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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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내 거라서 나만 손댈 수 있지

“각하, 제가 길을 닦아 놨어요. 대신 금방 회색 연기로 인해 길은 막히고 냄새도 차오를 거예요.”아, 냄새라.라이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아르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상쾌하고 온화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그새 이곳의 향이 변했구나.” “네, 길도 꽤 그럴듯하죠?” “이걸 전부 네가 했다고?” “네. 대신 시간은 좀 걸렸어요. 제가 활주로처럼··· 아, 하하, 훗날 마차가 들어와도 되도록 공을 좀 들였답니다.” “뭐? 마차?” “처음에는 물을 뿌리고 발밑에 진흙만 굳혔어요. 그런데 특훈 덕분에 마법력이 훨씬 강해졌어요.” “특훈?”바아르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라이신의 허리를 더 꽉 감싸 안고는 말을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말발굽이 다그락다그락 경쾌한 소리를 냈다. 라이신은 손을 앞으로 뻗어 황금빛 바람을 내보이면서도, 힐끔힐끔 바아르를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각하, 뒤 좀 보세요.”라이신의 말에 바아르가 고개를 돌리자, 가르남으로 들어왔던 입구는 어느새 회색 안개 너머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황금빛 연기를 맞이하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올수록 바아르의 눈은 절로 휘둥그레졌다.“이런!”심지어 공터까지 있었다. 어느 지점부터는 회색 안개가 걷히고 멀쩡한 나무와 개울, 심지어 꽃과 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가르남 깊숙한 곳에 이리 찬란한 비경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 바아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이곳은 청량감이 대단했고, 숲속 한가운데는 맑은 기운만 가득했다. 제국 전체가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콸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오랜 세월 버려진 탓에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순수의 공간이었다.마수가 죽은 잔재나 나무가 썩은 부산물들이 비바람에 쓸려 가르남 가장자리에만 악취를 풍겼던 모양이었다. 결계 같은 회색 연기가 그득했을 뿐, 실제 가르남 영지의 중심은 깨끗하고 비옥하기만 했다.천천히 말에서 내려온 바아르는 라이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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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불길하게, 치밀하게

그날 밤, 세실리에는 황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부터 벗어던졌다. 욕실로 들어가 미리 뜨겁게 받아 놓은 물에 몸을 담갔다.김이 가시고 물이 다 식었지만, 급박하게 순간이동을 하느라 생긴 어지럼증 탓에 오히려 서늘한 온도가 반가웠다. 욕조 속으로 머리끝까지 잠겨 물기를 머금은 채,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할 로드의 흔적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군.’하지만 성과는 확실했기에 계획의 첫 단추는 제대로 끼운 셈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그때, 예상대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실리에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기에 별로 환영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컥 욕실 문까지 열렸다.“어디 있나 했더니.”집무실에서 회의 중이라 들었건만, 고리타르는 일찍 일정을 종료하고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순간이동을 들킬 뻔했기에 세실리에는 간담을 쓸어내리며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 송구합니다. 날이 더워 씻는 중이었습니다.”고리타르는 이미 황금빛 망토와 제복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었다. 세실리에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황제의 나신을 살폈다. 오러를 다루며 검을 쓰는 자들은 마법사처럼 세월을 비껴가는 법. 청년처럼 탄탄한 몸을 한 고리타르가 첨벙 소리를 내며 세실리에가 있는 욕조로 들어왔다.“물이 식었군.” “온도를 높이겠습니다.”겉모습이 아무리 젊어 보여도 속 알맹이는 중년인 황제를 위해, 세실리에는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물의 온도를 올렸다. 이윽고 수건에 거품을 묻혀 그의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고리타르는 회의 때 있었던 이야기를 뱉어내기 시작했고, 세실리에는 묵묵히 경청하며 손을 움직였다.한참을 떠들던 황제가 물끄러미 세실리에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그 표정 없는 얼굴, 말 없는 입. 그래서 내가 그대를 옆에 두고 있지.” “제가 폐하의 취향이라 다행입니다.” “그대의 취향은?”세실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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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이런 각하가 제 취향입니다

라이신은 괴로웠지만, 꾹 참아내며 수업을 지켜보았다.‘이상해.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심장이 아파 미칠 것 같아. 설마 우연인가?’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쓰러져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것 같았다. 참다못한 라이신이 기어이 말문을 열었다.“공녀님,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미하엘에게 양해를 구한 라이신은 서둘러 방을 나왔다. 복도 끝으로 몸을 돌려 힘겹게 열린 창문 앞으로 다가가 숨을 몰아쉬었다.제 몸이 왜 이럴까 의문을 품은 바로 그 순간, 공녀의 방과 멀어지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어? 희한하네.”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라이신은 창밖의 더운 열기를 들이마셨다. 언제 힘겨웠냐는 듯 평온해진 제 몸을 신기하게 살폈다. 기분 탓인가 싶어 잠시 휴식을 마친 라이신은 다시 공녀의 방으로 향했다.아니나 다를까, 방과 가까워질수록 스멀스멀 역겨운 기운이 올라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그때, 계단을 올라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아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각하, 오셨습니까.”라이신은 그를 보자 깜짝 놀라 멈춰 서서 인사부터 건넸다.“가르남에 가야지.”아, 그렇지. 가긴 가야 했다.바아르의 표정은 당연하다는 듯 초연했고,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반면에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라이신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입을 맞춘 이후에도 바아르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혼자서 그를 과하게 의식하고 있자니 영 어색하기만 했다.바아르가 앞장을 섰고, 라이신은 그보다 멀찍이 뒤처진 채 본관을 나섰다. 마침 공녀의 호위를 교대하러 온 세이바로가 계단을 올라오며 바아르와 라이신에게 평범하게 인사하고 지나갔다.‘세이바로는 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미하엘 공녀님은 왜 아무것도 못 느꼈지?’라이신은 토할 것만 같았던 공녀의 방을 힐끔 돌아보고는, 이내 진절머리가 나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표정이 왜 그래?”라이신이 부자연스럽게 뒤를 힐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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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심장을 파고드는 발칙한 고백

바아르는 무엇이 되었든 진실의 단편을 쥐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네 마음이 궁금하다.”오늘따라 작정을 한 듯, 바아르는 세차게 라이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라이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남자. 한없이 다정하게 굴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려 하는 지고지순한 지배자.하지만 자신은 여자인 것도 속인 채 이 책 속에 빙의해 살고 있었고, 심지어 대공가의 비극적인 미래까지 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실을 꺼내놓아야 할까. 자칫하면 지금까지 간신히 쌓아 올린 유대감과 신뢰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시점이었다.늘 그렇듯 거짓을 고할 수도, 진실을 온전히 드러낼 수도 없을 때는 가장 영악하고 요령 있게 빠져나가야 하는 법이다.“···각하, 제가 이렇게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신분인데도 정말 각하의 취향이신가요?”소년 라이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걸까, 아니면 발작을 가라앉혀 주는 기특한 마법을 부리는 인간으로서 애정을 품는 걸까. 벼랑 끝에 몰린 라이신은 숨 막히는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질문을 던졌다.“넌 하찮지도 않고, 별 볼 일 없지도 않아. 난 네가 좋다. 무엇이 되었든 난 너를 소유할 생각이다. 자, 어서 말해.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오만한 대공의 직설적인 고백에 숨이 턱 막혔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하는 먼지 같은 자신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아르는 거침없는 직진으로 그녀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어쩌나. 이 지독한 마음에 응답을 해야만 했다.“···영광이네요. 저도, 바아르 각하가 취향입니다.” 라이신은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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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날 휘두르는 오만한 그대

레인은 황급히 주변의 이목을 살핀 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스메를 응시했다.“정숙해야 할 이 제국의 고귀한 레이디께서 지금 무슨 말을···!” “내가 이 나라 최고의 레이디이기 때문에 네게 청하는 거야.”에스메는 자신의 두 손을 레인의 커다란 손 위에 겹쳐 얹으며 눈을 빛냈다. 여자의 몸으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건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모하는 레인을 영영 놓치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심장을 터뜨릴 것 같았기에 낸 필사의 용기였다.“에스메, 내가 다른 여인과 혼인할까 두려운 거야?” “그래. 그리고 나 역시 원치 않는 다른 귀족과 정략결혼을 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 하지만 내가 레인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황제 폐하도 후작 각하도 감히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어?”레인은 다시 한번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에스메···.” “너의 여자가 되고 싶어. 지금은 비록 힘없는 황녀에 불과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노력해서 장차 너를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게 해줄게.”황위를 찬탈하겠다는 대담한 결심이자, 레인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황녀로서의 당당한 선언이었다.레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메의 앞에 한쪽 무릎을 정중히 꿇었다.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의 예법으로, 그는 에스메의 가냘픈 손등 위로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이 레인의 신비로운 푸른 머리칼 위로 부서져 내렸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오직 에스메 한 사람만을 올곧게 담아내고 있었다.“에스메,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나로 되겠어?” “레인. 부탁이야. 내 마음은 너밖에 없어. 너에게 더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욕심이 나. 너 하나는.”그 간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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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예쁜 쓰레기가 움직이려 하다니

황궁의 황태자 집무실.아처린은 피르닉스가 올린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황제 고리타르가 직접 하달한 친서에는 또다시 구(舊) 도르하르 잔당을 남김없이 토벌하라는 핏빛 명령이 적혀 있었다. 황제의 잔혹한 집착에 아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친서를 거칠게 구겨 쥐었다.피르닉스를 물린 아처린은 나른하게 한숨을 흘리며 측근 렘브란트를 찾았다.“경, 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겠어.”아처린은 기르키르 접경지에 도르하르군의 반란 세력이 다시 집결 중이라는 정보가 담긴 서류를 밀어냈다.“렘브란트 경, 도르하르의 바퀴벌레 같은 자들은 왜 이리도 질기지? 읽어 봐.”이십 대 후반의 수려한 이목구비에 기괴한 안대를 착용한 렘브란트가 서류를 면밀히 살폈다. 여러 번 텍스트를 곱씹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지난 숙청에 독기가 오른 잔당들이 구심점을 찾은 듯합니다.”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이 타이틀에 맞춰 기어 나오는 걸까?” “레투니카 제국 인근의 소공국들입니다. 워낙 인력이 부족해 이민족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곳이라 평소에는 숨죽이고 있다가, 때가 되면 결집하는 것 같습니다.”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아처린이 창가로 걸어갔다.6월 한여름의 햇살은 잔인할 만큼 찬란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정원의 장미들이 붉게 피어 있었고, 그늘 아래 노니는 황족과 귀족들의 모습은 평화롭다 못해 위선적이었다.“아, 피곤하군. 그런데 에스메가 변한 것 같은데.” “요즘 활기차게 사람들을 만나고 학업에 매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처린의 시선이 정원 한구석에 멈췄다. 에스메와 레인, 그리고 레이나가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멀리서 보아도 레이나는 에스메와도 제법 유대감을 쌓은 모양새였다. 특히 언제나 그늘져 있던 에스메가 세상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모습이 기이했다. 가련함을 무기로 삼던 황녀에게서 묘한 자신감과 당당함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렘브란트 경, 요즘 샤를 후작가는 한가한가?” “황제 폐하의 밀명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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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감히, 비밀을 덮으려고?

 길 소르도는 헐레벌떡 나타난 레이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처린 따위 별로 신경 쓸 것도 없기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내가 여기저기 존경을 오늘 많이 받고 있네. 예쁜 동생아, 빨리 말하고 꺼지렴.” 그가 건성으로 굴며 시선을 마차로 돌리는 그 순간 레이나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마구 흔들어 댔다.  “캔돔가에 청혼장을 이미 보냈대요. 미하엘 공녀 어떻게 해요?” “소식지니까 그런 소식이 있는 거지. 걱정 마. 난 미하엘 공녀랑 결혼해서 알콩달콩할 거란다.”길 소르도는 인상을 구기며 손을 휘휘 저어댔다. 청혼장 따위는 원래 많이 받는 게 고위 귀족의 숙명이니 별 의미가 없었다. “미하엘 공녀 데뷔탕트에 황태자도 온다던데. 각하의 발작 문제도 있고, 라이신이 미하엘의 호위무사지만, 그래도 보여 줄 수도 없고··· 내가 좀 답답해서요.” 길 소르도는 레이나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할 말을 여유 없이 뱉어내는 게 의아해 미간을 좁히며 타박을 했다. “어휴-, 왜 이리 어수선해? 거기서 라이신이 왜 튀어나와? 호위무사가 뭐 대충 설렁설렁 대다 맛있는 거나 먹으면 되니 걱정 마.” 그때 레이나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면서 길 소르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실은, 좀 라이신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 게 있기는 한데. 아직은 비밀이에요. 어쨌든 오라버니는 미하엘 공녀에게 먼저 청혼장 보낸 거 맞죠?” 당연히 저번에 신경 쓰인 김에 정식으로 하르트 공작가의 인장을 찍어 보낸 그였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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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이건 재앙인데!

“라이신이 뭐?”사방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하로 동결시키는 목소리였다. 미하엘과 레이나의 등 뒤로 거대하고 서늘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대, 대공 각하······!”레이나가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바아르는 잔혹할 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두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바아르의 뒤에 서 있던 보좌관 세이바로마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우리 라이신 경이 또 무슨 대단한 일을 저질렀나요, 공녀님들?”세이바로의 장난스러운 물음에도 응접실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굳어 들어갔다. 바아르의 시선은 오직 레이나에게 꽂혀 있었다. 붉고 검은 불길이 위험하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숨통을 조여왔다. 바아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다그쳤다.“라이신을 왜 언급했지? 말해.”경직된 대공의 위압감에 레이나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황궁에서 라이신에게 드레스를 입혀 캔돔가의 공녀라고 거짓으로 황제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제 목숨은 물론이고 하르트 공작가까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레이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 그, 그게······! 라이신 경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역시 캔돔 대공가의 숨겨진 보물이라고 말이에요, 하하······.”구차한 변명이었지만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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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숨이 막혀, 망할

어느덧 7월이 되었다.레투니카 제국은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으로 농토가 갈라지고 강이 말라붙는 재앙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신의 마음 역시 하루하루 메말라가고 척박해지는 중이었다.‘황제가 이 캔돔 대공저에 등장한다니.’그러면 연회의 주인공인 미하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게 될 터였다.그날 이후 라이신은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덮쳐오는 걱정도 문제였지만, 설상가상으로 바아르와의 관계도 6월 말 이후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아르가 일방적으로 라이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번 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예 칼로 자르듯 선을 그어 버렸다.[앞으로 나에게 사사로운 인사는 올리지 않아도 된다. 네 일정은 할트바르트에게 보고받겠다.]라이신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통보였다.전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리도 주제넘었던 걸까. 소중하니까 죽지 말아 달라는 그 소망이 대공에게는 그토록 과한 오지랖이었을까.‘각하께서 이제 날 없는 사람 취급하시는 걸까.’라이신은 바아르가 거리를 두는 것이 이토록 가슴 아프고 힘들 줄은 몰랐다. 사는 낙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온갖 고민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요즘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잡생각을 잊어 보려 라이신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였다. 미하엘의 호위 업무에도 착실히 임했고, 가르남을 개간하면서 섀도우와의 특훈도 고강도로 몰아쳤다.오늘도 몸을 가만히 두면 미쳐버릴 것 같아, 오전 일찍부터 미하엘의 수업에 동행하기 위해 공녀의 방에 머무르는 중이었다.“라이신 경! 심각하군요. 춤을 추는 와중에 딴생각을 하다니요!”미하엘의 대역 파트너 역할을 하던 라이신은, 오늘도 예법 선생인 스레기니 남작 부인에게 호된 지적을 받고 말았다.“죄송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네, 네. 죄송합니다.”라이신이 미하엘을 리드해야 하건만, 자꾸만 거꾸로 리드를 당하고 있었다. 덕분에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스텝만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게다가 스레기니 남작 부인은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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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사정 있는 여자, 지켜보는 남자

“네가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보다. 아무도 없다.”섀도우의 다정한 위로에도 라이신의 스트레스는 요즘 들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러다 황제에게 처형당하기 전에 신경쇠약으로 먼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죽는 것도 두렵지만, 대공가를 이 무시무시한 위험에 처하게 만든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목을 조여왔다. 가슴속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그 곁에서 섀도우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라이신만큼이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오늘 훈련은 접자.”“마음이 심란해서 뭘 먹을 수가 없네요. 그냥 저 하나만 딱 죽으면 좋을 텐데······. 지금이라도 황제 폐하께 달려가 이실직고하고 싶어요.”라이신은 너무 절망스러운 나머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아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제야 막다른 길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의 절망이 피부로 와닿았다.섀도우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라이신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넌 그래도 사람 목숨을 구했다. 이대로 놔두었다면 황녀님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온몸이 썩어 돌아가셨을 거다. 그리고 나 또한 살렸지. 분명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있을 거다.”섀도우의 단호한 말에 라이신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마저 거대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마음도, 다가올 미래도 온통 어둠뿐이었지만 제 행동에 부끄러움만큼은 없었다.“후회하지는 않아요. 대공가만 무사하고 저만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네요. 그동안 제가 구한 사람들이 저 대신 잘 살아 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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