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111 - Chapter 120

132 Chapters

111화

연백리의 전갈을 받은 진평은 지체하지 않고 암위들을 보냈다.얼마나 말을 재촉해 달려왔는지, 해가 지기도 전에 한 무리의 암위들이 만화각 주변에 도착했다.임주부는 그들이 머물 객잔을 소리 소문 없이 마련했고, 연백리의 지휘 아래 경계 태세도 빈틈없이 갖춰져 갔다.“신기하네요.”“뭐가?”“뭐든 다 시원시원하게 해결해 버리시니까요.”연백리가 피식 웃었다.“당연하지. 표기대장군의 명호를 도박으로 딴 건 아니니까.”“힘드셨겠죠.”“쉽진 않았지.”덤덤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그 말속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설아는 알고 있었다.“정말 고마워요. 그 능력을 저뿐만이 아니라, 이 아이에게도 나눠주고 계시니까요.”“뭐,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연백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설아는 그런 연백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품에 안겨 있는 소령에게 시선을 내렸다.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키워도 될까요.”연백리의 표정도 조금 진지해졌다.“단순하게 생각하면 입 하나 더 느는 게 큰일은 아니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 아비야. 언제든 당당하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니까.”“그렇겠죠. 친부모니까요.”“경북후부에서 키울 수도 없거니와, 우린 더더욱 명분이 없어. 그 자식은 분명 황제께 달려가 엎드려 절을 할 거다. 하나뿐인 딸을 돌려달라고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하겠지.”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어쩌죠.”“양육권을 빼앗아와야지.”“어떻게요?”설아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연백리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내가 뭘 하지 않아도 그놈은 반드시 다시 찾아올 거야.”그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소인배니까.”“그렇다면!”“역공을 해야지.”연백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야.”연백리는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호기롭게 웃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저승사자 같은 그의 모습이 설아에게는 더없이 믿음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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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간밤의 암습은 어린아이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가뜩이나 말수가 적던 아이는 더욱 입을 닫아버렸고, 하루 종일 설아의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게다가 씻기려다 보니 자객의 거친 손길에 온몸에는 시퍼런 멍이 가득했고, 등에 남은 칼자국까지 발견되었다.그 모습을 떠올리자 설아는 가슴 한쪽이 다시 저려왔다.“왕부에 도착하면 바로 의원에게 보여 증상을 기록해야 해.”설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연백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암습이 실패했으니 육위안은 분명 황제께 달려가 자신의 딸이 납치됐다며 돌려달라고 읍소할 거야. 그전에 증거를 갖춰놔야지.”“폐하께서 잘 판단을 해주실까요?”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황제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는 꽤 객관적인 편이야.”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던 연백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다만, 이번 일은 우리와 얽혀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 그래도 친딸에게 칼을 휘두른 놈이라면, 황제도 쉽게 편을 들어주긴 어려울 거야.”설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연백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연각은 원래 냉정한 사람이었다.“저도... 황제 폐하께 알현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겠죠?”연백리가 피식 웃었다.“당연하지.”장난기 어린 눈빛이 설아를 향했다.“그 길로 갇혀서 못 나오는 수가 있어.”“장락사는 당분간 휴점해야겠네요.”설아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겠지.”연백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상황을 봐서 네가 없더라도 문은 열어볼 생각이야. 운수현에도 이미 사람을 보내놨다고 하더군.”“그렇겠네요. 가게 문을 아예 닫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장락사 행수를 보러 온 사람들은 김이 좀 빠지겠지만.”연백리가 피식 웃었다.“알게 뭐람.”설아는 실없는 농담을 하는 연백리를 살짝 흘겨보았다.하지만 그런 모습이 싫기는커녕,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잠시 웃음이 오가던 마차 안에 다시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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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경북후부는 진명후부와 대대로 친분이 깊은 집안이옵니다. 그 인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신의 혼사였지요. 다만, 전처가 젖먹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경북후부의 동의만 있다면 동생이 들어와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후부인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셨고, 신 또한 충분한 보상을 해드렸습니다.”“흥!”하지만 연각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전처가 죽자마자 백일도 지나기 전에 본처를 들인 것으로 아는데.”연각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육위안을 내려다보았다.“왜? 새로 들어온 진명후부인은 전처가 낳은 자식은 꼴도 보기 싫다던가?”“그, 그게 아니옵고……”육위안이 다급히 입을 열려 했지만,연각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됐다.”“이 일은 경무왕을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잠시 생각하던 연각이 덧붙였다.“아, 소설아도 따로 부르도록 하게.”“예, 폐하.”총관태감 서충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삼 일이 지난 뒤.황제 연각의 승명전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왜 이렇게 사람들로 가득한 건가?”조회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승명전에 들어선 연각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모두 진명후를 따라온 사람들입니다.”곁을 지키던 서공공이 조용히 귀띔했다.“뭐 대단한 일이라고 온갖 친척들을 죄다 끌고 왔단 말인가!”연각이 인상을 찌푸렸다.“썩 모두 물러가게!”“폐하, 모두 저의 진실을 증언해 줄 사람들이옵니다.”육위안이 다급히 사정했지만, 연각의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진명후는 편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말도 못 하나?”“그, 그게……”황제의 차갑게 내려꽂히는 눈총을 견디지 못한 육위안은 결국 함께 온 사람들을 모두 물릴 수밖에 없었다.웅성거리며 승명전을 빠져나가는 사람들.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각이 혀를 차며 말했다.“직접 봐달라고 사정을 해서 기회를 줬더니, 일을 이토록 번잡하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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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폐하, 신녀는 진명후부의 평처로 들어가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점포를 차리고 독립하여 가주가 된 지 오래이니, 후부의 결정에 따를 이유 또한 없습니다. 부끄럽사오나, 조카인 육소령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그렇다면, 왜 경북후부인이 육소령을 소행수에게 데려갔다고 생각하지?”연각이 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정을 앞세워 신녀가 평처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어린 조카를 대신 키워달라, 이 말인가?”연각이 코웃음을 치며 육위안을 돌아보았다.육위안은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어린 것이 일찍 어미를 잃어서 그런지 사람을 따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아 키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경북후부인이 이모가 키우면 어떻겠냐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반가운 제안이었지요.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경북후부의 소문난 재녀들을 모두 아내로 들이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육위안은 제법 으쓱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연백리와 연각.두 남자의 눈에서 새파랗게 불꽃이 튀는 것은 거의 동시에 발생한 일이었다.연백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연각이 차가운 냉소를 날렸다.“천박하기 그지없군.”“서충!”“예, 폐하.”“저자의 입을 매우 쳐라!”그러자 서공공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짧은 채찍을 꺼내더니, 뒷걸음질 치는 육위안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후려쳤다.쫘악!“아아악!”꽈당!채찍을 피하려던 육위안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머리에 흰눈이 내릴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그는 강골의 총관 태감이었다.단 한 번의 채찍질이었을 뿐인데도 육위안의 입술은 단번에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육위안은 입을 감싸 쥔 채 신음만 흘릴 뿐,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황제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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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그때, 연백리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황후마마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담담하게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아무리 천륜이라고 한들, 먼저 칼을 들이대며 그 인연을 끊으려 한 것이 진명후인데, 아이를 다시 그 죽음의 소굴로 돌려보내란 말씀이십니까?”“죽음의 소굴이라뇨?”초영황후의 눈썹이 가늘게 치켜올라갔다.“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경무왕.”쌀쌀한 목소리가 승명전 안을 울렸다.“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진명후부는 그 아이가 태어난 집입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그러자, 이번엔 소설아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엎드렸다.“제 조카 소령이는, 친언니 소설영이 진명후부로 시집가서 일 년 만에 간절히 기도하며 어렵게 낳은 딸입니다.”설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승명전 안에 울려 퍼졌다.“폐하, 세상에 그토록 어렵게 얻은 자식을 두고 눈을 감고 싶은 어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니가 요절한 것은 진명후부의 가혹한 구박과 멸시 때문이었습니다. 시댁의 모진 핍박에 병이 들어 끝내 죽고 만 것입니다.”설아는 바닥을 짚은 두 손을 파르르 떨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소령이는 열 달도 채우지 못하고 일찍 태어났습니다. 너무 작고 약해서 다들 살아남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오죽하면 친부라는 자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아, 외할머니인 경북후부인께서 가엾은 외손주의 이름을 겨우 지어주셨겠습니까.”잠시 숨을 삼킨 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진명후부에서 소령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버려진 천덕꾸러기였습니다.”황후의 안색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설아는 굴하지 않았다.애끊는 심정으로 연각을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히 호소했다.“그렇게 버려두었던 아이인데, 이제 와 핏줄을 운운하며 데려가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자가 한밤중에 자객들을 보내 등에 칼침을 놓겠습니까?”설아는 끝내 참아왔던 설움을 삼키지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폐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목이 메어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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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하지만, 연각은 경무왕의 편을 드는 초영황후를 차갑게 쏘아보았다.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황후는 그 서늘한 눈길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연각은 한동안 말없이 초영황후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연백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짐과 함께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처자를 이렇게 경무왕에게 보내는 것은 법도와 도리에 맞지 않소. 또한, 모후이신 현정태후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니, 조금만 더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폐하!”연백리는 도저히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당분간 이 일은 다시 거론하지 마시지요.”연각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황명이오.”마치 경고라도 하는 듯, 스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승명전 안을 무겁게 울렸다.“다만.”잠시 뜸을 들인 연각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이를 진명후부로 돌려보내는 것은 다소 잔인한 처사로 보이니, 차라리 그 아이는 황궁에서 맡아 키우는 것으로 하겠소.”가만히 옆에 서 있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게 된 초영황후는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폐하!”당황한 목소리로 연각을 불러보았지만, 연각은 요지부동이었다.“황후께서 황손을 낳기 전 미리 연습한다 생각하고, 아이를 잘 맡아 키워보시오. 딸아이니 크게 손이 가는 일도 없을 것이오.”연각은 말을 마치자 더 이상 이 일로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는 듯,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모두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이에 총관태감이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묵직한 목소리로 승명전 안에 울려 퍼지도록 크게 외쳤다.“폐하께서 퇴선을 명하셨사오니, 모두 물러가 예를 지키십시오!”연백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던 설아를 조심스레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설아는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아이도 지키지 못했고, 혼인도 허락받지 못했다.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셈이었다.하지만, 아이만큼은 진명후부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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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대신, 제가 출발하자마자 빠른 말을 달려 황후마마께 전갈을 보내세요. 제가 입궁한다고요.”설아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그렇게 되면 제가 폐하와 단둘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황후마마께서 직접 건너오실 것입니다.”연백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흠. 꽤 그럴싸한 견제책이군. 쓸만하겠어.”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연백리는 마침내 설아의 뜻을 받아들였다.그렇게 설아는 황궁을 향해 길을 나섰다.연백리는 설아가 부탁한 대로 곧장 초영황후에게 전갈을 보냈고, 황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를 빠드득 갈았다.“이 망할 계집애가 또 폐하를 만나러 온단 말인가! 치우면 또 찾아오고, 치우면 또 찾아오고! 이쯤 되면 정말 연분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분을 참지 못하는 황후를 보며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게 아니오라, 일전에 폐하께서 명하셨던 편복을 진상하러 오는 것이라 합니다.”하지만, 황후의 귀에는 그 말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지겨워! 정말 치가 떨리게 지겨워!”초영황후는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바닥에 집어던지고, 닥치는 대로 찢어 던지며 악에 받쳐 몸부림을 쳤다.하지만, 그건 설아도 마찬가지였다.죽기보다도 더 싫은 황궁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된 이유는 오직 소령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설아는 태감의 뒤를 따라 승명전으로 들어가 연각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맞잡아 예를 올렸다.“오호라. 이토록 빨리 옷을 지어 올리다니. 올해 안에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말이야.”연각은 설아가 지어 올린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나는 좀 더 밝은색이 잘 어울리지. 그때 보았던 옷보다 훨씬 환하게 지어왔군. 광택도 한층 살아난 것 같고.”연각은 완성된 옷과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비춰보며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니까.”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아는 머리를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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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연각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키고 있었다.‘도대체 황후는 언제 도착하는 거지?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설아는 더 이상 연각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입맞춤 한 번에 이렇게 힘들게 굴지 말라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연각은 피식 웃으며 설아를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내가 한 번이라도 바라봐 주길 바라는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네가 선택받았는데도,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걸 모르네. 응?”연각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설아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그 순간.“폐하!”승명전 안에 쨍하니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황급히 들어섰다.초영황후였다.그녀는 분노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지만, 결국 가장 절묘한 순간 설아를 구해내고 말았다.“또야?”연각은 짜증이 가득 밴 얼굴로 황후를 노려보았다.“일부러 노리고 지금 들어와 방해하는 건가?”“폐하!”“밖에서 내가 하는 말을 죄다 듣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들어와 맥을 끊고, 꼬투리를 잡아 나를 닦달하려고?”“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아니긴 뭐가 아니야!”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연각이 불같이 고함을 질렀다.황제의 보기 드문 진노에 초영황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각을 지키는 길이었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그 순간, 연각의 관심이 황후에게로 쏠리자, 이때다 싶었던 설아는 그의 품을 뿌리치고 황후의 뒤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초영황후는 자신을 방패막이 삼아 뒤로 숨는 설아를 보자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매번 이런 식으로 교활하게 자신을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다.눈앞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원한다면 셋이서 사랑을 나눌 수도 있어.”“폐,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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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연백리가 소설아를 데리고 황궁을 떠난 뒤, 며칠 동안 황궁에는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연각은 매일 아침 조회에만 얼굴을 비칠 뿐, 조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승명전으로 돌아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 담을 쌓기라도 한 사람처럼, 승명전에 칩거한 채 조용히 지내는 나날이 이어졌다.그런 연각의 심기를 가장 예민하게 살피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현정태후였다.진명후부 사건 이후, 태후는 아들인 연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초영황후를 통해 연각의 동태를 알아보려 했지만, 황후가 태후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태후가 승명전에 출입 금지를 당한 것이야 저지른 짓이 있으니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기까지 덩달아 도매금에 출입 금지를 당해버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황후는 분풀이를 할 데도 찾지 못한 채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그러니 더 이상 황후를 통해 연각의 소식을 알아볼 길도 막혀버렸다.자의궁에 홀로 남겨진 현정태후는 애가 타는 속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승명전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누구 하나 연각의 근황을 전해주는 사람은 없었다.“아무리 제 뜻대로 안 됐기로서니, 친어미에게 이렇게까지 모질게 굴 수가 있단 말이냐! 하필 제 아비를 닮아서는!”현정태후는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분통을 터뜨렸다.그러던 그때였다.며칠째 승명전에 틀어박혀 지내던 연각이 뜻밖에도 자의궁을 찾아온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방문에 현정태후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황상, 드디어 이 어미가 생각이 난 것이오?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황상이 이 어미를 저버릴 리가 없지요.”현정태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연각은 그런 태후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이내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모후. 제가 이번 일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그게 무엇입니까?”“적어도 모후와 저는 둘 다 소설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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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뭐라고요? 대연제국으로 시집을 가라고요?”한낮의 열기가 왕궁의 대리석 바닥을 뜨겁게 달구고 있던 오후.대막국의 공주, 완안아란은 후원에서 대막왕 내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대막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순간, 완안아란은 입을 딱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아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대막왕의 표정에서는 조금도 뜻을 거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대막국에서 갇혀 사는 것보다야 더 큰 나라로 시집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이미 목용 공자와 정혼했잖아요?”“대막국의 재상 집안보다 대연제국 황궁으로 시집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저더러 그 재수 없는 황제의 후궁이라도 되라는 말씀이세요?”“후궁이 되면 더더욱 좋겠지. 지금 대연제국은 황손을 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말이다.”“부왕!”완안아란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끝내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공주! 감히 어디서 언성을 높이느냐!”바로 어머니인 대막왕비에게 더 큰 호통을 듣고 말았다.“공주로 태어났으면 애초에 제 뜻대로 혼인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그럼, 뭐 하러 저를 목용가와 정혼시킨 거예요?”“그거야, 그때는 대연제국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대막왕비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지금은 무엇 때문에 저를 부르는 건데요?”완안아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황제가 아니다.”“네?”“네 국혼 상대는 황제의 배다른 형인 경무왕이다.”대막왕은 딸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경무왕이라고요?”“그래.”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라는 말만으로도 기가 막힐 판인데, 하물며 배다른 형제라니.“설마, 국경을 떠돌며 토벌을 한다는 그 전쟁귀 경무왕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왜 아니겠느냐? 경무왕이 둘이라도 된다더냐?”“말도 안 돼요……”완안아란은 맥이 풀린 듯 옆으로 털썩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이 왕궁에서 공주로 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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