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힌 건 다름 아닌 피르닉스였다.지금까지 사사건건 정무 회의를 훼방 놓으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음모론을 들고나오니 에스메 역시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감히 무엄하게! 황녀 전하께 이 무슨 무뢰한 언사요!”에스메의 지지층이 넓어진 만큼, 다른 대신들도 피르닉스를 향해 일제히 살기를 뿜었다.“이 어려운 시기에 이만큼 하신 것도 대단하시거늘, 무슨······.” “제국 전체가 가뭄에 시달리는 데다, 캔돔 대공가마저 황가와 오해를 사 정세가 위태롭소. 말씀 좀 가려 하시오!”잠깐. 에스메는 캔돔 대공가로 인해 제국이 불안하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슬며시 시선을 돌리자, 곁에 선 레인이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단단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미하엘의 데뷔탕트 때 세실리에가 일을 벌인 건 사실이나, 그녀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 라이신과 바아르마저 고통을 겪었으니 황가로선 할 말이 없었다.그렇다고 이대로 밀릴 수는 없었다. 에스메는 탁! 손바닥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피르닉스 경, 말씀 잘하셨습니다. 당연히 제 데뷔탕트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계셔야지요. 그런데, 식도 치르지 않은 제 청혼장을 독단적으로 발송하신 것부터 대답해 주셔야겠습니다.”에스메는 치맛자락 아래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그건··· 이미 폐하께서 작성하셨던 것이라··· 너무 지체되기 전에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몸도 불편하시니,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피르닉스 경! 전하에 대한 모욕을 당장 멈추시오!”레인이 핏대를 세우며 발끈하려던 바로 그 순간. 에스메가 스르륵 손을 올려 레인의 탄탄한 팔뚝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사내의 뜨거운 열기에 숨이 가빠왔지만, 에스메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피르닉스 경. 제가 몸이 좀 약할지는 몰라도, 제국을 다스릴 머리까지 불편하진 않습니다.” “아, 아···.”하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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