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651 - Chapter 660

684 Chapters

제651화

“네 돈을 쓰지도 않을 거고, 공부에 방해되는 일도 없을 거야. 원한다면 영어 자격시험 공부도 도와줄게.”허서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지강산이라는 사람에게 끌린 건지, 영어 자격시험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혹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그의 덫에 완전히 걸려들었다.사귀기 시작한 뒤 이틀 동안 지강산은 꽤 조심스러웠다.평소처럼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했을 뿐, 일상도 두 사람의 거리도 달라진 게 없었다.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도서관을 나서자 지강산이 불쑥 허서령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허서령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어쩔 줄 몰랐다.처음으로 그와 손을 잡은 순간, 심장에 모터라도 달린 듯 맥박이 미친 듯이 뛰었다.남자와 사귀는 건 처음이라 다른 연인들이 얼마나 빨리 가까워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허서령이 느끼기엔 지강산과의 진도가 조금 빠른 것 같았다.사귄 지 일주일쯤 지난 주말 저녁, 지강산이 공원에 가자고 했다.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지강산은 갑자기 허서령의 양어깨를 잡고 나무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나직이 속삭였다.“서령아, 키스해도 돼?”허서령은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사귄 지 겨우 일주일인데 벌써 키스를 하자고?’하지만 룸메이트 말로는 요즘 커플 중엔 사귀기로 한 날 바로 잠자리를 갖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진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얘기였다.그래서 이 정도가 보통인지 아닌지 허서령도 알 수 없었다.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지강산이 입을 맞췄다.지강산도 서툴렀지만 허서령은 그보다 더 서툴렀다. 둘 다 긴장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맞닿은 입술을 좀처럼 떼지 못했다....남자 기숙사.지강산은 책상 앞에 앉아 항공우주 모형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최우진이 다가와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그의 진지한 얼굴을 들여다봤다.“뭐 해?”“모형 만들고 있어.”“너 연애 시작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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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2화

지강산과 사귀기 시작한 뒤 석 달 동안, 허서령은 처음의 어색함을 조금씩 떨쳐 내고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졌다.게다가 남자 친구는 잘생기고 다정했으며, 밝고 감정 기복도 적었다.웃음도 많아 예의 바르고 배려심 깊은 신사 같은 사람이었다.다만 가난한 건 사실이었다. 지강산의 말로는 성인이 된 뒤로 집에서 돈을 받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연애한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볕이 따스한 공원의 한적한 나무 아래였다.허서령과 지강산은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그때 지강산이 불쑥 말했다.“서령아, 우리 자자.”“좋아요.”허서령은 선뜻 대답하고는 뒤로 벌렁 누워 잔디밭에 몸을 뉘었다.지강산은 환하게 웃으며 허서령의 순진한 모습을 바라봤다. 볼살이 통통하게 남은 앳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하지만 최우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지강산은 잔디밭에 팔꿈치를 괴고 허서령 곁에 옆으로 누워, 위에서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서령아, 여기서 낮잠 자자는 뜻이 아니야. 우리 같이 방 잡으러 가자.”허서령은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엉덩이를 뒤로 빼며 물러나 두 손으로 잔디를 짚고 급히 일어섰다.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다.지강산도 놀란 허서령을 보고 일어났다.“무서워하지 마. 내 말부터 끝까지 들어 봐...”허서령은 화가 난 눈빛으로 지강산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선배, 전 선배가 다른 남자애들이랑은 다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선배도 똑같네요. 지금 장난해요? 우린 이제 겨우 성인이 됐고, 사귄 지도 석 달밖에 안 됐어요.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잖아요.”지강산이 한 걸음 다가왔다.“서령아, 난 네가 정말 좋아. 한 사람만 끝까지 사랑할 자신도 있어. 널 여자 친구로 선택한 이상, 아내로도 맞이할 거야. 미래의 남편으로서 누릴 권리를 미리 누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일찍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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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3화

그 뒤에는 룸메이트들에게도 넌지시 물어봤다.모두 결혼 후에야 잠자리를 갖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의견이었다. 혼인 신고까지 마친 뒤에야 신체적인 문제를 발견하면 이혼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그렇게 허서령은 며칠 동안 고민했다.주말이 다가오자 마음을 정한 허서령은 얼굴을 붉히며 지강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생각 다 했어요. 우리 숙소 잡아요. 내일 일요일이면 저 시간 있어요.]지강산: [다음 주에 가자. 준비할 게 있어.]허서령: [뭘 또 준비해야 하는데요?]지강산: [시험 보려면 공부해야지. 난 경험도 전혀 없는데.]허서령: [무슨 시험? 무슨 공부?]지강산: [네가 시험지이자 감독관이고 채점관이잖아. 내 성적은 전부 네 손에 달렸으니까 긴장돼. 며칠만 복습할 시간을 줘.]허서령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알았어요. 마음대로 해요.]사실 허서령도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일주일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지강산이 말한 공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리고 토요일이 되었다.지강산은 산속에 자리한 정원식 숙소를 예약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온천과 산 전망까지 갖춘, 아늑하고 낭만적인 곳이었다.지강산이 여행 가방을 들고 허서령의 손을 잡아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허서령은 손바닥에 땀이 밸 만큼 긴장했고, 두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숙소 주인은 허서령의 주민등록증을 몇 번이나 살펴보더니 물었다.“이분이 남자 친구예요?”“네.”허서령은 괜히 찔려서 수줍고 어색하게 대답했다.주인은 객실 카드를 건넸다.지강산은 허서령의 손을 잡고 객실로 들어갔다.아기자기하고 포근하게 꾸민 방에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문이 닫히자 허서령은 더욱 긴장했다.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사이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데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태연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씻을래?”지강산은 가방을 내려놓고 돌아봤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지만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짧은 머리 아래 드러난 귀도 빨갛게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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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4화

하지만 허서령을 찾아다닐 시간은 많지 않았다.지강산은 대학에 들어온 뒤 집안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는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었다.공부할 것도 산더미처럼 많아 허서령에게 연락하는 수단은 거의 휴대전화뿐이었다.전화와 메시지를 너무 자주 보낸 탓에 허서령은 답장을 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강산의 연락처까지 전부 차단했다.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당한 듯한 고통이 지강산을 덮쳤다. 감정 때문에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처음이었다.불안하고 초조했다. 손목의 맥박이 아려 오는 듯하더니 통증이 심장 깊숙이 번졌다. 머릿속에는 온통 허서령뿐인데 정작 얼굴조차 볼 수 없어 괴로웠다.후회와 자책도 끊이지 않았다.‘최우진의 터무니없는 말을 왜 믿었을까... 왜 그렇게 서둘러 허서령을 놀라게 했을까...’스스로 뺨을 때리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그렇게 일주일쯤 흘렀다.주말이 되자 지강산은 허서령의 기숙사 아래에서 기다렸다.아침부터 기다렸지만 정오가 지나도록 허서령은 나오지 않았다.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허서령이 편안한 멜빵 원피스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 휴대전화를 들고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석양이 허서령의 발그레한 얼굴을 비췄다. 온몸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묻어나 봄날의 새순처럼 맑고 산뜻했다.지강산은 옆길에서 불쑥 나와 허서령의 앞을 가로막았다.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허서령은 움찔했다. 상대가 지강산임을 알아본 순간 표정이 굳었고, 곧장 몸을 돌려 다른 길로 가려 했다.지강산은 서둘러 뒤쫓아 가 손목을 잡고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서령아, 미안해.”허서령은 손을 세게 빼려 했다.“놔요.”하지만 지강산은 손목을 놓기는커녕 허서령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날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지 말해 줘. 다만 제발 모른 척하지 마. 차단하지도, 피하지도 말아 줘.”지강산이 힘없는 허서령의 손을 잡고 자기 뺨을 한 차례 때리게 하자 허서령은 황급히 손을 빼냈다. 그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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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5화

“내 연락처도 차단하고, 만나 주지도 않고, 메시지에도 답 안 하잖아. 서령아,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자는 거야?”허서령은 그저 화가 났을 뿐, 헤어질 생각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강산의 입에서 이별이라는 말이 나오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첫 경험까지 함께한 사람인데 그렇게 갑자기 헤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지강산도 허서령도 한 번 짝을 맺으면 평생 함께한다는 백조 같은 사람이었다.잠자리까지 갖고 헤어지는 건 억울했다. 허서령이 다급히 말했다.“헤어지겠다고 한 적 없거든요.”지강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허서령을 와락 끌어안아 품에 꼭 가두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귓가에 속삭였다.“미안해. 서령아,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더 다정하게 할게. 네 말도 잘 듣고.”허서령은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안긴 채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지강산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예전에도 포옹하고 입을 맞출 때면 어렴풋이 맡았던 향이었다.하지만 이제 서로의 몸을 남김없이 마주한 뒤라 그런지, 허서령은 지강산의 몸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그만의 은은한 향기에 한층 끌렸다.“미안해. 서령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화나게 하지 않을게.”“정말요?”허서령의 마음은 이미 한없이 약해져 있었다.“정말이야. 다시는 널 화나게 하지 않을 거야.”허서령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 지강산의 허리를 감쌌다.“알았어요. 용서해 줄게요.”지강산은 허서령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슬며시 웃었다.여자 친구는 한번 마음먹으면 가차 없으면서도, 달래기는 참 쉬웠다.지강산은 품에 안긴 작고 부드러운 몸을 더욱 끌어당기며 속삭였다.“서령아, 난 이제 네 사람이야. 앞으로 너만 사랑하고 네 곁만 지킬게.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남자 친구가 될 거고, 졸업하면 가장 충실한 남편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돼.”“네.”허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각은 뭐든 존중할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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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6화

정윤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여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자 새 가정을 꾸렸을 때도 선택할 수 없었다. 정윤슬은 할아버지와 살아야 했다.어릴 때부터 경제력이 없었던 정윤슬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할아버지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치료비가 없었다. 지씨 집안의 경제적인 도움이 절실했기에 할아버지가 정해 준 결혼 상대 역시 거절할 수 없었다.지태일은 정윤슬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였다.정윤슬은 그저 참고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불행한 결말까지 각오했다.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서령 언니는 아이를 잃었고 이제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았다.예비 시어머니 하선희는 정윤슬을 지태일이 사는 곳으로 데려갔다.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강령원과 배치, 면적, 규모가 비슷했지만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정문에 조잡하게 걸린 현판의 이름, [쉼터]부터가 정윤슬을 질리게 했다.강령원은 어디를 둘러봐도 꽃과 푸른 나무가 가득했지만 이곳은 잡초가 무성했다. 커다란 나무 몇 그루는 말라 죽기까지 했다.저택 안에 들어선 하선희가 정윤슬에게 깨끗한 슬리퍼를 꺼내 주려고 신발장을 열었지만, 텅 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하선희는 한숨을 쉬고 신발장을 닫았다.“윤슬아, 그냥 맨발로 들어가자. 우리 큰아들은 작은아들이랑 성격이 정반대거든. 아주 털털한 데다 거칠고 소탈해서 사소한 일엔 신경을 안 써. 너무 마음 쓰지 말렴.”“네, 어머님.”정윤슬은 거실로 들어가 짐가방을 소파에 놓다가 옆에 널브러진 더러운 옷 두 벌과 양말 한 켤레를 발견했다.하선희도 보았는지 얼른 옷과 양말을 주워들며 멋쩍게 웃었다.“태일이가 아주 바빠. 사람 쓰는 것도 싫어하고, 집안일은 영 손을 못 대거든. 가끔 내가 와서 치워 주는 정도야.”하선희는 옷가지를 세탁실로 가져가 세탁기에 넣었다.정윤슬은 마음이 무거웠다.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할 집을 어색하게 둘러봤다.지태일은 집안도 좋고 외모와 체격도 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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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7화

정윤슬은 걸으면서 요금을 충전하다가 지태일의 방문 앞에서 갑자기 따뜻하고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쳤다.깜짝 놀란 윤슬이 움찔하는 순간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탁’ 소리가 나자 황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휴대폰을 주울 새도 없이 눈앞에 버티고 선 거구부터 올려다봤다.지태일도 부딪힌 충격에 어리둥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정윤슬을 보는 눈에 당혹감이 가득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윤슬이 먼저 귀가 붉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태일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물기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솟아 있었고 몇 가닥은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깊고 뚜렷한 이목구비에서는 강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넓은 어깨와 팔에는 근육이 선명했고 가슴과 복부 역시 단단하게 갈라져 있었다. 바위처럼 묵직하면서도 불길처럼 뜨거운 남성미가 느껴졌다.비누 향에 체온이 섞인 거친 향기가 풍겼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윤슬은 온몸이 뜨거워졌다.물론 완전히 벌거벗은 건 아니었다. 회색 사각팬티는 입고 있었다. 다만 천이 너무 꽉 끼는 바람에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도드라져 보였다.얼핏 본 것만으로도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정윤슬은 황급히 등을 돌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옷 좀 입으세요.”“네가 왜 여기 있어?”두 사람의 말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지태일은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서야 상황을 깨닫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하늘에 번진 저녁노을이 정윤슬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정윤슬은 고개를 숙이고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놀란 나비처럼 불안해 보였고 두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지태일은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정윤슬의 뒤를 지나가면서 덤덤하게 한마디 던졌다.“거실에서 얘기하지.”정윤슬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결국 몸을 돌려 지태일을 따라 거실로 갔다.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정윤슬은 두 발을 모으고 의자 양옆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시선은 무릎에 고정됐고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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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8화

마지막 노을이 사라지고 밤이 찾아왔다.거실에는 따뜻한 노란 조명이 켜졌다.“난 널 돌볼 시간이 없어.”고요한 공간에 지태일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정윤슬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따뜻한 빛을 받은 눈동자는 반짝였지만 눈부시지는 않았다.“돌봐 주실 필요 없어요.”“넌 이렇게 젊고 예쁜데.”지태일이 자조적으로 웃었다.“나 같은 늙은 남자랑 살면 억울하지 않겠어?”정윤슬은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안 억울해요.”“대체 왜 이러는 거야?”지태일은 팔꿈치를 무릎에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반짝이는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거리는 표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정윤슬은 들릴 듯 말 듯 숨을 들이켰다.“할아버지 소원을 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오빠 할아버지가 저희 할아버지 치료비를 내주신 은혜도 갚고 싶고요.”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옛날 사람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약속은 약속이잖아요. 전 진지하게 지킬 거예요.”지태일은 윤슬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비틀었다. 웃음기 없는 표정이었다.“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는 거지?”“네.”다시 침묵이 흘렀다. 지태일은 일어나 개방형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유리컵 두 개를 꺼냈다.“물 마실래?”정윤슬에게 등을 돌린 채 물었다.“감사합니다.”그는 물을 따라 돌아와 컵 하나를 정윤슬 앞 탁자에 밀어 놓았다.그리고 아까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정윤슬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쿠션 하나가 놓여 있었다.지태일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움직였다.“좋아. 그렇게 고집하겠다면 네 뜻대로 함께 살아 보자.”“배고파?”지태일이 갑자기 물었다.정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배고파요.”“밥 차려 줄게.”지태일이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갔다.요리도 할 줄 안다는 말에 정윤슬은 깜짝 놀라 뒤따라갔다.“제가 할게요.”“됐어.”“그럼 옆에서 도와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몇 분이면 끝나.”정윤슬은 고개를 갸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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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9화

지태일은 손을 닦고 주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정윤슬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우리 규칙 같은 걸 정해야 할까요?”“그럴 필요 없어.”“싫어하시는 거나 제가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있나요?”“없어.”“그럼...”지태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정윤슬은 부딪힐 뻔해 급히 멈춰 서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봤다.“네가 원래 집에서 지내던 대로 여기서 지내면 돼. 난 널 돌볼 시간도 없고,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날 방해할 일도, 내가 너한테 영향을 줄 일도 없어.”정윤슬은 긴장한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냈다.“그런데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지태일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뭔데?”“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집에서는 옷 좀 입어 주시면 안 될까요?”지태일은 담담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그는 윤슬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봤다. 역시 어린 여자애였다. 지극히 평범한 부탁을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다니.“감사해요.”정윤슬은 공손히 인사했다.“그럼 난 방에 들어갈게.”지태일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하고 몸을 돌렸다.정윤슬은 넓고 단단한 그의 등을 바라봤다. 불안감은 조금 가셨지만 낯섦과 막막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 뒤 며칠 동안 지태일의 말대로 그는 정말 바빴다. 집에 들어올 시간조차 없을 만큼이었다.어디에 갔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정윤슬은 아마 임무를 나간 것 같다고 짐작했다.정윤슬은 서령 언니를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허서령은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고 마음이 가라앉는 일은 피해야 했다.사고 당시 운전대를 잡았던 건 정윤슬이었다. 그 사고로 간접적으로 아이를 잃은 만큼 강산 오빠와 서령 언니에게 죄스러웠다. 자신을 보면 허서령의 마음이 더 힘들어질까 두렵기도 했다.정윤슬의 할아버지도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 틈틈이 병문안을 하여야 했다.게다가 내년에 시작할 석박사 통합과정 연구 주제도 준비해야 했고, 학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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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0화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서둘러 절차를 끝낸 지태일은 증명서를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정윤슬에게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고 다시 차를 타고 떠났다.증명서류를 본 할아버지와 부모님들은 무척 기뻐했다.반면 정윤슬은 서류를 손에 들고도 마음이 텅 빈 것만 같았다.살아남기 위해, 은혜를 갚기 위해 열 살이나 많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맡겼다.혼인 신고에 무심했던 태도와, 끝나자마자 서둘러 떠난 모습만 봐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모양이었다.정윤슬은 할아버지와 부모님들만 모시고 점심을 먹었다. 할아버지에게서 값비싼 비취 팔찌 한 쌍을, 부모님에게서 보석 장신구 한 세트를 받았다.선물은 모두 집으로 가져와 지태일의 방 서랍에 넣어 두었다. 돌려준 셈이었다.어차피 두 사람은 형식적인 계약 결혼 관계였으니 지씨 집안 물건은 정윤슬의 것이 아니었다.엿새째 되는 날 지태일이 돌아왔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걸음도 무거웠다. 그는 느릿느릿 거실에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더니 고개를 등받이에 기대고 팔다리를 쭉 뻗었다. 몹시 지쳐 보였다.소리를 들은 윤슬이 주방에서 나왔다.“태일 오빠, 오셨어요?”지태일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집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순간 움찔했지만 곧 생각이 났는지 대답했다.“그래.”정윤슬은 옅은 회색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매끈하고 흰 팔뚝이 드러났다. 앞치마에 손을 닦은 정윤슬은 현관으로 달려가 남성용 슬리퍼를 가져왔다.정윤슬은 지태일 앞에 슬리퍼를 놓고 쪼그려 앉아 양말을 벗겨 주려 했다.“뭐 하는 거야?”지태일은 황급히 발을 당기고 허리를 세우고 놀란 눈빛으로 정윤슬을 내려다봤다.정윤슬이 고개를 들었다. 숱 많고 검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탓에 잔머리가 통통한 뺨 옆으로 흘러내렸다. 커다란 눈은 맑고 순수했다.“슬리퍼 신으시라고요. 그게 더 편하잖아요.”지태일은 집 안 바닥을 내려다봤다. 먼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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