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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31 - Chapter 40

105 Chapters

31화 교통사고

지수는 복귀작 ‘이별’의 제작 공정을 확인하기 위해 단지 내 공방으로 향했다. 사건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찰나, 눈 깜빡임 사이에 벌어졌다. 시야 오른쪽 끝에서 작은 그림자가 튀어나온 것은 순식간이었다.끼이익—!비명 같은 브레이크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차체가 거칠게 요동치며 멈춰 섰다. 지수는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 속에서도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내렸다. 아스팔트 위에는 한 여자아이가 엎드린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얘야, 괜찮니? 아줌마가 한번 봐도 될까?”지수의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아이는 응석이라도 부리듯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멀리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현지야!”달려와 아이를 낚아채듯 안는 수진의 얼굴. 수진은 지수를 확인하자마자 비명을 삼키며 아이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마치 거대한 괴물 앞의 먹잇감이라도 된 듯한, 처절하고도 완벽한 공포의 형상이었다.“당신, 내 아이 죽이려고 작정했어? 단지 내에서 이렇게 과속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지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진은 상대가 지수임을 확인하고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내 구경꾼들이 몰려들자 눈빛을 싹 바꾸고 처절한 연기를 시작했다.“어머, 애 엄마 우는 것 좀 봐. 세상에, 애를 치고도 저렇게 뻣뻣하게 서 있는 거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차가워.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를 안 하네. 독하다, 독해.”수진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수는 그 소란 속에서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차로 돌아가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한 뒤, 수진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응급실 복도. 도진은 멀리서 보이는 지수를 보고 멈칫했다. 화사한 핑크색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를 한 지수는, 사고 가해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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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부끄러운 과거

공방의 김인식 장인의 손에서 탄생하고 있는 복귀작 ‘이별’은 지수의 생각보다 더 서늘하고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 서늘함은 마치 자신의 지난 7년, 공들였던 결혼생활을 정면으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생각보다 더 좋은데요? 역시 장인님의 실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네요.” “네 복귀작이라기에 내 노안이 올 때까지 힘 좀 썼지. 또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지면, 다시는 네 작품 안 만들 거다!”장인의 애정 어린 호통에 지수의 마음은 최상급 팬시 옐로우 다이아몬드 속에 갇힌 햇살처럼 따뜻하게 물들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제 것을 빼앗기지 않을 거고요.”어린아이 같은 지수의 소유욕 섞인 대답에 장인은 그제야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장인의 공방을 나서는 지수의 손목에 진동이 울렸다.[잠시 사무실에서 보죠.]진우의 연락이었다. 오전에 겪은 갑작스러운 사고와 병원에서의 수모로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그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3일 만에 다시 발을 들인 RV의 사무실은 낯설 만큼 달라져 있었다. 텅 빈 대리석 바닥은 어느새 짙은 색조의 원목 마루로 바뀌어 있었고, 구두 소리만 날카롭게 울리던 공간에는 이제 미세한 공조 소음만이 흐르고 있었다.홀로 외롭게 놓여 있던 진우의 책상 주변에는 집기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았고, 한구석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옅은 생기를 더했다. 차가운 전략실이자 완벽하게 통제된 안식처 같은 이 공간에서, 진우는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공간이 제법 사람 사는 곳 같아졌네요.” “최고의 팀원들이 올 자리인데, 삭막하게 맞이할 순 없으니까요. 이 정도면 지수 씨 취향에도 나쁘지 않겠죠?”진우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지수가 그간 도진에게 쏟아부은 투자 내역서였다.“3년 전, CB그룹 공정 교체 비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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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선을 넘는 밤

지현은 결국 슬비를 제외하고 홀로 저녁 접대 자리에 나갔다. 비서실에 홀로 남겨진 슬비는 업무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텅 빈 사무실의 적막은 평소보다 무거웠고, 모니터 속의 숫자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내 여자.’지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서류 한 장 넘기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심장이 소란스러웠다. 20년을 아는 동생으로, 8년을 비서로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해 왔건만, 그 짧은 단어 하나에 세상이 송두리째 뒤집히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이지현이 내뱉은 말이라 무게감이 달랐다. 슬비는 뜨거워진 뺨을 감싸 쥐며 애써 숨을 골랐지만, 이미 흐트러진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밤 11시가 넘은 시각, 정적을 깨고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선 지현의 모습에 슬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단정한 슈트 곳곳에는 보기 싫은 주름이 가 있었고, 넥타이는 누군가 잡아당긴 듯 볼품없이 풀어헤쳐져 있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슬비가 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지현의 몸에서 독한 위스키 향과 함께 미세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자세히 보니 그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슬비의 안색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잔챙이들이 좀 덤벼서.”지현은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신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오늘 접대 자리는 3개월 전, 술기운을 빌려 슬비에게 저열한 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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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잔향의 악취

이른 새벽, 고요를 찢는 마찰음과 함께 안방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수는 불쾌한 예감에 눈을 떴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 천장의 조명이 눈동자를 찔러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도진이 침대 머리맡에서 지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이지수, 일어나 봐. 일어나서 내 말 좀 들어.”몸을 일으키던 지수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코끝에 지독한 악취가 스쳤다. 병원 특유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끈적하고 화려한 장미의 향 . 수진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온몸에 뿌려댔을 그 짙은 향기가 도진의 옷깃에 배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썩은 꽃에서나 날 법한 비릿한 냄새로 변해 지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블랙박스 영상…… 봤어. 왜 그걸 병실에서 바로 말 안 했어? 사람 민망하게 말이야.”도진은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타박을 섞었다. 사과보다는 자신의 체면이 구겨진 것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당신이 처음부터 나한테 영상을 보여줬으면 내가 거기서 당신을 몰아세웠겠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오해가 커진 거 아냐. 나도 현지가 다쳤다니까 경황이 없어서 그랬던 건데, 그걸 꼭 그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지수는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채 그를 응시했다. 도진은 지수의 침묵을 긍정으로 오해했는지, 슬며시 침대 맡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역한 장미 향이 습기처럼 지수의 주변을 에워쌌다.지수는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혐오감에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꺼져! 당신한테서 역겨운 냄새나.”날카로운 일갈에 움찔한 도진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듯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따뜻한 카모마일 한 잔을 든 채 창가 옆 애착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뛰었다.잠시 후, 샤워가운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온 도진의 시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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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동상이몽(同床異夢)

퇴근 후 다시 병원을 찾은 도진은 비상계단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평소의 나긋나긋하고 애교 섞인 어투가 아니었다. 낮게 가라앉은 채 상대방을 다급히 진정시키려는, 절박하면서도 서늘한 음성. 그것은 분명 수진의 것이었다.“지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제발, 말 좀 들어.”무거운 철문이 소리를 뭉개버린 탓에 문장들이 파편처럼 끊겨 들려왔다. 상대방이 무언가 거칠게 요구하는지, 수진의 거친 숨소리가 문틈 사이로 비릿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밖의 동태를 살피는 듯 목소리를 더욱 죽이며 간절하게 속삭였다“……나 너무 무서워. 여기서…… 끝이야. 그러니까 제발, 이번 한 번만 내 말 들어. 응? ....은 내가 잘 돌볼게. 나중에, 나중에 내가 연락할 테니까…….”누군가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자신이 아는 수진은 늘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기거나,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연약하게 속삭이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비밀스러운 범죄를 모의하는 설계자의 그것처럼 낯설고 날카로웠다. 도진은 차가운 철문 앞에서 입술을 짓씹으며, 수진이 스스로 가면을 벗고 나오길 기다렸다.잠시 후, 다급히 전화를 끊고 계단을 빠져나오던 수진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도진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쳤다.“도진 씨……? 집으로…… 퇴근한 거 아니었어?”“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누구랑 통화하기에 그렇게 겁에 질려 있어. 여기서 끝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수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뱃속 아이의 진짜 생부 후보와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듯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온몸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찰나의 순간에 눈가를 붉히며 가련한 가면을 써 내려갔다. 순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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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여론전

고급 주택 단지 ‘포레스트’의 입주민 전용 앱은 며칠째 특정 게시글로 서버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시작은 ‘포레스트 맘’이라는 닉네임이 올린 사진과 영상이었다.[이런 게 텃세인가요? 우아한 겉모습에 속았네요.] (첨부 이미지: 찰과상과 피멍이 든 아이의 무릎과 손 사진) “단지 내에서 애가 다쳤는데 사과 한마디 없네요. 유명한 분이라길래 인품도 남다를 줄 알았는데...  아이들도 잘못하면 사과할 줄 아는데, 어른이 참...”댓글창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ㄴ 헐, 사진 보니까 애기 많이 아팠겠어요ㅠㅠ 누구예요? 대충 초성이라도 알려주세요. ㄴ 거기 사고 날 곳이 아닌데... 과속한 거 아니에요? 애들 많은 단지에서 미친 거 아냐?댓글창이 달궈지기 시작할 무렵, 수진은 연이어 결정타를 날렸다.[단지 내 교통사고, 누구의 잘못일까요?] (첨부 이미지: 1동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지수의 포르쉐 타이칸 사진. 독특한 외장 컬러가 선명함) (첨부 영상:밤 시간대, 지수의 차와 동일한 모델의 차 단지 내 도로를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모습. 번호판은 교묘하게 모자이크 처리됨) “이 차, 단지에서 과속하기로 유명하죠? 덩치 큰 차 믿고 애들 다니는 길에서 그렇게 밟으시면 안 되죠. 인성이 차만큼은 안 되나 보네요.”댓글창은 즉시 뒤집어졌다. ㄴ 저 차 1동 펜트하우스 사는 그 여자 차 맞죠? 역시 비싼 차 탄다고 유세 떨더니... ㄴ 저 모델 우리 단지에 한 대밖에 없지 않나? 와, 블랙박스 전수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님? ㄴ 애기 엄마들, 저 번호판 보이면 일단 피하세요. 무서워서 살겠나 진짜. ㄴ 와, 인성 논란 있는 입주자 때문에 이미지 망치기 싫네요.수진은 기세를 몰아 입주자 자치 위원회에 지수 명의의 차량을 단지 내에서 영구 제명하라는 파격적인 안건을 상정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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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이사가기 싫어

도진은 멀어지는 지수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뻗은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지수가 내뱉은 ‘인자한 배려’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도진의 가슴속 깊숙이 박혔다. 아내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서늘한 위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도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그가 돌아간 곳은 컨퍼런스 홀 구석,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는 수진의 곁이었다.“한수진, 너 미쳤어? 지수가 영상을 가지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낮게 으르렁거리는 도진의 음성에 수진이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수진은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나는…… 나는 그냥 사람들이 단지 내에서 조심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어. 우리 아이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내 진심이 그렇게 잘못된 거야?”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처량하게 눈물짓는 수진을 보며,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가련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조금 전까지 타오르던 서슬 퍼런 기세가 허망하게 꺾이고 말았다. 수진은 도진의 흔들리는 눈빛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정말 미안해요, 도진 씨. 근데…… 나 정말 ‘강제 퇴거 권고’ 당하는 거 아니야? 도진 씨도 알잖아요, 난 여기 아니면 이제 갈 곳도 없다는 거…….”무심결에 튀어나온 수진의 가냘픈 존댓말이 도진의 비뚤어진 오만을 자극했다. 오직 자신만이 이 가련한 여자를 지켜줄 수 있다는 정복감. 지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던 자존심이 수진의 눈물 앞에서 비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비릿한 만족감이 도진의 미간을 매끄럽게 폈다.“그런 일 없어. 그 누구도 너를 여기서 쫓아낼 수는 없으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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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시작을 위한 준비

 도진의 집에서 짐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담백했다. 아니,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삭제’에 가까웠다. 지수는 거대한 드레스룸에 가득 찬 명품 백들과 화려한 가구들을 무미건조하게 훑어보았지만, 챙겨갈 것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진의 손길이나 흔적이 조금이라도 묻은 것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3년이라는 세월 중 지수가 챙긴 것이라곤 원석과 비즈가 잠든 보석함 세 개,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담긴 포트폴리오와 노트북, 드로잉 패드가 전부였다. 작은 가방 하나만을 든 채 지수가 도착한 곳은 고급 주택 단지의 정점이라 불리는 ‘리버파크’였다. 이곳은 단순히 비싼 집이 아니었다. 부와 명예를 넘어, 진짜 자격을 가진 자만이 허락받는 일종의 훈장과 같은 성역이었다. 도진이 소유한 '포레스트'가 과시를 위한 성벽이었다면, 이곳은 지수에게 있어 완전한 해방을 뜻하는 요새였다. 지수는 두 채의 집을 하나로 합친 독특한 구조를 선택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벽히 분리된 두 공간은 지수의 새로운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먼저 거주 공간은 대리석과 가죽으로 점철되었던 도진의 차가운 집과는 달리, 스칸디나비아 스타일과 휘게 인테리어가 따사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실의 통창을 열자 푸른 사파이어를 닮은 청하강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공간에는 지수가 가장 아끼는 포근한 코튼 향과 우아한 동백꽃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도진의 옷깃에서 나던 비릿한 장미 향이 아닌, 오직 지수 자신만을 위한 고결하고 깨끗한 향취였다.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선 작업실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차분한 우드 앤 화이트 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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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드림팀의 완성

진우의 사무실은 강이현의 등장으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아니, 활기라기보다는 폭풍 전야의 에너지가 감돌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보스, 여기는 보스가 있기에는 조금 작지 않아? 뭐, 그래서 더 새롭기는 하지만.”빈정거리며 사무실을 구경하던 이현은, 마치 정해진 운명인 듯 8개의 모니터가 곡면으로 배치된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의자 뒤에는 그가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의 에너지 드링크와 간식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어도 진우는 이현의 사소한 취향조차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진우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자, 그가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 중 하나였다.“그래서 나는 뭘 하면 되는데?” “전부 모이면 그때 설명해 주지.”진우의 미소는 짧고도 서늘했다. 그 뒤로 일주일 간격으로 팀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자금 동원의 대가 사라 첸, 법률계의 독사 박성재, 그리고 그림자 같은 정보원 김철수까지. 마침내 진우의 드림팀이 완성되었다.[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뵙죠.]지수는 진우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거울 앞에 섰다. 하루 종일 리버파크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예정이었지만, 진우의 호출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활동적인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그리고 어제 직접 세공한 백금 은사 링 귀걸이를 한 지수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생기 넘쳤다. 도진의 아내로 박제되어 있을 때의 무색무취한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날 것의 아름다움이었다.지수가 사무실 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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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드레스 전쟁

서재의 공기는 무겁고도 달콤했다. 도진은 일주일 뒤로 다가온 신상 향수 ‘러빙유’ 시향회 준비를 위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수진이 얇은 슬립 차림으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훅 끼어드는 진한 장미 향에 도진의 펜 끝이 멈췄다."이 파티, 나도 가면 안 돼? 당신이 만든 작품, 나도 제일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도진은 고개를 돌려 수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이어진 목소리는 비즈니스만큼이나 냉정했다."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임원들부터 거래처까지 전부 지수가 내 부인인 걸 알아. 너를 데려가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망신당하고 싶지는 않아."수진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물러나려는 찰나, 도진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제 무릎 위에 앉혔다."대신 파티 끝나고 열리는 경매, '블레싱 나이트'에 가자."도진이 건넨 것은 블랙과 골드가 조화된 우아한 초대장과 한도 없는 카드 한 장이었다."이번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Midnight Blue & Silver)'야. 잊지 마."수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평생 손에 쥐어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최상류층의 전유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서운함은 카드 한 장에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오는 수진의 눈빛은 이내 독기로 번뜩였다. 도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이까지 가진 건 자신인데, 공식적인 옆자리는 언제나 지수의 것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수진은 곧장 도진의 친구이자 바람둥이로 유명한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수야, 파티에 나 좀 데려가 줘. 앞으로 도진 씨랑 그런 자리 자주 다닐 것 같아서 미리 익혀두려고." "너를? 도진이 아내는 지수 제수씨잖아. 나 도진이한테 뒤지게 혼나는 거 아냐? ...뭐, 네가 책임진다면야. 나도 혼자 가기 심심하던 차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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