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81 - Chapter 90

269 Chapters

#81. 숨을 쉬는 법도 잊은 채

실험이라니. 대체 무슨 실험을 의미하는 걸까.그 의문이 라이신의 머릿속을 스치기도 전에, 바아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거침없이 뽑아 들었다. 달빛을 흡수한 검신이 선득하게 빛을 발했다.“라이신! 준비해!”“대체 무엇을······.”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바아르의 묵직한 검신 위로 무시무시한 농도의 마력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거칠고 날카로운 오러가 검을 집어삼키는 광경에 라이신의 눈이 커졌다.“어? 각하! 설마!”그 순간, 무뚝뚝하기만 하던 바아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혹적으로 휘어졌다. 눈빛 가득 나른한 유열을 담은 채 웃어 보이던 그가, 돌연 잔인할 만큼 거대하고 살벌한 오러를 가차 없이 뿜어냈다.“라이신, 막아!”“윽······ 네!”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며 날아든 검기를 향해 라이신은 본능적으로 검을 맞받아쳤다.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손끝이 짓눌린 듯 잘게 떨려왔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라이신이 쳐낸 검기의 여파가 단단한 결계의 벽에 부딪치며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폭발했다.대기를 뒤흔드는 웅장한 진동에 결계 안의 공기가 비틀렸다. 라이신은 그제야 바아르가 말한 '실험'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아르는 지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 절대적인 공간에서 제게 극한의 검술 훈련을 시켜주려는 것이었다.고개를 돌려보니, 오러의 충격을 직격으로 맞은 결계의 한 축이 안개처럼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일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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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 입을 틀어 막더라도

쿵, 쿠우웅-! 쿠궁-!바아르의 무자비한 일격을 정면으로 맞은 올리타스 나무 수십 그루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차례차례 힘없이 쓰러졌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대지를 찧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라이신은 밀려드는 충격에 숨을 제대로 내쉬지도 못한 채, 그저 목구멍 뒤로 가쁜 숨을 들이마시기만 했다. 커다란 고성능 폭탄이 눈앞에서 터진 것만 같은 청각적 충격에 고막이 먹먹하게 마비되어 갔다. 시야가 핑글 돌며 서서히 암전되기 시작했다.쿵, 쿠우웅-!귀를 찢는 이 잔인한 소음은 제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했던 그 지독한 공포의 감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엔진이 이미 굉음을 내지르며 처참하게 폭발하던 순간. 제어력을 잃은 전투기가 맹렬한 속도로 추락하며 민가로 고두박질치려 했던 바로 그 끔찍한 찰나.방향키를 잡은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채,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제발 더 멀리······.자신이 이 추락 속에서 반드시 부서져 죽을 것을 확신하면서도, 얼굴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비행기를 몰았던 그 외롭고 처절했던 마지막 기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트라우마의 파편들이 폭발음과 함께 라이신의 영혼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라이신?”멀어지는 바아르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라이신의 가슴이 가파르게 들썩이며 통제할 수 없는 격렬한 과호흡이 시작되었다.죽음의 공포가 영혼을 잠식한 순간, 지독한 발작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암흑 속으로 침잠해가던 바로 그때였다.단단한 사슬에 옭아매어지듯, 거대하고 뜨거운 온기가 라이신의 온몸을 강하게 구속했다. “읍······!”공포로 차갑게 굳어가던 감각 위로, 벼락같은 자극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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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지독하게 번지는 열꽃

많이 당황했는지 라이신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더듬으며 바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바아르는 그런 라이신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폈다. 다행히 울거나, 괴로워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저, 각하.”“어.”“제가 각하의 오러가 지닌 위력에 압도당해서······ 잠시 정신을 놓은 것까지는 알겠는데요.”라이신은 우물쭈물하며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붉어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까지 하자, 바아르의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각하, 혹시······.”“혹시?”“이런······ 취향이 있으셨습니까?”이런 취향.그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날아드는 순간, 바아르는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지 못했다.라이신은 그저 해맑은 눈을 깜빡이며, 답을 재촉하듯 바아르의 단단한 입술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정작 사고를 친 것은 자신이었으나, 밀려드는 당황스러움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뭐 그럴지도.”뻔뻔하게 굴어도 되는 것.이럴 때 자신이 대공인 게 다행이라 생각하는 바아르였다.***얼마 전 가라앉는 듯했던 에스메의 몸에 다시금 지독한 열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아직 신음이 터질 만큼 앓아누운 것은 아니었으나,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안색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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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깊은 밤에는 남자 친구가 필요해!

그날 밤.쾅, 쾅, 쾅! 쿵, 쿵, 쿵!“저기요! 저기요!”술에 취한 레이나는 할 로드네 빵집 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요즘 마음이 왜 이리 싱숭생숭한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충동적으로 할 로드를 찾게 되었다. 밤도 깊었고 모두가 잠든 시각이었으나 레이나는 당당했다. 이미 제 마음속에서 할 로드를 '친구'라고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불 켜진 빵집 입구에 걸린 메모를 보니 '주인이 여행을 가서 한동안 문을 열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은 안 계셔도 할 로드는 당연히 안에 있을 거라 확신한 레이나는 목청을 높여 그를 불렀다.“어머, 오늘 날 잘 잡았네. 호호. 할 로드! 어이! 할 로드!”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빵집 문이 벌컥 열렸고 할 로드가 눈을 비비며 등장했다. 그는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퇴근했는지 기사 복장을 고스란히 입고 있는 그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하아······ 미치겠군. 당신 뭐야?”레이나는 할 로드를 보는 순간, 그 몸 주변에서 오늘 오러 훈련을 아주 고되게 받은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피곤해하며 하품을 하는 게 단번에 이해가 갔다.“어머, 자기. 오늘 검술 훈련 제대로 했구나? 호호, 피곤하겠네.”“어.”할 로드는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레이나의 눈을 응시했다. 레이나는 왜 그가 더 화를 내지 않는지 의아해하던 그때였다.“울었어? 무슨 일 있었나?”그 말에 레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울었나 싶어 손등으로 쓱 제 눈가를 비벼 보았다.“&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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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슬아슬, 꿈만 같은 밤이잖아

레이나는 스스로가 민망해 쿠키나 먹어야겠다 싶었는데, 제 손에 있던 쿠키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기사님의 순정이라니. 쿠키 만큼이나 달콤하네. 멋지다. 나는 맨날 짝사랑이 힘든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레이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쿠키가 놓인 선반으로 향했다. 새로 하나를 꺼내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쿠키를 조금씩 베어 물기 시작했다.할 로드는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기에 빵집은 내일부터 당분간 문을 닫을 거라며, 진열대에 남은 쿠키를 전부 꺼내 종이봉투에 담았다. 그러고는 레이나의 눈앞에 툭 내밀었다.“그냥 다 가져가.”레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으며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어머! 너무 스위트 하잖아?”레이나는 갑자기 직접 몸을 움직여 은화를 수납함 통에 쏙 집어넣고는 배시시 웃었다.그냥 주려 했는데 저리 선을 지키다니, 할 로드 역시 결국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꺼내더니, 가게 한편에 놓인 물통에서 시원한 물을 채웠다.“물이랑 같이 먹어. 아주 VIP 고객이시네.”“어머, 자기 참 세심하다. 하지만 물 대신 난 술이 더 필요한데. 우리 번화가로 나가서 럼주라도 한잔할까?”“나랑 밤새 연애 상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뭐,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고. 나름 고급 정보가 있기도 하고. 그냥 두런두런 이야기나 좀 나누고 싶어서.”“정보?”레이나는 우선 할 로드가 건네준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조금 전 먹던 쿠키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음···&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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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운명의 그대, 길을 열어 주길

라이신은 황당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눈보다 코가 먼저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주변에서 술 냄새가 거칠게 진동을 했고, 둘은 대체 얼마나 마셔댄 것인지 얼굴색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거봐, 라이신 여기 있다니까?”“진짜네? 할 로드의 추측이 아주 정확했어. 다시 봤어, 자기야. 하하!”할 로드는 거보라며, 라이신은 원래 이 연병장을 좋아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오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어떻게 두 분이 같이······.”“안녕, 라이신.”레이나 역시 할 로드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할 로드 경? 여기서 자려는 거예요? 술 냄새는 별로 안 나는데, 많이 마신 거예요?”“딱 좋을 때 빵집 문을 닫아 버려서······ 취한 것보다 오러 훈련을 과하게 했더니 피곤하네.”할 로드는 그새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황당함에 실소만 터지던 라이신은 슬그머니 레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공녀님, 바닥에 이렇게 앉으시면 안 돼요. 어휴, 귀한 분이 어쩌다가.”“이제 라이신, 너도 아주 귀한 사람이야.”“대체 할 로드 경이랑은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할 로드랑 럼주 한잔했거든. 우린 전혀 안 취했어. 그냥 쿠키도 남았고, 네 생각이 나서 찾아온 거야.”이 심야에 대공가 정문을 정공법으로 떡 하니 통과해 들어올 정도면 만취가 확실하다 싶었지만,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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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위험한 초대, 응답할 용기

라이신은 넓은 연병장을 둘러본 뒤, 대공저 너머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은 파르교산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자신은 이제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확고한 신분도 존재했다. 그래서 천천히 셔츠 안쪽에서 바아르에게 받았던, 대공비의 증표가 새겨진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목걸이를 쥔 라이신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레인 경, 에스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요. 내겐 이제 당당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분이 있어서 괜찮아요.”“······라이신. 지금 뭐라고 했어?”라이신의 말을 듣자마자 레인은 너무 놀라 그녀가 보여 준 목걸이의 표찰을 다급히 살폈다.그건 분명 캔돔 대공가의 상급 기사이자, 귀족 신분을 나타내는 명확한 작위까지 새겨진 표식이었다. “······라이신, 네 정체가 대체 뭐야? 어떻게······ 분명 이곳의 하인이라 하지 않았나.”“레인 경, 그사이 제게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레인 경, 그쪽도 공녀님이 레인 경이라고 부르셨잖아요?”“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럼······ 넌 지금 에스를 구하기 위해 대공가를 잠시 나갈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한 건가?”“에스를 한번 치유해 볼게요.”그 말에 감격한 레인이 라이신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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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미소년의 변신은 유죄

지금 라이신은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에스가 이 나라 최고의 귀한 신분인 에스메 황녀라는 것도, 지금 이곳이 평범한 하녀가 묶는 처소가 아닌 황궁이라는 사실도, 그녀가 위독하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일단 에스에게로 데려다주세요. 제가 치유를 시작할게요.”우선 그녀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기에, 오직 그것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그때 레이나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침대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셔 댔다. 난생처음 겪은 순간이동이 레이나에게는 꽤 버거웠는지,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으윽, 레인 경. 윽! 처음부터 황녀님 방으로 바로 순간이동을 하지! 욱, 속 울렁거려!” “그곳은 언제 시녀들이 들락날락거릴지 몰라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레이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레인은 잠시 멈칫거리다 모두에게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이내 라이신의 손목을 잡고 방문을 나설 채비를 했다.바로 그때, 레이나가 문 앞을 척 가로막았다.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영리한 눈빛을 빛내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에스메 황녀님 방까지 이 모습으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누가 봐도 수상한 침입자로 볼 것 아니에요?” “아, 그렇군······.”레인이 아차 싶어 라이신을 돌아보았다. 간소한 기사 복장이기는 하지만 황궁에 다닐 법한 정식 제복 차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권위 있는 귀족의 부유한 행색도 아니라 확실히 눈에 띌 만했다.“황궁에는 수많은 눈과 귀가 있어요. 다행히 여기서 제 방이 멀지 않으니, 필요한 장신구와 옷들을 얼른 챙겨 올게요.” “하긴, 변장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한데. 그대 숙소에 뭐가 있길래 그러는 겁니까.”레인은 의아한 얼굴로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괜히 어설픈 기사의 모습으로 꾸미면 다들 더 경계할 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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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이시여! 제발, 자비를!

라이신은 레이나의 최고급 드레스를 얻어 입었으니 당연히 화려했고, 누가 보아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독보적인 자태를 자랑했다. 라이신 본인이 슬쩍 보아도 굴곡진 몸매에, 원래 검술로 다져진 엉덩이와 골반 라인이 탄력이 넘쳤기에 드레스를 입혀놓으니 대단한 여성미를 뽐내는 체형이 되어 있었다.심지어 레이나는 평소 기분 전환을 위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색의 화려한 가발들까지 챙겨왔던 터라, 라이신의 짧은 머리도 풍성한 금발의 긴 가발로 완벽하게 커버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자, 어서 서둘러요. 혹시 모르니 나는 라이신이 벗어둔 옷과 신발을 챙길게요. 라이신의 레이피어는 할 로드 경이 챙겨줘요.” “전 그럼 황녀님께 드릴 사과를 챙기겠습니다. 레인 경, 여기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 좀 빌릴게요.” “라이신. 이 긴박한 와중에 용케 쿠키와 물통까지 야무지게 챙겨오다니 정말 대단하다.”모두의 마음은 급했지만, 이왕 주사위가 던져진 이상 여기까지 온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고자 단단히 힘을 모았다.“서둘러 이동합시다!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라이신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바르게 걷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황궁의 복도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할 로드는 그들의 뒤에서 자신의 검과 라이신의 레이피어까지 함께 고쳐 차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라이신을 밀착 호위했다.레인의 방은 동궁의 3층이었고, 에스메 황녀는 몸이 불편한 관계로 특별히 1층을 쓰고 있었기에 갈 길이 제법 멀었다. 이 넓은 황궁에서 층수를 넘나들며, 그것도 수많은 눈이 도사리는 황궁 내부를 이동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임이 분명했다.사방이 어스름한 심야였지만 황궁은 달랐다. 깊은 밤인데도 많은 기사가 삼엄하게 순찰을 돌았고, 시녀들 역시 분주하게 복도를 오갔다.“이렇게 깊은 밤에도 황궁에 사람이 많다니.” “거봐요, 다들 내 말이 맞죠?” “레이나 공녀, 그대의 혜안이 옳았습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입니다.”할 로드와 레이나,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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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젠장, 너무 가혹한 벌이잖아

이 세계의 절대 악, 황제 고리타르.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 라이신은 온몸이 굳어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다.“네, 폐하. 그러합니다.”대충 라이신은 그리 말하며 스레기니에게 배운 예법대로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때, 세실리에가 빤히 할 로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뜬금없이 라이신의 옆에 서 있는 할 로드에게 성큼 다가서더니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기사님은 그럼?”황제 고리타르 역시 할 로드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어, 오히려 지금은 할 로드가 대처를 잘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판국이 되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캔돔가 기사로 임명받은 할 로드라고 합니다!”어찌나 할 로드가 대답을 씩씩하고 당당하게 하는지, 라이신은 잘했다고 그의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할 로드 경, 반갑습니다. 혹시 제가 에스메 황녀님께 함께 가도 될까요?”이런, 왜 그녀가 동행하려 하는 건지!이건 명백한 또 다른 위기였다. 라이신이 긴장한 채 할 로드를 바라보자, 그는 이미 사색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레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세실리에와 고리타르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말문을 열었다.“대마법사 세실리에 님께서 황녀 전하의 미열 정도에 이리 늦은 시각까지 고생하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조금 전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레이디 분들과 원래 내일 차를 마시기로 선약이 있으셔서 미리 들른 것뿐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흘러나오는 말들이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황궁에서 오랫동안 머문 노련한 기사답게, 레인은 여유롭게 기지를 발휘했다.그러자 세실리에는 아하,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황제를 한번 바라보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아, 그러시군요. 폐하, 어서 침소로 가시지요.” “그래.”고리타르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 번 더 할 로드와 라이신을 힐끔 바라보고는 이내 멀어져 갔다. 그 뒤를 황제의 호위 기사들이 엄숙하게 따랐고, 라이신은 그제야 조마조마했던 간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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