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全部章節:第 81 章 - 第 90 章

284 章節

#81. 숨을 쉬는 법도 잊은 채

“라이신! 준비해!” “네?”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바아르의 묵직한 검신 위로 무시무시한 농도의 마력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거칠고 날카로운 오러가 검을 집어삼키는 광경에 라이신의 눈이 커졌다.눈빛 가득 나른한 유열을 담은 채 웃어 보이던 그가, 돌연 잔인할 만큼 거대하고 살벌한 오러를 가차 없이 뿜어냈다.“라이신, 막아!”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며 날아든 검기를 향해 라이신은 본능적으로 검을 맞받아쳤다.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라이신이 쳐낸 검기의 여파가 단단한 결계의 벽에 부딪치며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폭발했다.대기를 뒤흔드는 웅장한 진동에 결계 안의 공기가 비틀렸다. 라이신은 그제야 바아르가 말한 '실험'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아르는 지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 절대적인 공간에서 제게 극한의 검술 훈련을 시켜주려는 것이었다.“이번에는 네 차례다. 전력으로 덤벼!”기사로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 오러를 제어하고 방출하는 초인의 기술. 라이신의 입꼬리가 호기롭게 치고 올라갔다. 한껏 생기 있게 미소 지은 그녀가 곧장 검을 고쳐 잡고 허공을 가르며 휘둘렀다.바아르가 묵직하게 일격을 던지면, 라이신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받아치고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오러를 발현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피워내도 좋다!” “넵!”이 세계에서의 실전 경험은 대공가에서의 연습이 전부였지만, 전생의 사관학교 시절 검도도 익힌 그녀였다.‘오늘 여기서 발작이 일어나도 레이나 님이 주신 비상약이 있으니까!’타고난 신체 조건과 뛰어난 전술적 감각 덕분에, 바아르가 보여주는 정교한 동작의 궤적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해 나갔다.바아르는 칠흑 같은 암흑과 타오르는 적색의 연기를 번갈아 검에 두르며 라이신의 한계를 시험했고, 라이신은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찬란한 황금빛 오러를 피워내며 맹렬하게 검을 맞댔다.그렇기에 이 밤의 단련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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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 입을 틀어 막더라도

바아르의 무자비한 일격을 정면으로 맞은 올리타스 나무 수십 그루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차례차례 힘없이 쓰러졌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대지를 찧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라이신은 밀려드는 충격에 숨을 제대로 내쉬지도 못한 채, 그저 목구멍 뒤로 가쁜 숨을 들이마시기만 했다. 엔진이 이미 굉음을 내지르며 처참하게 폭발하던 순간. 제어력을 잃은 전투기가 맹렬한 속도로 추락하며 민가로 고두박질치려 했던 바로 그 끔찍한 찰나.방향키를 잡은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채,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제발 더 멀리······.자신이 이 추락 속에서 반드시 부서져 죽을 것을 확신하면서도, 얼굴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비행기를 몰았던 그 외롭고 처절했던 마지막 기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트라우마의 파편들이 폭발음과 함께 라이신의 영혼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라이신!”멀어지는 바아르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라이신의 가슴이 가파르게 들썩이며 통제할 수 없는 격렬한 과호흡이 시작되었다.죽음의 공포가 영혼을 잠식한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고 암흑 속으로 침잠해가던 바로 그때였다.“읍······!”공포로 차갑게 굳어가던 감각 위로, 벼락같은 자극이 쏟아졌다. *** 얼마 전 가문이 부리던 그림자, 섀도우가 황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밀보를 전해왔을 때부터 바아르의 내면에는 은밀한 조바심이 일고 있었다.다가올 폭풍 속에서 라이신이 제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오러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평소라면 제 무력의 10분의 1도 보여주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오러의 진정한 격을 각인시켜 주기 위해 조금 더 힘을 실었던 것인데.지독한 착오였다. 라이신은 바아르의 오러를 마주한 순간, 영혼이 찢겨 나간 사람처럼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숨을 못 쉬는 건가? 라이신!”내뱉지 못하는 숨을 그저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만 하는 과호흡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끌어안고 귓가에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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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지독하게 번지는 열꽃

바아르는 라이신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폈다. 다행히 울거나, 괴로워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제가 각하의 오러가 지닌 위력에 압도당해서······ 잠시 정신을 놓은 것까지는 알겠는데요.”라이신은 우물쭈물하며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그런데?” “이런······ 취향이 있으셨습니까?”이런 취향.그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날아드는 순간, 바아르는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지 못했다.라이신은 그저 해맑은 눈을 깜빡이며, 답을 재촉하듯 바아르의 단단한 입술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정작 사고를 친 것은 자신이었으나, 밀려드는 당황스러움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뭐 그럴지도.”뻔뻔하게 굴어도 되는 것.이럴 때 자신이 대공인 게 다행이라 생각하는 바아르였다. *** 얼마 전 가라앉는 듯했던 에스메의 몸에 다시금 지독한 열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아직 신음이 터질 만큼 앓아누운 것은 아니었으나,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안색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에스메는 당장 시녀를 부를 수 없었다. 다리에 또 염증이 도진 것이 분명했기에,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침상 머리맡에서 조심스럽게 제 수발을 들어주는 레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레인 경, 그만 퇴근하세요.”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그가 자신을 돌보느라 평소에도 과도한 업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에스메 역시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에스메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이 넓고 차가운 황궁에서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은 오직 레인, 그 하나뿐이었으니까.너무도 소중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건만, 비정한 현실은 늘 어긋나기만 했다.“이런 추한 모습······ 보이기 싫어요.”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레인은 아예 밤을 새울 작정인지, 의자를 침대 바짝 당겨앉았다. 이내 팔을 가볍게 풀고 허리를 쭉 펴며 굳은 몸을 움직이던 그가,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에스메를 응시했다.“레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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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깊은 밤에는 남자 친구가 필요해!

그날 밤.쾅, 쾅, 쾅! 쿵, 쿵, 쿵!“저기요! 저기요!”술에 취한 레이나는 할 로드네 빵집 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요즘 마음이 왜 이리 싱숭생숭한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충동적으로 할 로드를 찾게 되었다. 밤도 깊었고 모두가 잠든 시각이었으나 레이나는 당당했다. 이미 제 마음속에서 할 로드를 '친구'라고 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불 켜진 빵집 입구에 걸린 메모를 보니 '주인이 여행을 가서 한동안 문을 열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은 안 계셔도 할 로드는 당연히 안에 있을 거라 확신한 레이나는 목청을 높여 그를 불렀다.“어머, 오늘 날 잘 잡았네. 호호. 할 로드! 어이! 할 로드!”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빵집 문이 벌컥 열렸고 할 로드가 눈을 비비며 등장했다. 그는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퇴근했는지 기사 복장을 고스란히 입고 있는 그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하아······ 미치겠군. 당신 뭐야?”레이나는 할 로드를 보는 순간, 그 몸 주변에서 오늘 오러 훈련을 아주 고되게 받은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피곤해하며 하품을 하는 게 단번에 이해가 갔다.“어머, 자기. 오늘 검술 훈련 제대로 했구나? 호호, 피곤하겠네.”“어.”할 로드는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레이나의 눈을 응시했다. 레이나는 왜 그가 더 화를 내지 않는지 의아해하던 그때였다.“울었어? 무슨 일 있었나?”그 말에 레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울었나 싶어 손등으로 쓱 제 눈가를 비벼 보았다.“&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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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슬아슬, 꿈만 같은 밤이잖아

레이나는 스스로가 민망해 쿠키나 먹어야겠다 싶었는데, 제 손에 있던 쿠키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기사님의 순정이라니. 멋지다. 나는 맨날 짝사랑이 힘든거라 생각했는데.”할 로드는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기에 빵집은 내일부터 당분간 문을 닫을 거라며, 진열대에 남은 쿠키를 전부 꺼내 종이봉투에 담았다. 그러고는 레이나의 눈앞에 툭 내밀었다.“그냥 가져가.”레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으며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너무 스위트 하잖아?”레이나는 갑자기 직접 몸을 움직여 은화를 수납함 통에 쏙 집어넣고는 배시시 웃었다.그냥 주려 했는데 저리 선을 지키다니, 할 로드 역시 결국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물이랑 같이 먹어. 아주 VIP 고객이시네.” “자기 참 세심하다. 하지만 물 대신 난 술이 더 필요한데.” “나랑 밤새 연애 상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고. 나름 고급 정보가 있기도 하고.” “정보?”레이나는 우선 할 로드가 건네준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조금 전 먹던 쿠키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음······ 대공가의 미하엘 공녀는 아무래도 아처린 황태자와 조만간 국혼을 치러야 할지도 몰라.” “······뭐?”그 한마디에 할 로드의 잠이 번쩍 깼는지, 더는 하품이 나오지 않았다. 멍하던 눈동자에도 날카로운 힘이 실렸다. “그럼, 미하엘 공녀님을 전담 호위하는 라이신은?”레이나 역시 술기운을 쫓아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만지작거리던 쿠키를 내려놓았다.“호위 기사도······ 특별한 경우에는 레이디를 따라 황궁으로 적을 옮기는 경우가 있지.”콰앙!할 로드의 단단한 주먹이 빵집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고요하던 빵집 내부에 거친 굉음이 위태롭게 울려 퍼졌다. *** 간밤에 레인은 에스메와 깊은 키스를 나누고, 그녀를 제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잠을 재웠다.처음에는 에스메가 얌전히 안정을 취하는 듯해 레인 역시 안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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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운명의 그대, 길을 열어 주길

라이신은 황당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눈보다 코가 먼저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거봐, 라이신 여기 있다니까?” 할 로드는 거보라며, 라이신은 원래 이 연병장을 좋아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오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어떻게 두 분이 같이······.” “안녕, 라이신.”레이나 역시 할 로드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할 로드? 여기서 자려는 거야?” “딱 좋을 때 빵집 문을 닫아 버려서······ 취한 것보다 훈련을 과하게 했더니 피곤하네.”할 로드는 그새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황당함에 실소만 터지던 라이신은 슬그머니 레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공녀님, 바닥에 이렇게 앉으시면 안 돼요. 어휴, 귀한 분이 어쩌다가.” “이제 라이신, 너도 귀한 사람이야.” “대체 할 로드랑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쿠키 좀 먹을래?”이 심야에 대공가 정문을 정공법으로 떡 하니 통과해 들어올 정도면 만취가 확실하다 싶었지만, 라이신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감사해요. 공녀님도 좀 드세요.” “난 목이 마르네.”라이신은 레이나가 건네준 종이봉투 속에서 쿠키를 하나 꺼내 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하, 하고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마침 바아르가 건네주었던 스틸 물통이 손에 걸려, 그곳에 깨끗한 물을 가득 채운 뒤 입구를 꼼꼼히 닦아 레이나에게 건넸다.“이거 드세요.” “어머! 고마워.”레이나는 시원하게 물을 들이켠 뒤, 본인 역시 입구를 잘 닦아 다시 라이신에게 건네주었다. 라이신은 제 가슴팍을 가볍게 빳빳이 두드렸다. 그 안에 고이 간직해 둔 약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현했다.“공녀님, 그 약은 정말 감사해요. 아직 하나도 안 먹었어요. 대신 앞으로 제 마력의 한계도 좀 제대로 확인해 보려고요.” “그런데, 그 약은 좀 많이 특별해. 실험실 잠금장치 안에 보관되어 있던 거라 아주 귀한 약이거든. 더 찾아봤는데도 안 나오더라.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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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위험한 초대, 응답할 용기

라이신은 넓은 연병장을 둘러본 뒤, 대공저 너머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은 파르교산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자신은 이제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확고한 신분도 존재했다. 그래서 천천히 셔츠 안쪽에서 바아르에게 받았던, 대공비의 증표가 새겨진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목걸이를 쥔 라이신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레인, 에스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요. 내겐 이제 당당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분이 있어서 괜찮아요.” “······라이신. 지금 뭐라고 했어?”라이신의 말을 듣자마자 레인은 너무 놀라 그녀가 보여 준 목걸이의 표찰을 다급히 살폈다.그건 분명 캔돔 대공가의 상급 기사이자, 귀족 신분을 나타내는 명확한 작위까지 새겨진 표식이었다. “하인이라 하지 않았나.” “레인, 그사이 제게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럼······ 넌 지금 에스를 구하기 위해 대공가를 잠시 나갈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한 건가?” “에스를 한번 치유해 볼게요.”그 말에 감격한 레인이 라이신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할 로드가 레인의 그 팔을 팍, 하고 거칠게 쳐냈다.“절대 안 돼! 라이신의 치유 능력은 한 번 쓰고 나면 몸에 엄청난 무리가 따르는 일이야! 대공 각하께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 라이신. 너 그때 오러를 다루려다 쓰러진 적도 있었잖아? 조심해야 해.”할 로드와 레이나의 완강한 만류에도 라이신은 오히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문을 열었다.“제 능력은, 고통받는 누군가를 구하라고 신이 부여해 준 사명 같아요.”라이신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레인의 눈동자에 강렬한 의지와 집념이 서렸다. 그는 절실함을 담아, 품 안에서 마도구를 꺼내 들며 결연하게 말했다.“라이신, 부탁해. 에스를 구해줘. 순간이동으로 나와 함께 가자!”레인의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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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미소년의 변신은 유죄

지금 라이신은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에스가 이 나라 최고의 귀한 신분인 에스메 황녀라는 것도, 지금 이곳이 평범한 하녀가 묶는 처소가 아닌 황궁이라는 사실도, 그녀가 위독하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일단 에스에게로 데려다주세요. 제가 치유를 시작할게요.”우선 그녀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기에, 오직 그것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그때 레이나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침대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셔 댔다. 난생처음 겪은 순간이동이 레이나에게는 꽤 버거웠는지,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으윽, 레인, 윽! 처음부터 황녀님 방으로 바로 순간이동을 하지! 욱, 속 울렁거려!” “레이나 공녀, 이제 말 조심 하십시오. 여기는 황궁입니다.”레인은 잠시 멈칫거리다 모두에게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이내 라이신의 손목을 잡고 방문을 나설 채비를 했다.바로 그때, 레이나가 문 앞을 척 가로막았다.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영리한 눈빛을 빛내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알았어요. 술이 다 깨버렸으니 전부 귀족이니 예법을 차리고 말을 하도록 해요. 그리고 에스메 황녀님 방까지 이 모습으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누가 봐도 수상한 침입자로 볼 것 아니에요?” “아, 그렇군요······.”레인이 아차 싶어 라이신을 돌아보았다. 간소한 기사 복장이기는 하지만 황궁에 다닐 법한 정식 제복 차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권위 있는 귀족의 부유한 행색도 아니라 확실히 눈에 띌 만했다.“황궁에는 수많은 눈과 귀가 있어요. 다행히 여기서 제 방이 멀지 않으니, 필요한 장신구와 옷들을 얼른 챙겨 올게요.” 레인은 의아한 얼굴로 레이나를 빤히 바라보았다.“괜히 어설픈 기사의 모습으로 꾸미면 다들 더 경계할 것 아니에요? 라이신은 워낙 선이 고운 미소년이라······ 몸도 가늘고 피부도 좋으니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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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이시여! 제발, 자비를!

라이신은 레이나의 최고급 드레스를 얻어 입었으니 당연히 화려했고, 누가 보아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독보적인 자태를 자랑했다. 심지어 레이나는 평소 기분 전환을 위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색의 화려한 가발들까지 챙겨왔던 터라, 라이신의 짧은 머리도 풍성한 금발의 긴 가발로 완벽하게 커버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자, 어서 서둘러요. 혹시 모르니 나는 라이신이 벗어둔 옷과 신발을 챙길게요. 라이신의 레이피어는 할 로드 경이 챙겨줘요.” “전 그럼 황녀님께 드릴 사과를 챙기겠습니다. 레인 경, 여기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 좀 빌릴게요.” “라이신. 이 긴박한 와중에 용케 쿠키와 물통까지 야무지게 챙겨오다니 정말 대단하다.”모두의 마음은 급했지만, 이왕 주사위가 던져진 이상 여기까지 온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고자 단단히 힘을 모았다.“서둘러 이동합시다!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라이신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바르게 걷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황궁의 복도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할 로드는 그들의 뒤에서 자신의 검과 라이신의 레이피어까지 함께 고쳐 차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라이신을 밀착 호위했다.레인의 방은 동궁의 3층이었고, 에스메 황녀는 몸이 불편한 관계로 특별히 1층을 쓰고 있었기에 갈 길이 제법 멀었다. 이 넓은 황궁에서 층수를 넘나들며, 그것도 수많은 눈이 도사리는 황궁 내부를 이동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임이 분명했다.깊은 밤인데도 많은 기사가 삼엄하게 순찰을 돌았고, 시녀들 역시 분주하게 복도를 오갔다.“이렇게 깊은 밤에도 황궁에 사람이 많다니.” 할 로드와 레이나, 그리고 레인이 변신을 하길 잘했다고 덕담을 나누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라이신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온몸의 세포가 찌릿찌릿하게 곤두서는 기분이었다.한 걸음, 두 걸음.에스메 황녀의 처소는 왜 이리도 아득하게 먼 것인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떨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바로 그 순간이었다.가장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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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젠장, 너무 가혹한 벌이잖아

“네, 폐하. 그러합니다.”대충 라이신은 이 세계의 절대 악, 황제 고리타르에게 그리 말하며 스레기니에게 배운 예법대로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때, 세실리에가 빤히 할 로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뜬금없이 라이신의 옆에 서 있는 할 로드에게 성큼 다가서더니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기사님은 그럼?”황제 고리타르 역시 할 로드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어, 오히려 지금은 할 로드가 대처를 잘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판국이 되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캔돔가 기사로 임명받은 할 로드라고 합니다!”어찌나 할 로드가 대답을 씩씩하고 당당하게 하는지, 라이신은 잘했다고 그의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할 로드 경, 반갑습니다. 혹시 제가 에스메 황녀님께 함께 가도 될까요?”이건 명백한 또 다른 위기였다. 라이신이 긴장한 채 할 로드를 바라보자, 그는 이미 사색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레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세실리에와 고리타르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말문을 열었다.“대마법사 세실리에 님께서 황녀 전하의 미열 정도에 이리 늦은 시각까지 고생하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레이디 분들과 원래 내일 차를 마시기로 선약이 있으셔서 미리 들른 것뿐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황궁에서 오랫동안 머문 노련한 기사답게, 레인은 여유롭게 기지를 발휘했다.그러자 세실리에는 아하,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황제를 한번 바라보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아, 그러시군요. 폐하, 어서 침소로 가시지요.” “그래.”고리타르는 발걸음을 옮기며 한 번 더 할 로드와 라이신을 힐끔 바라보고는 이내 멀어져 갔다. 그 뒤를 황제의 호위 기사들이 엄숙하게 따랐고, 라이신은 그제야 조마조마했던 간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완전히 시야에서 고리타르와 그 일행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할 로드가 가장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 황제 폐하까지 만나다니.” “할 로드, 아까 네 목소리 진짜 크더라.”긴장이 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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