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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그렇게 한참 뒤, 송씨가 시녀와 유선주의 부축을 받으며 힘없이 안으로 들어왔다.두 사람을 본 유씨 노부인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꿇어라!”송씨는 당황한 얼굴로 노부인을 바라보았다.쾅!유씨 노부인이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겁에 질려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할머니, 진정하세요.”“우리가 인주로 좌천되어 십여 년을 버티다가 겨우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도 안 되어 추문만 온 집안에 쌓이게 만들었구나.”유씨 노부인은 오늘 자신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앞으로 돌게 될 소문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녀는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송씨를 노려보며 말했다.“열두 명의 목숨이 달린 사건이다. 송씨, 네가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면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는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널 구하지 못해.”송씨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듬거렸다.“어… 어머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경조 판사는 이 일을 조정에 올릴 것이다. 조정이 움직이면 소주까지 사람을 보내 철저히 조사하겠지. 황족도 죄를 지으면 벌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유씨 노부인은 송씨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선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은 정왕부가 나선다 해도 조용히 덮을 수 없을 게다.”유선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유지영이 관청에 신고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유지영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잘못을 저질러놓고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으니, 이제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다. 노부인의 시선을 느낀 유지영이 담담히 말했다.“그 수녀가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순간부터 이 일은 덮을 수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모든 죄를 유국공부가 떠안아야 했을 수도 있어요!”“언니가 인정하고 곤장 서른 대만 맞았으면 바로 끝났을 수도 있잖아요.”유선주가 다급히 말하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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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배준형이 숙태비의 처소로 달려갔을 때, 숙태비는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배준형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태후께서 무슨 일로 너를 궁으로 부르신 것이냐?”“바둑을 몇 판 두고 조정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배준형이 답했다.숙태비는 배준형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부광 비단 일이 정말 송씨와 관련되었다면 혼사는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으로 몰아간 일에 사돈이 연루된다면, 정왕부에도 좋을 게 하나 없었다.배준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배준형이 달래자 숙태비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오래 묵혀두었던 말을 꺼냈다.“나는 평생 모멸감을 참으며 살았다. 죽기 전에 궁에 있는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넘어설 수 있다면, 이번 생에 더 바랄 게 없겠구나. 준형아, 너는 이 할미의 유일한 희망이다.”“할머니, 여러 친왕 세자 중에 저를 넘어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숙태비의 안색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보고 배준형이 말을 이었다.“오늘은 할머니의 생신 연회라 밖에 손님들이 많이 와 계십니다. 오늘 일 때문에 연회까지 망칠 수는 없습니다.”숙태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배준형의 부축을 받아 손님들을 맞이했다.오시가 가까워지자 생신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아침에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도 제법 부드러웠다. 무대에서는 악사들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연회장은 조금씩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그때 시녀들이 저마다 제 주인 곁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귓속말로 전하기 시작했다.한 부인이 놀라 물었다.“뭐라고요? 폐하께서 유 상서의 직위를 박탈하셨다고요?”다른 부인들도 하나둘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한 시진 전, 황제가 유정혁의 이부상서 직위를 파면한다는 조서를 내린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열두 수녀의 사망 사건을 철저히 조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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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유정혁은 날카로운 그녀의 반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도 그동안 유지영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지켜보았다. 그래서 송씨가 유지영에게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는지, 겉으로는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부광 비단처럼 귀한 물건은 애초에 집안에서 쉽게 다루는 물건도 아니었기에, 설령 그런 것이 들어왔다고 해도 유선주의 몫이 되겠지, 유지영에게 돌아갈 일은 없었다.정말 우연이었던 걸까?이내 유지영의 희고 고운 얼굴 위로 서러운 기색이 스쳤다.“그날 저는 옷을 수선하러 갔다가 우연히 장공주 전하를 뵈었습니다. 장공주 전하처럼 매일 귀한 비단을 보시는 분도 알아보지 못하셨는데, 삼촌께서는 제가 그것을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십니까?”그 말에 유정혁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의심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그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그러나 송씨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송씨는 그의 시선에 찔린 듯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유정혁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부광 비단 일에 대해 정말 몰랐다면 부부의 정을 생각해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소. 하지만 알고도 그런 짓을 벌인 것이라면, 나는 반드시 당신을 내칠 것이오.”“나으리!”말을 마친 유정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고, 송씨는 그를 붙잡기 위해 비명을 질렀지만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어머니!”유선주가 놀라 소리쳤고, 대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유씨 노부인은 손을 내저어 송씨를 처소로 돌려보내게 하고, 정씨네 일가도 물렸다.모두가 떠난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지영아, 이 할미가 잘못했다. 네가 그렇게 많은 서러움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구나.”갑자기 달라진 할머니의 다정한 태도에 유지영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기쁘기보다는 먼저 경계심이 들었다.이제 와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결국 그녀를 궁으로 보내 태후에게 부탁하게 만들 속셈일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유씨 노부인은 눈물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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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세자와 따로 나눌 말이 있던가요?”유씨 노부인은 마음이 복잡한 탓에 빨리 유지영을 내보내고 싶었다.“세자께서 손님으로 오셨으니, 어서 정원으로 모시거라.”노부인의 안달 난 얼굴을 본 유지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고, 배준형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잠시 후, 두 사람은 정원의 정자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너와 나는 전생에 부부였다. 지영아, 너도 나처럼 회귀했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 부광 비단 일을 네 숙모에게 뒤집어씌운 건 정말 지나쳤다.”조금 전까지 예의를 차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배준형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나무랐다.유지영은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나와 맞서서 네게 득 될 게 뭐가 있겠느냐. 앞으로는 각자 갈 길을 가고, 다시는 얽히지 말자. 비겁한 수로 선주를 괴롭히지도 말고. 나는 전생의 한이 남아 이번 생에 선주를 택한 것뿐이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든, 내 선택은 오직 선주뿐이야.”배준형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유지영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녀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배준형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너도 이제 지난 일은 내려놓고 새로 시작해라. 배현준은 아무리 밀어줘도 큰일을 해낼 사람이 아니야. 괜히 그를 앞세워 나와 맞서려 하지 마라. 내가 즉위하면 그에게 영지를 내려 너희가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그 말을 듣고 유지영은 그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모른다는 걸 확신했다.그러니 저렇게 분수도 모르고 즉위를 입에 올리는 것이다. 그는 전생에 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전부 제 능력 덕분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내가 없으면 네가 무슨 수로 이번 생에도 태자가 되겠니.한편, 유씨 노부인은 급히 송씨를 찾아갔다.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문을 닫은 뒤, 노부인은 겨우 정신을 차린 송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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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유선주가 헐레벌떡 정원으로 달려왔을 때, 유지영은 이미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참이었다.눈치 빠른 홍주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유선주를 보고 서둘러 알렸다.“군주님, 선주 아가씨가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유지영이 고개를 돌리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오는 유선주가 보였다. 유지영은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띠고 도발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을 본 순간, 유선주는 당장이라도 유지영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영 언니는 정혼자도 있으면서 예의도, 부끄러움도 모르나요? 어떻게 제가 곤란한 틈을 타 세자께 접근할 수가 있죠?”유선주는 오늘 체면을 크게 구긴 탓에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하필 자신이 모르는 사이 유지영이 배준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이성이 끊어질 지경이었다.유지영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배준형을 비웃듯 바라보았는데, 마치 이게 당신이 선택한 사람이냐며 묻는 듯했다.“언니!”유선주는 할 수만 있다면 유지영의 눈이라도 도려내고 싶었다.“우리 어머니를 모함한 것도 모자라, 국공부 안에서 대놓고 제 정혼자에게 접근하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선주야!”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유선주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잔뜩 서러워하는 얼굴을 보자 배준형의 마음이 또 한없이 약해졌다.두 사람은 남들이 보든 말든 가까이 붙어 섰다.배준형은 흐느끼는 유선주를 부드럽게 달랬다.“세자께서 많이 이해해 주셔야겠네요. 선주는 원래 생각 없이 말을 뱉는 버릇이 있거든요. 온 경성이 다 아는 일을 고작 눈물 몇 방울로 제 잘못인 것처럼 몰아가려 하다니.”유지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하얗게 질린 유선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대놓고 멍청하다는 말을 들은 유선주는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큰언니!”“군주는 왜 일부러 선주를 자극하는 겁니까?”배준형은 유선주를 감싸 안은 채 눈살을 찌푸리고, 경고하듯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유지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받아쳤다.“맏언니로서 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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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유지영은 서둘러 소 상궁을 부축했다.“소 상궁님, 고생 많으셨습니다.”“소인은 괜찮습니다.”소 상궁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태후마마께서 오늘 군주님이 정왕부 대문 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많이 속상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을 보내 이것을 전하라 하신 겁니다. 이번 사건을 맡은 부 대인은 능력이 뛰어난 분이니 마음 놓고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결코 군주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두지는 않겠다고도 하셨고요.”그 말을 들으니 유지영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소 상궁을 돌려보낸 뒤, 배준형이 유선주를 무려 반나절이나 달래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유선주가 처소로 돌아갈 때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했다.어차피 이번 일이 결코 너희에게까지 번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겠지.부광 비단 사건 이후로 경성은 며칠 동안 조용했다.유지영은 일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직접 곽 장군 댁에 가서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이런 시국에 괜히 밖으로 나섰다가 곽운연에게 불필요한 피해를 줄까 조심스러웠다.어느덧 북명대사가 외할머니의 다리를 치료하기로 한 날이 돌아왔다. 유지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담씨 저택으로 가기로 했다.시간에 맞춰 복성당에 도착하니, 역시나 북명대사가 담씨 노부인에게 침을 놓고 있었다.북명대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방해받는 것을 몹시 싫어해 한씨와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유지영은 조용히 회랑 아래에 서서 기다렸다.그렇게 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북명대사가 침을 거두었다. 그는 이내 깨끗한 수건으로 손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아내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지영은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시녀들이 뒷정리를 하는 사이, 유지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담씨 노부인의 안색은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그녀는 북명대사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사님, 꼭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북명대사는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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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담시령은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피를 나눈 자매잖아. 아버지께서도 늘 넌 고모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핏줄이니 서로 돕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아도, 유지영은 담담히 팔을 빼냈다.그녀는 숙태비의 생신 연회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모함을 당하는 동안, 담시령은 마차 안에 숨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런 사람들은 늘 얻을 것이 있을 때만 다정하게 굴었다. 이용할 가치가 사라지면 언제든 등을 돌리고, 오히려 그녀를 밟고 올라섰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바로 담시령이었다.유지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담시령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왜, 싫어? 설마 공로를 혼자 다 차지하려는 건 아니지? 고모께서 북명대사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북명대사가 너를 거들떠보기나 했겠어? 그리고 고모는 우리 담씨 가문의 따님이야!”역시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자,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유지영은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언니는 그날 자녕궁에서 숙태비와 정왕비가 왜 벌을 받았는지 벌써 잊으셨나 봐요.”그 말에 담시령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또 태후마마를 들먹이는 거야? 네 속셈은 알겠는데, 사소한 일마다 태후마마를 앞세워서 잘난 척 좀 하지 마.”의술을 배울 수 없을 것 같자, 담시령은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유지영을 노려보았다.“숙태비는 어쨌든 우리에게 큰어른이 될 분이야. 그런데 왜 예의도 없이 정왕부와 맞서려 들어? 태후께서 널 아끼시는 건 맞지만, 너는 네 평판도 생각 안 해?”그날 생신 연회가 엉망이 된 일은 담시령의 마음에도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장차 정왕부로 시집갈 몸인데, 정왕부가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듣기 거북했던 것이다.그녀는 모든 일이 유지영이 말썽을 일으킨 탓이라고 여겼다.유지영은 자신을 훈계하려 드는 담시령이 우스워 눈썹을 살짝 올렸다.“그러니까 언니 말은, 제가 누명을 쓰고 곤장 서른 대를 맞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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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지영아…….”담성국이 당황한 얼굴로 유지영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유지영은 그들 부녀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에, 이내 고개를 돌려 담시령에게 말했다. “언니와 나 사이에는 처음부터 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죠. 그러니 앞으로는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언니에게 폐 끼칠 일 없을 테니, 서로 각자 살면 됩니다.”선을 긋는 듯한 유지영의 태도에 담시령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버지, 보셨죠? 아버지께서 그렇게 마음 쓰고 아끼시던 조카딸이 이런 사람이에요. 이제 조금 힘이 생겼다고 태후마마께 붙어서 우리 담씨 가문은 안중에도 없잖아요!”“그만해라!”담성국이 매서운 눈으로 딸을 노려보았다. 담시령은 겁에 질려 움츠러들며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사납게 유지영을 향해 있었다.재수 없어.담성국은 착잡한 얼굴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을 망설였다.유지영은 담시령 앞으로 다가가 차분히 물었다.“대체 저한테 뭘 바라시는 거예요? 결국 언니를 위해 제가 정왕부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고 비위 맞추길 바라는 건가요? 오늘 외삼촌도 계시니 분명히 말할게요. 저는 언니에게 빚진 것도 없고, 먼저 언니를 건드린 적도 없어요. 그런데 언니는 늘 저를 깎아내리고 시비를 걸었죠.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요?”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담시령이 눈에 거슬렸다.“너…!”그 말에 담시령은 잠시 멍해졌다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뭐라고 받아쳐야 하는데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외삼촌, 제게 잘해주신 분께는 반드시 은혜를 갚겠지만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저를 감싸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담성국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 듯 한숨을 내쉬었다.“지영아,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더는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네 마음은 알겠다.”“감사합니다, 외삼촌.”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예를 올린 뒤 담씨 노부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회랑에 부녀 둘만 남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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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시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담성국의 심복이 들어와 조금 전 회랑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한씨는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품에 안고 있던 담시령을 떼어내고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이게 다 사실이냐?”담시령은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느라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어리석은 것! 왜 쓸데없는 일로 그 애와 부딪쳐 일을 키우니? 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니냐. 태후마마께서 유독 아끼는 아이인데, 오히려 네가 잘 보여야 할 판에!”한씨도 최근 유국공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정왕비가 유지영을 이용해 북명대사를 부르려다 태후에게 크게 혼난 일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담시령은 유지영이 숙태비의 생신 연회에서 소란을 피웠다며 탓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열두 명의 목숨이 걸린 사건이라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왜 어머니까지 지영이 그 계집애 편을 드세요?”담시령이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한씨는 딸이 답답해 화가 치밀었다.“내가 왜 그 애 편을 들겠니? 생신 연회에서 벌어진 일은 애초에 숙태비와 상관없는 일이야. 유국공부 안에서 벌어진 집안싸움이지. 송씨네가 지영이를 해치려 한 건 이미 거의 드러난 일이고, 사람 열둘의 목숨이 걸린 만큼 진실이 밝혀지면 반드시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영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왜 대신 인정해야 하느냐?”“그래도 그 일 때문에 연회가 망한 건 사실이잖아요…”“어쩜 이렇게 생각이 짧은 것이냐!”한씨는 담시령의 이마를 콕 찌르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조금만 생각해 보거라. 송씨네가 지영이를 모함한 것이 확실해지면 어떤 벌이 내려지겠느냐? 송씨네가 무너지면 유선주의 처지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그때 정왕부에서 과연 그 아이를 지금처럼 예뻐하겠느냐?”담시령은 그제야 그 안에 얽힌 이해관계를 깨달았다.“지영이와 송씨네가 다투면, 이치상 너는 지영이 편에 서야 한다. 생신 연회 때 일은 평범한 말다툼이 아니었어. 네 아버지가 그토록 화를 낸 것도 무리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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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송씨가 이미 모함했는데, 이제 와서 자신에게 유선주의 체면을 세워달라니!“할머니, 이미 잊으신 겁니까…? 지금 경성 귀족들은 연회를 열어도 제게 초대장 한 장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문전박대를 당하면 국공부의 체면만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유지영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유씨 노부인은 그제야 그 일을 떠올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할머니, 제 생각에는 이런 시기에 성년례를 여는 건 좋지 않습니다. 부광 비단 일이 제대로 밝혀지고 삼촌께서 관직에 복귀하신 뒤에 여는 편이 낫습니다. 그때라면 경성의 귀족들도 국공부의 체면을 생각해 자리를 채워줄 겁니다.”유지영은 차분히 권했다.집안이 이렇게 뒤숭숭하고 사람들은 유국공부 사람이라면 피하기 바쁜데, 누가 기꺼이 연회에 참석하려 하겠는가.유씨 노부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방법밖에 없겠구나.”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선주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큰언니, 큰일 났어요! 숙태비께서 갑자기 중병에 걸려 의식을 잃으셨대요! 오후에 정왕 전하께서 의원들을 여럿 정왕부로 부르셨는데, 다들 손을 쓰지 못하고 지금 아주 위독한 상황이래요!”유선주는 결국 유지영의 손까지 붙잡았다.“예전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언니. 그런데… 지금은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생각해 보니 전생에도 부광 비단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태비가 중병에 걸렸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유지영 때문에 숙태비가 화병이 났다며 그녀를 비난했었다.다행히 북명대사가 치료해 준 덕분에 숙태비는 사흘도 지나지 않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그 뒤로 북명대사는 자주 정왕부를 드나들며 숙태비의 건강을 보살폈고, 유지영이 죽을 무렵에는 숙태비도 이미 기력을 되찾은 상태였다.“나는 의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니?”유지영은 유선주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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