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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Author: 레몬과 향수
시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담성국의 심복이 들어와 조금 전 회랑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한씨는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품에 안고 있던 담시령을 떼어내고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다 사실이냐?”

담시령은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느라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것! 왜 쓸데없는 일로 그 애와 부딪쳐 일을 키우니? 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니냐. 태후마마께서 유독 아끼는 아이인데, 오히려 네가 잘 보여야 할 판에!”

한씨도 최근 유국공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정왕비가 유지영을 이용해 북명대사를 부르려다 태후에게 크게 혼난 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담시령은 유지영이 숙태비의 생신 연회에서 소란을 피웠다며 탓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열두 명의 목숨이 걸린 사건이라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어머니까지 지영이 그 계집애 편을 드세요?”

담시령이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

한씨는 딸이 답답해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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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532화

    배예경은 마당에 아직 닦이지 않은 붉은 핏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한참 뒤, 그는 조령 장공주를 향해 묵묵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폭풍 같았던 사단이 멎었다.유지영이 조령 장공주를 향해 깊은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조령 장공주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부드럽게 타일렀다."홀몸도 아니거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거라."그러고는 이연령을 돌아보며 말했다."연령아, 내 마침 입궁하여 자초지종을 고할 참이니, 함께 가자꾸나."이연령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지자, 왕부는 이내 무거운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유지영은 발걸음을 돌려 곁채로 향했다. 곁채에는 조원금이 침상 옆에 반쯤 쭈그려 앉아 있었다. 침상에 누운 어린아이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 참담한 모습을 본 유지영의 가슴속엔 다시금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아이는 좀 어떻습니까?"그녀가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조원금이 퀭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짙은 근심과 슬픔이 고여 있었다."태의 말로는 많이 놀라 기절했을 뿐, 다행히 가벼운 외상만 좀 입었다 하더구나."아이의 옷을 갈아입힐 때 조원금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린 몸뚱이에 시퍼렇게 든 멍 자국들은 분명 누군가 잔인하게 학대한 흔적이었다."이모님,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유지영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조원금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오랜 세월 이를 갈며 숨죽였던 자들의 악독한 계략을 어찌 쉽게 막을 수 있었겠느냐. 네 잘못이 아니야. 헌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구나."유지영이 바짝 다가섰다."그동안 아이의 아비가 줄곧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저놈들이 아이를 납치했다면, 필시 그자 역시 저들 손에 붙잡혀 있을 터. 혹여 모진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강요받을까 두렵구나."조원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유지영 역시 그

  • 피안을 거슬러   제531화

    유지영은 다시 여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내가 십팔 년 전의 늙은 하인들을 찾아내어 이 증거들을 끌어모으느라 제법 공을 들였지. 여씨, 아직도 발뺌할 셈이냐?"여씨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당장 끌어내어 형을 집행하라!"유지영이 차갑게 호령했다.배영준과 배옥준이 다급히 양옆에서 여씨를 감싸고 돌았다. 배옥준은 사색이 되어 유지영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형수! 십팔 년이나 지난 일이지 않습니까.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오해 한마디면 사람 목숨을 앗아간 죄가 덮어지는 줄 아느냐?"유지영이 비릿하게 코웃음을 쳤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목소리였다."너희도 그리 조급해할 것 없다. 밖에서 심문받을 자들은 심문받게 두고, 우리는 여기서 남은 죄를 낱낱이 파헤칠 터이니."여씨가 짐승처럼 끌려 나가며 배예경을 향해 살려달라 비명을 질렀다.배예경은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황급히 다가가 호위들을 가로막았다."그만두어라! 여씨는 방금 유산을 겪어 몸이 성치 않다. 옛일은 너무 오래된 일이니…… 나는 여씨를 믿는다. 당장 놓아주어라!"그 말에 여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며 서릿발같이 명했다."저자도 한꺼번에 끌어내라!"유지영의 명에만 복종하는 호위들이 순식간에 배예경마저 제압했다. 배예경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유지영을 노려보았다."네가 정녕 미쳤구나! 감히 내 몸에 손을 대?"유지영이 배예경을 매섭게 쏘아보며 맞받아쳤다."여씨가 선왕비를 모함하여 시해했거늘, 지아비이라는 사람이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도리어 첩실을 감싸고 돌다니. 이는 당신 역시 그 추악한 일의 공범이거나 진실을 묵인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한통속으로 묶어 심문해야 마땅하지!""너, 너……!"배예경은 기가 막혀 말문이 턱 막혔다.유지영은 곁에 선 운민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서늘하게 지시했다."일단 여씨부터 장을 쳐라. 입을 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장살에 처하라!"장살이라는 끔찍한 말에 여씨는 벼락이

  • 피안을 거슬러   제530화

    "유지영, 네가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감히 태후 마마의 하명을 거역하겠다고!"배영준이 기함하며 소리쳤다.유지영은 이연령을 매섭게 쏘아보며 답했다."이 사건을 모두 해결한 뒤, 내가 직접 입궁하여 태후 마마를 뵙고 오늘 일어난 일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고발할 것이다."이연령은 분통이 터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고, 소매 속에 감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태후 마마께서 덮으라 하셨거늘, 어찌 감히……!"배예경이 호통을 쳤다.유지영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무슨 일이 생기든 제가 전부 책임질 테니 입 다물고 계시지요!"그러고는 조령 장공주를 향해 분명히 선을 그었다."장공주 전하, 오늘 이 일을 추궁하는 것은 오로지 제 뜻입니다. 장공주 전하와는 무관한 일이니 염려 마십시오."조령 장공주는 유지영과 이연령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자,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연령이 미간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현왕비께서는 정녕 태후 마마의 명을 어기고 이 일을 끝까지 크게 만들 셈인가?"유지영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연령 군주는 염려 마시게. 행여 태후 마마께서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신다면, 내가 친히 군주를 대신해 용서를 빌어 줄 테니.""너……!"이연령은 평생 이토록 꽉 막힌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그때 밖에서 호위 하나가 들어와 유지영의 귓가에 조용히 무언가를 고했다. 유지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이연령을 힐끗 쏘아보았다.조금 전, 이연령의 수하들이 상처를 돌보겠다는 핑계로 민 부장을 데려가, 기회를 틈타 그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때맞춰 발견하고 막아선 덕에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되었다. 현왕비가 이리 독하게 마음먹고 끝장을 보겠다 하니, 이참에 모조리 심문하여 명명백백히 밝히겠다."조령 장공주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턱을 치켜들고 선언했다."뒷수습은 내가 직접 자녕궁으로 가 태후 마마께 엎드려 빌 터이니 그리 알라!"그 선언에 이연령의 낯빛이 백지

  • 피안을 거슬러   제529화

    끝까지 파헤쳐 보자는 결단이 서자, 유지영의 낯빛은 한층 더 무겁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첩실 여씨를 대청으로 끌어내라 명했다.방 안에서 문틈으로 대화를 빠짐없이 엿듣던 여씨는, 특히 유지영의 서슬 퍼런 말에 혼비백산했다.들것에 실려 나온 여씨는 유지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불렀다."현왕비 마마.""집안일은 본래 함부로 밖으로 떠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조원금의 신분을 들쑤시어 이 사단을 벌인 배후가 대체 누구인지 낱낱이 파헤쳐야 마땅하겠지요."여씨가 유지영의 눈치를 살피며 제안했다."제가 그 배후가 누군지 밝힐 테니,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한참을 애원했건만, 유지영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 일언반구 대꾸조차 없었다. 여씨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바로 그때, 밖에서 이연령이 당도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연령이 대청에 들어섰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널브러진 핏자국을 본 그녀는 본능적으로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곧장 내실로 들어가 조령 장공주를 향해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소녀, 장공주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조령 장공주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이연령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태후 마마의 분부이옵니다. 현왕부에 사단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전하께 긴히 전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어 달려왔습니다."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이연령을 주시했다. 모든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쏠렸다.이연령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령 장공주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은밀히 속삭였다."태후 마마께서 이르시길, 폐하께서도 형제의 정을 생각하시고 전장에서 적과 맞서는 현왕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일을 잘 해결하라 하셨습니다. 허나 피를 나눈 부자지간에 끝장을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비가 큰 죄를 지었다 한들 효의 도리를 저버릴 순 없는 노릇입니다. 아이도 무사히 찾았고 조씨의 결백도 밝혀졌으니

  • 피안을 거슬러   제528화

    민 부장은 말문이 막혔다.지루한 말씨름이 길어지자 유지영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장공주 전하, 제가 알기로 민 부장은 폐하의 어명 없이 도성을 벗어날 수 없는 금족령 상태였습니다. 이는 명백히 황명을 거역한 죄입니다. 거기다 몰래 사병을 풀어 죄 없는 백성을 납치해 감금까지 했으니, 참으로 파렴치하고 비열한 범죄이니, 그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그게 무슨 억지인가!"민 부장이 눈을 부라리며 유지영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유지영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 살기가 등등했다."어명을 어기고 몰래 도성을 빠져나간 증거가 차고 넘치거늘, 어딜 감히 발뺌하려 드느냐!"유지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웠다."내 똑똑히 기억하기로, 호성과 남야국의 사신단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 영안이라 들었다. 네놈들이 혹여 사신단과 남몰래 역모를 꾸미기라도 한 게 아니냐?"반역을 들먹이자 이성을 잃은 민 부장은 유지영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덤벼들었다.그 찰나, 서늘한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푸욱!시뻘건 피가 솟구쳤다.살이 찢어지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민 부장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뎅겅 잘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운민이 쥔 시퍼런 칼날에서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방자한 놈! 어디 감히 현왕비 마마를 시해하려 드느냐! 죽어 마땅하다!"운민이 버럭 호통을 쳤다.오른팔이 잘려 나간 민 부장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아버지!"민경주는 자지러지게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그녀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유지영을 쏘아보았다."사람이 어찌 이렇게 잔혹해!""내가 잔혹하다고?"유지영이 민경주를 깔아보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오늘 이 사단의 뿌리를 뽑기 전엔, 너 또한 결코 온전치 못할 것이다!""너, 너……!"민경주는 유지영의 서늘한 살기에 압도되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바닥은 피바다가 되었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유지영은

  • 피안을 거슬러   제5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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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4화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유지영은 품에서

  • 피안을 거슬러   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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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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