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641 - Chapter 650

684 Chapters

제641화

신해시.해가 바다 수평선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잘게 부서진 금빛이 바다 위에 흔들리는 길처럼 길게 펼쳐졌다. 물이 멀리 빠져 평평하고 축축한 모래사장이 드러났고, 젖은 모래는 짙은 빛을 띠었다.허서령은 맨발이었다. 모래는 살짝 차가웠고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푹 들어갔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이보리색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지강산은 한 손으로 허서령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허서령의 샌들을 들고 있었다.두 사람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아주 천천히 걸었다. 허서령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지강산의 잘생긴 옆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봤다.“뭘 그렇게 봐?”지강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당신.”허서령은 걸음을 멈췄다.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바람에 길게 흩어졌다. 파도는 두 사람의 발끝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났다.지강산은 깊은 눈빛으로 부드럽게 물었다.“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바닷가에서 쉬니까 좋아?”“네, 좋아요.”허서령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예전에는 로맨틱한 해변 결혼식 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데 나중에는 왜 싫어졌어?”허서령은 미소가 옅어지더니 고개를 숙이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지강산은 손을 잡은 채 따라가며 물었다.“왜 그래?”허서령이 말없이 걷자 지강산도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허서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전에 어느 깊은 밤에 썰물 빠진 모래사장에 누워서 물이 다시 차오르기만 기다린 적이 있어요. 파도가 제 몸까지 올라왔었어요. 그때 그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아마 그날 밤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파도 따라 사라졌을 거예요.”지강산은 그대로 멈춰 섰다. 맞잡은 손가락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허서령은 지강산에게 붙잡혀 걸음을 멈췄다. 손가락 마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자 곧바로 몸을 돌려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슴에 기댔다. 미안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지강산의 심장이 빠르고 세게 뛰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언제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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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2화

제산 대학교에 가장 북적이는 개강철이 찾아왔다.활기가 넘치는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잔디 언덕에도 서너 명씩 모여 수다를 떨거나 공부를 하고,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보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보였다.“저기요. 카톡 친구 추가해도 될까요?”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화려한 인상의 여학생이 남학생들 무리로 다가와, 책상다리하고 앉아 있는 한 남학생을 바라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학생 셋이 모두 고개를 들어 여학생을 바라봤다.“미안한데 휴대전화가 없어요.”지강산은 차갑게 거절했다.여학생은 난처하고 민망한 얼굴로 곧바로 자리를 떴다.소준혁이 웃으며 말했다.“강산아, 개강하고 지금까지 너한테 카톡 달라고 한 여자가 몇 명이냐? 아직 셀 수는 있냐?”지강산은 얇은 회색 재킷을 한번 잡아당기며 무심하게 웃었다.“그걸 왜 세?”최우진은 두 손으로 잔디를 짚고 몸을 뒤로 젖힌 채, 지나치게 잘생긴 지강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충고했다.“강산아, 너도 벌써 성인이야. 여자친구 한 명 사귀고 연애도 해 봐야지. 대학 와서 연애 안 하면 대학 생활 절반은 날리는 거다.”“안 해. 관심 없어.”지강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최우진은 지강산의 어깨를 툭 쳤다.“너도 준혁이 좀 배워. 걔는 중학교 때부터 연애해서 일 년에 한 번씩 여자친구가 바뀌잖아. 그래야 청춘을 제대로 즐기는 거지.”지강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연애는 시간 낭비야. 한다고 꼭 끝이 좋은 것도 아니고. 졸업할 때 되면 다 헤어진다는데 뭐 하려 해?”“결과가 뭐가 중요해. 과정이 중요하지.”최우진은 지강산의 귀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여자애들은 다 향기 나고 부드러워. 키스하면 얼마나 좋은데. 넌 여자랑 자 본 적도...”지강산은 손을 들어 최우진의 얼굴을 가리고 힘껏 밀어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자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 정상적인 얘기 좀 하자.”소준혁이 비웃듯 말했다.“우진아, 얘한테 그런 말 해 봐야 소용없어. 무슨 욕심 없는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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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3화

밤이 된 기숙사는 유난히 조용했다.게임을 좋아하는 최우진까지 이미 잠들었는데 지강산만 눈을 뜬 채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였다.머릿속은 온통 허서령이라는 여학생으로 가득했다.민망해서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유난히 사랑스러웠다.‘이게 설레는 감정이라는 걸까? 안 돼. 아까 연애는 시간 낭비라고 해 놓고 너무 빨리 말이 뒤집히잖아. 소준혁과 최우진한테 평생 놀림당할 게 뻔해.’지강산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은 채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다.새벽이 한참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또 허서령이라는 여자를 만났다.심지어 꿈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이른 새벽, 아직 어스름할 때 지강산은 갑작스러운 쾌감에 놀라 잠에서 깼다.이불을 걷고 아랫배 쪽을 내려다본 지강산은 낙담한 듯, 또 짜증 난 듯 한숨을 쉬었다.곧바로 일어나 화장실로 가 바지를 갈아입고 세면대 옆에서 빨기 시작했다.잠시 뒤 최우진이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왔다. 지강산 뒤를 지나가며 빨고 있는 옷가지를 힐끗 보고 물었다.“너 자위했냐, 몽정했냐?”지강산은 두 손으로 옷가지를 세면대 물속에 꾹 눌렀다.“가서 오줌이나 싸.”최우진은 히죽거리며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소변 보는 소리가 들려왔다.“너 어젯밤에 그 무슨 령인가 하는 여자 생각하면서 잤지? 마음에 들면 가서 잡아. 그런 예쁜 애는 대학에서도 엄청 인기 많아. 학교 남자들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돈 좀 있는 남자들도 이런 청순하고 예쁜 대학생 좋아해서 찾아다닌다고. 그런 부자들이 제일 큰 경쟁자야.”최우진의 말을 듣는 순간 지강산의 심장이 철렁했다.정체 모를 질투가 가슴을 덮쳤다.살면서 처음으로 낯선 여자에게 이런 이상한 소유욕을 느꼈다.최우진은 화장실 칸에서 나와 세면대로 가 손을 씻었다.지강산은 계속 속옷을 빨며 물었다.“여자는 어떻게 꼬셔?”최우진은 지강산을 보다가 웃었다.“장난하냐? 그 얼굴에 집안까지 그런 네가 나한테 여자를 어떻게 꾀냐고 묻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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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4화

“뭐 먹고 싶은데요?”허서령은 식권을 들고 조금 어색한 듯 지강산을 바라봤다.지강산은 깔끔한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키도 커서 수많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시끄러운 학생식당 안에서도 지강산의 목소리는 맑고 부드럽게 들렸다.“국수 한 그릇이면 돼.”허서령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강산처럼 키 큰 남자가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단백질도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았다.“너무 채식 같지 않아요?”“괜찮아. 배만 부르면 돼.”지강산은 가장 싼 국수를 골랐고, 허서령도 똑같은 메뉴를 먹었다.두 사람이 쓴 돈은 너무 적었다. 나란히 앉아 국수를 먹었다.학교에 다니는 동안 허서령이 남학생과 단둘이 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이유도 모르게 긴장되고 어색해 몸 둘 바를 몰라, 몰래 눈을 들어 맞은편 남자를 훔쳐봤다.지강산은 얇은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려 반듯한 손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지적인 분위기가 났고, 식사하는 모습도 우아해 기품이 느껴졌다.지강산은 허서령이 몰래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딱 마주치자 허서령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모습에 지강산은 부드럽게 웃었다.“난 항공 우주학부야. 너는?”“금융학과.”“1학년?”“네.”“난 2학년인데. 몇 살이야?”“열여덟.”“생일은 몇 월이야?”“11월 25일.”“난 6월 25일이야. 거의 일 년 반년 차이네. 날짜도 똑같고, 우리 인연인가 보다.”허서령은 어색하게 입술을 다물고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나야 인연이라고 하지, 날짜 하나 같다고 무슨 인연이란 말이야...’대화가 조금 억지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허서령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숙여 국수를 먹었다. 어색한 식사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국수를 다 먹은 뒤 허서령은 식기를 정리해 일어날 준비를 했다.“허서령.”지강산이 갑자기 손을 뻗어 허서령의 손목을 잡았다.따뜻한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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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5화

“데려다줄게.”“괜찮아요.”허서령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안녕.”지강산은 허서령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카톡 프로필을 확인했다.그런데 SNS는 내용물 하나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허서령은 학생식당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를 향했다. 긴장한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한참 걷고 나서야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문득 자신이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강산에게도 룸메이트나 학과 친구가 있을 테고, 친척이나 지인도 있을 것이다.‘그런데 왜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돈을 빌린 걸까? 만원만 속았으면 몰라도, 안쓰럽다고 2만 원이나 보내 줬잖아.’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잘생긴 얼굴에 홀려 잠깐 판단력이 흐려졌다.허서령은 휴대전화를 꺼내 지강산의 카톡 프로필을 확인했다.SNS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어쩌면 정말 사기꾼일지도 몰랐다.‘저 잘생긴 얼굴을 앞세워 여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어.’의심은 들었지만 허서령은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사흘째 되는 날 저녁, 지강산에게 카톡 메시지가 왔다.[허서령, 나 아르바이트해서 돈 좀 벌었어. 2만 원 갚을게.]허서령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진동이 울리자 휴대전화를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이렇게 빨리 돈을 받을 줄은 몰랐다. 허서령은 답장을 보냈다.[그럼 보내 줘요.][현금밖에 없어. 만나자. 직접 가져다줄게.][저 2관 도서관이에요.][바로 갈게.]허서령은 더 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뒤 다시 책을 읽었다.잠시 뒤 누군가 맞은편에 앉았다. 희고 길쭉하며 마디가 선명한 손이 천천히 눈앞으로 뻗어 왔다. 손바닥 아래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두 장 눌려 있었다.허서령은 잠시 멈칫하고 그 손을 바라봤다.남자의 손이었다. 손톱은 가지런하고 깨끗했으며, 마치 TV에 나오는 손 모델처럼 예뻤다. 손이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감탄할 만했다.허서령은 그 손을 따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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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6화

두 사람은 조용히 나란히 섰다. 어깨가 거의 닿을 듯 가까웠다.침묵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지강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허서령, 나 너 좋아해. 내 여자친구 해 줄래?”허서령은 깜짝 놀라며 심장이 세게 뛰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돌려 지강산을 바라봤다.지강산은 불빛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진심이야. 나 너 정말 좋아해. 너...”갑작스러운 고백에 허서령은 크게 당황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말을 끊었다.“다음 달 밥값은 해결했어요? 밥 먹을 돈도 없으면서 연애부터 하겠다고요? 부모님이 힘들게 대학 보내 준 건 공부하라고 보낸 거지 연애하라고 보낸 게 아니잖아요.”“너 좋아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허서령은 잠시 멈칫했다.듣고 보니 그렇기도 했다. 연애를 꼭 돈 들여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아무튼 전 연애할 생각 없어요.”허서령은 그렇게 말하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실처럼 가는 차가운 빗줄기가 순식간에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허서령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전 마음을 뒤흔든 고백 현장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허서령!”뒤에서 지강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바닥 위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왔다.허서령은 더 빠르게 걸었다. 심장은 북처럼 뛰었다. 달리고 있어서인지, 조금 전 들은 ‘좋아해’라는 말 때문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잠깐만!”어느새 지강산이 곁까지 따라왔다. 손을 뻗어 허서령을 붙잡으려다가 망설이고 다시 거뒀다.두 사람은 빗속에서 나란히 뛰었다. 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물이 뺨을 타고 흘렀고, 긴장해서 난 땀인지 비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안 지 얼마나 됐다고 좋아한다는 거야? 만원 때문인가? 아니, 2만 원이지.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여서?’“내 말끝까지 들어 주면 안 돼?”지강산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조금 흐릿하게 들렸다.“듣기 싫어요!”허서령은 거의 소리치듯 말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지강산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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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7화

하지만 비는 이렇게 많이 오고, 정말 아파 보였다...“괜찮아요?”결국 허서령은 걱정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본인도 모르게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지강산이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턱선을 타고 흘렀고, 비 내리는 밤 속에서 눈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발목을... 삔 것 같아.”억누른 고통이 목소리에 섞여 있어 연기처럼 들리지는 않았다.허서령은 몇 초 망설인 끝에 결국 돌아갔다. 쪼그려 앉아 상태를 보려 했지만 직접 몸에 손대기는 또 부끄러웠다.“일어날 수 있어요?”지강산은 한번 일어나 보려다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잘... 안 될 것 같아.”고개를 들어 허서령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솔직해 보여 의심하기 어려웠다.“좀 부축해 줄래? 앞에 비 피할 곳이 있어.”허서령은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지강산은 허서령의 손목을 잡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자리였다. 다만 이번에는 비 때문에 손바닥이 차가웠다.허서령은 온 힘을 다해 지강산을 일으키려 했지만 정말 많이 다친 것인지 두 번이나 실패했다. 세 번째에는 자세를 바꿔 거의 어깨로 받치다시피 해 겨우 일으켰다.지강산은 체중 대부분을 다치지 않은 왼발에 싣고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허서령의 어깨에 올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이 붙은 채 천천히 앞쪽 건물 처마 밑으로 옮겨 갔다.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허서령에게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젖은 셔츠 너머로 지강산의 체온이 전해졌고, 빗물에 씻긴 듯 맑고 은은한 향도 느껴졌다. 심장이 또 말을 듣지 않고 빨라졌다.마침내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 밑에 도착했다. 허서령은 지강산을 벽에 기대 앉힌 뒤 곧장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고마워.”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허서령을 바라봤다. 녹아내린 설탕처럼 부드러운 눈빛이었다.“미안해. 괜히 귀찮게 했네.”허서령은 고개를 돌렸다.“괜찮아요.”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발목은... 보건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지강산은 조금 붉게 부어오른 오른쪽 발목을 내려다봤다.“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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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8화

허서령은 지강산을 보건실까지 데려다준 뒤 혼자 기숙사로 돌아갔다.그날 밤 내내 마음이 엉망이었다.예전에도 남학생들에게 고백을 여러 번 받아 봤지만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분명하게 거절했다. 여자친구가 될 생각도 없었고, 다시는 지강산과 엮이지 않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거절은 단호했다.그 뒤 일주일 동안 지강산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대학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일주일 뒤 지강산이 다시 도서관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허서령의 맞은편에 앉지 않고 대각선 자리에서 허서령을 향해 앉았다. 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두고도 표지를 펼치지도 않은 채 시선만 곧게 허서령에게 두었다.윤성이 다가와 허서령의 맞은편에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 새로 개봉한 애니메이션 있는데 재밌대.”“응.”허서령이 대답했다.윤성은 더 말하지 않고 자료를 넘겼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가 대각선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윤성은 잠시 지켜보다 입가에 웃음을 띠고 펜으로 허서령의 책을 톡톡 건드렸다.“세 시 방향.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가 이쪽 보고 있는데, 혹시 나 보는 거 아니야?”글을 쓰던 허서령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진짜 잘생겼다.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윤성은 웃으면서 자꾸 그쪽을 힐끗거렸다.허서령은 몇 초 침묵하다 말했다.“지강산이야. 지난번에 내가 사람 잘못 봤다고 말했던 그 남자. 지난주에 나한테 고백했는데 거절했어.”윤성은 눈빛이 가라앉고 얼굴도 순간 어두워지더니 짜증스럽게 앞의 자료집을 덮었다.“너 진짜 눈 높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좋다고 하는데 거절했다고? 누구 약 올리냐?”허서령은 화가 나 말했다.“우리는 학교에 공부하러 온 거지 연애하러 온 거 아니잖아.”“연애한다고 공부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저런 분위기의 잘생긴 남자는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이야. 돈이 많거나 집안이 좋은 사람이겠지.”윤성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슬쩍 지강산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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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9화

기숙사로 가는 길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짧게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지강산은 카톡으로 귀찮게 연락하지도 않았고, 집요하게 들이대지도 않았다. 다만 자주 허서령의 시야 안에 나타나 친구처럼 인사만 했다.행동도 매너도 흠잡을 데 없었다. 빗속에서 했던 갑작스러운 고백만 빼면 다른 때에는 허서령을 조금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두 사람은 학과가 달라 수업이나 공부에서는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그래도 지강산은 어떻게든 마주칠 기회를 만들었다. 잠깐 스쳐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그렇게 미지근한 관계가 석 달째까지 이어졌다.허서령은 거의 매일 지강산이 나타나 인사를 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지강산이 며칠째 갑자기 보이지 않자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어수선해졌다.며칠을 고민한 끝에 허서령은 결국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뭐 해요?]잠시 뒤 지강산이 답했다.[그냥 있어.]허서령은 그 말을 한참 들여다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싶어 다시 물었다.[왜 ‘그냥’인데요?][아파. 곧 죽을지도 몰라.]허서령은 순간 긴장했다.[무슨 병인데요? 많이 심해요?][심해. 사람 죽을 수도 있는 병이야.]몇 줄 안 되는 글을 보는 순간 허서령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유도 없이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가득 찼다.[어디에요?][기숙사.][그렇게 심한 병인데 왜 기숙사에 있어요? 빨리 가족한테 연락해서 병원 데려가 달라고 해요.][네가 데려가 주면 안 돼?][알았어요.]걱정이 앞선 허서령은 생각할 틈도 없이 곧바로 승낙하고 남학생 기숙사 아래에서 지강산을 기다렸다.막상 만나 보니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그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정도였다.하지만 혹시 겉으로 티가 안 나는 큰 병인가 싶어 여전히 걱정됐다.큰 병원에 도착하자 지강산은 돈이 없다고 했다. 결국 접수비와 검사비도 허서령이 냈다.계속 마음 졸이며 기다렸는데 마지막에 의사가 말했다.“그냥 감기입니다.”허서령은 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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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0화

허서령은 또 지강산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밤새 진지하게 고민한 뒤 다음 날 항공 우주학부로 갔다. 예전에 지강산이 말해 준 강의동을 기억해 그쪽으로 찾아갔다.직접 찾아가 부르기는 민망해서 지강산이 꼭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사실은 어떤 여자가 그렇게 열심히 지강산을 쫓아다니는지도 보고 싶었다.공교롭게도 정말 보게 됐다.한 여학생이 초콜릿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지강산이 지나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강산이 남학생 둘과 함께 걸어오자 여학생은 앞으로 뛰어나가 길을 막았다.“지강산, 나 진짜 너 좋아해. 내 남자친구 해 주면 안 돼?”“안 돼.”지강산은 단호하게 잘랐다.“날 좋아한다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도 몰라?”여학생은 민망하고 창피해 얼굴이 붉어졌다.최우진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난 단 거 좋아하는데. 특히 초콜릿...”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쓰레기통 옆을 지날 때 초콜릿 꽃다발도 그대로 버렸다.지강산은 무심코 눈을 들었다가 익숙한 뒷모습이 기둥 뒤로 숨는 걸 봤다.그는 소준혁과 최우진에게 먼저 가라고 한 뒤, 두 사람이 멀리 간 걸 확인하고 기둥 뒤로 걸어가 허서령의 앞에 섰다.허서령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지강산을 봤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바지를 꼭 쥐었다.지강산은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눈빛까지 반짝이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생각 다 했어?”허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강산은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진하게 웃었다.“나 거절할 거였으면 카톡으로 한마디 보내면 되지 굳이 직접 찾아오진 않았을 거잖아. 내 말 맞지, 사랑하는 여자친구?”“네?”허서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완전히 멍해졌다.‘방금 뭐라고 부른 거지? 사랑하는 여자친구? 나는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떻게 벌써 여자친구가 된 거지?’“전 그게 아니라...”허서령은 머릿속이 뒤죽박죽돼 두 손을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그 얘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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