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581 - Chapter 590

684 Chapters

제581화

질문이 떨어지자 식탁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상훈과 허서령을 번갈아 보았다.지강산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아버지, 그건...”허서령은 지강산의 팔을 살며시 눌러 자신을 대신해 질문을 피하게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했다.어차피 가족들도 녹음 파일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할 터였다. 마음에 걸리는 일을 남겨 두느니 확실히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지강산은 허서령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괜찮아요.”허서령이 담담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제가 큰아버지께 전화한 걸 녹음한 거예요. 큰아버지가 강산 씨의 앞날과 직장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걸 빌미로 제 아버지 사건에 더는 개입하지 말라고 압박했어요. 재심 신청이 순조롭게 받아들여지길 바랐거든요. 증거도 이미 충분히 모였고요. 그런데 제가 잘못 판단했어요. 큰아버지가 저와 강산 씨의 결혼을 반대한 건 강산 씨의 앞날이나 집안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도은정 때문인 줄은 몰랐어요.”지상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생각엔 큰아버지가 네 아버지 사건의 재심을 막고 있다는 거냐?”“네.”허서령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버님은 큰아버지가 그런 분이라는 걸 믿기 어려우실 거예요. 형제간 우애가 깊으셨으니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시겠죠. 하지만 이번에 제가 제출한 자료는 큰아주버님이 오랫동안 깊이 조사해 찾아낸 의혹들이에요. 재심을 청구하기에 충분해요.”지상훈이 다시 물었다.“큰아버지에게 협박하듯 했던 말은 진짜였니?”“아니요.”허서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아버지 사건의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강산 씨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저랑 결혼하라고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식탁의 공기가 더욱 무겁고 엄숙해졌다. 모두 젓가락질을 멈추고 허서령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지상훈이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그럼 강산이에 대한 마음은? 아직 옛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강산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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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그때 지강산이 입안에서 뭔가를 씹다 말고 놀란 소리를 냈다.“어? 이게 뭐야?”곧바로 휴지를 뽑아 입안의 것을 뱉더니 휴지에 놓인 딱딱한 덩어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강산의 손에 쏠렸다.휴지 위에는 새알심에 싸여 있던 호두와 굴이 놓여 있었다.지강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선희를 봤다.“엄마가 넣었어요?”하선희도 어리둥절했다.“아닌데?”지은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따졌다. “내가 큰 새언니한테 넣어 달라고 한 거야. 오빠가 왜 큰 새언니 새알심을 먹어? 그건 큰오빠 먹으라고 만든 건데.”“아무거나 먹은 거지. 모양은 안 봤어.”지강산은 휴지를 구겨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호두가 생것이라 딱딱하잖아. 이런 걸 왜 넣었어?”지은영이 또박또박 말했다.“남자 정력에 좋대. 조카를 보고 싶어서 그랬지!”정윤슬은 그제야 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필 지태일이 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태일이 먹었다면 괜한 오해가 생길 뻔했다.지강산은 빙긋 웃으며 구겨 놓은 휴지를 다시 집으려 했다.“생것도 못 먹을 건 없지. 도로 먹으면...”허서령이 얼른 손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뱉었는데 그걸 왜 다시 먹어요? 더러워요. 먹지 말아요.”가족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지강산은 휴지를 건드리지 않고 지은영을 바라봤다.“또 있어?”“없어. 딱 하나야.”지은영이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운도 좋지. 정말. 큰오빠 먹으라고 일부러 하나만 만들었는데 그걸 오빠가 먹다니.”지강산은 말없이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다.동짓날의 따뜻한 시간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가족들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깊은 밤, 바깥 기온은 영하 6도까지 떨어졌다. 실내에는 바닥 난방이 켜져 있어 무척 포근했다.허서령은 샤워하고 긴 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로 며칠간의 기온을 살펴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였다.‘이 시간에 강산 씨 아직 안 잤나?’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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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허서령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몸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네, 괜찮아요.”그러고는 침대 옆 협탁으로 가서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고는 손가락으로 한 번 쓸고 또 한 번 쓸었다. 아무 앱이나 열었다 닫고 다시 열기를 반복했다.화면에 뭐가 떠 있는지도 몰랐다. 온 신경이 등 뒤에 쏠려 있었다.지강산이 다가와 허서령을 뒤에서 끌어안았다.그 순간 허서령의 몸이 바짝 긴장하며 살짝 굳었다.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고 넓은 가슴이 등 뒤에 닿았다. 점점 뜨거워지는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강산이 몸을 숙여 허서령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잔잔한 전율이 번지고 숨결마저 흐트러졌다.등 뒤에서 안기는 감각은 따뜻하고 든든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다.가슴과 등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두 심장이 같은 박자로 거세게 뛰는 듯했다.지강산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불 아래로 스며들었다.“서령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네?”허서령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제대로 대답하기조차 어려웠다.지강산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그런데 지금은 사과부터 하고 싶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령아.”“왜 미안해요?”“널 오해했잖아.”“괜찮아요. 저도 잘못했어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니까.”“아버지한테 했던 말, 얼마나 진심이었어?”지강산은 눈을 감고 허서령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을 귓불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정말 날 좋아하게 된 거야?”“네.”“얼마나 좋아해?”“잘 모르겠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고, 강산 씨랑 잠자리도 기꺼이 함께할 만큼... 좋아해요.”지강산은 살며시 웃으며 손으로 허서령의 뺨을 감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술을 맞췄다.허서령은 눈을 감고 깊어지는 입맞춤에 빠져들었다.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포근하던 방 안의 공기가 점차 뜨거워졌다. 깊은 밤, 두 사람의 열기가 달아올랐다.지강산은 허서령의 몸을 돌려세우고 두 뺨을 감싼 채 입을 맞췄다.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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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허서령이 잠에서 깨어났다.온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다. 허벅지 안쪽도 아직 뻐근했다.침대 양옆을 돌아보니 텅 비어 있었다. 지강산은 벌써 출근한 모양이었다.‘밤새 그렇게 괴롭혀 놓고 자기도 얼마 못 잤을 텐데, 출근할 기운은 어디서 나는 걸까? 참 이상한 남자야.’허서령은 눈을 비비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옆으로 누워 달아오른 얼굴을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었다.며칠 전 부모님 댁에서 기억을 잃은 뒤 처음 함께했을 때, 지강산은 무척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끝까지 절제하는 모습이기도 했다.허서령은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는 옆방에 지은영이 있어서 조심했던 것뿐이었다.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지강산은 전혀 참지 않았다. 단정하고 세심하고 다정한 평소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어젯밤은 그야말로 뜨겁고 거침없고 짜릿했다.허서령은 밤새 있었던 일을 떠올릴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정말 중독될 것 같은 남자였다.평소에는 한없이 다정하고 세심했다. 생각도 행동도 올바르고 인품도 훌륭했다.둘이 있을 때는 달콤한 데다 애교도 많았다.그리고 침대에서는...한번 떠올리기만 해도 견디기 힘들 만큼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분명 몰래 그런 쪽 강의라도 찾아 들었을 것이다.허서령은 이불을 둘둘 감고 침대 위를 한 바퀴 더 굴렀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흘러내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 후끈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돈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다정하지도 않더라도, 타고난 신체 조건과 놀라운 솜씨만으로 평생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였다.‘그걸 알면 얼마나 많은 여자가 달려들까?’다행히 이런 건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안 되겠다. 인제 그만 생각하자. 이러다 머릿속이 온통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겠어.’그런데 지강산과 함께하는 건 너무... 좋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기분이었다.허서령은 또다시 자기 생각이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굴렸다.쿵!이불을 둘둘 만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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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오후 1시의 카페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허서령이 둘러보니 구석에 여자 한 명이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린 채 홀로 앉아 있었다.도은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조금 이상했다.‘보통은 카페 창가에 앉거나 약속한 사람이 오는 걸 보기 편하도록 문 쪽을 향해 앉지 않나? 적어도 출입문에 등을 보이고 앉지는 않을 텐데...’허서령은 일단 다가갔다.가까이 가 보니 도은정이 맞았다. 그래서 맞은편에 앉으며 예의상 말을 건넸다.“많이 기다리셨...”앉자마자 얼굴을 본 순간 말끝이 목에 걸렸다. 허서령은 놀란 눈빛으로 도은정의 얼굴을 바라봤다.도은정의 예쁜 얼굴에는 귀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긴 거즈가 붙어 있었다. 얼굴 한쪽을 거의 다 가릴 정도였다.놀란 눈빛을 알아챈 도은정이 씁쓸하게 웃더니 거즈를 만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상처를 직접 못 봐서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거예요. 아주 깊게 찢어져서 열일곱 바늘이나 꿰맸어요. 요즘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흉터가 옅게 남을 수 있대요.”“누가 그랬어요?”허서령이 가방을 내려놓았다.“말할 수 없어요.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요. 그랬다가는 저 때문에 가족 모두가 피해를 볼 테니까요.”도은정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억울함과 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씁쓸하게 웃었다.“어쩌면 제가 벌 받는 건지도 모르죠.”“어제 다친 거예요?”“네.”허서령은 누가 그랬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큰어머니일 것이다. 도미란은 겉으로는 인자해 보여도 속은 시커먼 데다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도씨 집안을 돌봐 준 것도 도미란이였으니, 도은정의 가족은 모두 도미란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췄다.도은정의 가족이 도미란에게 맞설 리 없었다. 그저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말도 못 하고 책임도 못 물을 거라면 소송해 달라고 절 찾은 건 아닐 테고요. 용건부터 말해 주세요.”허서령은 차분했다.도은정에게 특별히 동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었다. 도은정 자초한 일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유혹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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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이번에는 지준석도, 지로운도 찾지 않았어요. 대신 도미란에게 부탁했어요. 비위를 맞추고 온갖 아양을 떨었죠. 마침내 허서령 씨와 지강산이 또 헤어졌어요. 지강산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도미란의 도움으로 다가가 맞선 상대가 됐죠.”도은정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초점 잃은 눈으로 탁자를 바라보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렇게 많은 걸 희생했어요. 드디어 약혼녀가 될 수 있었죠. 지강산의 마음에 아직 허서령 씨가 남아 있어도 상관없었어요.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저는 이미 그 사람을 미칠 듯이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아무리 노력하고 무슨 수를 써도 허서령 씨가 한번 돌아보는 것만 못했어요.”말하는 사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도은정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들어 허서령을 보았다.“정말 미워요. 왜 제산시에 왔어요? 왜 다시 지강산 앞에 나타났냐고요?”“그 짐승 같은 가족에게 몸도 마음도 다 바쳤는데 돌아온 게 뭐였는지 알아요? 얼굴에 상처를 남기고, 절 짓밟고, 욕을 퍼부었어요.”도은정은 기운이 다 빠진 듯 더는 흥분조차 하지 않았다.허서령도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럼 금자 아주머니를 시켜 저한테 약을 먹인 것도 도은정 씨예요?”“아니요.”“대형 트럭 운전자를 고용해서 절 치게 한 것도요?”“아니요.”“그럼 저와 지강산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을 했는데요?”도은정은 탁자 위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 사람들한테 지강산을 좋아하고, 결혼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도와주기만 한다면 뭐든 하겠다고요.”허서령은 이제야 경위를 대강 알 것 같았다.큰아버지와 사촌 아주버님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던 건 도은정의 몸을 탐냈기 때문이었다. 큰어머니가 도은정을 도운 건 조종하기 쉬운 사람이어서였다. 도은정이 집안에 들어오면 지강산까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결국 큰아버지 가족은 처음부터 지강산의 앞날이나 직장을 위해 움직인 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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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겨울에는 밤이 빨리 찾아왔다. 아직 오후 6시도 되지 않았는데 바깥이 어두워졌다.허서령은 퇴근해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지강산의 신발이 신발장에 들어가 있는 걸 보았다.잠시 멈칫한 뒤 슬리퍼를 신고 외투를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며 눈으로 거실 구석구석을 훑었다.“오늘은 퇴근이 빠르네?”주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허서령이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을 때 가사도우미가 뒤뜰 쪽 문으로 들어왔다.“사모님, 퇴근하셨어요?”“네.”허서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가사도우미와 주방을 번갈아 보았다.“주방엔 누가 있어요?”가사도우미가 활짝 웃었다.“대표님이요. 오늘 일찍 오셔서 직접 저녁을 만들어 주신대요. 보양식도 따로 끓이셨어요.”허서령은 달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향했다.주방 문밖에 기대어 두 손으로 문틀을 붙잡고 안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지강산은 몸에 꼭 맞는 검은색 니트 상의에 회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넓은 어깨와 다부진 뒷모습을 보인 채 진지하게 음식을 볶고 있었다.어깨는 넓고 허리는 날씬했으며 엉덩이는 살짝 솟아 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도 눈에 들어왔다.‘나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허서령은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젯밤의 거침없는 모습을 떠올리니 주방에서도, 침대에서도 못 하는 게 없는 남자였다.‘하하...’지강산은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담아 주방 아일랜드 위에 올려놓았다. 돌아서는 순간 문가에서 기웃거리는 허서령이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허서령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집어넣고 나쁜 짓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민망하고 찔려 벽 뒤에 숨었다. 등을 벽에 붙이자 심장이 쿵쾅거렸다.지강산이 다정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집에 생쥐 한 마리가 들어왔나 보네. 음식 냄새 맡고 왔는지 문 앞에서 몰래 기웃거리는데. 훔쳐 먹으려는 게 음식일까, 주방에 있는...”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강산이 주방에서 나와 허서령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느긋하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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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아니요.”허서령이 아니라는 말에 지강산은 누가 그랬는지 더 묻지 않았다.“그럼 앞으로 네가 날 많이 웃게 해 줘.”“어떻게 하면 되는데요?”지강산은 불을 끄고 접시에 채소를 담아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한 손으로 조리대를 짚고 몸을 숙여 허서령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떨어져 미소 지었다.“이렇게.”입술에 아직 지강산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허서령은 웃음을 머금고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음식 들고 나가서 밥 먹자.”지강산이 앞치마 끈을 풀었다.“네.”허서령은 얼른 접시를 들고 나갔다.저녁은 화려하지 않은 집밥 위주였고, 보양식 한 그릇도 있었다. 전에 하선희가 지은영 편에 보내 준 재료로 끓인 것이었는데, 지강산은 허서령 몫만 한 그릇 만들었다.허서령은 숟가락으로 보양식을 떠먹으며 물었다.“왜 제 것만 끓였어요? 강산 씨 건요?”“난 몸이 멀쩡하니까 평소처럼 먹으면 돼. 보양식은 필요 없어. 네가 천천히 다 먹어.”허서령은 보양식을 천천히 먹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잠시 고민한 뒤 물었다.“강산 씨, 큰아버지네 사생활까지 그렇게 자세히 알아냈으면 사촌 아주버님이 뇌물 받은 것도 알고 있었어요?”식사하던 지강산의 손이 멈췄다. 몇 초간 굳어 있던 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난처한 듯 말했다.“서령아, 증거가 없을 때 먼저 공격할 순 없어. 움직이려면 명분이 필요해.”허서령은 담담하게 웃었다.“저도 알아요. 뭐든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게 맞아요. 정당한 이유를 찾아서 움직여야죠. 강산 씨가 큰아버지네 추문을 알아냈어도 그쪽에서 먼저 저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렇죠?”“응.”지강산이 고개를 끄덕였다.허서령은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내밀었다.“그 부분은 저도 강산 씨랑 생각이 같아요. 이 안에 지로운이 뇌물을 받은 증거가 있어요. 도은정이 줬어요.”“도은정이 왜 갑자기 등을 돌렸지?”지강산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USB를 받아 들었다.“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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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저녁 식사를 마친 허서령은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 어젯밤의 ‘고생’ 때문인지 그날은 유난히 일찍 잠들었다.지강산은 일부러 방에 찾아가 깨우지 않았다.방 안에는 부드러운 조명이 켜져 있었다. 씻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지강산이 서재의 책상 앞 가죽 의자에 앉았다.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리고 손끝에 정교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쥔 채 깊은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봤다.11년 전의 오래된 반지였다.지강산은 그 반지로 허서령에게 청혼했고, 허서령은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얼마 동안만 끼다가 헤어질 때 돌려주었다.지강산은 그 반지를 지금까지 간직해 왔다.허서령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사소한 선물 하나도 빠짐없이 소중하게 보관했다.반지는 11년 동안 깊숙이 넣어 두고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꺼내 한참 동안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반지를 꺼낼 용기는 생겼지만 허서령에게 다시 청혼할 용기는 여전히 없었다.성공할 가능성을 시험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서령에게 또 거절당한다면 이번에는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지강산은 손가락을 오므려 반지를 손안에 감쌌다. 눈을 감고 주먹 쥔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밤이 깊어 갔다.강령원은 고요했다....동지가 지나자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허서령의 일도 차츰 줄었다. 법원과 법률사무소가 모두 휴가에 들어갈 시기라 대부분 업무가 새해로 미뤄졌다.며칠 동안 지강산은 기회가 날 때마다 안방으로 돌아와 함께 자자고 했다.지난번에 혼자 엉뚱한 생각을 했던 일이 너무 창피했다. 허서령은 자기가 그렇게 밝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일부러 안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허서령이 돌아오지 않자 지강산도 더는 방으로 찾아와 함께 ‘자자’고 하지 않았다.그러자 시간이 갈수록 마음도 몸도 자꾸만 그리워졌다.지강산은 매일 평소처럼 출퇴근했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맛있는 저녁도 만들어 주었다. 저녁에는 함께 이야기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다.‘서른이면 한창때 아닌가? 벌써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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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지강산은 문을 닫고 돌아서다가 잠시 멈칫했다. 얇은 잠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허서령의 몸매에 시선이 머물렀다.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강산은 헛기침하고 말했다.“오늘부터 다시 이 방에서 지내자. 내일 아주머니한테 짐 옮겨 달라고 할게.”“번거롭게 짐을 왜 옮겨요? 바퀴벌레가 없어지면 제 방으로 돌아가서 자면 되지.”지강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두 손을 뒤로 뻗어 이불을 짚은 채 허서령을 올려다봤다.“내일이면 바퀴벌레가 없어질 게 확실해?”“네, 당연하죠.”허서령은 이제 거짓말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술술 했다. 왕 바퀴벌레는 어느새 단골 핑계가 돼 있었다.중요한 건 지강산은 한 번도 그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그럼 넌 내 방에서 자. 난 바퀴벌레 안 무서우니까 네 방에서 잘게.”지강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허서령은 화들짝 놀라 얼른 다가갔다. 침대에 무릎을 꿇고 지강산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어깨를 눌렀다.“강산 씨 제 방에 가서 자면 안 돼요.”지강산은 다시 손을 침대에 짚고 몸을 살짝 뒤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으며 허서령을 바라봤다.“서령아, 이 방으로 돌아와 나랑 같이 자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그래도 끝까지 싫다면 나도 내 고집대로 할 거야.”허서령은 그제야 깨달았다.“그러니까 일부러 제 방에 안 온 거예요? 제가 먼저 찾아오길 기다리다가, 막상 찾아오니까 또 모른 척하고요? 저더러 안방으로 돌아와 같이 살라고 이러는 거죠?”지강산은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하네...”허서령은 일부러 화난 척 볼을 부풀리고 허벅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강산이 재빨리 허리를 끌어안아 품에 가뒀다.허서령의 몸이 닿는 순간 지강산의 몸은 강하게 반응했다. 목울대를 살짝 움직이던 지강산이 낮게 속삭였다.“지금껏 늘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애썼잖아. 너도 한 번만 먼저 다가와 주면 안 돼? 딱 한 번이면 돼. 네가 날 필요로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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