹혀들었다. 경신은 끙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이불을 걷어차고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아직 평평한 제 배를 조심스레 문지르며,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웅얼거렸다.“자, 지구촌 여러분. 스페인의 미지의 세뇨리타 씨, 제가 사적으로 속이 좀 뒤틀려서 심술을 부렸네요. 일단 사과드립니다.”경신은 제 기분이 왜 이토록 밑바닥을 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을 만큼 유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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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위험하게 구는 빌런들]

현수는 스테파니가 나가고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의 동작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드는 와중에도,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어이, 자기야. 작작해. 진짜 허리 나가.”냉장고에서 시원한 생수를 빼 마시던 도윤은 문이 닫히고 모두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현수의 등 뒤로 다가왔다. 차가운 물병을 현수의 달아오른 목덜미에 슬쩍 대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도윤 씨, 연습 쉬는 거 나 하나도 안 고맙거든?”“쳇, 우리 자기 요즘 살도 너무 빠지고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 그렇지.”“나 도윤 씨 자기 아니야.”현수가 밀어내려 어깨를 비틀었지만, 도윤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긴 팔로 현수의 가느다란 허리를 거칠게 낚아채 제 단단한 품으로 무겁게 끌어당겼다. 땀으로 젖은 서로의 티셔츠가 빈틈없이 맞물리며 뜨거운 열기가 훅 겹쳤다.“자기가 아니면, 누구한테 이렇게 몸이 달아?”장난기 어린 목소리와 달리, 현수의 턱을 돌려세우는 손길은 포악할 만큼 강압적이었다. 도윤의 입술이 현수의 벌어진 숨결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거칠게 입안을 가르며 들어찬 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맥박이 뛰는 여린 살천장을 눅진하게 핥아 올렸다. 도윤이 현수의 호흡을 모조리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빨아들이는 동안, 그의 커다란 손이 땀으로 미끄러운 현수의 티셔츠 밑단 속으로 쑥 들이쳐졌다.“어머! 도윤 씨··· 여기 CCTV 있어!”현수의 잘게 떨리는 신음이 도윤의 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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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세상에 비밀은 없는데]

사실 회사 안무 연습실의 CCTV가 몇 대나 고장 나 있는 상태였지만, 그걸 그냥 고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수리하라고 지시한 것은 서정우 본인이었다.최훈 홍보 실장은 피식 웃으며, 딱 좋은 타이밍에 물건이 왔다며 손짓을 해 보였다.“사장님, 드디어 도윤이하고 현수 좋은 그림이 나왔나 봅니다.”어쩐지, 프라이빗 숙소까지 내주었는데 그렇게나 방만하게 구나 싶었다.최훈이 은밀하게 USB를 내밀자, 서정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최훈을 바라보며 고갯짓으로 노트북을 가리켰다. 보안실 직원이 건넸다는 USB가 노트북 포트에 매끄럽게 연결되었다.“요즘 기고만장해서 보기 불편했는데, 아주 잘 됐군.”서정우의 입가에 비릿하고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훈 역시 가쁜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의 눈빛이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을 받아 기괴하게 빛났다.***4월도 3주째에 접어들자 한낮의 기온은 제법 여름을 흉내 내듯 높아졌다.평일인 목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 대기실은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은 임산부들로 가득했다. 웃음꽃을 피우며 만삭의 배를 문지르는 임산부 무리가 있는가 하면, 질병이나 불임 때문인지 어두운 표정으로 진료를 기다리는 여성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하지만 그들 곁에는 대부분 다정한 배우자나 든든한 보호자가 함께였다. 경신을 제외한 대기실의 모든 사람은 적어도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결국 자신은 이 모든 과정을 홀로 외롭게 버텨내야 한다는 사실에, 앞으로 정말 보호자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덜컥 막막해졌다. 생각을 겹쳐 할수록 마음이 자꾸만 처량하게 가라앉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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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착각은 달콤해도 현실은 매운맛이]

한지원은 지금 진료실 책상 위에 팝콘과 콜라라도 펼쳐두고 경신의 이야기를 밤새워 듣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태하라는 거대한 존재가 어른거렸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신의 엉뚱하고 해맑은 웅변에 그만 완전히 매료되고 만 탓이었다.이 3 진료실 문밖에서 지루하게 대기 중인 다른 임산부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지금 이곳의 분위기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달떠 있는지.“그런데 전 남자를 가까이하면 안 되는 운명이었기에 단칼에 거절했어요. 실은 밤하늘의 별처럼 눈부시고 대단한 어떤 남자도 제 곁에 딱 한 명 있긴 하거든요? 하지만 곧 스페인에서 미지의 망할 세뇨리타가 나타나 그 남자를 채갈지도 몰라서요.”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지원은 본능적으로 이 병원의 VIP 투자자이자 경신의 아기 아빠가 확실한 '태하'를 떠올리며, ‘세뇨리타’라는 뜬금없는 단어를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잠깐만요, 경신 님. 그 대단한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건가요?”“아니요, 현생 말고 전생에 있었다는 이야기예요.”“······네?”한지원은 순간 머리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진위여부가 헷갈려 눈을 깜빡이며 한참 기승전결을 따져보아야 했다.일순, 경신이 처음 이 병원을 방문했을 때 텍사스의 ‘샌안토니오 메디컬 센터’를 언급했던 기억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이 애처롭고 고운 임산부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한바탕 경신의 페이스에 휘말려 진료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한 한지원은 서둘러 차트를 정리하며 초음파실로 향하자고 제안했다. 이젠 현실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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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꽃길만 걷게 해줄게. 내가]

“뭘 그렇게 놀라.”태하가 나직하게 피식 웃으며 경신의 옆자리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듯 와서 앉았다. 지독하게 밀도 높은 남자의 향취가 훅 끼쳐왔다. 그는 길고 곧은 손가락 끝으로 예전 사고 당시 상처가 났던 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경신은 그제야 뒤늦게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도 큰 사고를 당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되었으니, 정기적인 정밀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온 게 분명했다.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뇌 신경외과나 종합 검진 센터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곳은 예비 엄마들로 가득한 산부인과 병동이 아닌가. 이 남자가 대체 왜 여기 서성이고 있는 걸까?순간 경신의 몸이 바짝 긴장으로 굳어 들어갔다.삭막하고 하얗기만 하던 산부인과 대기실에 화보를 찢고 나온 듯한 압도적인 남자가 등장하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와 태하가 잘생겼다는 말소리가 들려왔다.‘이거 어쩐지 익숙한 데자뷔 같은데···?’기시감이었다. 예전에도 꼭 이런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숨에 시선을 노예처럼 붙잡아 매는 이 마성의 남자는, 오늘도 눈부시게 생글생글 웃으며 별안간 경신의 세계로 불쑥 침범해 들어왔다.“정기 검진. 너도?”태하는 여전히 장난기가 어린 손길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지만, 경신은 그 수려한 얼굴을 향해 눈을 얇게 흘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병원이 넓고 정기 검진 날이라 해도, 하필이면 이 수많은 진료과 중 산부인과 대기실 의자에서 마주치다니.경신은 가슴 앞에 팔짱을 단단히 낀 채 태하를 빤히 노려보았다. 의심의 눈초리가 잔뜩 서려 있었다.&ld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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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아무리 선을 그어도, 내가 지우면 돼]

그때 잠시 경신의 얼굴이 화끈거렸다.보호자가 되어 준다니. 그 무거운 의미를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걸까. 설마,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텐데.경신은 수려한 얼굴에 마음씨까지 태평양처럼 넓은 태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자꾸만 그에게 밀려드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멀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이 남자에게 의지하면 안 되는데.“저, 태하 씨. 자꾸 이렇게 신세 지는 것도 그렇고··· 다 큰 여자가 대단한 분 집에 들락거리면 남들 보기 좋을 거 없어요. 부모님도 안 좋게 보실 거예요.”경신은 그리 말하며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머지않아 스페인에서 대단한 여자가 오고 있다고 기범이 그랬는데. 자신으로 인해 태하의 앞길이 막히면 안 되니, 이제는 현실적으로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그냥 괜찮다고, 오늘은 안 가겠다고 말을 맺으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태하가 덥석, 경신의 손목을 굳건하게 잡아챘다.“강아지들만 집에 있어. 급해.”“네?”“보호자 없이, 강아지 두 마리만 지금 거실에 있다고. 도와줘.”갑작스러운 태하의 말에 경신의 사고가 일시 정지됐다. 잠깐, 지금 그 핏덩이 같은 것들이 그 넓은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꼬물거리고 있다는 소리인가?“네? 어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호 사장님은요?”“마호 형이 급한 일이 생겨 나갔어. 녀석들이 너무 불쌍해.”태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얼굴로 경신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꼬물이들이 배가 고파서 울고 있으면 어쩌나, 울타리를 탈출해서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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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한국 여자 좀 어렵네]

태하는 주스 잔을 들고 있다가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그녀의 이런 방어적인 태도는 태하가 이전에도 자주 보았던 모습이라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요즘 들어 겨우 안심했더니 이렇게 또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긴장이 몰려왔다. “이유는?”태하는 까만 목이 타들어가 탄산음료를 크게 몇 모금 들이켰다.경신의 표정은 제법 심각해져 있었다.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서 최근 들어 더 수척해졌던 걸까.“곧 스페인에서 태하 씨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엉뚱한 사람이 여기 머무는 모습 보여드리기도 그렇고···.”잠깐, 부모님? 게다가 엉뚱한 사람이라니, 본인을 말하는 건가.“뭐가?”“저··· 방도 그래요. 나중에 미지의 ‘세뇨리타’라도 오면 오해해요. 슬슬 정리하셔야 할 것 같아요.”뜬금없이 튀어나온 세뇨리타라는 단어에 태하는 황당하다는 듯 경신을 바라보았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였다. 저 방을 왜 정리하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세뇨리타?”“다 알아요. 사실 상류층 사람들은 정략결혼도 하고, 부모님이 미리 점찍어 둔 배우자가 따로 있잖아요. 우린 비즈니스 사이니까 편하게 말해 주셔도 돼요. 제가 여기 있는 걸 부모님께서 싫어하실 거예요.”태하가 들고 있던 탄산음료 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경신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가 천천히 올라왔다.“한국말,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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