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의 모든 챕터: 챕터 341 - 챕터 350

500 챕터

제341화

지은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다친 둘째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늘 하루만.”“안 돼.”“가위바위보로 정해.”“싫어.”“너무하네. 둘째 오빠, 서령 언니가 오빠 혼자만의 사람도 아니잖아.”“네가 서령이한테 내가 자살하려 했다고 거짓말한 일도 아직 따지지 않았어. 더한 꼴을 보고 싶어?”지은영은 찔린 듯 입을 벌리고 웃더니 황급히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허서령을 돌아보았다.“서령 언니, 늦었으니까 둘째 오빠랑 방에 가서 쉬어요.”허서령은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휴대전화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지은영의 곁을 지나며 부드럽게 말했다.“은영아, 잘 자.”지은영은 볼을 부풀리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중얼거렸다.“잘 자요.”말을 마치고는 지강산에게 눈을 흘겼다.지강산은 그 유치한 행동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너 아직도 어린애야? 시집가도 될 나이에 새언니를 두고 나랑 다투고, 이젠 눈까지 흘겨?”“오빠보다는 어려.”지은영은 코를 찡긋하며 한마디 받아친 뒤 문을 닫았다.지강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허서령은 그의 팔을 끼고 생긋 웃었다.“가자. 우리도 방에 가서 자자.”지강산은 고개를 돌려 허서령을 바라보았다. 깊은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서운함이 비쳤다.“너도 나랑 자기 싫었어?”“아니에요!”허서령은 즉시 태도를 바로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전 강산 씨랑 자는 게 아주 좋아요. 강산 씨는 제 남편인데, 제가 강산 씨랑 안 자면 누구랑 자겠어요?”지강산이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하자 허서령은 그의 팔을 부축하며 보조를 맞췄다.“아까 보니 너도 방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은영이가 못 가게 했어요.”“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했어?”“별걸 다 이야기했죠. 일, 생활, 가십, 연예인, 심지어 요즘 볼만한 영화까지.”“여자들 이야기는 참 재미있나 보네. 넌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하잖아.”“강산 씨는 여자가 아니잖아요.”지강산은 가볍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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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화

어두운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질문이 떨어진 뒤로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들리는 것은 고르고 나직한 숨소리와 평온하지 못한 두 사람의 심장 박동뿐이었다.문득 지강산이 이불 속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서늘한 손을 잡았다. 길고 거친 손가락을 그녀의 손바닥 사이로 깊숙이 끼워 열 손가락을 맞물린 뒤, 그 손을 끌어당겨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 위, 심장이 뛰는 자리에 눌러 놓았다.얇은 잠옷 너머로도 허서령의 손등에는 그의 체온과 심장 박동, 두툼한 손바닥의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졌다.“잘 자. 서령아.”그는 거의 숨결만으로 다정한 말을 짜내듯 쉰 목소리로 속삭인 뒤 눈을 감았다.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허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곁에 누운 남자의 흐릿한 옆모습을 바라보자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그의 행동은 그녀의 마음에 거대한 돌을 떨어뜨렸다. 잔잔하던 마음의 호수가 크게 출렁여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언제부터였을까, 지강산은 그녀와 함께 잘 때마다 억지로라도 열 손가락을 맞잡고 손을 쥔 채 잠들었다.극도로 불안하고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증거였다.어쩌면 그의 무의식 속에는 그녀가 갑자기 도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그 순간 허서령의 여린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귀 옆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가라앉는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고 싶지도, 눈물을 흘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마음은 너무 슬프고 괴롭고 막막했다.지강산의 질문에 대답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지강산의 곁에 있으면 스스로 회복하고 우울한 감정에서도 천천히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고통스러운 감정이 갑자기 거세게 밀려와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키는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지강산의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입술을 힘껏 깨물고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몰래 눈물을 흘렸다.그녀에게는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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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화

“내가 왜 서령이를 나무라겠느냐?”지용식은 인자하게 눈웃음을 지었다.“잘 먹고 잘 자는 것도 복이지.”그는 다시 도미란을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바꾸었다.“우리 지씨 집안 규칙은 어린 손자며느리가 몇 시에 일어나는지 정하려고 있는 게 아니다. 쓸데없는 트집 잡지 말고 푹 자게 내버려 둬.”지강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도미란은 속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아버님.”옆에 있던 지은영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웃음을 참았다. 최근 겪은 온갖 슬픈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지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그때 지용식이 이번에는 지태일에게 시선을 돌렸다.“태일아.”지태일은 허리를 곧게 펴고 차분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할아버지.”“네 동생한테 잘 배워라. 좋아하는 여자를 어떻게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지 말이다.”지태일은 담담하게 웃었다.“할아버지, 저는 배울 필요 없어요.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요.”지용식은 목을 가다듬고 정색했다.“곧 생길 거다. 여자 친구가 아니라 아내가.”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지용식을 바라보았다. 지태일의 부모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기쁨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다.지태일이 미간을 찌푸렸다.“할아버지, 농담하지 마세요.”커다란 원탁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촌 형제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지태일도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느덧 서른두 살이었다. 직업이 특수한 그는 오래전부터 결혼도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온 가족이 그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하지만 여든을 넘긴 지용식이 이런 문제로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내 전우의 손녀다. 부모가 이혼해서 어릴 때부터 그 친구 손에서 자랐지. 그런데 이제 그 친구가 암 진단을 받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소원이 손녀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 가정을 이루는 걸 보는 거란다. 너희 형제들을 하나씩 생각해 봤는데, 네가 가장 적합하더구나.”지은영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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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4화

“고마워요. 큰형님. 참 애써 주시네요.”하선희는 여전히 단정하고 온화했지만, 식탁 아래 숨긴 주먹은 이미 단단히 굳어 있었다.“저는 늘 아이들에게 배우자를 고를 때 집안을 볼 필요는 없다고 가르쳤어요. 자신이 원하는 높이가 있으면 스스로 올라가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요.”“태일이는 이혼 가정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강산이는 아버지가 감옥에 간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 아, 아니지. 강산이는 아예 결혼도 못 하지.”도미란의 웃음에는 은근한 멸시가 묻어 있었고, 눈에는 감출 수 없는 혐오가 드러났다.“남들이 들으면 좋게 생각하지 않겠네.”“우리끼리 문 닫고 사는 집안일을 누구한테 들려주실 건데요?”하선희는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큰형님 아드님의 여자 친구가 배우라고 들었는데, 무슨 작품을 찍었다고 했더라? 수위가 너무 높아서 방영 금지된 영화였던 것 같은데요. 큰형님은 보셨어요?”도미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못 보셨죠? 그것도 남들이 들으면 썩 좋지는 않겠네요.”두 사람은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온화하게 대화했지만, 말 사이에는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어른들의 설전에 아랫사람들은 한마디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음식은 식어 갔지만 지용식이 젓가락을 들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먼저 먹을 수 없었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지준석과 지상훈은 더더욱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그때 허서령이 허둥지둥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숨이 차올라 헐떡였고 얼굴에는 조심스러움과 민망함이 가득했다. 문 앞에 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늦잠을 잤어요.”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허서령의 두피가 따끔거리는 듯했다.지용식은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말했다.“늦지 않았다. 딱 맞게 왔어. 아직 식사도 시작하지 않았으니 얼른 들어와 앉거라.”그때 지강산이 목발을 짚고 일어나 허서령을 맞으러 가려 했다.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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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5화

지용식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듯 계속 당부했다.“나이가 좀 어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스물세 살이라던가. 너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니 잘 보살펴 줘라. 가능하면 좋은 일자리도 알아봐 주고.”지태일은 어이가 없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식탁에 팔꿈치를 댔다. 식욕이 완전히 사라졌다.허서령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지강산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할아버지가 형한테 결혼 상대를 정해 주셨어.”“네?”허서령은 놀란 눈빛으로 지강산을 바라보았다.지강산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담아 주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용히 말했다.“형이 서른둘이잖아.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겉으로는 비혼과 비출산을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무척 조급하셨던 거야.”허서령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무거워졌다.‘결국 따지고 보면 나랑 지강산 때문이 아닐까?’지상훈이 예전에 자신을 따로 불러 이야기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집안에 자손이 가득하기를 바랐고 지강산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거나 제산시를 떠나 지강산에게 어떠한 가능성도 남기지 말고 미련을 끊게 해 달라고 권했다.이제는 누구도 그녀와 지강산이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흔들 수 없었다. 그러니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그 기대를 지태일에게 돌린 것이다.허서령은 지태일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해 질 무렵,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챙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지강산은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서재로 불려 갔다.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허서령은 정원을 거닐며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정원 오솔길을 걷자 지나치게 달콤한 장미 향이 공기 속에 떠다녔다. 허서령은 이 오래된 저택 뒤뜰의 고요함을 좋아했다.사촌 형 지로운은 아직 떠나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올해 꽃이 참 잘 피었네.”지로운의 목소리는 날씨를 평하듯 잔잔했다.“밑에 좋은 게 많이 묻혔나 봐. 죽은 고양이나 개, 병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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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화

돌아가는 길 내내 허서령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녀가 운전하고 지강산은 조수석에 앉았다. 해가 저물고 어둑해지자 거리의 불빛과 도시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환하게 켜졌다.지강산은 등받이에 기대 그녀의 곱고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서령아.”“네?”허서령은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했다.“할아버지가 나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아?”“할아버지가 강산 씨를 따로 서재로 부르셨다면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겠죠. 궁금하지 않아요.”“그런데 나는 궁금하네. 사촌 형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허서령이 의아하게 물었다.“봤어요?”“응. 나올 때 멀리서 봤어.”허서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생각했다.“두루뭉술하게 말해서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어요.”“그래도 네가 알아들은 뜻은?”“협박이었어요.”지강산은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정말 미쳤군.”“이익이 걸리면 세상 사람들은 다 미쳐요.”지강산은 씁쓸하게 웃었다.허서령은 갑자기 핸들을 꺾어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뭐 좀 사 올게요.”지강산이 의아하게 물었다.“뭘 사려고?”허서령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더니 아무 대답 없이 가방을 들고 빠르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다시 나왔을 때도 손에는 가방만 들려 있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 문을 닫고 시동을 걸어 그대로 출발했다.지강산은 그녀가 무엇을 샀는지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다.“다 샀어?”“네.”“뭔데?”허서령은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먹을래요?”지강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먹어.”허서령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그녀는 부끄러운 듯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민망함을 감췄다.심장은 여전히 박자를 놓치고 쿵쿵 뛰었다.강령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시간제로 오는 요리사가 없어서 허서령이 두 사람 몫의 국수를 끓였다. 저녁을 먹은 뒤 각자 방으로 돌아가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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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화

얇은 흰색 잠옷이 굴곡진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수줍은 얼굴로 손에 무언가를 숨기고 그의 문 앞을 한참 서성였으니, 무슨 생각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제 발로 날아온 먹잇감이 입에 들어오기 직전인데 어떻게 다시 놓아줄 수 있겠는가.지강산은 온화하면서도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목발을 짚고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서령아, 지금 내가 널 따라잡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할 거라고 일부러 도발하는 거지?”“도발한 거 아니에요.”“그럼 들어오기나 해.”“역시 안 되겠어요. 강산 씨 허벅지 상처가 아직 안 나았잖아요.”지강산은 당장이라도 목발을 내던지고 다가가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부드럽게 달랬다.“정말 괜찮아.”“또 다칠까 봐 무서워요.”“그 정도는 아니야.”“두 달만 더 기다려요. 의사가 허벅지 뼈는 적어도 석 달 이상 걸린다고 했잖아요.”두 달, 지강산에게 그 길고 긴 시간은 매 순간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그런 잠옷까지 입고 왔다.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는 일찌감치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피가 끓게 했다. 그런데 그녀가 방에 들어오지 않으면 오늘 밤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그는 입술을 살짝 벌려 뜨거운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잘 자.”그리고 문을 닫았다.허서령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쿵’ 하는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허서령은 즉시 돌아서 지강산의 방문을 두드렸다.“강산 씨... 무슨 일이에요?”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허서령은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문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에 들어서자 바닥에 내던져진 목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지강산은 보이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몸을 돌리자 지강산이 문을 짚고 천천히 닫은 뒤 잠갔다. 그리고 문짝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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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화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방 안을 몽롱하고 흐릿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에어컨 온도는 25도로 맞춰졌다.문은 단단히 잠겼고 커튼도 빈틈없이 닫혔다. 스탠드 불빛 아래로 그림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불을 끄고 싶었지만 지강산은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여러 일을 겪었어도,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전통적이었으며 조금 보수적이기까지 했다.그러니 자연스럽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움직여야 했으니 긴장과 수줍음을 더욱 감출 수 없었다.그는 양손으로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깊고 검은 두 눈은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며 그녀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창밖에는 희미한 밤빛이 내려앉고 벌레 울음소리가 잔잔히 번졌다.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정원의 큰 나무를 스쳐 가며 굵고 긴 가지가 살며시 흔들렸다.부드러운 바람은 나뭇가지를 가볍게, 천천히 흔들며 나무에 매달린 누렇게 시든 잎을 끝내 하나둘 떨어뜨렸다.그날 밤, 두 사람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밝았다. 허서령은 지쳐서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지강산은 사람을 괴롭히는 법을 너무도 잘 알았다. 허벅지의 부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체력과 횟수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두 사람 모두 밤새 거의 자지 못했는데, 그는 아침 일찍 멀쩡히 일어났다.기운이 넘치는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재택근무까지 시작했다.허서령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도 따뜻했고 이불 속 몸도 따뜻했다.지난밤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침대와 베개, 이불 속에는 온통 지강산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기분 좋은 향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했다.전에는 우울증 때문에 잠들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지금은 그의 침대에서 빠져나오기가 아쉬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자 지강산이 곁눈질로 알아차렸다. 책상 쪽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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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화

허서령은 찔린 듯 눈을 내리깔아 손에 든 서류를 바라보았다.“빚은 없지만 가진 재산도 많지 않아요. 오랫동안 일하면서 계속 진병철의 치료비를 냈거든요. 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강산 씨가 준 돈도 전부 엄마 치료비에 썼고, 남은 돈은 배상금으로 냈어요.”지강산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다치지 않은 허벅지 위에 앉히고, 뜨겁고 깊은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다.“난 네 돈을 탐내는 것도 아니고 네게 빚이 있을까 봐 두려운 것도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알아요.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대하라는 거잖아요.”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지강산은 그녀의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어 올렸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귓가를 스쳤고, 시선은 아름다운 눈과 눈썹 사이를 맴돌았다.“네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 네 재산과 휴대전화 잠금 비밀번호, 친구, 계획, 일 같은 건...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알려 줘.”허서령은 가슴이 조여 오는 듯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어째서 지강산이 나보다 더 아픈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지강산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너만의 비밀이나 사생활을 만들지 말고, 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허서령은 심장이 갑자기 빨라져 어쩔 줄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순간 지강산의 집착이 병적인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저릿해진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였다.“강산 씨, 강산 씨도 아픈 거예요?”지강산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향긋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럴지도 모르지. 너한테 시달리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게 됐어.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고, 나를 아프게 하는 말도 하지 마. 아니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이제 안 그럴게요.”허서령은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욱 꽉 안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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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0화

그래서 휴대전화를 들어 지태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태일 오빠,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내고 잠시 기다리자 답장이 왔다.지태일: [무슨 일인데?]허서령: [저를 성화 그룹 화학 공장 안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어요?]지태일: [어렵지 않아. 언제?]허서령: [앞으로 사흘 동안은 언제든 괜찮아요. 다만 반드시 새벽 네 시여야 해요.]지태일: [왜 그렇게 늦은 시간이어야 하지?]허서령: [새벽 네 시가 화학 공장에서 몰래 폐수를 방류하는 시간이거든요.]지태일: [알았어. 모레 가자.]허서령: [고마워요, 태일 오빠.]지태일: [한 가족인데 고마워할 것 없어.]저무는 햇살 아래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물들였다.허서령은 숄더백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법률사무소 문을 막 나서는 순간, 박규태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더니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변호사, 성화 그룹 사건 재판이 곧 시작되지? 이길 자신은 있고?”허서령은 입술을 깨문 채 담담하게 웃었다.“물론이죠.”박규태는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하하, 증거를 전부 잃어버리고 뭐로 재판에서 이기겠다는 거야? 그 세 치 혀로? 아니면 젊고 예쁜 얼굴을 믿고 판사한테 추파라도 던지려고?”허서령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참으며 차가운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노려보았다.이렇게 비열한 동료 변호사는 처음이었다. 마음을 얻지 못하자 헐뜯고 괴롭히다니. 자기 마음이 더러우니 생각하는 것도 온통 추잡했다.‘이렇게 뒤틀린 정신으로 대체 어떻게 변호사가 된 걸까?’허서령은 억지 미소를 띠고 태연하게 말했다.“박 변호사님은 재판에서 이길 수 없을 때 몸을 팔고 판사에게 추파를 던지셨나 보네요. 경험담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한번 시도해 볼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박규태를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박규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몸을 돌려 허서령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비꼬듯 소리쳤다.“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가 어떻게 큰 호랑이한테 잡아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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