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극 로맨스 / 피안을 거슬러 / Chapter 511 - Chapter 520

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511 - Chapter 520

556 Chapters

제511화

언제부터였을까?아마도 배준형이 혼사를 무른 후부터였을 것이다.배준형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유정남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그간 제가 알게 모르게 무례를 많이 범한 듯합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요, 국공 어르신. 유 공자께서 자유의 몸이 되실 수 있도록 해독제를 드리겠습니다."그는 한참 동안 찻잔을 들고 있었으나, 유정남은 끝내 받지 않았다.배준형도 제법 끈질기게 버텼다."유 공자의 정인도 지금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털끝 하나 안 다치게 무사히 국공부로 돌려보내 드리지요."고개를 든 유정남의 시선은 한없이 담담했다. 찻잔을 받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유정남의 속내를 훤히 꿰뚫었다고 자만했건만, 뜻밖의 반응에 배준형은 당혹스러웠다. 아들의 목숨 따위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일까.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지던 끝에 마침내 유정남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차를 마시는 대신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세자께서 협상을 원하신다면, 고작 이 정도 성의로는 어림없습니다."배준형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내게 명단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 적힌 자들을 넘겨준다면, 내가 경세자를 설득해 그쪽 해독제를 받아드리지요. 정군왕 세자도 자유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출정 전에 세자가 내 아들 관성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세상에 분명히 밝혀드리지요. 어떻습니까?"그는 여유로운 손길로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치자 다섯 명의 이름이 보였다.배준형은 명단을 확인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며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하나같이 그의 오른팔과도 같은 자들이자, 문신과 무장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맹세한 핵심 수족들이었다."출정까지 아직 사흘이 남았으니, 돌아가 찬찬히 고민해 보세요."유정남은 정중하게 축객령을 내렸다.배준형은 치미는 분노에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가까스로 화를 억누른 그는 결국 분을 삼키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경왕부.저녁 식사
Read more

제512화

국사원은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가는 참배객들로 몹시 붐볐다.이연령은 불상 안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그녀는 불상을 향해 경건하게 세 번 절을 올렸다.고개를 돌린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경세자비?"유지영 역시 놀란 기색을 꾸며냈다."참으로 우연이네요. 연령 군주께서도 이곳에 오시다니."물론 이연령은 우연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아한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나는 이미 불공을 다 드렸으니 이만 가보겠네.""그러시지요."유지영은 운민이 건네는 향을 받아 들고 경건히 절을 올렸다.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대전을 빠져나온 이연령은 뜰 밖에 도열한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을 보며 낯빛을 굳혔다. 시녀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군주님, 혹시 저희가 미행을 당한 걸까요?"이연령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내가 유지영을 너무 얕봤어. 제법 영악한 구석이 있는 줄 몰랐군."사방을 둘러보아도 배준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그녀는 결국 시녀 은행을 데리고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한 시진 후.유지영은 산을 내려와 마차를 타고 도성으로 돌아오던 중 소식을 들었다. 이연령의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마차가 뒤집혔고 밖으로 튕겨 나간 이연령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배준형이 이연령을 구했고, 현재 도성 안 의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호위들 말로는 한쪽 팔이 부러졌을 뿐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운민의 얼굴에는 고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세자비 마마께서 손을 쓰지 않으셨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겁니다."유지영은 밖을 거닐다 돌아오니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듯 기분이 상쾌했다.지난번의 빚은 이렇게나마 갚은 셈이었다.*의관.피로 흠뻑 젖은 이연령의 팔을 살피던 의원은 단숨에 헛숨을 들이켰다."이, 이건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Read more

제513화

이연령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억울하다는 듯 코를 훌쩍였다."태, 태후 마마?""두 번이나 불상사가 생겼으니 세 번은 안 될 일이지. 액운을 쫓을 수 있도록 내가 사람을 시켜 절에서 평안부라도 하나 받아오마."말을 마친 서 태후는 소 상궁에게 지시했다.소 상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아, 아닙니다, 태후 마마. 저는 분명 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이연령은 다급하게 호소했다.서 태후는 몸을 굽혀 평상에 기대앉으며 혀를 찼다."연령아, 참으로 미련하구나. 어찌 정세자 같은 자와 얽힌단 말이냐. 그 아이는 처복이 없어 벌써 두 명의 부인을 잃었다. 다들 피하지 못해 안달이거늘, 이번에 교외에서 마차가 놀랐을 때 하필 그 아이의 도움을 받다니. 쯧쯧!"서 태후의 꾸지람에 이연령은 더욱 애가 탔다."태후 마마, 저는 정세자와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없습니다.""연령아, 만약 이 일이 배준형이 꾸민 짓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내 결코 그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서 태후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는 다과를 들고 태화궁에 갔다가 배준형을 마주쳐 몇 마디 나누더니, 오늘 귀신같이 마차가 뒤집히고 그의 구조를 받았다. 넌 장군부의 귀한 아가씨다. 절대 허튼생각을 품지 말거라."무심코 내뱉은 듯한 말들 속에는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연령은 목끝까지 차오른 변명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물증이 전혀 없는 마당에 유지영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밝혀낼 방도는 없었다.이연령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가르침 감사드립니다, 태후마마. 앞으론 매사에 신중을 기하겠습니다."서 태후는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연령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다정한 당부를 덧붙였다.*내실을 나선 서 태후는 회랑 아래 기다리고 있던 배준형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준형아, 정세자비가 상을 당한 지 이제 겨우 보름 남짓이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저으며 사람을 시켜 배
Read more

제514화

자녕궁에서 쫓겨난 배준형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전생에 서 태후는 늘 그에게 자애로운 관심을 베풀며 수시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조차 사람들의 눈을 피해 따로 불러 타이를 뿐이었다.태후의 든든한 비호 아래 배준형은 거침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하지만 오늘 마주한 노골적인 경멸의 눈빛은 그의 가슴을 찌르며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가 궁문을 나설 때 하늘은 이미 어스름하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궁문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유정남이 휘장을 걷어 올리며 물었다."세자,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습니까?"배준형은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대답했다."국공 어르신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마침내 양측의 거래가 성사되었다.두 사람은 각자 쥐고 있던 마지막 해독제를 조심스레 교환했다."국공 어르신께서는 언제 제 결백을 밝혀주실 셈입니까?"배준형이 물었다.유정남은 속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짐짓 태연한 척 대꾸했다."아직 세자께서 그 다섯 명을 내게 넘기지 않으셨습니다만.""당신!"배준형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다섯 명의 고수를 유정남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신분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한 시진 뒤에 내가 그 다섯 명을 국공부로 보내겠습니다. 부디 국공 어르신께서도 약조를 지키길 바라지요."유정남이 휘장을 내리자 마차는 국공부를 향해 출발했다.해독제를 손에 넣은 유정남은 곧장 배현준에게 향했다. 약은 배현준을 거쳐 명언에게 전달되었고, 명언은 지체 없이 약을 들이켰다.*한 시진 후.기이한 옷차림을 한 사내 다섯이 유국공부로 당도했다. 유정남은 배준형이 보는 앞에서 오해를 푸는 상소문을 작성한 뒤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파발마로 쏜살같이 황궁에 전달하게 했다.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배준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신이 무사히 상 내관의 손에 들어갔다는 확답을 받
Read more

제515화

명언, 아니 유관성은 아버지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전후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구석에 결박된 여인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관성의 눈빛에는 애정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서늘한 원망과 증오만이 맴돌았다.그 여인 역시 유관성을 보자마자 마치 악귀라도 마주친 양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웅크렸다."이것은 제 사적인 원한이니, 제가 직접 매듭지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유관성의 청에 유정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방온이 다가와 유관성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방온, 큰공자를 뵙습니다. 과거 시험 전까지 잠시 이 댁에 머물고 있습니다만, 시험이 끝나는 대로 지체 없이 거처를 옮기겠습니다."방온에 대해서는 이미 유정남이 설명해 둔 터였다. 게다가 방온은 매일 자신의 처소에만 머물며 철저히 선을 지켰다. 유정남은 아들이 온전히 자리를 되찾고 나면 방온에게 작은 가업이라도 마련해 주려 했으나, 방온은 이를 한사코 거절했었다."방 공자, 부담 갖지 마세요."유관성은 여전히 조금 어색한 듯 손을 내저었다.방온은 유정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저는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니, 세자 자리는 마땅히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방씨 가문도 제가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 밤 내가 입궁하여 황상께 모든 사실을 명백히 아뢰도록 하마.""감사합니다, 나으리."방온은 소란을 듣고 직접 입장을 밝히려 찾아왔다가, 목적을 달성하자 눈치껏 물러났다.유정남은 붉어진 눈시울로 유관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쏟아지는 애정에 유관성은 도리어 몹시 거북해했다.*반 시진 후.유정남은 다급히 입궁해 건양제를 알현했다. 그는 유관성을 되찾았으며 자신이 정세자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소신이 세운 모든 군공을 담보로 내놓을 테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폐하."유정남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그간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건양제
Read more

제516화

전각 밖에서 북소리가 진동했고, 간간이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이연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랑으로 향하자, 새로 온 궁녀 벽옥이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군주, 오늘 양성 장군께서 출정하시니, 그 광경이 참으로 장관일 것입니다."양성 장군이라는 단어는 이연령의 귓가에 몹시 거슬렸다. 그녀는 안색을 굳히며 무의식중에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그녀는 벽옥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배현준이 몇 년이나 앞당겨 정체를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유지영이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존재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배현준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사람은 이연령이었다. 염치없는 유지영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이다.생각이 깊어질수록 이연령의 안색은 더욱 흉흉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자 마침내 북소리가 멎었고, 거칠게 요동치던 그녀의 가슴도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연령아."연한 푸른색 치마를 입은 유영 군주가 다가왔다.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연령의 다친 팔을 본 유영 군주는 미간을 찌푸렸다."아직도 아프니?"정신을 차린 이연령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저택에서 약을 좀 챙겨 왔다. 태의에게 물어보니 모두 네게 쓰일 만한 것들이라더구나. 푹 쉬면 금세 나을 게다."유영 군주가 걱정스레 말했다.두 사람은 정자로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이연령이 불쑥 물었다."유영, 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어?"유영 군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네 말이 놀라 날뛰던 날, 국사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적어도 수십 대의 마차가 지나갔어. 경세자비의 마차는 그로부터 한 시진 뒤에나 그곳을 지나갔지. 마부와 은행은 중상을 입고 죽었다고 하더구나. 내가 사람을 시켜 그 말을 확인해 보았는데, 누군가 고의로 습격한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어. 그게 전부야."요컨대, 이 일이 유지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
Read more

제517화

유영은 아예 마차에서 내려 시녀와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흑흑!""사람 살려……."머지않은 앞쪽에서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영 군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가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고개를 돌려보니 유지영이었다."경세자비?""기 부인."유지영은 손을 뻗어 유영 군주를 길가의 다루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마침 창가 자리에 마주 앉게 되었다.유영 군주는 영문을 몰랐지만 순순히 이끌려 자리에 앉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어찌하여 이러시는 겁니까?"유지영의 시선이 창밖 아래를 향했다. 한 노파가 네 살배기 아이를 끌어안고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마차에 치인 모양인지, 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호성의 화친 사신단이 어제 경성에 당도했습니다. 저 아이는 크게 놀라 기절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없습니다. 만약 군주께서 나서신다면 훗날 호성의 사신이 군주를 지목하며 화친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유지영은 전생에 저 어린 여자아이를 구한 사람이 바로 유영 군주였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평범한 백성처럼 보이는 저 아이는 사실 호성 제2황자의 친딸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저 아이는 이황자가 애지중지하는 금지옥엽이었는데, 장난을 치다 하마터면 말발굽 아래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천만다행으로 아이는 무사했고, 며칠 푹 쉬면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유영 군주는 호성 이황자의 눈에 들어 먼 타국으로 시집을 가야 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만에 이국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나는 이미 혼인한 몸인데, 어찌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간다는 말입니까?"유영 군주가 경악하며 소리쳤다.유지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유영 군주를 바라보았다."저쪽에서 억지를 부린다면 어쩌시겠습니까?"유영 군주는 입을 다물었다.양나라 대군은 이제 막 출정길에 올랐고, 호성 역시 화친을 청하러 온 상황이었다. 만약 화친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전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컸다. 혼사 하나 때
Read more

제518화

날이 어두워지기 전, 유지영은 경왕부로 돌아왔다.운민은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세자비 마마, 유영 군주는 믿을 만한 분이십니까?""우리 사이에는 어떤 이해관계도 얽혀 있지 않아. 유영 언니가 기씨 가문으로 시집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나와 같은 배를 탄 셈이지."게다가 유영 군주는 이미 여러 번 유지영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해준 적이 있었다."이연령이 유영 언니에게 말이 놀란 일을 캐달라고 부탁했지만, 증인과 물증은 이미 다 없애버렸어. 유영 언니도 겉으로만 돕는 척하며 나를 지켜주고 있는 거지."같은 배를 탄 사람이라면 마땅히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었다.다음 날.호성 이황자가 도성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궁에서는 환영 연회가 열렸고, 경왕과 조원금이 연회에 참석했다.덕분에 유지영은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연회가 끝났는지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조원금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다. 잠시 말동무나 하러 들렀다."동금이 따뜻한 차를 올렸다.조원금은 차를 두어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어제 서씨 가문의 딸이 호성 이황자의 딸을 구했는데, 오늘 이황자가 서 낭자에게 청혼을 했다지 뭐냐."서운영은 바로 어제 아이를 구했던 청의 소녀였다.그녀는 황궁의 서 태후와도 먼 친척뻘 되는 조카였다. 보름 전 황명으로 상경했다가, 어제 근처에서 다과를 사던 중 울음소리를 듣고 우연히 아이를 구한 것이다."오늘 연회에서 태후 마마께서 서운영을 어찌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지."조원금은 궁궐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유지영은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차를 채워주었다. 이야기가 자못 흥미로웠다."호성 이황자는 첫 부인을 난산으로 잃고 핏덩이 딸 하나를 얻었다더구나. 그 아이를 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끔찍이 아낀다지. 어제 서운영이 그 귀한 아이를 구했으니, 꼬마가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며 어머니로 모시
Read more

제519화

유씨 노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요 근래 노부인은 하루가 멀다고 의원을 불러 진맥을 받았고, 삼시 세끼 탕약을 달고 살았기 때문이었다.부고가 전해지자마자 차남댁의 유정랑과 유원랑, 삼남댁의 정씨와 유정웅이 가장 먼저 달려와 상복을 입었다.이번에는 유정남도 이들의 발걸음을 막지 않고 영당 앞에 무릎을 꿇도록 내버려 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영도 국공부에 도착했다."지영아."유정남은 핼쑥해진 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안쓰러워했다.하지만 유지영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효라는 글자의 무게를 저버릴 수 없었고, 죽은 이는 엄연히 집안의 어른이었다.노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고 눈시울도 붉게 젖어 있었다.어찌 되었든 그를 낳아준 친어머니였다.유지영은 향을 정성스레 피워 올린 뒤 유정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몇 달 만에 본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누렇게 뜬 피부와 푸석한 머릿결,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 너덜너덜했다. 곁에 엎드린 유원랑의 꼴도 다를 바 없었다. 눈빛에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유정랑의 뒤만 졸졸 쫓았다."큰, 큰누님."눈이 마주치자 유정랑이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며 그녀에게 아는 체를 했다.유지영은 손수건을 꽉 쥔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유정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씨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유정웅의 학업을 묻는 것으로 상황을 넘겼다.정씨 모자는 공손한 태도로 묻는 말에 깍듯이 대답했다.영당 안을 둘러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유정남을 제외하고는 슬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정씨의 눈에는 은근한 웃음기마저 어렸다. 그녀는 남들 눈에 띌까 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냈는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그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다."지영아, 너는 이미 출가외인이고 향도 올렸으니 굳이 여기 머물 필요 없다."상복을 차려입고 방석에
Read more

제520화

유씨 노부인은 결국 아들 셋 중 둘을 먼저 떠나보내고, 말년에는 모든 자손에게 외면받는 처지가 되었다.유지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삼켰다.그녀가 차남댁과 삼남댁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손을 썼으면서도 유씨 노부인에게만큼은 선을 그었던 건,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이제야 비로소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던 응어리가 씻은 듯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참, 네게 전할 말이 하나 더 있다."조원금이 유지영의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당씨 가문의 큰공자가 죽었다더구나.""언제 일어난 일입니까?"유지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조원금은 가볍게 혀를 찼다."오늘 아침에야 알게 되었다. 강에 빠져 익사한 시신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을 지나가던 시녀가 발견했다지 뭐냐."당학이 물에 빠져 죽다니,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하지만 직감은 이 사건은 그리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매사에 주도면밀하던 당학이 어처구니없이 발을 헛디뎌 죽을 리 만무했다.게다가 당학은 제 목숨을 끔찍이도 아끼는 자였다. 뼈아픈 좌절을 겪었더라도 기어코 당윤을 짓밟겠다는 독기를 품고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갈았을 것이다.혹여 당학이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알아챈 탓에 입막음을 당한 것은 아닐까?의문은 오래가지 않아 풀렸다.그날 오후, 유지영을 찾아온 유영 군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머니께서 그동안 당씨 가문의 편을 들어준 건 온전히 아버지 때문이었어. 사실 아버지의 여동생인 류씨의 집안은 장공주부에 감히 얘기도 못 건넬 수준인데, 어머니께서 굳이 아버지를 마음에 두셨지."유영 군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네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아버지는 얼굴도 준수하고 글재주도 제법 뛰어났어.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꼿꼿한 성품이었는데, 과거를 치르러 왔다가 어머니 눈에 띄어 부마가 되신 거지."유지영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류 부마의 누이동생이라면 장공주부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정실 자리도 거뜬했
Read more
PREV
1
...
5051525354
...
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