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191 - Chapter 200

284 Chapters

#190. 자꾸 얽히고설키게 되잖아.

바아르가 웬일로 먼저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라이신은 어리둥절했다. “대공저 밖이라면······.” “뭐, 나들이라고 볼 수도 있지.”“좋아요!”정신이 번쩍 든 라이신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바아르는 찻물이 든 주전자를 마법으로 데우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파르교 산도 좋고, 가르남도 괜찮고. 결계가 처진 곳은 안전할 테니 바람이나 좀 쐬자. 오늘 오후에.” “이왕이면 가르남으로 가요, 각하. 안 그래도 그곳에 볼일이 있었거든요.”볼일이 있다는 라이신의 말에 바아르는 일순 얼굴을 굳히며 김이 펄펄 나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볼일?” “그냥 마정석 좀 가져와서 마도구로 만들려고요.” 라이신의 명쾌한 대답에 언제 굳었냐는 듯 인상을 푼 바아르는 손끝에 은밀한 마력을 피워 올렸다. 그가 마력을 운용할 때마다 도자기 주전자의 온도가 기분 좋게 상승하며 향긋한 김이 피어올랐다.“각하의 마법 구현 능력은 정말 날로 발전하시네요.” “그래. 난 앞으로 더 대단해질 거다.”바아르는 따뜻하게 데워진 차를 잔에 채워 라이신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도 잔을 들어 가볍게 축였다. 누구에게 제대로 된 지도를 받은 적도 없을 텐데, 그의 마법 운용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무시무시해지고 있었다.“대단해지실 각하가 벌써 기대되네요. 참, 오늘 나들이도요.” “그래, 기대해. 네게 주고 싶은 것도,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대체 얼마나 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걸까. 그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긋한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눈앞의 다정한 바아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 라이신은 해가 완전히 뜬 뒤에야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오후가 될 때까지 회의를 하러 간 바아르 덕분에 자유 시간이 생긴 라이신은, 세이바로의 든든한 호위를 받으며 대공저 산책을 나섰다.“라이신 경, 분부하신 사항은 내일까지 할트바르트 님과 렌스렌 대장님이 실종
Read more

#191. 놀라 버린 대공가의 보물

라이신은 도르하르 제국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자유민’들의 존재를 쉽게 넘겨버릴 수 없었다.하물며 현재 레투니카 제국은 도르하르의 핏줄과 잔당이라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잔혹하게 숙청을 이어가는 중이었다.‘그런데 내게 청혼서를 보냈다니······.’머릿속이 지독하게 얽혀 들어가는 느낌에 라이신이 굳은 안색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세이바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그나마 도르하르에 우호적인 귀족 가문이 우리 캔돔가뿐이라서요. 이래저래 운명의 실타래가 묘하게 얽혀버리는 모양입니다.”역시, 그들이 목숨을 구걸하며 마음을 둘 곳은 이곳 대공가밖에 없었던 것이다.라이신은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노인들의 신분이나 출신을 굳이 묻지 않고, 오직 그들이 앓고 있는 고통에만 집중했다.일반 병환을 치유하는 것은 다행히도 지독한 전염병을 억누를 때보다 마력의 소모가 훨씬 적었다. 라이신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아픔을 하나씩 지워나갔다.“천사님······.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진 열 살배기 손주 녀석을 두고 차마 눈이 감기질 않아,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급한 병세만 일시적으로 막아드리는 것뿐이니, 돌아가시면 반드시 푹 쉬셔야 해요. 아시겠지요?”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천사님.”라이신은 거칠게 마르고 주름진 노인의 가슴팍 위로 살며시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제 안의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이윽고 그녀의 손끝에서 신비롭고 영롱한 무지갯빛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노인의 심장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색이던 안색이 기적처럼 맑게 돌아온 노인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라이신에게 허리를 굽혀 절했다.“고맙습니다, 천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손자분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흑흑,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 소소하게 시작된 정화 작업은 어느새 영지 구제로 이어졌다.별채에
Read more

#192. 꿈꾸는 비련의 여인

붉은 망토를 위압적으로 휘날리며 검은 제복을 입은 바아르가 성큼성큼 걸어왔다.현재 별채에서 사람을 치유한다는 확증은 가지고 왔지만, 레이나까지 어두운 표정으로 라이신에게 의지하는 눈빛을 보니 바아르는 신경이 거슬려 날카로워졌다.그의 뒤를 수호하듯 따르는 호위기사들의 칼집이 서늘한 금속음을 내며 짓눌린 공기를 가르자, 라이신의 주변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이들이 하나둘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갑작스러운 대공의 등장에 레이나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급히 고개를 숙였다.“각하, 안녕하셨어요. 저······ 라이신에게 선물을 좀 전해주려고 왔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풀어 라이신의 앞에 내려놓았다.“선물만 놓고 가.”바아르의 자비 없는 무뚝뚝한 명령조에 레이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라이신은 레이나가 내민 보자기에 싸인 물건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려 했다.하지만 그보다 바아르가 먼저 한 발 앞서 다가서서 레이나의 선물을 제 손으로 낚아채듯 대신 받아 들었다.“이거 책이잖아.” “각하, 그건······ 초월자에 관한 서적이에요.”레이나의 입에서 '초월자'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라이신은 한달음에 다가와 바아르의 손에 들린 서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바아르와 은밀한 시선을 교환한 라이신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책의 빛바랜 표지를 넘겼다.“······이 귀한 것을 제게 주시겠다고요?”“라이신. 이제 네 마력이 사라지고 있으니 상관없는 책일지도 모르겠지만······.”레이나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지, 라이신의 눈동자는 벌써 책장 속에 적힌 고대 문자들을 쫓느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아르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레이나의 설명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각하, 실은······ 라이신이 초월자로 완전히 각성하면, 함께 키요리타 산맥에 데려가려고 했었어요.”역시, 꿍꿍이가 있었던 레이나였다. 바아르는 레이나의 입에서 숨
Read more

#193. 치명적인 협박을 받다니

레이나는 한참 동안 슬픔을 토해냈고, 대공가의 기사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하나둘 자리를 비켜주었다.“······각하, 죄송해요. 어쨌든 이 책의 진정한 주인은 라이신 같네요. 그리고 혹시······ 캔돔가에 도르하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요.”레이나는 미안함이 서린 눈빛으로 라이신과 바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이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나 역시 궁금하군. 지식은 알아둘수록 이로운 법이니.”바아르의 묵직한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라이신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요즘 내가 참 못나게 굴어서 마음이 온통 엉망이야. 할 로드를 데리고 사라진 세실리에도 미운데······ 납치된 게 아니라 제 발로 따라갔다니. 라이신, 너한테 부담만 줘서 정말 미안해.”라이신은 말없이 힘을 주어 레이나의 떨리는 손을 더 감싸 쥐었다.제 발로 세실리에를 따라간 할 로드, 그리고 최근 자취를 감춘 황제와 황태자. 그 수수께끼 같은 실타래의 중심에 '세실리에'라는 존재가 얽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도대체 할 로드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곳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 텐데, 왜 자발적으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건지 그게 의문이에요.” “어쨌든 마수가 들끓는 키요리타 산맥에 있는 건 확실해. 제가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까.”바아르는 레이나의 절박함을 이해한다는 듯, 날이 서 있던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낮게 응답했다.“내 아버지 역시 키요리타 산맥에서 실종되셨다. 대공령 북부이자 구 도르하르 국경과 맞닿은 곳이니, 그곳은 이미 끊임없이 정찰대를 파견하고 있는 지역이야.”예전에 키요리타 산맥에 파견을 갔다가 마수에게 당해 죽어가던 할 로드를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라이신 자신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제 발로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버렸다니, 허탈함에 할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원작 소설에는 없던 설정인데······.’하긴, 라이신 자신도 그렇고 할 로드라는 인
Read more

#194. 각하의 명령은 너무 달콤해서

라이신은 눈앞이 캄캄해졌다.바아르는 도대체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걸까.“각하, 그냥 전쟁을 하시겠다는 건가요.”바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라이신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욱 진득하게 감싸 쥐었다.“역시, 도망갈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군. 그러니 아예 그런 마음조차 품지 말기를 바란다.” “각하······.” “일단, 하던 것이나 계속할까.”바아르의 뜨거운 입술이 가차 없이 겹쳐왔다.오직 남과 여, 두 사람만의 시간이 시작되자 별채 안의 온도가 아찔하게 상승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 소음과 달리, 달콤하고 그윽하게 밀려드는 숨결과 옷자락 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손길 끝에 라이신의 사고는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그저 온전히 서로를 갈구하는 몸의 대화만이 정적을 메울 뿐이었다. *** 그 시각. 하르트 공작가의 연구실.“레이나, 요즘 어째 얼굴 보기 힘들구나.”마도구에 마력을 주입하며 한창 공격용 무기를 제작하던 길 소르도가 물끄러미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의 시선이 요즘 부쩍 초췌해진 레이나의 얼굴에 닿았다.오늘도 연구실 구석에는 완성된 마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레이나는 흙빛이 된 얼굴로 멍하니 기계 부품을 조물거리며 길 소르도의 무기 조립을 돕고 있었다. 잔뜩 가라앉은 그늘을 드리운 채, 그녀가 툭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그냥 대공저에 갔다 왔어요. 아프다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런데 라이신은······ 정말 대단해요. 마력이 약해져 있다고 해도 치유는 하고 있더라고요.” “어? 그래?” “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대공가 영지민들의 지독한 전염병까지 전부 마력으로 잠재우고 억눌렀나 봐요. 다들 천사라고 칭송이 자자하던데······ 능력을 잃어가는 처지라니 참 안타깝죠.”순간, 길 소르도가 손에 들고 있던 정밀 마도구를 내려놓으며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뭐라구? 귀염이가 전염병까지 제 마력으로 치유했다고?” “그것뿐이겠어요. 노파의 굽은 등이나 노
Read more

#195. 맥락없이 저돌적인 그 대공

이게 지금 현실이라니.남자에게 반지를 받는 일 따위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게다가 늘 막연하게 동경하고 연모해 마지않던 바아르가, 제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끼워 주다니.“각하······.”가슴이 뻐근하게 조여든 라이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가르남의 흐드러진 꽃밭이 만들어 낸 환상이나 꿈이 분명하다고 여겨질 만큼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내 여자가 돼라. 그렇다면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나 역시 너만의 남자가 되어 주겠다.”귓가를 낮게 울리는 바아르의 음성은 너무도 오만하고 웅장해서, 라이신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입술을 벌렸다. 악마의 치명적인 유혹이자, 천사가 천상의 세계로 이끄는 인도 같았다.절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끌려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떠나 얼굴도 모르는 도르하르 황태자에게 시집을 가겠다며 비장하게 결심했건만. 이렇듯 빈틈없는 확신을 내리꽂는 남자의 기세에, 머릿속의 모든 계산과 방어벽이 단숨에 뒤집어지고 있었다.“저, 지금······ 각하의 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의 곁에 서고 싶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바라는 게 주군과 기사 사이의 충성 맹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제 여자가 되라고 했고, 저만의 남자가 되어 주겠다고 선포했으니까.사정없이 일렁이는 바아르의 눈동자는 온전한 남자의 욕망을 담고 있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려 라이신은 손부채질을 해댔다.그러나 바아르는 라이신의 어수선한 반응이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켠 그가 허둥대는 라이신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그리고 이내, 라이신의 복잡한 뇌리를 번개처럼 관통할 무지막지한 폭탄을 떨어뜨렸다.“당장 혼인 신고서부터 황실에 제출해야겠군. 내 마음이 아주 급해서 말이야.”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혼인 신고서라니!“
Read more

#196. 폭군의 치명적인 협박

분명 석양이 찬란하게 물들던 가르남에 있었건만, 순식간에 도달한 대공저에는 어느새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평소의 그는 세상만사에 무심하고 차가운 사내였으나, 일단 제 신경이 쏠린 일에 한해서는 가히 무서울 정도의 집요함을 발휘하는 위인이었다. “저기······ 각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이만 주무세요.” “라이신, 넌 내게 확실한 답을 내놓아야 할 거다.”살다 살다 청혼을 협박이자 명령으로 하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라이신은 입꼬리를 내리며 바아르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꿈결을 거닐듯 폭신폭신하고 다정했던 프러포즈는 어느새 은밀하고 질척이는 압박으로 바뀌어 있었다.“각하, 갑자기 이렇게 강제로 청혼을 밀어붙이시면······.” “그래야 네가 도망치지 않고 내 곁으로 올 테니까.”지극히 본능적이고 솔직한 응수에 라이신은 차마 반박하지 못한 채, 그가 끼워준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바아르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듯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저도 각하가 좋아요.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그 말에 바아르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를 그렸다.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미소였다.“그래, 생각은 해. 다만, 내 품을 벗어나는 다른 선택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이건 청혼을 승낙할지 말지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답을 라이신의 입으로 직접 확인받겠다는 집요한 선포에 가까웠다.“너무 막무가내시네요.”바아르는 라이신의 허리를 한층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네가 내 곁을 떠나면 난 다시 발작에 시달려 가신들을 해칠 테고, 네가 날 말리지 않는다면 도르하르든 레투니카든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일지도 모르지.”사실 미래를 약속해 주지 않은 것은 라이신 쪽이었기에 그의 불안과 집착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단번에 고개를 숙이기에는 사태가 너무 엄중했다.“그건 너무 폭군
Read more

#197. 난관을 극복할 비책은?

할트바르트는 대공저의 집사장으로서 오랜 연륜과 지혜를 지녀 가신들의 깊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각하의 스물네 번째 생신이 지나신 후에 혼례를 치르십시오. 결혼 자체는 찬성입니다만, 각하의 발작이 가라앉고 난 뒤가 적절할 것으로 사료됩니다.”그는 바아르의 반려가 라이신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군의 안전과 가장 완벽한 시기를 염려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그의 뜻밖의 옹호에 다른 가신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시선들이 자연스레 바아르에게로 향했다.“발작이 일어난다면 라이신이 곁에서 날 눌러줄 거다. 게다가 시라이엔의 이름으로 도착하는 청혼장 서류라면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라 말이지.”이 저돌적인 대공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하지만 이내 그는 가볍게 떠 있던 장내의 공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히며, 본래의 묵직하고 서늘한 분위기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난 선대의 오랜 숙원과 영지민, 나아가 하르트가 공작가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그의 선언에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방금 전까지의 달콤한 결혼 담론은 간데없고, 피비린내 나는 거대한 현실의 궤적이 정면에 들이닥친 탓이었다.“만약 내가 라이신과 혼인하게 된다면, 구 도르하르 제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의미하겠지.”침묵은 깊고 무거웠다. 그 정적을 깨고, 기사단장 페르도트가 단호하고 신중한 낯빛으로 바아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각하, 저희는 오직 각하의 명령만을 따를 뿐입니다.” “상대가 레투니카든 도르하르든 상관없습니다.”가신들은 눈을 부릅뜨며 바아르의 뜻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세에서 그간 캔돔 대공가가 얼마나 처절하게 전쟁의 칼날을 갈아왔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난 이 제국의 그 어떤 세력도 우리 캔돔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벽히 압도할 생각으로 지금까지 경영해왔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믿고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아무런 반론도, 이의도 없었다.
Read more

#198. 아슬아슬 사람 착각하게

에스메의 아픈 다리를 치료한 것도, 황제에게 신분을 들킬까 봐 시라이엔 영애로 거듭나게 한 것도, 돌이켜보면 모두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합쳐져 나온 결론이었다.함께 모여서 황궁에서의 일을 복기하다 보니, 이 순간 지독하리만치 에스메가 보고 싶어졌다.“라이신, 표정이 좀 나아졌구나.”모두가 만나 의논을 하다 보면 자신이나 할 로드의 일도 결국 돌파구를 찾지 않을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진 덕분이었다.“어쩌다 어려움도 극복하고, 각하께 과분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사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아요. 너무 좋아서요.”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누군가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결혼’이라는 달콤한 미래를 기다리게 되다니. 행복하다는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꿈만 같다는 고백은 라이신의 진심이었다.그녀는 휘두르던 레이피어를 잠시 내려놓고 덤덤한 눈으로 대공저의 웅장한 전경을 바라보았다.“라이신, 걱정 마라. 각하께서 전부 해결해 주실 거다.”정말 바아르에게 온전히 기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전쟁을 치르지 않고 레투니카 황가의 견제를 피하는 것, 그리고 구 도르하르 제국과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 아마 제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바아르가 에스메와 혼인하고, 라이신이 도르하르의 황태자와 결혼하면 모든 갈등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라고.하지만 바아르가 써 내려가는 정답은 정반대라는 게 문제였다. 그는 라이신과 결혼한 뒤 도르하르가 이를 빌미로 쳐들어오면 가차 없이 물리치고, 더 나아가 레투니카 황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전쟁을 치르는 것만이 비원을 이루는 길이라 믿고 있었다.“섀도우 형님. 실은 모두가 평화로울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그걸 거스르려고 하니 고민이 되네요.”씁쓸하면서도 솔직한 마음을 털어내며, 라이신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열어 물을 들이켰다. 이제는 제법 쌀쌀한 가을이라 얼음물까지는 필요 없었건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탓인지
Read more

#199. 그 남자가 웃잖아, 불안하게

조금 전 바아르에게 영혼까지 쏙 빼앗긴 탓에, 라이신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야 서류를 넘길 수 있었다.그런데 정말 기분 탓일까.아까 본 은빛 연기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라이신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집무실 주변을 훑어보았다. 원래 은빛 연기는 할 로드와 연결되는 마력의 형태였다.물론 방금 느낀 연기는 할 로드가 가진 마력의 질감이나 향기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 색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일치했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일단 의문을 뒤로하고 도서관에 도착한 그녀는 할트바르트가 건넨 가신들의 명부와 렌스렌이 정리해 준 기사·병사 명단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달 이상 부재중인 자들의 이름을 날카롭게 살폈다.갑자기 사라진 인물이라.‘어······ 마리?’명부를 짚어가던 라이신의 손끝이 멈춰 섰다. 대공저의 하녀인 마리, 그리고 기사 중에는 제크가 실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무려 10여 명이나 소식이 없다는 사실에 라이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제발 그들이 전염병에 걸린 것만은 아니어야 할 텐데.’불안감에 휩싸인 라이신은 명단을 보고 또 보며 멍하니 들여다볼 뿐이었다.그때, 도서관 문이 열리며 미하엘과 레이나가 밝은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어머, 라이신 경. 아니, 라이신 님······ 아니지, 시라이엔 영애? 윽, 복잡해라!”“하하, 공녀님. 그냥 편하게 라이신이라고 불러주세요.”“그럼, 라이신. 일단은 그럴게요.”미하엘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Read more
PREV
1
...
1819202122
...
2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