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71 - Chapter 80

268 Chapters

#71.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신, 이제 일어나야지.”누군가 라이신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신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온몸을 감싸는 푹신한 감촉, 코끝을 간지럽히는 포근한 이불의 향기, 그리고 적당히 기분 좋은 실내 온도까지. 라이신은 이 달콤한 나른함 속에 조금 더 파묻혀 있고만 싶었다. 그런데.“어이, 귀염아! 안 일어나면 하르트가로 데려가서 이런 거 저런 거 내가 실험 좀 할 수 있으니 각오하렴!”길 소르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네?”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도저히 그냥 참고 넘길 수준이 아니었기에, 라이신은 겨우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서서히 돌아오는 시야로 눈앞의 풍경을 살피던 라이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바위 같은 커다란 마정석에 기대어 잠들었을 텐데,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낯익으면서도 화려한 천장이었다.“어떻게······ 제가······.”“일어났어?”“네.”부드러운 어조로 묻는 바아르의 목소리에 라이신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는 검은 눈동자의 바아르가 아까 보았던 엉망인 차림이 아닌, 정갈한 다른 제복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 곁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mi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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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달콤하게 주고받는

아처린은 서관으로 향하는 길, 동관의 회랑을 가로지르며 벽면에 전시된 명화들에 느긋한 시선을 던졌다.“폐하께서는 구 도르하르 제국의 잔당 소탕에 여념이 없으셨던바, 황태자 전하의 귀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보좌관 피르닉스의 보좌 섞인 보고에 아처린은 입술을 비딱하게 끌어 올렸다.“귀궁이 아니라, 내가 가져온 전리품에 관심이 있으신 거겠지.”회랑을 채운 명화와 골동품, 진귀한 장식품들은 아처린이 잔당을 소탕하는 와중에도 탐미적인 집착으로 긁어모은 것들이었다. 그의 부친인 황제 고리타르 역시 아름다운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개인 갤러리까지 운영할 정도였으니, 부전자전이라 할 만했다.아처린은 예술품들을 감상하듯 걷다 발걸음을 돌려 레이나의 처소로 향했다. 그곳에 다다르자, 방문이 이미 미세하게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곱고 아름다운 것은 비단 사물에만 국한되지 않는 법. 아처린은 레이나를 마주할 기대감에 가벼운 몸짓으로 문을 두드렸다.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채 테이블 앞에 서서 독서에 몰입한 레이나를 보자, 아처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육감적인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시선을 강제로 잡아끄는 매혹적인 자태였다.오늘도 레이나의 가슴곡선은 터져 나갈 듯 부풀어 오른 살결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잘록한 허리 아래로 이어지는 탄력 있는 엉덩이 라인은 드레스 위로 노골적인 실루엣을 그렸다. 아처린은 손에 들고 있던 황금 주전자를 피르닉스에게 넘기고, 오직 책 한 권만을 든 채 방 안으로 침범하듯 들어섰다.“그대는 여전하군.”낮게 깔린 아처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레이나가 서둘러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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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집요한 시선 아래의 진실

바아르가 라이신의 앞날을 ‘기사’로 단정 짓자, 길 소르도는 먹던 쿠키를 입안으로 쏙 밀어 넣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귀염이가 과연 어딘가에 얽매일 수 있을까? 본인 입으로 1년 뒤엔 독립하겠다고 공언했잖아.”비어버린 길 소르도의 찻잔에 다시 향긋한 찻물을 채워주던 미하엘이 넌지시 바아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아무리 하인이 자유를 꿈꾼들, 기반도 없는 몸으로 무슨 수로 1년 뒤에 독립하겠어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죠.”“하긴, 일리가 있네.”미하엘의 현실적인 지적에 길 소르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바아르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바아르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깊고 고요했다.“라이신은 결국 내 뜻대로 움직이게 될 거야.”“그래? 뭐, 나는 그럼 앞으로의 일들을 구경만 하면 되겠군.”의아해하는 길 소르도와 미하엘을 뒤로한 채, 바아르는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곁에서 시중들던 시녀에게 다과와 음료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준비하라 명하고는, 짧은 인사를 남겼다.“그만 실례하지.”바아르가 떠난 자리에는 묘한 여운만이 남았다.길 소르도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향할 곳이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바아르의 발걸음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라이신이 머무는 손님방으로 향했다.***밤은 깊어 대기를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라이신은 정리 정돈을 마친 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현실이 못내 불편했다. 가슴 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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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그대에게 휘둘려 버렸어

바아르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주스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짧은 소음이 정적을 깨웠으나, 그의 시선만은 여전히 라이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라이신이 지금부터 내뱉을 말이 단순한 변명이 아닌, 본질에 닿은 진실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바아르는 턱 끝을 비스듬히 까닥이며 더 말해보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댄 그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제 발로 덫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맹수와도 같았다.“그래? 어떻게 멈췄다는 거지?”거짓을 말할 수 없는 순간에는 일부를 감추고, 일부의 진실에 교묘한 살을 붙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라이신은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숨기며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대공 각하께서 저를 바닥에 눕히고는······ 아주 거칠게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냈을 뿐입니다.”그 순간, 여유롭던 바아르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소파에서 등을 떼고 상체를 라이신 쪽으로 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거칠게?”“네, 마치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요.”짐승 같았다는 말에 바아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짓씹듯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짐승이라······. 계속해 봐.”“처음에는 저도 큰 충격을 받았고, 도저히 감당하기 버겁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남모를 치유의 능력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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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애틋함이 솟구친 그 자리에

레인은 당혹감에 어깨를 떨고 있는 에스메를 조용히 다독였다. 그의 신경은 이미 굳게 닫힌 도서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인기척에 곤두서 있었다.“분명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 전언을 받았습니다만, 이상하군요.”“이 늦은 시각에 대체 누가···.”레인은 에스메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작은 몸을 보호하듯 섰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도서관 문이 거짓말처럼 활짝 열려 젖혀졌다. 레인은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명백한 황제의 허락이 있었고, 외부인의 출입은 엄금한다는 통보까지 받은 상태였다.그러나 통로를 지나 모습을 드러낸 인물들을 마주한 순간, 레인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황녀 전하,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납셨습니다.”그의 낮은 목소리에 뒤편에서 휠체어를 끌고 나오던 에스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메의 휠체어를 밀며 도서관 중앙의 이동 통로로 나아갔다.그곳에는 20여 명의 기사를 거느린 채, 황금빛 자수가 놓인 제복과 망토를 휘두른 고리타르 황제가 서 있었다. 서른 중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젊은 외양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40대 후반의 노련한 지배자 그대로였다. 죽은 황후 이후 후처를 들이지 않았으나 소문난 호색가였던 그의 곁에는, 정부이자 대마법사인 세실리에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폐하, 제가 책을 찾는 데 몰두하느라 무례를 범했습니다.”“무례라니! 내 서고에 쥐새끼처럼 숨어든 저것들이 문제지!”고리타르의 날 선 질책에 에스메와 레인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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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 계약, 바아르가 웃었다

라이신은 지금 바아르에게 마치 고백을 받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설마, 그럴 리가.’천하의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그 대단한 대공이 남장 하인인 자신을 이리 애틋하게 바라보다니. 게다가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다정한 '짐승 각하'도 아닌데 말이다.라이신은 정신을 번쩍 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전히 바아르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지금까지의 일들은 제가 거부하지 않았던 일이고, 원해서 한 것들입니다.”“두 번 다시 내 발작을 막겠다고 나서지 마라.”무엇보다 라이신을 또 고통스럽게 할까 봐 염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라이신은 바아르에게 슬그머니 몸을 가까이 옮겨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어 보였다.“전 정말 괜찮아요. 발작은 제가 또 막아 드릴게요.”“앞으로는 도망가.”그러자 라이신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바아르의 손을 꼭 맞잡기까지 했다. 바아르는 흠칫 놀라 제 손을 잡은 라이신을 빤히 바라보았다.“하하, 처음보다 덜 아팠고, 이젠 좀 괜찮다고 여겼거든요.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바아르님과 함께하는 그것을 이젠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하하, 그러니까 발작이 나면 무조건 제게로 오세요. 그럼 제가······.”아차. 분위기가 너무 좋아진 나머지 해이해진 라이신은 하마터면 더 나아간 말까지 내뱉을 뻔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두 손으로 제 입을 확 막아 버렸다.순간 바아르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굳어지더니, 상상도 못 한 대답을 내뱉었다.“네게 그런 취향이 있었다니. 놀랍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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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얽매인 계약, 다가오는 계절

놀란 라이신은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을 바아르 앞으로 쭉 내밀었다.“네? 진짜요?”하도 심각한 표정으로 오밀조밀한 얼굴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바아르 역시 팔짱을 풀고 진지하게 응해주었다.“네가 그 땅에 집을 지을 때까지 기사 일을 하면 되겠구나.”바아르는 속으로 ‘어지간해서는 힘들 터였다’ 생각하며, 밀려오는 웃음을 참아내고 짐짓 엄숙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자 라이신이 손사래를 쳤다.“대공 각하도 참, 하하! 우선은 1년이라고 계약서에 딱 명시해 주세요. 하하!”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라이신이었다. 하지만 바아르 또한 이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계약서를 들이밀었다.“그래, 알았다. 그럼, 계약하자.”“하하, 네!”“토지 소유권도 당장 넘겨주마.”“네! 저도 오늘부터 바로 공녀님을 지킬게요!”바아르와 라이신 모두 얼른 사인을 마치고 싶어 서로 몸을 들썩거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5월의 햇살보다 더 환하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바아르 오라버니께서는 어지간히 라이신이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지, 아침을 먹자마자 또 사라지셨네요.”“하하, 덕분에 우리도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서로 잘된 일이지요.”길 소르도와 미하엘은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윽한 눈으로 미래의 반려가 될 미하엘을 살펴보니, 매끈하고 부드러운 샛노란 드레스 위로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져 가는 몸의 곡선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거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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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휘몰아치듯 뜨거운 마음

이 세계의 6월도 여름이었고, 이곳의 여름도 눈이 부셨다.라이신은 오늘도 눈 뜨자마자 연병장으로 나와 연병장을 뛰었다. 바아르와 계약을 한 이후 거의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가르남 땅에서 진흙땅을 돋우고 마법 훈련을 홀로 했기에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행복했다.개똥밭이라고 해도 라이신에게는 황금보다 귀하게 보였다. 땅을 가진 자, 그게 라이신 자신이 되었다.일단 지난 한 달간 라이신의 대공가에서의 위치는 확연히 변했다. 자작 신분 증서와 가르남 땅문서, 1년 동안 의식주에 대한 편의 제공이라는 혜택은 파격 그 자체였기에 위상도 달라진 셈이었다. 현재 자신의 목에는 바아르로부터 받은 자작의 신분을 나타내는 은색 표찰이 걸려 있다. 평민이나 기사만 되어도 감사한 일인데, 이 정도는 상급 기사에 해당하는 지위다. 이건 모두 바아르가 현재 제국의 황위  계승 서열 3위 대공이기 때문에 작위까지 내릴 수 있게 된 덕이 가장 컸다.어쨌든 위치가 달라진 라이신은 거처도 달라졌다. 지하 숙소는 여전히 라이신의 공간이기는 했지만, 보초를 설 때는 2층 공녀의 옆방에 머물고 평소에는 3층 손님방을 쓰라고 명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대공가 가신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려 할트바르트와 마리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라이신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라이신 경」이 대단한 호칭이 이제 자신의 이름이 되어버렸다니. 그런데 이리 대단한 일이 라이신의 앞에 펼쳐졌어도, 매일매일 그리 꽃밭만 펼쳐진 건 아니었다. 세상에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에, 달리면서 숨이 찬 라이신은 입을 한번 삐죽거렸다.“헉헉, 1년 뒤 계약 연장을 안 하면 다시 하인으로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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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은밀한 시간의 전리품

도르하르의 마법 관련 책들은 어느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현 레투니카는 마법보다는 무력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나를 운용한 오러를 활용한 검술, 전술 이론, 무기 개발에 국가적인 연구가 치중되었다. 그러니 마법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그러니 황태자 침실을 점령이라도 해서 비위를 맞추는 성의를 보이는 중이었다.“전하를 이리 붙잡고 있으니, 황제 폐하를 뵐 면목이 없네요. 아읏······!”뒤에서 집요하게 파고들던 아처린은 침대 시트를 거칠게 쥔 레이나의 몸을 단숨에 돌려 눕혔다. 침대 위로 매끄럽게 돌아누운 그녀의 몸 위로 무겁게 올라탄 그가, 마지막 열기를 토해내기 위해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그대처럼 우수한 마법사도 궁에 묶어두어야 아버지도 든든하시겠지. 세실리에를 한번 능가해 보라고.”“흥, 저는 저예요. 그리고 제가 10년 뒤쯤에는 이 제국에서······ 음, 두 번째 정도의 마법사는 되어 있을걸요?”세실리에라는 이름 한 마디에 레이나의 미간이 단박에 좁아졌다.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는 그 고고한 얼굴이 외려 아처린의 가학적인 소유욕을 자극했는지, 그가 커다란 손가락을 올려 레이나의 미간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그대는 이럴 때 보면 천상 평범한 레이디 같군. 뭐, 그대 오라버니 다음이라는 소리인가?”“더는 말을 아끼고 싶네요.”레이나는 길 소르도가 아니라 라이신을 떠올렸기에, 그저 의미심장한 입꼬리만 밀어 올릴 뿐 말을 더 잇지 않았다.아처린은 레이나의 골반을 강하게 쥐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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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단둘이 갇힌 세계에서

검은 제복에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바아르의 시선은, 미하엘이 아닌 오직 라이신에게 닿아 있었다.라이신은 그의 깊고 묵직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의 매일 마주하기에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그를 볼 때마다 라이신의 가슴은 매번 속절없이 두근거렸다.그럼에도 자신은 대공가의 기사였기에, 라이신은 기사로서의 정중한 예법을 갖춰 경례를 올렸다. 이내 입가에 띄웠던 미소를 거두고 흐트러짐 없는 정자세를 취했다.그때, 바아르는 방 안의 그 누구에게도 눈길 한 자락 주지 않은 채, 다짜고짜 라이신만을 응시하며 낮게 명령했다.“라이신, 너는 나를 따라와라. 이후 미하엘의 호위는 세이바로가 대신 맡을 거다.” “네! 각하!”지목된 세이바로가 환하게 웃으며 라이신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라이신은 미하엘에게 깍듯하게 목례를 올린 뒤 세이바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미 거침없이 문밖으로 향하는 바아르의 넓은 등 뒤를 서둘러 뒤쫓았다.이 밤중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바아르의 보폭을 따라잡던 라이신은, 문득 의문이 솟구쳤으나 보는 눈이 많아 주제넘은 질문 대신 말문을 꾹 닫았다. 하지만 오히려 바아르가 먼저 고개를 돌려 라이신을 내려다보더니,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라이신, 파르교산으로 간다.”라이신은 순간 흠칫 놀라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파르교산을 또?’의문을 품은 그녀는 묵묵히 바아르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 바아르와 말에 같이 올라탄 라이신은 주변을 하나하나 살피며 지난번 보다는 마음에 여유를 갖고 파르교산에 이르게 되었다.주변은 검다 못해 시린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산속의 공기는 서늘하게 내려앉았고, 주위 분위기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그럼에도 라이신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바아르의 단단한 품에 안겨 있었기에, 말로 다 못할 기묘한 안도감만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제 등이 바아르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고, 엉덩이는 그의 아랫도리와 코앞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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