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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21 - Chapter 30

105 Chapters

Z

박진우가 무너져가는 가정을 붙잡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지수는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Z의 복귀를 알릴 무대가 필요해요."비서가 숨을 들이마시며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수의 예전 활동명인 ‘Z’. 그 이름이 말하는 순간 지수의 눈빛에 서늘한 생기가 돌았다."여왕의 귀환이군요. 마침 한 달 뒤에 열리는 프라이빗 주얼리 쇼 'The Origin'에서 Z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 있습니다. 업계 거물들만 모이는 자리라 복귀 무대로는 최적입니다.""한 달 뒤라… 딱 좋군요."지수는 책상 위에 놓인 노란 장미를 응시했다. 싱싱하다며 큰소리치던 도진의 호언장담과 달랐다. 시들어가는 꽃잎의 끝동은 이미 말라붙어 추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지수는 연필을 들어 거침없이 스케치북 위에 선을 그어나갔다.그녀가 선택한 메인 스톤은 5캐럿의 선명한 옐로 다이아몬드였다. 지수는 그 노란 보석을 중심에 두고, 마치 꽃잎이 비명을 지르며 벌어지는 듯한 기괴하고도 화려한 형상을 그려 넣었다. 통의 주얼리가 추구하는 대칭의 안정감 따위는 철저히 배제된, 파괴적인 비대칭의 미학이었다."여기에… 안개꽃을 더해야겠어."안개꽃은 수백 개의 멜리 다이아몬드(Melée Diamond)로 표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평범하지 않았다.  노란 장미를 감싸 안으며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 아니라, 마치 안개꽃이 장미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듯한 위태로운 구도였다.세밀한 마이크로 파베 세팅 기법을 사용하여 금속의 질감은 지우고, 오직 다이아몬드의 파편 같은 광채만이 장미를 짓누르게 설계했다. 특히 장미의 줄기는 블랙 로듐(Black Rhodium)으로 도금하여, 화려한 꽃잎과 대비되는 서늘하고 어두운 상처를 형상화했다. 작품의 이름은 ‘이별’. 그것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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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길 바랐던 진실

이른 아침, 슬비는 지수의 연락을 받았다. [나 박진우 씨를 만나고 싶어.]그날 오후, 지수와 진우는 A시의 정막한 레스토랑 ‘가람’에서 마주 앉았다.“반갑습니다. RV의 최대 주주 이지수라고 합니다.”진우는 지수의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에 멈칫하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박진우라고 합니다. 주주님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저 또한 월가의 '미더스의 손'이자,  M&A 업계의 ‘사신’이 이렇게 숨죽이며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지수의 서늘한 인사에 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주위를 경계하는 맹수의 눈빛. 그는 지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뭐, 숨길 것도 없지요. 슬비가 조사한 자료를 기억할 뿐이에요.”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투자자로서의 명성은 몰라도, 기업 사냥꾼으로서의 과거는 그가 가장 지우고 싶은 낙인이었다. 숫자로만 보았던 데이터 뒤에 ‘사람의 삶’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자신의 판단으로 해고당한 직원의 분신자살 기사를 본 뒤였다.‘내가 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인가.’그 자책 끝에 화려한 월가를 떠나 평범한 은행원으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진우씨가 다시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되어 있는지 궁금해서요.”지수의 직설적인 질문에 진우는 말을 잃었다.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기야하나 고민은 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요구는 예상치 못했다. 머뭇거리는 진우를 보며 지수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진우 씨는 당신의 와이프를 얼마나 믿나요?”몇일 전 이혼을 이야기하던 수진의 모습이 떠올라 진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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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성벽

새벽 어스름이 진우를 비추었다. 전날 집에 돌아온 이후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방, 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현수의 작은 양말 한 짝을 손에 쥔 모습 그대로였다.  밤새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정신을 깨운 것은 무심하게 울려 대는 아이들의 등원 시간 알람 소리였다.진우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 헝클어진 머리로 아이들이 다니는 ‘햇살 유치원’으로 달렸다. 지금 당장 아이들을 확인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현수 아버지, 어머나! 현수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갑자기 퇴소 처리가 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현수랑 현지 너무 보고 싶네요.”아이들이 있을 곳이라 믿었던 유치원에는 공허한 안부만이 남아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수진의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장모님, 저 박 서방입니다. 건강하시죠?” “박 서방, 웬일이야? 이번 주 주말에 수진이랑 애들 데리고 와. 우리 강아지들 보고 싶네.”장모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곳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진우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세상 천지 그 어디에도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수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그 시각, 수진은 아이들을 연간 교육비만 수천만 원에 달하는 ‘로열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도진이 선물해 준 ‘포스트 빌리지’ 6동. 그곳은 수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 최고급 수입 가구로 채워진 거실, 그리고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욕실까지. 수진만을 위한 완벽한 안식처였다.쇼핑 중이던 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우였다. 차단하고 싶었지만, 이혼 서류를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수진은 짜증 섞인 문자를 남겼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 네 목소리 듣는 것도 소름 끼쳐.]  [만나자. 이혼 문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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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소중한 이들의 세계

요즘 지수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수 자신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가장 먼저 변한 것은 몸이었다.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난임 치료용 호르몬제를 끊으면서 지독했던 몸의 부종이 썰물처럼 가라앉았다. 약 부작용으로 올라왔던 피부 트러블이 사라지자 본연의 맑은 안색이 돌아왔고, 체계적인 식단과 운동은 그녀에게 20대 시절의 탄탄하고 우아한 몸매를 빠르게 되돌려주었다.  거울 속의 지수는 더 이상 초라한 피해자가 아니었다.지수의 일상이 도진의 궤도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찾아갈수록, 역설적으로 도진은 초조해졌다. 지수의 무관심이 짙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 하나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오늘 저녁 나가서 먹어. 당신이 좋아하는 일식당 ‘만월’ 예약했어.”도진의 연락에 지수는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의 배려에 감동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비즈니스 미팅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수는 도진이 그토록 원하는 입양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저녁 6시, 외출 준비를 끝내고 현관을 나서려던 지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진이 아닌 그의 비서였다.“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갑작스러운 긴급 회의가 잡히시는 바람에…… 저녁 식사는 혼자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지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슬비를 불러 ‘만월’로 향했다. 예약된 자리를 버리기엔 그곳의 요리가 아까웠고, 혼자보다는 마음 맞는 친구와 나누는 술잔이 그리웠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긴급 회의’가 아닌 응급실에 있었다. 이사 온 포스트 빌리지의 수영장 근처에서 놀던 수진의 아이, 현수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만월의 창가 자리, 지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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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진짜 세계

진우는 어떤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단지 돌아온 집이라 믿었던 곳에는 수진이 남긴 서늘한 배신감만이 감돌았다.  아이들의 흔적이 남은 거실 바닥에 앉은 진우는 수납장 깊숙한 곳, 이중 바닥을 들추어 먼지 쌓인 노트북 한 대를 꺼냈다. 7년 전, 가족이라는 평범한 행복을 위해 스스로 전원을 내렸던 진우의 ‘진짜 세계’였다.위잉—.노트북이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화면 위로 복잡한 숫자들과 영어로 된 금융 지표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때 세계 경제의 거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월가의 사신, 박진우의 개인 서버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진우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차갑게 가라앉았다.“모래성 치고는 꽤 화려하게 지어놨군.”진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수가 말했던 ‘회수’의 의미를 이제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진이 이끄는 CB 그룹은 토탈 럭셔리 패션을 지향하며 급성장했지만, 그 화려함은 결국 지수의 자산과 인맥이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다. 라이징 패션 그룹이라는 명성은 지수가 닦아놓은 유럽의 배타적인 유통망 위에서만 유효했고,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독창적인 예술성은 수진이 짓밟은 유진의 재능을 약탈해 세운 가짜 기념비였다. 도진은 지수가 깔아준 비단길 위에서, 유진의 피눈물로 빚은 가면을 쓴 채 제왕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이다.진우는 주저 없이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을 넘기기 전,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심이 섰나요?”마치 진우가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물음이었다. 진우는 도진의 제국이 그려진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게 대답했다. “제 아이들까지 그 모래성 속에 가두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좋습니다. 그럼, 함께하시죠”지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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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무너진 성벽

그날 저녁, 도진은 드물게 약속 시간을 지켜 귀가했다. 그의 손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여기 선물. 백화점 시찰 나갔는데 당신 생각이 나서 샀어."도진이 꺼내놓은 것은 해외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가방이었다. 지수는 가방을 받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도진은 정말 모르는 걸까. 며칠 전 수진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온 뒤, 자신의 SNS에 자랑스럽게 올렸던 사진 속 가방과 디테일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일 모델이라는 것을. 수진에게 던져준 가방을 아내에게도 건네며 ‘당신 생각’을 운운하는 도진의 뻔뻔함에 지수는 구역질이 올라왔다.도진은 지수가 가방을 받지 않자 머쓱한 표정으로 그것을 소파 위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지수는 거실에 홀로 앉아 그 화려한 가죽 뭉치를 응시했다.수진과 도진이 저 가방을 고르며 얼마나 달콤한 밀어를 나누었을지, 불필요한 상상들이 가시 돋친 넝쿨처럼 지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역겨운 관계를 끊어내고 싶다는 조급함이 명치끝을 압박했다.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던 중, 지수가 먼저 정적을 깼다.“입양, 생각해 봤어.”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도진의 눈을 향해 지수는 단호히 뱉었다.“난 남의 자식 키울 자신 없어.”도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연히 지수가 수용할 것이라 믿었던 확신이 무너진 당황함이 역력했다.“아니야, 당신은 잘 키울 수 있어. 남의 자식이라도 키우다 보면 결국 내 자식이 될 거야.”지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왜 그렇게 필사적이야? 정말…… 당신 아이야? 만약 당신 아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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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어린 여자

라운지에서 지수를 마주한 이후, 수진의 행동은 한층 과감해졌다. 그녀는 마치 지수의 일과표를 훔쳐보기라도 한 듯, 지수가 산책을 나서는 시간에 맞춰 세 살 난 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수진은 지수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보란 듯이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고는 아직 완연하지는 않지만, 옷감 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15주. 생명의 태동을 준비하는 그 손길은 지수에게는 그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운 조롱이었다.  지수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우아한 척 현지를 챙기는 수진의 가증스러운 연기는 매일같이 지수의 안식처를 더럽혔다.지수는 그 천박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계획보다 빠르게 독립을 준비했다. ‘포스트 빌리지’는 지수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도진과의 신혼을 시작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묻었으며, 끝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채 홀로 앓아야 했던 애증의 공간이었다. 언젠가 이곳을 수진에게 비워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사실에 입안이 씁쓸해졌다.하지만 지수에게는 확인해야 할 마지막 퍼즐이 있었다. 도진이 내뱉은 ‘입양’이라는 단어가 시부모의 머리에서도 나온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지수는 평소와 다른 차림으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무채색 원피스 대신 연핑크색 스웨이드 투피스를 선택했고, 굵은 웨이브와 화사한 화장으로 얼굴을 채웠다. 칙칙했던 어제의 지수는 사라지고,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은 화사함한 여자가 거울속에 있었다.주차장에 내려온 지수는 늘 타던 얌전한 아우디 A4의 키 대신, 얼마 전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 뽑은 포르쉐 타이칸의 스마트 키를 쥐었다. 도진이 골라준 차가 아닌, 오로지 지수 자신의 안목으로 선택한 첫 번째 독립의 상징이었다.  매끄러운 화이트 보디의 차체가 지수의 화사한 옷차림과 어우러져 날카로운 세련미를 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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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부정당한 부정

진우는 며칠 만에 허락된 짧은 면회 시간을 위해 ‘포스트 빌리지’ 내 입주민 전용 키즈카페를 찾았다. 입구부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진우에게는 거대한 단두대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떨리는 손에는 밤새 정성껏 포장한, 현수가 좋아하던 프라모델과 현지를 위한 작은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키즈카페 안은 지독하리만큼 화려했다. 그곳에서 수진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다른 입주민 엄마들과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현수야! 현지야!”진우의 부름에 현수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낡은 점퍼를 걸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진우는, 세련된 이 공간에서 유독 튀는 ‘부끄러운 불청객’일 뿐이었다.“현수야, 아빠가 이거 사 왔어. 우리 같이 만들어 볼까?”진우가 무릎을 굽혀 프라모델 상자를 내밀었다. 하지만 현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도진이 선물한 최신형 로봇의 리모컨만 만지작거렸다.“이거 유치해. 아저씨가 사준 건 진짜 움직인단 말이야. 아빠가 사 온 건 가짜잖아! 나 이제 가난한 아빠 싫어! 아저씨랑 살 거야! 아빠는 저기 나가서 기다려, 창피해!”다섯 살 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창피하다’는 말은 진우의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진우는 떨리는 시선을 돌려 수진의 옆에 앉아 있던 세 살배기 현지를 보았다. 낯선 아빠의 모습에 현지는 멈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매일 밤 자신을 안고 재워주던 익숙한 체취가 어색해진 아이는 본능적으로 수진의 치마폭 뒤로 숨어버렸다.그 한 뼘의 거리가 진우에게는 수천 킬로미터의 절벽처럼 느껴졌다. 주위 입주민들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박혔다. 수진은 그런 진우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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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또 다른 과거와의 이별

진우는 어떤 정신으로 포스트 빌리지를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관성처럼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이제 진우에게 이곳은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는, 온기가 꺼진 잔해에 불과했다.진우는 아이들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섬세한 조각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어 있는 작은 옷가지와 장난감들을 뒤로한 채, 진우는 자신의 몇 가지 소지품과 7년 동안 비밀리에 지켜온 노트북만을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뒤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는 흡사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듯했다.진우가 향한 곳은 시내 중심가의 초고층 오피스텔 ‘더 프라임’이었다. 7년 전, 수진과 결혼하며 ‘평범한 가장’으로 살겠노라 선언하며 봉인했던 그의 진짜 요새였다. 지문 인식을 거쳐 문이 열리자, 7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던하고 차가운 인테리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하나 앉지 않은 무채색의 공간과 날카로운 가구들. 이곳은 은행원 박진우가 아닌, 숫자로 세상을 읽던 전문가 박진우가 군림하던 성채였다.진우는 거실에서 저 멀리 보이는 포스트 빌리지의 불빛을 응시했다. 그는 가방에서 현지가 끝내 받지 않았던 토끼 인형을 꺼내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그가 아빠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일하고도 처연한 흔적이었다. 차가운 대리석 위에 놓인 보드라운 인형은 이 공간에서 지독하게 이질적이었지만, 진우는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진우가 서재로 들어섰다. 그곳엔 여러 대의 모니터가 마치 단 한 번도 꺼진 적 없었다는 듯 시퍼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7년 전 전원을 내린 줄 알았던 진우의 진짜 세계는, 그가 낡은 양복을 입고 은행원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곳에서 숨죽인 채 흐르고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전 세계 금융 시장의 지표와 자금 흐름을 응시하며, 진우는 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준비 끝났습니다. 내일 오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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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내가 안 괜찮아

슬비는 장기간의 해외 출장에서 복귀하자마자 지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울도 보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화장을 고쳤다. 심호흡 끝에 노크를 하고 들어선 사무실. 지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3피스 정장 차림으로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와 지적인 금테 안경. 그 완벽한 모습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20년을 봐온 얼굴인데도, 그를 마주할 때면 매번 첫사랑의 열병이 도졌다. 정적을 깬 건 지현의 나직한 음성이었다.“언제까지 구경할 거야? 계속 볼 거면 관람료라도 내고 보든가.”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던진 농담에 슬비의 양 볼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죄송합니다. 이번 출장 보고서와 오늘의 일정표입니다.”슬비가 서둘러 서류를 내밀며 다시 비서의 가면을 썼다. 지현은 서류를 받아들며 입안에 맴도는 아쉬움을 삼켰다. 출장 기간 내내 비어 있던 옆자리가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오늘 저녁 접대 일정…… 슬비 씨는 빠지세요.” “네? 저번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전 정말 괜찮습니다. 비서로서 당연히 가야 할 자리니까요.”칼같이 선을 긋는 슬비의 태도에 지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냉철하게 업무로 받아쳤을 그가, 오늘은 드물게 짜증 섞인 진심을 툭 내뱉었다.“내가 안 괜찮아. 내 여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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