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全部章節:第 181 章 - 第 190 章

284 章節

#180. 음모가 틀림 없는데!

레이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청혼장을 다시금 확인했다.화려한 인장 속에 적힌 내용은 명확했다. 레인과 자신과의 혼인을 원한다는 샤를 후작가에서 보낸 내용이었다.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가슴 벅차게 행복하고 좋았을 텐데,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한 걸까. 이제 레이나의 마음속에는 오롯이 할 로드의 존재만이 가득 차 있었기에 이 상황이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뭘 그렇게 놀라? 너는 원래 레인 경을 꽤 좋아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오라버니, 레인 경은 당연히 황녀님하고 연결되야죠.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레이나가 지금 할 로드를 찾아 헤매며 연심을 품었다는 것을 길 소르도도 모르지 않을 터.하지만 돌아오는 길 소르도의 반응은 싸늘하게 혀를 차는 소리였다.“너 아직도 정세를 모르는군. 몰라? 우리는 조만간 전쟁을 할 거야. 황가는 완전히 무너질 거라고. 샤를 후작가가 뭐하러 곧 망해버릴 레투니카 황가 사돈을 맺겠어? 게다가 그 황녀는 몸도 좀······.” “······오라버니, 너무해요! 황녀님은 인품도 훌륭하고, 지금도 완벽하게 정무를 돌보고 있는걸요!”갑자기 레이나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자는 이를 갈아도 시원치 않을 인성이라 그렇다 쳐도, 황녀 에스메만큼은 자신이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었기에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그래, 황녀를 그리 말한 건 좀 미안하네. 하지만 황녀는 이제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는 여자가 될 뿐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 연애야 네 맘대로 하더라도, 결혼만큼은 신중해야지.”길 소르도의 잔인한 현실 조언에 레이나는 거대한 절망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마음속으로 지금은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을 애타게 부르짖을 뿐이었다.레이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길 소르도에게 제 절박한 속내를 내비치고야 말았다.“······오라버니. 나 할 로드 경이 좋아요. 그 남자 아니면 평생 그 누구와도 결혼 안 해요!”맹목적인 동생의 고백에 길 소르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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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뒤틀리는 소용돌이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힌 건 다름 아닌 피르닉스였다.지금까지 사사건건 정무 회의를 훼방 놓으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음모론을 들고나오니 에스메 역시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감히 무엄하게! 황녀 전하께 이 무슨 무뢰한 언사요!”에스메의 지지층이 넓어진 만큼, 다른 대신들도 피르닉스를 향해 일제히 살기를 뿜었다.“이 어려운 시기에 이만큼 하신 것도 대단하시거늘, 무슨······.” “제국 전체가 가뭄에 시달리는 데다, 캔돔 대공가마저 황가와 오해를 사 정세가 위태롭소. 말씀 좀 가려 하시오!”잠깐. 에스메는 캔돔 대공가로 인해 제국이 불안하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슬며시 시선을 돌리자, 곁에 선 레인이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단단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미하엘의 데뷔탕트 때 세실리에가 일을 벌인 건 사실이나, 그녀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 라이신과 바아르마저 고통을 겪었으니 황가로선 할 말이 없었다.그렇다고 이대로 밀릴 수는 없었다. 에스메는 탁! 손바닥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피르닉스 경, 말씀 잘하셨습니다. 당연히 제 데뷔탕트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계셔야지요. 그런데, 식도 치르지 않은 제 청혼장을 독단적으로 발송하신 것부터 대답해 주셔야겠습니다.”에스메는 치맛자락 아래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그건··· 이미 폐하께서 작성하셨던 것이라··· 너무 지체되기 전에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몸도 불편하시니,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피르닉스 경! 전하에 대한 모욕을 당장 멈추시오!”레인이 핏대를 세우며 발끈하려던 바로 그 순간. 에스메가 스르륵 손을 올려 레인의 탄탄한 팔뚝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사내의 뜨거운 열기에 숨이 가빠왔지만, 에스메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피르닉스 경. 제가 몸이 좀 약할지는 몰라도, 제국을 다스릴 머리까지 불편하진 않습니다.” “아, 아···.”하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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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달콤한 구속이기는 한데

라이신은 지금 속으로 아차 싶었다.바아르 몰래 대공저 곳곳을 누비며 마법을 부리고 다니다, 별안간 체력이 바닥나 이리 침대에 다시 눕게 될 줄이야. 그 와중에 방 안으로 들어선 레이나의 안색은 처참할 정도로 초췌했다.‘아, 할 로드 때문에······.’누군가를 열렬히 갈망해도 온전히 채워질 수 없는 가혹한 처지라니. 그 지독한 속앓이를 라이신은 너무도 잘 알았다. 스스로 바아르를 깊이 연모하게 되고 나서야, 사랑에 빠진 이들의 애달픈 눈빛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게 된 탓이었다.레이나는 침대에 굳어 있는 라이신을 응시하며 조심스레 포션을 내밀었다.“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서······.” “······와주셔 감사해요.”그때, 라이신을 묵묵히 간호하던 바아르가 레이나를 향해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레이나, 라이신의 마력은 갈수록 고갈될 거다. 그러니 난 철저하게 라이신을 보호할 생각이야. 너무 소중해서 말이야.”오만하고도 지독한 소유욕을 어찌 이리 덤덤하게 내뱉는지.“······각하. 부끄럽게요.”제국을 뒤흔드는 무소불위의 대공과, 남장을 했던 비천한 신분에서 갑자기 백작 영애가 된 자신인데.대공가의 가신들이 입이 무거워 망정이지, 만약 호사가들에게 흘러 들어간다면 부녀자들이 열광하는 자극적인 소설로 재탄생해 제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게 뻔했다. 황녀를 비롯해 제국의 대단한 귀족 레이디들이 그토록 탐내던 바아르의 곁을, 온전히 독차지한 채 집착받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니. 민망함에 입술만 달싹였다.그 순간, 레이나가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탄식을 뱉었다.“각하께서 라이신을 보호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라이신의 자가 치유 능력이 정말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나 봅니다. 안타깝네요.”그 말에 바아르의 미간이 한층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과로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라이신은 달랐다. 죽어가는 자의 숨줄기도 붙잡는 대마법사가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다니.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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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사람들이 좋아하는 막장 드라마

라이신은 지금 너무 황당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자신이 다른 귀족 가문의 사내와 혼인을 한다니.남장한 짧은 머리에, 당장 바아르의 품 안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처지기에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손사래라도 치고 싶었다.“길, 거슬려.”바아르는 극도로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고, 레이나와 길 소르도 역시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세상에나······. 하지만 미하엘 공녀의 데뷔탕트 때 라이신은 무척 아름다웠으니까요. 어엿한 백작가 영애가 되었으니 귀족 가문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니! 나도 어지간하면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싶어! 그런데 이건 완전 막장 청혼장이라니까?”뭐가 되었든 지금 상황은 막장이 맞았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청혼서가 오가는 건 흔한 일이라지만, 도대체 어떤 대단한 가문이 기세 좋게 자신에게 이런 걸 보냈단 말인가. 아마 바아르의 살벌한 표정을 보지 못해 겁을 상실한 자가 분명했다. 라이신은 슬며시 바아르를 올려다보았다.“라이신은 마력이 고갈되느라 몸 상태가 좋지 않다. 피곤하니 앞으로 길, 너는 내 침실에 발도 들이지 마. 어수선해.” “어휴, 바아르! 매정하긴! 다 우리 레이나가 포션도 챙겨주며 보살펴 주니까 라이신이 버티는 거라고!”우연이든 필연이든, 라이신이 기력을 잃고 피로에 찌든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둘릴 여유 따윈 없었다. 바아르 역시 들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밀히 말하자면 ‘시라이엔’으로 온 청혼서는 전부터 있긴 했다.”바아르는 펄펄 뛰는 길 소르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열이 오른 라이신의 이마를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툭 읊조렸다.순간, 침실 안의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피부로 전해지는 한기에 바아르는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라이신의 눈치를 보았다.이건 그냥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서 바아르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으로 말을 잃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라이신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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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잔혹한 해피엔딩

라이신은 지금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그녀는 사정없이 떨리는 눈으로 바아르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청혼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결혼이라니. 그것도 이름조차 생소한 구 도르하르 제국의 황태자의 반려가 되라니.남장한 처지로 바아르의 침실에 갇혀 지내는 지금 이 꼴에, 대륙 반대편의 사내와 성혼을 논한다는 자체가 황당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했다.바아르는 극도로 흉포해진 눈빛으로 종이 뭉치를 바닥에 내던지며 나직하게 읊조렸다.“신경 쓰지 마라, 라이신. 그저 미친 자들이 보낸 쓰레기일 뿐이니.”지독한 냉기가 서린 음성은 당장이라도 도르하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처럼 살벌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길 소르도는 심각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아르의 앞을 가로막았다.“바아르, 이성적으로 생각해! 여기 적힌 문장들이 안 보여? 이건 단순한 구혼서가 아니야. 까딱하다간 우리가 레투니카 황가와 전면전을 벌이는 와중에, 틈을 노린 도르하르에게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 맞을 수도 있다고!”길 소르도의 무거운 경고가 침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묵묵히 정세를 가늠하던 레이나 역시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어두운 목소리를 보탰다.“과거의 망령인 줄 알았는데, 도르하르가 물밑에서 무섭게 세력을 키워 부상하고 있었나 보네요. 캔돔 가문은 조만간 레투니카 황실과 거대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레이나의 말끝에 실린 무게에 라이신은 심장이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 다음 날 아침.에스메는 식은땀을 흘리며 지독한 몸살 기운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정된 오전 회의를 모조리 취소한 채 침대에 누워 레인의 간호를 받던 중, 피르닉스가 무작정 들이닥치는 바람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황녀 전하! 이런 일이 다 있군요. 적대국에서 대놓고 청혼장을 보내다니,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머리가 깨질 듯 어지럽던 에스메는 불쑥 찾아온 피르닉스에게 놀라기도 전에, 그가 전한 내용의 충격성 때문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었다.“시라이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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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악녀의 직진이 시작되다

다시 며칠이 흘렀다.몸살이 말끔히 가신 에스메는 오랜만에 레인과 함께 황궁 정원으로 산책을 나섰다.겉보기엔 평화로운 황궁이었으나, 장벽 너머의 현실은 참혹했다. 백성들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점점 궁핍해졌고, 가을걷이마저 신통치 않아 당장 대기근의 위기가 코앞까지 닥친 상태였다.“이번 겨울에는 굶어 죽는 하층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거야. 그런데 이런 시국에 전쟁까지 일어난다면······.” “도르하르 잔당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어.”에스메는 불안감에 두 손을 꼭 맞잡아 쥐었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 오고 숨이 턱턱 막혔다.“내가 부덕해서 비도 안 오고, 황좌에 오르자마자 이런 위기가 닥치는 걸까?” “이미 이전부터 지속된 가뭄이었잖아.” “그래도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실의에 빠져 어깨를 떨구는 에스메를 보며, 레인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다독였다. “아기를 품은 엄마가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레인.”그제야 에스메는 살며시 볼을 붉히며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네 데뷔탕트 때, 우리 결혼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자. 그리고 네 임신 사실도 함께 알리는 거야. 어때?”레인의 든든한 말에 에스메는 비로소 경직되어 있던 얼굴을 풀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레인이 조심스럽게 배를 문질러 주자, 짓누르던 책임감도 한결 가벼워지는지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레인, 황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덜컥 임신부터 했다고 하면······ 백성들이 엄청 비웃을 텐데.” “넌 이 제국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 비웃을 사람 없어.”레인은 에스메의 눈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어깨를 토닥였다. 남들에게는 자극적인 가십거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에스메에게 이것은 생존이 걸린 치열한 현실이었다. 임신만이 이 꽉 막힌 결혼의 유일한 돌파구였기에 강행한 결과였고, 하늘은 고맙게도 그 무모한 도전에 축복을 내려주었다.“그런가? 하지만 난 정말 행복해. 꿈에서나 그리던 모든 것들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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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대공의 품 밖으로 탈출하려는 악녀

라이신이 의무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아, 오셨습니까! 천사님!”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하나같이 입과 코를 손수건으로 꽁꽁 감싸고 있었다. 기이하면서도 진풍경인 그 모습에 라이신이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다들 잘 실천하셨군요! 이렇게 손수건만 잘 쓰고 있어도 수많은 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어요.”마스크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세계였다. 라이신이 기지를 발휘해 손수건 양끝에 귀에 걸 수 있는 고리를 달아 쓰라고 알려준 덕분에, 대공령 내 전염병의 확산세는 눈에 띄게 꺾인 상태였다.“천사님 덕분에 영지가 한시름 놓았습니다.”렌스렌 기사단장의 감격 어린 보고를 들으며, 라이신은 곧장 아이들이 모여 있는 작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자, 아픈 아이들은 어디 있죠?”“작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라이신을 본 아픈 아이를 데려온 부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라이신이 치유를 시전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때, 저만치 뒤에서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던 노파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노파는 라이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더니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내 작고 소박한 쿠키 바구니를 라이신의 손에 쥐여주었다.“······드디어 오셨군요. 천사님. 며칠 전에 제 손주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내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워낙 가진 게 없어 드릴 것이 이것뿐이네요.”투박하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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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도망치면 각하가 폭발할지도

다음 날 새벽.침대에 누워 있던 라이신은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어제 그녀는 바아르 몰래 전염병에 걸린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치유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침실로 잘 복귀하긴 했으나, 무리하게 마력을 쥐어짜 낸 몸은 그야말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라이신은 제 곁에 곤히 잠든 바아르를 바라보았다. 혹여 그가 깰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여며준 뒤, 그녀는 살그머니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바아르가 자신을 위해 협탁 위에 둔 사과 주스를 한 모금 축인 라이신은 느린 걸음으로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새벽안개 속에서 형형색색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대공저의 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결국 떠나야 하는 걸까.’매일 심장이 조마조마할지언정, 이곳에서 바아르와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도르하르 황가에서 보낸 청혼장의 묵직한 무게가 사정없이 가슴을 짓눌러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바로 그때, 침대 저편에서 바아르의 낮은 숨소리가 라이신의 귓가를 스쳤다. 이 아름다운 이세계 정점에 선 남자가 어느새 자신과 이토록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지금도 꿈결 같아 자꾸만 현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잠이 오지 않아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고, 평소 소중히 간직해온 물건들을 모아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확인했다.주머니를 기울이자 안쪽에서 익숙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르남의 토지증서, 신분증명서, 금화 한 닢과 은화 몇 개, 그리고 작은 약통 하나까지.약통을 열자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아직 열다섯 알의 약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 알을 꺼내어 쥐자 손끝으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약 한 알을 삼키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가뭄은 여전하니 전염병이 또 창궐할 수도 있어. 청혼을 거절하면 도르하르와 전면전도 벌어질 테고.’복잡한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한 라이신은 약을 아끼는 게 나을 것 같아 다시 주머니에 밀어 넣고 협탁 깊숙한 곳에 숨겼다.그녀는 다시 바아르의 얼굴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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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고운 남자에게 벌 받는 여인

이렇게 자신에게 한없는 마음을 퍼부어주고 있는 바아르인데.또다시 그에게 거짓말쟁이가 되려 하다니.라이신은 마음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날에 긁힌 듯 쓰라려왔다. “각하, 죄송해요.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죄송?”거짓말을 덧대다 보면 결국 상대를 완전히 기만하게 되고, 나중에는 사죄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를 터였다. 라이신은 더는 숨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파고들었다.“저 사실······ 각하의 명령을 어겼어요.” “그래?”바아르는 미동도 없는 건조한 표정으로 라이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찰나의 순간 그의 서늘한 낯빛을 마주한 라이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괜히 입을 열었나 하는 후회가 해일처럼 몰려왔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저······ 전염병에 걸린 아이들을 몰래 치료해 왔어요.”“그렇군.” “······그래서 몸이 좀 앓았던 거예요.”예상했던 불호령이나 분노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덤덤한 반응에 라이신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아르는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기울이더니, 온갖 감정이 일렁이는 진득한 눈으로 라이신을 빤히 응시했다.“라이신, 내 말을 어겼으니······ 벌이 필요하겠구나.”위압적이면서도 묘하게 열기가 밴 목소리였다. 라이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그녀가 참았던 숨을 쭉 내뱉으며 그에게 물었다.“혹시······ 이미 알고 계셨나요?” “그래.”이런.라이신은 부끄러움에 지금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바아르가 더 빨랐다. 그는 라이신의 허리를 커다란 한 손으로 감싸 안고는 그대로 넓은 침대 위로 거칠게 눕혔다.그의 단단한 체구가 시야를 가득 메우며 다가왔다. 바아르는 라이신의 입술 위로 천천히 제 입술을 겹쳐 누르며, 숨결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진득하게 파고들었다.지독하게 야릇하고도 위태로운 입맞춤 끝에, 그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떼며 낮게 읊조렸다.“각오는 되어 있겠지?”라이신은 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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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감히, 다른 남자한테 가려고?

새벽이 물러가고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 오는 시각이었다.밤새 바아르의 달콤하고도 지독한 벌을 받아낸 탓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 라이신은 느린 걸음으로 테라스로 향했다.어느새 다가온 바아르가 건넨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그녀는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함께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피어오르는 찬란한 아침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오직 서로에게만 단단히 묶여 있었다.“각하, 언제 눈치채셨어요?”고요를 깨트린 라이신의 목소리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찻잔을 쥔 가냘픈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갔다.“네 마력이 별채로 이동하자마자 바로 알았다.”라이신의 고운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그런데 바로 말씀 안 하셨네요.”그 순간 바아르의 시커먼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러나 이내 그 표정 위에 묘한 기대감을 서서히 띄우며 낮게 입을 열었다.“네가 언젠가는 내게 먼저 말하겠지 싶어서. 기다렸어.”“말씀 안 드렸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어휴, 벌이 참······ 대단했는데요.”라이신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쾌활하게 웃으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 정말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벌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라이신.”바아르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씻겨 나갔다. 사뭇 진지하다 못해 무겁게 내려앉는 분위기를 감지한 라이신은 슬그머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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