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91 - Chapter 100

269 Chapters

#91. 미친 기적, 너를 위해

빌고 또 빌고. 바라고 또 바라고.라이신이 그렇게 간절하게 에너지를 모으자, 두 손이 점점 따뜻해져 갔다. 그녀는 마침내 모여진 그 신비로운 기운을 에스메에게 전해주었다.꼭 감았던 눈을 뜨고 라이신은 조심스럽게 앞을 보았다. 하지만 에스메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여태껏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라이신은 다시 눈을 감고 온 힘을 다 쏟아부었다. 빌고 또 빌면서, 손바닥에 전해지는 한층 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에너지를 에스메의 다리를 향해 사정없이 퍼부었다.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눈을 떴지만, 여전히 에스메의 다리는 그대로였다.“아, 이런. 에스메 황녀의 치유는······ 너무 복잡하고 오래된 상처라 힘든 건가?”할 로드의 가녀린 속삭임이 라이신의 귀에 닿았다. 라이신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절망이 엄습했다. 정말 그런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이신이 당황해하고 있을 그때, 레인의 힘없는 목소리 역시 들려왔다.“괜찮습니다. 물도 마셨고, 내일 눈을 뜨면······ 사과를 줄까 합니다. 라이신 경,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무척 힘들어 보이는군요.”그러나 레이나는 그 둘을 향해 매섭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두 기사님, 좀 조용히 하세요! 마법이 어디 쉬운 줄 아세요? 집중이 흐트러지면 조금의 호전도 기대하기 힘들어요.”라이신은 자신을 믿어주는 이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미안해져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이렇게 무리해서 자신이 오겠다고 고집 부려, 무시무시한 고리타르 황제까지 마주하며 이곳에 왔는데. 그냥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그녀는 다시 마음을 비우고 조급함을 버린 채 손 끝에 힘을 주었다. 책에서 본 대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힘을 이해하고, 온몸으로 그 에너지를 차분하게 응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몸 주변을 감싼 자연의 모든 기운과 융합하여 마침내 두 손에 엄청난 힘을 가했다.라이신은 서밋을 구하고 할 로드의 상처를 치유했을 때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원래대로, 아프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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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돌겠네, 감히!

고리타르 황제는 아무래도 오늘, 평소 절대 눈에 띄지도 않던 레이나를 마주친 것이 영 찝찝했다. 침실에 들어서 세실리에를 옆에 끼고 누워서도 도무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그대, 뭔가 이상하지 않아?”고리타르는 옆에 누워있는 세실리에에게 날이 선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는지, 혹은 자고 있더라도 깨워서 말을 받아내고 싶었던 것인지. 고리타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미간을 좁혔다.“폐하, 밤이 늦었습니다.”고리타르의 심중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세실리에 역시 몸을 일으켜 옆의 잔에 물을 채워 그에게 건넸다. 몇 모금 물을 들이킨 고리타르는 여전히 험악한 인상으로 잔을 내밀었다.“그대의 정화수를 마셔도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군. 아처린이 하필 하르트 가문의 여식을 가까이 두다니. 쯧.”그러자 세실리에는 목에 건 마도구를 들어 은은한 빛을 밝히더니,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 고리타르의 얼굴 위로 그 빛을 비추었다.“폐하께서도 절 곁에 두시니 서로 마찬가지지요.”그제야 고리타르는 피식 웃으며 세실리에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감싸 안았다. 동시에 그녀가 입은 로브의 옷깃을 움켜잡고는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뒤로 젖히며, 탐욕스러운 눈으로 세실리에의 하얀 몸을 훑어 내렸다.황제의 집요한 시선은 기어이 그녀의 가슴팍에 머물렀고, 이내 양손으로 거칠게 손아귀에 쥐었다.“다 마음에 안 들어. 교육이 필요해. 지금이라도 아처린을 불러다 에스메의 방으로 가봐야겠는데, 그대의 몸이 날 붙잡는군.” “하흑······.”고리타르는 비서관을 부르기 위해 벽면에 걸린 종을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세실리에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는 한껏 물어뜯듯 탐했다. 세실리에는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리면서도, 한 손으로는 마도구의 빛을 더욱 진하게 밝혀내었다.“아윽! 오늘은······ 후우, 후우. 제 몸도 달아올랐고,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고리타르는 세실리에를 거칠게 탐닉하며 한 손을 낮게 내려 그녀의 치맛자락 속으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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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짐승 대공 전하는 몹시 한계

바아르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도록 오직 라이신만을 찾아 헤넸지만, 그 어떤 수확도 없었다. 그는 결국 허탈하고도 시린 심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깊은 생각에 잠겼다.평소 라이신은 아침마다 일어나 연병장을 달리며 체력 훈련을 하곤 했다. 역시나 오늘은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동안 신분이 증명되었으니 정문으로 당당하게 다닐 때마다 아이처럼 기뻐하며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바아르는 매번 흐뭇하게 보고받았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라이신은 항상 정문을 통해서만 나갔다고 했다. 대공저 밖으로 나가보아야 고작 근처 빵집이거나, 걸어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가르남을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라이신은 대공저 안에서도 미하엘의 호위가 끝나면 서고에 박혀 도서관에 가거나 홀로 연병장에서 훈련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만큼 단조롭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라이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아르였다.“정문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건, 아직 이 대공저 어딘가에 숨어있어야만 한다는 소린데.”어제처럼 커다란 사건이 있었으니 진작 라이신의 뒤에 사람을 붙여놨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바아르의 가슴 속으로 무겁게 밀려왔다.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황가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탐색하고 있는 자신의 숨겨진 심복, 섀도우를 마도구를 사용해 불러낼 수밖에.바아르는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꺼내어 묵직한 오러를 피워 넣었다.“섀도우.”바아르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고 십여 초가 지났을 무렵, 방 한구석에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며 누군가 형체를 드러냈다. 검은색 옷에 얼굴까지 복면으로 감싸 오직 날카로운 눈만 드러낸 사내였다.“각하. 무슨 일이십니까.”바아르는 어지간하면 섀도우를 대공저로 직접 불러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이성은 궁지에 몰려 있었기에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섀도우를 향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단 한마디 명령만을 던졌다.“라이신이 없어졌다. 당장 찾아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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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진실이 폭주하는 이 순간

바아르는 지금 머리가 터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라이신이 내 침실에 왔었다는 말이지?”할트바르트와 마리나는 서로의 시선을 슬그머니 주고받더니, 이내 죄인처럼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네, 왔었습니다.” “그러합니다, 대공 각하.”바아르는 가슴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할트바르트를 향해 맹수 같은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분명 자신의 끔찍한 발작은 그 전날 밤에 일어났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마치 기적처럼 온몸이 개운하고 맑은 상태로 눈을 떴었기에 이 손에 든 침대 시트가 바로 라이신의 흔적이라는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다시 질문을 던졌다.“왜 그날, 라이신이 내 침실에 있었던 거지?”그때 마리나가 입술을 파르르 달싹거리더니,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바아르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자백했다.“대공 각하께서······ 마수화 의식을 잃으신 채 직접 지하로 내려가셔서 라이신 경의 방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라이신 경을······ 강제로 침실까지 데려오셨습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채로, 라이신을 직접 내 손으로 데려왔다고?”마리나의 충격적인 설명을 듣던 바아르는 눈을 크게 뜬 채 할트바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할트바르트가 무겁게 입을 열어 쐐기를 박았다.“네, 각하. 그 뒤로 각하의 폭주하는 발작을 완벽하게 가라앉힌 라이신 경이······ 새벽녘에 홀로 방을 빠져나왔고, 각하께서는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고통 없이 아침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그 고마운 기억을 통째로 잊어버렸단 말이지.”할트바르트와 마리나는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바아르는 가만히 제 손에 들린, 라이신의 잔향이 남아있는 침대 시트를 부서질 듯 꽉 쥐었다. 그리고 오만한 대공의 자존심을 버려두고, 지금 이 순간 대공저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제 구원자, 라이신을 떠올렸다.‘이번에 녀석을 찾아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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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지옥의 문이 열리기 직전

에스메는 지금 라이신이 남장이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녀가 실제로 가녀린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그럼······ 저 때문에 라이신이 이 모습을 하고 황궁에 잠입해······ 저를 치유해 준 뒤 쓰러진 건가요?”자신의 몸이 기적처럼 다 나았다는 기쁨보다, 자신을 살려낸 라이신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네, 맞습니다. 황녀님의 상태가 위독하여······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라이신을 데려와 치유하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황녀님은 완치되셨고, 라이신은 모든 힘을 소진해 쓰러진 상태입니다.” “맞아요. 빨리 대공저로 순간 이동할 수 있도록 복귀용 마도구를 조율 중인데, 잠시만요, 전하! 시간이 촉박해서 이것부터 마무리 지어야 해요!”레이나는 다시 조금 전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마정석을 꽉 쥐고는 밀려오는 식은땀을 닦으며 마법 수식을 다급히 읊조리기 시작했다.에스메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레인을 바라보자, 그는 안도하면서도 이내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로 황녀를 응시했다.“에스메 황녀 전하. 우선 무사히 쾌차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라이신의 상태는······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라이신 경은······ 레이나 공녀의 말에 의하면, 지닌 마법력을 한계 이상으로 과하게 쓰게 되면 이처럼 가사 상태로 쓰러진다고 합니다.”당황해 하던 에스메가 말을 하려던 그 순간.바로 그때, 고요하던 황녀의 침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예상치 못한 소음에 너무 놀란 세 사람이 동시에 문가로 시선을 던졌다. 이내 문틈 너머로 상급 시녀의 다급한 전언이 들려왔다.[황녀 전하, 황제 폐하께서 곧 이쪽으로 친히 문안을 오신다는 전갈이 내려왔습니다!]이 타이밍에, 하필이면 황제라니.에스메와 레인, 그리고 할 로드와 레이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얽혀 들었다. 방 안의 모두가 그대로 얼어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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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기적 같은 완벽한 타이밍

웅장한 고함과 함께 에스메의 침실 문이 활짝 열려 젖혀졌다.가까스로 라이신을 비롯하여 레이나와 할 로드가 순간이동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그야말로 찰나의 차이로 위기를 넘긴 절체절명의 타이밍이었다.“오셨습니까, 폐하.”지옥 같은 고통을 앓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에스메는 지극히 멀쩡하고 우아한 자태로 고리타르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곁에 서 있던 레인 역시 황궁의 정예 기사답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화려한 황금빛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 들어온 고리타르 황제는 매서운 눈빛으로 황녀의 침실 내부를 한 바퀴 쓱 훑었다. 기묘하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와 어딘지 모르게 급하게 치워진 듯한 흔적이 황제의 날카로운 촉에 걸려들었다.“방이 소란스럽더구나. 이곳에 와 있다던 손님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황제의 차가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에스메는 흉포한 압박감에 온몸의 피가 서늘하게 식어내리는 것 같았다.“워낙 바쁘신 귀족 영애 분들이라 오래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고리타르 황제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치켜올렸다.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캔돔 대공가의 그 영애도?”황제의 입에서 ‘캔돔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에스메는 몸이 떨리고 얼굴까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라이신의 존재를 어찌 알고 조사를 한 것인가.하지만 에스메는 그 어느 때보다 우아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렇습니다, 폐하. 대공가의 영애께서도 제 안부를 무척 걱정해 주시더군요.”황제는 에스메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거짓을 가려내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 한참 동안 머물렀으나, 에스메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넌 지금 제법 멀쩡해 보이는구나.”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더니 몸도 마음도 몰라보게 가뿐해졌습니다.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에스메는 다시금 화사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황제의 의심을 부드럽게 쳐내었다.그 대답과 동시에, 에스메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레인의 눈동자와 은밀하게 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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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대공의 분노 폭발, 그리고...

그렇게 가르남의 하늘에도 노을이 짙어지더니, 해는 어느새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다시금 차가운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정신이 아슬아슬하게 흐려지는 와중에도 라이신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마침내 손을 거두었을 때, 섀도우의 얼굴과 상체 등 눈에 보이는 모든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으로······ 실험은 대성공이에요.”확실히 알약을 미리 복용한 덕에 정신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마법력을 통째로 쏟아부은 탓에 가슴이 턱 밑까지 가쁘게 차올랐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섀도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과 상체, 그리고 다리 곳곳을 다급하게 더듬었다.“아, 이런······. 이런 기적이, 도대체 어떻게······.”평생을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살아온 전설의 기사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문 채 눈가에 눈물까지 붉게 글썽였다.섀도우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라이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경의를 표했다.“고맙다! 라이신! 각하께서 피가 마르도록 널 찾고 계시거늘, 내 정신 좀 봐라!”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섀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다시금 복면을 치켜올린 그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지쳐 버린 라이신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자, 어서요. 우리 각하께 돌아가요.” “이 은혜는 내 평생 목숨을 바쳐 갚으마. 숨을 잠시 참아라. 좌표는 각하의 침실이다.” “아······ 네.”섀도우는 라이신의 경이로운 치유술에 단단히 감복한 듯했다. 이동하는 순간까지도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리던 사내가 순식간에 흑색 마력을 피워 올렸다.캄캄한 아공간의 어둠 속에서 라이신은 숨을 죽인 채 생각에 잠겼다. 에스메 황녀를 살려냈고, 훗날 바아르의 가장 강력한 오른팔이 될 섀도우까지 완벽히 구원해 냈으니 스스로가 이보다 더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동의 종착지가 다름 아닌 바아르의 방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급격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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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뇌를 거치지 않은 본심

바아르는 라이신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혹시 라이신이 이대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 하나만으로, 하루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던 자신을 허탈하게 되돌아보았다.그 순간, 라이신의 살결에서 풍겨오는 체향에 바아르는 또다시 이성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그저 눈앞에 이 녀석이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렸다. 제 앞에 무사히 나타나 주어서 다행인데, 묘하게도 제 몸은 다른 쪽으로 이 녀석을 갈구하는 것인지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금 뜨거운 갈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바아르는 이러다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선을 넘을 것 같아, 아쉽지만 라이신의 몸을 슬그머니 떼어놓았다.“가르남에서 왔다더니, 역시 네 몸에서 나는 향은 남다르구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어서 가서 깨끗이 씻고 올게요!”라이신은 자신이 혹시나 땀 냄새나 악취를 풍길까 봐 당황했는지, 바아르가 가둬놓은 팔 안에서 벗어나려 몸을 주뼛거렸다. 바아르는 녀석이 이대로 도망갈까 봐 걱정되어, 라이신의 허리를 다시 힘주어 감아쥐며 낮게 말을 건넸다.“네 체향이 기분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썩은 땅에는 왜 그리 자주 가는 거지?”바아르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라이신은, 무서운 추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안심했는지 이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제 땅이니까요. 너무 좋아서 거기만 가면 마법 실험도 하고 가르남도 활용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아······ 이제 그만 제 방으로 가볼게요. 하하!”바아르는 녀석을 절대 놓아줄 마음이 없었기에, 라이신의 허리를 제 쪽으로 더욱 바짝 끌어당기며 진득한 시선으로 응시했다.“어딜 가려고. 그나저나 가르남을 활용?” “네. 흙도 더 돋우고 영양 가득한 작물을 심으면······ 언젠가 풍성하게 수확할 수도 있잖아요? 그 땅을 쓸모 있게 만들어서······ 나중엔 세금도 제대로 낼게요.”그 죽어버린 땅에서 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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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오늘 같이 자자고요?

라이신 역시 예상치 못한 전개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아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아르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제 입을 급히 가렸다.“설마······ 저 지금 벌 받는 건가요?”바아르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겁먹은 라이신의 표정이 황당하면서도 묘하게 귀여웠기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래.”라이신은 순간 몸을 휘청이며 움찔했다. 긴장감에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리도록 그저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라이신의 입에서는 탄식과 함께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왔다.“······명령이니······ 알겠습니다.” *** 황궁에도 드디어 깊은 밤이 찾아왔다.황녀의 침실은 오늘 아침부터 시간차로 들이닥친 고위 인사들 탓에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어수선했다.황제가 다녀간 것을 시작으로 황태자 아처린, 세실리에와 피르닉스까지.심지어 레이나는 제 방에서 할 로드를 대공가로 데려다줄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불려와 황궁 사람들에게 꼼짝없이 심문까지 당해야 했다. 그 서슬 퍼런 분위기 탓에 할 로드는 숨죽인 채 계속 숨어 있어야만 했다.황궁의 권력자들이 돌아가며 황녀에게 문안 인사를 오다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에스메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그들이 이토록 황녀의 방을 기웃거린 진짜 이유.‘라이신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랬겠지.’캔돔 대공가의 영애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 에스메와는 대체 언제부터 그리 친밀한 관계였는지. 다들 그녀를 ‘미하엘’이라 추측하고 있으니, 훗날 거대한 문제가 되겠다는 막연한 걱정이 밀려왔다.“어휴, 나는 이만 피곤해서 가볼게요.” “레이나 공녀, 날 좀 얼른 데려다줘. 레이디의 방에 숨어 있는 거, 진짜 못할 짓이었어.”마침내 레이나와 할 로드도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있는 에스메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진심 어린 작별 인사를 건넸다.“에스메 황녀님, 몸조리 잘하세요. 그래도 이렇게 훌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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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몸서리치게 좋아서

순간 바아르의 안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번개라도 맞은 듯 머릿속은 강한 충격에 정신까지 혼미해졌다.“음, 예를 들면···.”야한 짓이라니. 설마.“막······ 옷도 벗기셨고······ 몸도 만지셨고······. 그리고······.” “뭐, 뭐···? 옷? 몸을?”움켜쥔 이불 위로 팔뚝의 힘줄이 돋을 만큼 바아르는 굳어버렸으나, 라이신은 잠을 청하며 몸을 잘게 움찔거릴 뿐이었다.“짐승처럼··· 제 몸을 거칠게 다루시면서 이런 짓, 저런 짓을 막······.”잠깐, 이건 깨워서 물어야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게 하면 절대 입을 열지 않겠지. 진실을 들을 기회는 오직 지금, 이 찰나뿐일지도 몰랐다.바아르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잘게 일렁였다. 마른침이 쓰게 넘어갔다.“네 정체가 뭐야.”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비밀은 아직······.”라이신은 이미 깊은 잠의 늪으로 침잠해 가고 있었다.잠 기운이 완전히 가셔버린 바아르는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서늘한 눈으로 라이신을 내려다보았다.“······그럼 뭐라도 더 말해봐, 라이신. 비밀이든, 진실이든. 단 하나만 더.”다급해진 그가 라이신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 잡았다.이대로 녀석이 눈을 감고 수면 속으로 도망쳐버린다면, 머릿속을 갉아먹는 이 갈증을 안고 밤새 오롯이 버텨야 했다. 바아르의 전신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슬며시 눈을 감은 라이신은 제 입을 가려 비밀을 단속하려 하면서도, 취한 듯 중얼중얼 말을 흘렸다.“언젠가 대공가를 떠나야 하는데······ 짐승 같은 각하도······ 이성적인 바아르님도······.” “그래서, 내가 뭐!”바아르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숨이 턱 막혔다.“······좋아해요. 각하.”그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든 라이신을 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시각, 달빛조차 숨어든 황궁의 깊숙한 침실.황녀 에스메가 제 호위 기사인 레인의 품에 깊숙이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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