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의 모든 챕터: 챕터 351 - 챕터 360

500 챕터

제351화

허서령은 여행 가방을 끌고 심인혜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거실에서는 지강산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녀가 퇴근해 함께 저녁을 먹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허서령이 들고 온 여행 가방과 옆에 있는 심인혜를 본 순간, 지강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한 듯했다.허서령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산 씨, 인혜가...”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강산이 책을 덮고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결정해.”허서령은 마음이 놓인 듯 미소를 지은 뒤 심인혜를 돌아봤다.“네 방부터 보여 줄게. 짐도 가져다 놓자.”심인혜는 안으로 들어와 지강산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고마워요. 강산 씨.”지강산이 온화하게 말했다.“편하게 지내.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네.”심인혜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허서령은 심인혜를 방으로 데려가 짐을 내려놓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심인혜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은 이혼 못 하겠대. 이것저것 한참 설명하면서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다른 마음을 품은 것도 아니라고 했어. 나랑 아기는 제산시에 남게 하고, 울심시에는 보모를 구해서 자기 엄마를 돌보게 하겠다고도 했고. 나도 아기를 봐서 한 번은 더 기회를 줄까 했어.”심인혜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그런데 윤가온이 울면서 전화했더라. 딸이 없어졌다고. 그런 건 경찰에 맡기면 된다고, 도와주러 가지 말라고 했더니 나보고 너무 냉정하대. 아침에 나간 뒤로 지금까지 안 들어왔어.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아이 데리고 그 사람한테서 떠날 거야. 이혼 소송은 천천히 하면 되지.”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은 허서령은 친구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심인혜는 허서령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서령아, 병은 좀 나았어?”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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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지강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난 네 입장이 될 일도 없고, 너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수도 없어. 다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지. 나도 소유하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그런데 유하가 서령이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바로 차단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백시욱은 입을 다물었다.“내가 소유하를 차단했을 때는 서령이와 아직 재결합하기도 전이었어. 나중에 내가 서령이를 포기하고 아무 여자나 만나 결혼하려고 했을 때, 서령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지. 하지만 약혼녀가 있는 상태에서 서령이와 얽힐 생각은 없었어. 서령이를 붙잡기로 마음먹은 순간에는 바로 파혼했고,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뒤에야 서령이를 찾아갔어.”백시욱은 화를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들었다.지강산은 말을 이었다.“난 한 번도 서령이에 대한 내 진심을 의심해 본 적 없어. 하지만 어떤 일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믿어 주는 게 아니야. 그래서 난 행동으로 내 결심을 보여 줘. 서령이의 감정을 존중하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도 우리 관계의 걸림돌이 되게 두지 않아.”백시욱이 입을 열었다.“하지만 가온이는 정말 불쌍해. 정말...”지강산이 말을 끊었다.“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다 가서 골고루 사랑을 베풀지 그래? 무슨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한 명 한 명 다 챙겨 주든가.”“그건...”말문이 막힌 백시욱은 반박하지 못했다.지강산이 물었다.“너 심인혜 사랑해?”백시욱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당연히 사랑하지.”지강산은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넌 사랑하지 않아.”백시욱은 얼굴이 잔뜩 굳어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내 아내고 내 아들의 엄마야. 사랑하니까 결혼한 거라고.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지 마.”지강산은 코웃음을 쳤다.“진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운 게 정상 아니야? 네 아내가 이혼하겠다고 하는데도 넌 그냥 화내고 떼쓰는 거로 생각하잖아. 전혀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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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화

허서령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듯 살짝 시선을 내렸다. 지강산의 사랑은 그녀에게 너무 무겁고 깊었다. 자신이 지강산이 사랑하는 방식만큼 그를 사랑할 수 있을지 자신조차 없었다.두 사람은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 지강산은 뜨겁게 밀어붙이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겁을 먹고 자꾸 피하려는 사람이었다.백시욱은 그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서령 씨, 제 아내는요? 저 인혜 좀 만나게 해 주면 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진짜 제가 잘못했어요.”허서령은 백시욱을 바라보며 다가갔다.“인혜는 시욱 씨를 만나고 싶지 않대요. 지금 저는 인혜의 대리 변호사예요. 할 말이 있으면 저를 통해 전달하세요. 인혜는 현재 협의이혼 아니면 이혼 소송만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시욱이 소리쳤다.“절대 이혼 못 해요! 애가 아직 이렇게 어린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아이한테서 가정을 빼앗아요? 이혼 가정 아이로 만들겠다는 거예요?”허서령은 차갑게 웃었다.“그 상황을 만든 건 시욱 씨의 잔인함 아닌가요? 왜 인혜 탓이죠?”“전 바람도 안 피웠어요. 가정을 배신한 적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꽉 막혀서 꼭 이혼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백시욱의 목소리가 울먹였다.허서령은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 막 결혼했을 때 기억나요? 인혜가 인터넷에서 남자들이 은근히 몸을 드러내는 영상을 보는 걸 좋아했죠. 그때 시욱 씨가 얼마나 화냈는데요. 그것 때문에 크게 싸우고 우리 집까지 와서 따졌잖아요. 다 잊었어요?”백시욱은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서령은 씁쓸하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시욱 씨가 싫어하니까 인혜는 앱을 전부 지웠고 그런 영상 보는 취미도 끊었어요. 그런데 시욱 씨는요? 인혜가 아이를 낳고 나니까 거리낌이 없어졌죠. 인혜의 감정은 무시하고, 인혜가 원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요. 여자는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혼 안에 평생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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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화

잠시 기다려도 그가 말을 잇지 않자, 허서령은 휠체어 옆으로 돌아가 회랑 곁 나무 벤치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그를 바라봤다.“왜 그래요?”“피곤해?”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아직 이른 시간이야. 그냥 백시욱이랑 쓸데없는 얘기 더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아직 잘 생각 없어.”허서령은 알아듣고 미소 지었다.지강산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좀 있어 줘. 여기서 잠깐만 앉아 있자.”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만지는 걸 내려다보자, 이유 없이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네.”“너 아이를 꽤 좋아하더라.”지강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그럼 우리도...”“싫어요.”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허서령이 곧바로 말을 잘랐다.“제가 좋아하는 건 많아요. 그렇다고 좋아하는 걸 전부 가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지강산도 기분이 가라앉아 나직하고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백시욱한테 한 말, 나도 마음에 새겼어.”“무슨 말인데요?”허서령이 궁금한 듯 그를 바라봤다.“결혼이나 아이가 상대를 붙잡아 두는 건 아니라는 말 말이야. 결국 사람을 붙드는 건 사랑과 존중이더라고. 백시욱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해했어. 내가 그렇게까지 너와 결혼하려고 집착했던 것도 결국 네가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였어.”허서령은 이제 지강산이 자신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문 채 미소만 지었다.사람이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이, 사랑 하나로만 함께 늙어 간다면 결국 어딘가에는 아쉬움이 남을지도 몰랐다.완벽하지 못해서 생기는 그런 아쉬움 말이다.그녀와 지강산은 모두 마음 가장 깊은 곳 어딘가가 늘 텅 빈 듯했다.허서령은 두 손을 뻗어 지강산의 잘생긴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마디가 선명하고 거칠면서도 길쭉한 손은 따뜻했고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알 수 없는 답답함이 또다시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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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화

지강산은 당연히 걱정됐지만, 일을 대하는 그녀의 책임감도 이해했다. 허서령은 원래 고집이 세고 위험한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날 새벽 세 시 반, 허서령은 지태일과 약속한 대로 경찰서 앞에서 만났다.그녀는 지태일이 자신을 데리고 몰래 공장 안으로 숨어들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지태일은 경찰차를 당당하게 몰고 왔고, 동료 두 명까지 데리고 있었다.그들은 정확히 새벽 네 시에 화학 공장에 도착했다.그 시각 공장 안에서는 폐수 배출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고, 십여 명의 경비원과 직원들이 야근하고 있었다. 입구 경비도 삼엄했다.공장 밖에는 희미한 조명이 켜진 채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지태일은 허서령과 동료들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경비원이 경찰차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경찰관님, 이 한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공장은 진작 퇴근했는데요.”허서령은 그들 뒤에 서서 잔뜩 긴장했다.경찰 한 명이 신분증을 꺼내 상대방 앞에 내밀었다.“마약사범을 추적 중입니다. 그중 한 명이 공장 뒤쪽으로 숨어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안에 들어가 검거해야 하니 문을 여세요.”“그럴 리 없어요. 공장 출입구는 이 대문 하나뿐이고 저희가 계속 지키고 있었어요. 아무도 들어간 적 없어요.”“출입구가 하나뿐이라고요? 그럼 소방 기준을 위반한 거 아닌가요. 소방서에도 연락해야겠군요.”경비원은 당황해 서둘러 말했다.“경찰관님, 저희 CCTV가 24시간 돌아가고 있어서 모든 출입구가 다 보여요. 정말 마약사범이 들어간 적 없어요. 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문을 열어 드릴 수 없어요.”“그래도 내가 꼭 들어가겠다면요?”경찰관의 태도는 강경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방법이 없어진 경비원은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몇 분 뒤 공장장이 나왔다. 그 역시 강경한 태도로 물러서지 않고 경찰과 말장난을 섞으며 시간을 끌었다.결국 공장장 선에서도 해결이 안 되자 또다시 윗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한 시간을 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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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6화

그는 몸을 돌려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서 전화를 걸더니 몇 분 뒤 다시 돌아와 물었다.“이름이 뭐라고? 경찰 번호는?”“지태일. 경찰 번호는...”성 대표는 휴대전화에 지태일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 뒤 상대의 말을 듣느라 침묵했다. 그러다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충격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으로 지태일을 바라봤다.전화는 상대가 먼저 끊은 듯했다.마른침을 삼키던 성 대표는 기세가 완전히 꺾인 채 경비원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문 열어.”옆에 있던 허서령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화 그룹을 뒤봐 준다는 세력도 별것 아닌 모양이었다.그렇게 지태일은 허서령을 데리고 정문으로 당당하게 화학 공장에 들어갔다. 마약 제조 거점이 의심된다는 명목으로 공장 내 폐수와 토양을 모두 채취했고, 배수관을 따라가 폐수가 흘러가는 경로까지 직접 추적했다.이번에는 지난번 몰래 공장에 잠입해 확보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확실한 증거를 모을 수 있었다.몇 사람은 아침이 될 때까지 줄곧 바쁘게 움직였다.증거를 챙겨 떠나려던 허서령이 성 대표 앞을 지나가자, 그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허 변호사, 제법 수완이 좋으시군.”허서령은 옅게 웃었다.“성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시네요.”“남의 돈줄을 끊는 건 부모를 죽이는 것과 다를 게 없어. 허 변호사는 정말 죽는 게 무섭지 않나?”“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폐수를 몰래 버려 인근 수십 가구 주민들의 건강을 망쳐 놓고도 대표님은 죽는 게 안 무서우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뭘 무서워하죠?”“네가 누구한테 밉보였는지 알아?”성 대표가 이를 갈며 물었다.“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마 지씨겠죠?”허서령은 한없이 여유롭고 침착했다.“제 남편도 지씨고, 제 남편의 큰형님도 지씨고, 그 집안 사람은 다 지씨인데요. 제가 대체 누구한테 밉보였다는 건가요?”“너...”성 대표는 말문이 막혔다.“이번에는 증거를 바로 법원에 제출할 거예요. 또 훔쳐 갈 기회는 안 드려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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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소준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생각도 없어. 내 대리 변호사가 재판 중에 쓰러졌는데 데려와서 치료받게 한 게 잘못이야? 게다가 우리 집 의료진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사람들이야. 병원 의사들은 너무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고 환자 한 명당 기껏해야 3분 정도밖에 못 보잖아. 우리 의료팀이 훨씬 전문적이지.”허서령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속에서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소준혁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신발을 신고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든 뒤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소준혁이 다급히 뒤따라왔다.“의사가 그러는데 네 몸이 많이 허약하대. 여기서 제대로 쉬어...”허서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을 지나던 중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는 소유하가 눈에 들어왔다.소유하는 깔보듯 시선을 들며 옅은 냉소를 띠었다.“허서령, 정말 대단하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양다리 걸치는 걸 좋아하네. 예전엔 강산 오빠랑 윤성이더니, 이제는 강산 오빠랑 우리 오빠야?”허서령은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현관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걸음이 멈추며 몸이 굳었다.소유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더니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던져 놓고 환하게 웃었다.“강산 오빠...”마침 뒤따라 내려온 소준혁도 현관으로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지강산을 발견했다. 걸음을 멈춘 그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저녁노을의 주홍빛이 지강산의 몸을 감쌌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노을을 등지고 안으로 들어왔다.흰 셔츠 소매는 두 번쯤 접힌 채 단단한 팔목이 드러나 있었다.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솟아 있었고, 희고 단단한 손가락은 휠체어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고 눈빛은 차가웠다.“강산아, 왔어?”소준혁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형수님 방금 깼는데 딱 맞춰 왔네.”그 말을 듣는 순간 허서령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소준혁이 지강산에게 직접 연락했다는 뜻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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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화

그 순간 허서령의 마음은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계속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온몸에서 힘이 빠진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 반대편을 돌아 뒷좌석에 앉았다.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도로는 늘어선 차들로 더디게 움직였다.차는 앞쪽으로 길게 이어진 붉은 빛의 흐름 속으로 합류했다. 차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지강산은 냉랭한 표정으로 좌석에 반듯이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서령은 피곤한 몸을 창문에 기대고 도시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계속 망설였다.‘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까? 왜 먼저 말도 하지 않는 걸까?’차 안의 공기가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허서령은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30분 뒤, 차는 강령원으로 들어섰다.기사가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자 지강산은 문을 짚고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았다. 대리 운행이 끝나자 기사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주황빛 정원 조명 아래에서 허서령은 조용히 지강산의 곁에 서 있었다. 허서령은 차갑게 굳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가방끈을 손끝으로 꽉 움켜쥐었다. 가슴을 큰 손으로 짓누른 듯 숨이 막혔다.“강산 씨...”허서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저랑 소준혁은 그냥 일로 엮인 관계예요. 아무런...”하지만 그건 지강산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휠체어를 움직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지강산의 차가운 태도는 마치 낫으로 그녀의 심장을 서걱서걱 베어내는 것 같았다.‘내가 원해서 소준혁의 집에 간 것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오해해야 하는 걸까?’허서령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걷잡을 수 없는 괴로운 감정을 눌러 보려 했지만 눈물이 어느새 한 방울, 또 한 방울 흘러내렸다.고통은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분명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부정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들었고, 머릿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뒤섞인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허서령, 다 네 잘못이야. 넌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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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의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심맥어조증을 일으키는 질환은 여러 가지예요. 하지만 대부분 정신이나 감정과 관련된 질환에서 비롯돼요.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 양극성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경우도 있고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지강산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책상 위에 높게 쌓인 책과 자료들을 바라보는 그는 얼굴이 한껏 어두웠다.마음도 함께 캄캄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끝을 찾을 수도 없이 텅 비고 깊었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지강산은 휠체어를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허서령의 방이 아니라 심인혜의 방 앞에 멈췄다.그리고 문을 두드렸다.문을 연 심인혜는 그를 보자 조금 놀랐다.“지강산 씨?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지강산은 강압적이고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허서령, 무슨 병이예요?”심인혜는 순간 굳더니 눈동자가 흔들리고 두 손은 불안하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망설이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지강산은 점점 다급해졌다. 주먹이 딱딱하게 굳었고 낮고 굵은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였다.“대체 무슨 병이길래 말도 못 해요?”“그건 서령이의 사생활이에요. 제가 대신 말할 수는 없어요. 직접 물어봐요.”심인혜는 불안한 듯 시선을 내렸다.“직접 물어보라고요?”지강산이 차갑게 웃었다. 눈가에는 순식간에 붉은 핏발이 섰고, 꽉 쥔 주먹은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걔는 저한테 늘 좋은 일만 말하고 나쁜 일은 하나도 안 알려 줘요. 뭐든... 뭐든 안 좋은 일은 전부 숨겨요. 늘 저한테 거짓말만 해요. 이제 걔가 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못 믿겠어요.”심인혜는 얼굴이 굳은 채, 허서령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가 나 목소리를 높였다.“그건 서령이가 지강산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지강산은 기가 막혀 웃다가 눈이 붉어진 채 분노에 차서 물었다.“그게 대체 무슨 사랑이에요?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 사랑은 처음 보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절 뭐로 생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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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심인혜는 다시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여 지강산을 바라봤다.지강산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눈물은 이미 뺨을 흠뻑 적셨고, 단단하게 쥔 주먹은 떨리고 있었다. 푸른 핏줄이 불거졌고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듣고 있었다.“지강산 씨, 예전에는 서령이가 왜 그렇게까지 아픈지 저도 이해 못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알아요. 서령이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구석에 버려진 고양이 같은 아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미친 듯이 사랑해 준 거죠. 지옥에서 천국으로, 슬픔에서 행복으로. 누군가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깨질까 조심하듯 아껴 주는 게 어떤 건지 처음 느껴 본 거예요. 그 사랑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년이나 이어졌어요. 그러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두 번째로 병이 도진 건 지강산 씨가 제산시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어요. 마침 아버지의 재심 신청도 또 기각됐고요. 그런 고통을 한꺼번에 겪고 지강산 씨랑 다시 헤어진 뒤 우울증이 재발했어요. 이번에는 바로 중증으로 악화했고. 지강산 씨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살 충동이 있다는 걸 지강산 씨가 알까 봐 무서웠겠죠.”“약도 먹었고,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버티기도 했고, 옥상에도 올라갔어요. 제가 아는 것만 이 정도인데... 제가 모르는 일은 훨씬 더 많을지도 몰라요. 몇 번이고 죽음의 경계에서 버텼어요. 자기 의지로 살아 보려고 했지만 이 병은 계속 서령이 목숨을 빼앗으려 했어요. 그렇게 지강산 씨를 사랑하는데 이런 일을 어떻게 말하겠어요?”“서령이는 어릴 때부터 부모 사랑을 그렇게 원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늘 남동생만 더 챙겼죠. 겨우 엄마가 남동생의 이기적인 본모습을 알아보고 서령이가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제야 서령이를 사랑하고 조금씩 더 잘해 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엄마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 서령이는 금방이라도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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