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421 - Chapter 430

500 Chapters

제421화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넓은 방 안을 따뜻하게 밝혔다.허서령은 잠에서 깨어 옆자리를 더듬어 봤다. 넓은 침대는 텅 빈 채 지강산은 이미 일어나 출근한 뒤였다.휴대전화를 집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오전 열한 시였다.임신한 뒤 잠이 좋아졌다. 어젯밤에도 일찍 잠들었는데 오늘은 늦게 일어나 무려 열 시간이 넘도록 잤다.기분도 꽤 좋았다. 허서령은 일어나 씻고 천천히 침대를 정리한 뒤 방을 나섰다. 점심은 간단하게라도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그런데 거실로 나온 순간 걸음이 뚝 멈췄다. 뜻밖의 광경에 눈이 커졌다.“서령아, 일어났구나. 점심 거의 다 됐어.”앞치마를 두른 하선희가 음식을 들고 식탁에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나물 하나만 더하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지상훈은 식탁에 그릇과 수저를 놓고 있었다. 평소의 엄숙하고 차가운 얼굴에는 보기 드문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서령아, 이리 와서 앉아. 서 있지 말고. 금방 먹을 수 있어.”한편 지은영은 봉투에서 영양제를 하나씩 꺼내 장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서 있는 허서령을 보며 웃었다.“새언니, 왜 멍하니 있어요? 우리 이제 다 알아요. 이건 부모님이 임신 축하한다고 사 오신 영양제예요.”‘태일 오빠가 말한 건가?’갑자기 부담스러워진 허서령은 식탁 옆으로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어서 앉아. 빨리.”허서령은 조금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 지은영도 다가와 옆에 앉았다.“은영아.”허서령도 그녀에게 인사했다.지은영은 허서령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새언니, 축하해요.”“고마워.”“부모님이 새언니 임신했다는 말 듣고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아주머니가 음식에 약을 탔다는 얘기까지 듣고는 걱정돼서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대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저까지 데리고 영양제 사러 가셨다가, 직접 장까지 봐서 요리하러 오셨어요. 앞으로 여기에서 같이 살면서 새언니를 직접 돌봐 주고 싶다고 둘째 오빠한테도 말씀하셨고요.”허서령은 입술을 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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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2화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걸 보면 자신까지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처럼 말이다.정윤슬은 서령 언니와 지 대표님 사이에서 건강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이 대가족이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정윤슬은 늘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녀는 허서령이 부러웠다. 지강산은 매일 퇴근해 돌아오면 가장 먼저 허서령을 안아 자기 허벅지 위에 앉히고 몸 상태는 어떤지, 기분은 어떤지, 오늘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는지 하나하나 물었다.지강산은 놀라울 만큼 인내심이 컸다. 허서령과 함께 있는 데 아주 긴 시간을 기꺼이 썼다.정윤슬이 알고 있던 남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지강산의 집안 분위기도 너무 좋았다. 식사가 끝나면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사소한 잡담까지 무슨 주제든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말을 꺼냈다가 무안하게 묻히는 일도 없었다.부모님 역시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식자재를 사는 것부터 요리까지 모두 직접 했고, 도우미는 집 청소만 마치면 바로 퇴근했다. 이 집에서 가족 외에 밤을 보내는 외부인은 정윤슬뿐이었다.허서령은 일을 조금씩 정리해 이제 집에서 쉬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정윤슬도 자연히 함께 집에 머물렀다. 보조원 일이 있을 듯 없을 듯 단순하고 편해져 대부분 시간은 공부에 쓸 수 있었다.지강산이 매달 3백만 원이나 주는 것도 사실상 일의 대가라기보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뜻에 가까웠다.정윤슬은 그들을 보며 세상에 정말 ‘계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계층은 돈과 권력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었다. 교양과 품성, 지식, 그리고 가족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갈리는 것이었다.허서령이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갈 때면 온 가족이 함께 병원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전담 보조원인 정윤슬도 당연히 따라갔다.그러다 정윤슬은 허서령이 산전 검사뿐 아니라 정신건강의학과에도 자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허서령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약을 먹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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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3화

눈 깜짝할 사이, 정윤슬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급히 꺾었다.쾅!굉음과 함께 화물차가 승용차 조수석 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승용차는 두 바퀴나 빙글 돌더니 길가에 옆으로 전복됐다.사고가 벌어지기 바로 전까지도 뒷좌석의 허서령과 하선희는 아기가 아들일지 딸일지, 무슨 이름을 지어 주면 좋을지 행복하게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평소 정윤슬이 워낙 천천히 안정적으로 운전했고, 충돌 직전 브레이크까지 밟은 덕에 차가 완전히 찌그러지지는 않았다.일부러 역주행해 들이받은 화물차 운전자는 현장에서 곧바로 달아났다.승용차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앞부분에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윤슬은 정신을 잃은 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운전석에 끼어 있었다.허서령은 찢어질 듯 아픈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극심한 통증이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지금은 배 속의 아이를 걱정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녀는 뒤집힌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기어 나왔다.차 반대편으로 돌아간 허서령은 죽을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기고 안에 있는 시어머니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하선희는 충격으로 의식을 잃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허서령은 너무나 두려웠다.“어머님...”눈에는 금세 눈물이 가득 찼다. 아픔에 온몸이 저릴 지경이었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 때문인지 아드레날린이 한꺼번에 치솟았다. 허서령은 남은 힘을 전부 짜내 하선희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그녀는 자기 몸의 통증을 억지로 버티며 하선희를 끌고 또 끌었다. 차에서 충분히 멀어진 뒤에야 시어머니를 내려놓고 다시 달려가 정윤슬을 구하려 했다.차 앞부분의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짙은 연기가 주변을 뒤덮었다.한적한 도로였지만 지나가던 차량 몇 대가 멈춰 섰다. 운전자들은 차에서 내려 검은 연기가 치솟는 사고 현장을 바라봤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허서령 역시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운전석 문을 잡아당긴 뒤 바닥에 엎드려 손을 뻗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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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4화

꿈속에서 그녀는 아기를 만났다.자신과 지강산의 아이였다. 너무나 예뻤다. 짧고 풍성한 머리카락, 맑고 커다란 눈,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통통하고 동그란 얼굴. 아직 이도 나지 않은 아기는 환하게 웃고 있어 유난히 사랑스러웠다.아기는 허서령을 보자 신이 나서 기어왔다. 그녀도 두 팔을 활짝 벌려 아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기는 계속 기어오고 또 기어와도 좀처럼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결국 지쳐 버린 아기는 제자리에 털썩 앉아 허서령을 바라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엄마, 왜 나한테 와서 안아 주지 않아요?’허서령은 일어나 달려가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다.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갇힌 것처럼 바깥은 보이는데 아무리 해도 넘어갈 수 없었다. 눈앞에서 아이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아기가 서럽게 울자 허서령도 함께 울었다.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슬펐다.눈물로 젖은 아기가 허서령을 바라보다 서서히 안개 속에 휩싸였다. 어린 목소리가 울먹이며 말했다.“엄마... 살려 줘요...”“엄마가 갈게...”허서령은 온 힘을 다해 일어서서 안개로 된 벽을 뚫으려고 몸부림치며 앞으로 달리고 또 부딪쳤다.온몸이 떨릴 만큼 몇 번이고 부딪친 끝에 마침내 장벽을 깨뜨렸다. 허서령은 안개 속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아가야... 아가야...”허서령은 목이 찢어지라 울부짖으며 아이를 찾아 헤맸다.“어디 있어? 엄마한테 대답 좀 해 줘. 엄마가 널 못 찾겠어...”그녀는 안개 속에서 끝없이 헤매며 찾고 또 찾았다.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아이를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지강산에게 돌아가야 할까? 나를 그토록 아껴 준 지씨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해야 할까?’아이를 찾지 못한다면 자신도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지강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픔과 피로에 젖어 너무나 처연했다.“서령아,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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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5화

지강산은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는 아직 젊잖아.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그 한마디에 피 한 방울 없던 허서령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거의 찢어질 만큼 꽉 깨물며 애써 울음을 참았다. 투명한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지강산의 시선을 피했다.다시 눈을 감자 눈물이 한 방울씩 베개 위로 떨어졌다. 이불 속의 손은 환자복을 움켜쥔 채 덜덜 떨렸다.심장이 거대한 도끼에 두 동강 난 뒤 그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칼날을 삼키는 것처럼 아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머릿속에는 길고 긴 꿈이 다시 떠올랐다.아기는 그렇게 열심히 자신에게 기어오고 있었는데, 엄마인 자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아이는 서럽게 울며 무력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엄마, 살려 줘요...’‘우리 아기는 얼마나 무섭고 슬펐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엄마에게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래서 아기가 나를 버린 거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거야...’“서령아...”지강산은 침대를 짚고 몸을 숙여 창백한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뻗어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그러지 마. 슬프면 그냥 소리 내서 울어. 억지로 참지 마. 그렇게 참으면 몸까지 상해.”허서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면서도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소리가 나지 않는 아픔이 있었다.울고 싶어도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아프고 괴로웠다. 가슴 안이 터져 버린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머릿속에는 온통 아이 모습뿐이었다.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에 너무나 예쁜 얼굴, 눈은 지강산을 조금 닮아 부드러웠고, 웃을 때는 달콤할 만큼 사랑스러웠다.아이는 예쁜 아기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새겨져 있었다.“엄마...”어린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허서령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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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6화

젖병도 분홍색이었고 이유식을 먹일 작은 그릇에는 토끼 열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허서령은 어릴 때부터 토끼를 좋아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건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워서 못생겼다며 싫어했다.아기 침대는 사지 않았다.아이와 함께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고,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따로 재울 생각이었다.자신의 아이만큼은 어릴 적 자신처럼 기억이 생길 때부터 혼자 자게 하고 싶지 않았다.허서령이 어렸을 때 살던 낡은 집은 비좁았다.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방에 작은 침대 하나가 있었는데 창문도 없고 온갖 물건이 쌓여 있었다. 밤이면 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허서령은 무서워 이불 속에 숨어 울며 몸을 벌벌 떨었다. 너무 무서운 날에는 이불을 끌어안고 부모님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모님은 쓸모없다며 꾸짖었다. 쥐가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하느냐고 했다.자신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하러 가야 하는 데 잠을 방해한다며 화를 냈다. 일하지 않으면 너를 굶겨 죽일 수밖에 없으니 철 좀 들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쥐를 잡아 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누워 잠들었다.네 살이었는지 다섯 살이었는지도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어린 허서령은 그렇게 착하고 철이 들었다. 울면서 이불을 안고 다시 창고 같은 작은 방으로 돌아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이불 속에 숨었다. 너무 울어 지쳤던 건지, 이불을 꽁꽁 덮어 산소가 부족했던 건지, 그렇게 울다 잠이 들었다.매일 밤 공포와 눈물 속에서 잠들었다. 날마다 쥐에 시달리며 그렇게 조금씩 자랐다.허서령은 유난히 눈물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강한 아이였다.아이를 잃었으니 목놓아 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행복한 어린 시절은 평생을 치유해 준다고 했다.그렇다면 불행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은 정말 평생을 들여 치유해야 하는 걸까?의사가 와서 검사한 뒤 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강산에게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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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7화

지강산은 의사를 따라 병실을 나왔지만 멀리 갈 엄두는 나지 않아 바로 복도에 멈춰 섰다.의사는 양손을 흰 가운 주머니에 넣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지 대표님, 사모님께서 깨어난 뒤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나요?”“울지를 않아요.”지강산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원래 우울증이 있고 평소에는 눈물도 많은 사람인데요.”“맞아요. 울지 않더군요.”“선생님, 혹시 우울증이 나아진 건 아닌가요? 아까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도 생각이 꽤 긍정적이었고, 다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어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오히려 더 심각해졌을 가능성이 있어요.”지강산은 충격에 빠져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그럴 리가요. 아까는 꽤 괜찮아 보였어요. 웃기도 했고 오히려 선생님을 안심시키려고 했는데요.”“우울증을 앓던 환자가 큰 충격을 겪은 뒤 양극성 장애로 바뀌는 경우가 있어요.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정신질환이죠. 어느 순간에는 모든 걸 받아들인 것 같고, 마음을 놓고 벗어난 것 같으며 감정이 과하게 격앙되거나 쉽게 격해져요.”“그러다 또 어느 순간 갑자기 우울해지고 가라앉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깊은 절망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죠.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보다 자살 위험도 훨씬 크고,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환각이 나타나도 본인 스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지강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벽에 등을 부딪쳤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괴롭게 깊은숨을 몰아쉬었다.그는 우울증을 공부하면서 양극성 장애에 대해서도 당연히 찾아본 적이 있었다.“왜... 이렇게 된 거죠?”지강산의 목소리는 쉬고 힘이 없이 무력감까지 묻어났다. 넓은 두 어깨 위에 거대한 산이 몇 겹이나 내려앉은 듯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제가 계속 주치의로 상담해 왔고, 전에도 과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마음속 상처를 알 수 있어요. 그 고통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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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8화

지강산이 의아하게 물었다.“저보고 그 부모처럼 대하라는 말씀인가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느 정도는요. 계속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마세요. 아무 대가 없이 무조건 사랑만 주는 것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으니 언젠가 버림받을 거야’라고 느낄 수 있거든요.”“반대로 사모님에게 무언가를 요구해 보세요. 무엇이든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이고, 실제로 무언가를 해 주고 있으며,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해요.”“저는 계속 사랑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히 분명하지 않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서령 씨도 부모님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 부모님에게는 그런 보이지 않는 사랑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딸이 말 잘 듣고, 효도하고, 철들고, 문제를 만들지 않기를 요구했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집안일도 하고, 돈도 벌어 집에 보태고, 동생까지 도와야 했어요.”“서령 씨에게는 그런 식의 ‘요구받는 것’이 사랑의 형태로 각인돼 있어요. 오랜 정신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오히려 가해자에게 애착을 갖는 것과 비슷해요. 물질이나 생활, 일, 혹은 다른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해 보세요. 그래야 자신이 빈 껍데기 같은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어요.”하지만 지강산에게는 필요한 것이 이미 다 있기에 굳이 허서령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완전히 난감한 문제가 됐다.“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지강산이 다시 물었다.“있기는 해요. 어린 시절을 잊고,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들을 모두 잊은 채 완전히 새로운 자신으로 살아가는 거죠.”지강산은 씁쓸하게 웃었다. 눈가에는 물기가 번졌다. 벽에 몸을 기대고 주먹을 꽉 쥔 탓에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굳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의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원래는 아이를 계기로 많이 좋아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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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화

지강산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줬다.“처음부터 계획한 사고였어. 사고가 나자마자 공항으로 달아나 미리 사 둔 비행기 표로 동남아까지 도망갔고, 그 뒤로 완전히 종적을 감췄어. 지금은 형사사건으로 정식 수사 중이고 그 운전자는 1급 수배자가 됐어.”허서령은 침대 헤드에 기대 긴장한 표정으로 지강산을 바라봤다.“어머님이랑 윤슬이는 다친 데 없어요? 범인은 분명 저를 노린 거였을 텐데 두 사람까지 휘말렸잖아요. 혹시 저를 원망하지 않을까요?”그 말을 듣는 순간 지강산의 가슴이 송곳에 찔린 듯 아팠다. 그는 미간을 꽉 찌푸리고 무거운 눈빛으로 따져 물었다.“왜 그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왜 다른 사람이 널 원망할지부터 걱정하는데?”허서령은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저는...”지강산은 결국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본 적 없을 만큼 거센 분노였다.“허서령,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지 마. 설령 범인이 너를 노렸다고 해도 잘못한 건 범인이야. 넌 피해자라고. 가장 크게, 가장 깊게 다친 사람도 너야. 예전에도 지금도, 어린 시절에도 어른이 된 뒤에도 넌 계속 피해자였어.”허서령은 그의 분노에 눌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감정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아무 일도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는 듯했다. 차분함을 넘어 거의 마비된 상태라 어떤 감정도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심지어 지강산이 있든 없든, 아이가 있든 없든 이제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불과 조금 전 화장실에서는 아이를 잃었고 자신은 이렇게 초췌해졌으니 지강산이 싫증 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를 잃을까 봐 그렇게 겁을 먹었는데...겨우 잠깐 사이에 감정은 또다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이렇게 무감각해지자 모든 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슬퍼할 이유조차 없는 듯했다.지강산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물었다.“배 안 고파? 뭐 좀 먹을래?”“안 고파요.”“졸려? 좀 잘래?”“안 졸려요.”지강산은 옆 의자에 앉아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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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0화

허서령은 예의 바르게 답했다.“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별일 없어요.”하선희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부처님이 보살펴 주셔서 다행이지. 서령아, 드디어 깨어났구나. 강산이는 그동안 네 곁에서 한 발짝도 안 떨어지고 간호하느라 완전히 망가졌는데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질 않더라. 너희 둘을 보면, 하나는 누워서 꼼짝도 못 하고 하나는 옆에 앉아 떠나질 않고... 나는...”말을 잇던 하선희는 결국 몰래 눈물을 훔쳤다.“어머님, 저 빨리 나을게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하선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죽 용기 뚜껑을 열었다.“고기 죽 좀 끓여 왔어. 이제 막 깨어났으니까 우선 부드러운 음식부터 먹자.”“네.”그때 정윤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미안해요. 서령 언니, 저 때문에 다치셨어요.”“네 잘못 아니야. 사고 낸 사람이 일부러 역주행해서 우리 차를 들이받은 거잖아.”허서령은 정윤슬을 위아래로 살폈다.“너는 다친 데 없어?”“저는 그냥 조금 다친 정도예요. 보름 동안 거의 다 나았어요.”정윤슬은 오히려 고마운 표정이었다.“나중에 CCTV를 봤어요. 서령 언니가 저를 구해 주셨더라고요. 언니랑 그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차 안에서 불에 타 죽었을 거예요.”허서령의 마음에 갑자기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눈가가 순식간에 젖었다.“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그녀는 다시 하선희를 바라봤다.“어머님도 정말 괜찮으세요?”“나는 괜찮아. 내가 제일 덜 다쳤어. 충격 때문에 잠깐 기절했을 뿐 긁힌 데도 거의 없어.”하선희는 죽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서령이는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해. 정말 고마워.”허서령은 눈물을 머금은 채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었다.지강산이 손을 뻗었다.“엄마, 제가 먹일게요.”“내가 할래, 내가.”지은영이 먼저 죽그릇을 받아 허서령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목소리는 일부러 밝고 씩씩하게 했다.“새언니, 큰 고비를 넘겼으니까 이제 좋은 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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