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Bab 121 - Bab 130

132 Bab

121화

“어디로 가는 거지?”완안아란은 기척도 없이 앞서 걸어가는 진상궁의 등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하지만, 진상궁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그렇게 처음 보는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이나 따라가자, 짙은 녹음에 둘러싸인 아담한 처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지요.”진상궁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아란을 안으로 청했다.완안아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처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문을 들어서는 순간, 짙은 풀 향기가 먼저 코끝을 감싸안았다. 그 사이로 은은한 사향과 침향이 뒤섞여 흘러나와,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공간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진상궁은 아직도 얼굴에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완안아란을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며 의자에 앉혔다.그러고는 작은 술병 하나를 가져와 은잔에 투명한 액체를 찰랑이도록 따른 뒤, 조용히 아란의 앞으로 밀어주었다.향긋하면서도 코끝을 알싸하게 파고드는 향에 완안아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게 무엇이냐?”“기분을 풀어주면서 몸의 이완을 돕는 술이옵니다, 공주마마.”아란은 잔을 든 채 당황스러운 눈으로 진상궁을 올려다보았다.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뜨거운 정오의 햇살이 가득 들이치고 있었다.“밤도 아니고, 이리 훤한 대낮에 왜 이런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냐? 난 낮술 따위는 마셔본 적이 없다.”불안함이 묻어나는 당돌한 반문에 진상궁은 소리 없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그녀는 아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공주마마, 대연의 황제는 낮과 밤을 따져서 여인을 품지 않사옵니다.”“……!”“그자가 원한다면, 그때가 언제든 사냥개처럼 달려들게 만들어야 하지요. 낮이든 밤이든, 황제의 눈길이 마마에게 머무는 그 찰나가 바로 매혹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진상궁의 목소리가 뱀처럼 매끄럽게 아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란의 손에 들린 잔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황제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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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설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불안만 더할 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입을 다물었다.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걸까.전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각의 음흉함과 집착이 설아의 불안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 연각이 기다리고 있는 황궁으로 향했다.거대한 궁궐은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승명전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웅장한 대전의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 연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오, 황형. 그리고 소행수. 어서 오시오.”연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부드러운 걸음으로 설아에게 다가왔다.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적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급히 부르게 되었군. 그래도 불만스러운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연백리가 담담히 대답하며 설아를 자신의 뒤로 살짝 물렸다.“아무튼 좋습니다. 오늘 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를 말해 주지요. 일전에 소행수가 내게 지어 올린 편복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이가 있어서 말이오. 한 벌 더 선물하고 싶어 이렇게 소개해 주려 하오.”연백리의 얼굴이 불길한 예감으로 서서히 굳어지려던 바로 그때.연각이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아란공주.”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풍 너머에 가려져 있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즐겨 입는 대연의 여인들과 달리, 몸의 곡선을 따라 유연하게 감기는 짙은 자청색 의복은 가느다란 은실 띠로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어 그녀의 늘씬한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마를 장식한 정교한 보석 장식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하게 흔들렸고, 단정하게 좁아지는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손목은 눈부실 만큼 희고 고왔다.오뚝한 콧날과 이국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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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그러자 연각이 흥미롭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아란공주를 바라보았다.“호오? 아주 자신만만하군. 그대의 치마폭에 과연 저 대단한 경무왕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기대해 보겠소.”하지만 아란공주는 교태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나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연각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꼭… 경무왕 전하뿐이겠습니까?”순간, 연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이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아란공주.”연각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승명전 안을 조용히 울렸다.“내가 조언 하나 해주지.”그는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가 아란공주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한 채 낮게 속삭였다.“난 도발하는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내 발치에 쓰러져 애원하는 쪽에 더 흥미가 있지. 그러니……”연각의 손끝이 아란공주의 길게 땋은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 손길은 자연스레 목덜미를 따라 미끄러져 내렸고, 아란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날 유혹하고 싶다면 방법을 달리하는 게 좋을걸. 차라리 벗은 몸으로 내 욕탕에 숨어드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어.”연각은 냉소 어린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아란공주의 귓가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승명전을 빠져나갔다.***경무왕부로 돌아가는 마차 안의 공기는 우울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가슴을 눌러 설아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이내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바라보았다.그래. 욕심이었겠지.내가 꿈을 꾼 거야.이제는 그 터무니없는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된 것뿐이야.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내가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한참의 침묵 끝에 연백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너무 애쓰지 말아요. 순리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이치인 것을요.”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백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가 순리고 이치라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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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전장에선 무서울 게 없다던 천하의 연백리도 더는 소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엔 내가 황제가 되지 못한 게 문제였군.”연백리는 허탈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설아는 연백리의 두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며 말했다.“까맣게 타고 그을려 거친 삼베처럼 얼굴이 상해도… 그래도 저를 원하신다면 찾아오세요. 이 파도가 모두 지나가고, 다시 잔잔해진 다음에요.”설아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려 보였지만, 그 미소는 애처로울 만큼 쓸쓸했다.“내가 가지 않으면… 원망할 건가?”“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왕야께서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데요. 전 늘 왕야께서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거예요.”설아는 목이 메어 오는 것을 애써 삼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마차는 장락사 앞에 멈춰 섰다.연백리는 붐비는 사람들 틈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소설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라면… 내 마음대로 하면 되지.’늘 마음 가는 대로 살아오지 않았던가.언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며 살아왔다.그런데 이제는…….무엇이 되더라도, 한 번쯤은 끝까지 발악해 보고 싶었다.“모두 승경각으로 모이도록 하라.”왕부로 돌아온 연백리는 마차에서 내리며 마중 나온 하인에게 명했다. “예, 왕야.”공손히 고개를 숙인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더니 바람처럼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경각에는 네 사람이 모두 모였다.연백리는 한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총각 귀신 좀 면해보려는데,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아니라 황제겠지요.”설연목이 슬쩍 말을 보탰다. “그래, 그러니까 그 개만도 못한 XX가 방해하는 것 좀 막아보라고!”연백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소낭자께서 여지를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꽤 희망적이지요.”설연목은 익숙하다는 듯 조금도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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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목용덕은 아란공주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같은 세도가의 집안과 정략혼을 맺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지요. 결국 왕위라는 것도 세도가들의 비호를 등에 업어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니까요.”설연목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듯 공손히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이 국혼은 목용덕이 추진했다는 말인가?”“은밀히 사람을 보내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호시와 각창을 이렇게 순순히 열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그렇군. 목용덕은 공주를 치우는 동시에 호시와 각창까지 얻고, 연각은 나를 치워버릴 수 있으니.”“이런 계책은 태후마마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어쩐지, 순순히 보내준다 했지.”연백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다행히, 이 계책에서 손해만 본 억울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목용현 말인가?”“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이번 일의 열쇠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무슨 이유로?”“아란공주와의 정혼을 가장 강력하게 원했던 사람이 바로 목용현이라고 합니다.”설연목은 중요한 대목이라는 듯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정이 깊었다고 합니다.”“재상의 아들이면서도 순정을 품고 있었군. 외아들로 곱게 자란 탓인가 보지.”연백리는 코웃음을 치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선은 이자를 데려와야 아란공주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을 겁니다.”“무슨 근거로? 대막왕이 정한 국혼을 일개 공자가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그러니, 함정을 파야지요.”설연목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저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공주가 폐하의 품에 안겨 버리면 저희로서도 손쓸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주군께 낚시를 던진다고 한다면,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셈이지요.”“그곳에 목용현을 던져 넣는다?”“바로 그렇습니다.”“그런데, 꼭 내가 가야 하나?”“이런 일을 간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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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이윽고 대막국의 하늘 위로 차가운 달이 떠오르고, 낮 동안의 열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번잡하던 수도의 거리가 차츰 고요한 침묵에 잠기자, 연백리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재상가의 담장은 성벽을 방불케 할 만큼 높았고,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을 든 사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어 경비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하지만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시산혈해를 헤치고 성을 함락시켜 온 연백리에게 이 정도 경계는 결코 높은 벽이 아니었다.사병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찰나, 연백리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높은 돌담을 가볍게 딛고 솟아오른 그는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와 한 장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경공이었다.연백리는 낮에 미리 살펴두었던 재상가의 구조를 떠올리며, 외아들 목용현의 처소가 있는 깊숙한 안채를 향해 어둠을 틈타 스며들었다.경비병들의 그림자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 그는 몸을 날려 어두운 정원의 거목 위로 올라섰다. 울창한 가지와 잎사귀가 그의 모습을 완벽하게 감추었다.잠시 숨을 죽인 채 안을 살피던 연백리의 시선 끝으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별채가 들어왔다.창호지 너머로 비친 그림자의 주인은 목용현이었다.그는 밤이 깊었음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은은한 묵향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그때였다.거칠고 차가운 밤바람이 문짝을 흔들자 촛불이 크게 일렁였고, 책상 위 종이들이 부산스럽게 흩날렸다.“밤바람이 제법 거칠군.”목용현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창가로 다가가 문을 단단히 닫았다.몸을 돌려 다시 자리로 향하려던 순간.서늘한 살기와 함께 차가운 칼날 하나가 목용현의 목덜미에 닿았다.“누구냐.”목용현은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글쎄.”“이곳이 어딘 줄 알고 들어왔다면, 그리 여유로울 처지는 아닐 텐데.”“그건 재상 나리의 외아들인 목용 공자의 생각일 뿐이고.”연백리가 코웃음을 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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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쳇!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금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던 완안아란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채 길게 하품을 했다.“도대체 폐하는 언제 나오는 거야.”아란은 괜스레 발끝에 걸리는 풀꽃을 툭 차며 투덜거렸다.“여기 산책을 자주 나온다며!”뒤를 따르던 상궁들을 돌아본 아란이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그, 그게…… 저희도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라…….”대막국에서부터 따라온 상궁들은 대연의 사정에 밝지 못해 간자들이 전해 오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황궁은 간자를 심어 두기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 때문에 아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자세히 알아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거냐고! 짜증 나!”급기야 아란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시녀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바로 그때, 그녀를 꾸짖는 차갑고도 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감히 누가 금원에서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가!”고개를 돌리자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초영황후가 상궁과 시녀들을 거느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아란공주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화, 황후마마.”아란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도대체 아란공주는 예까지 무슨 일인가?”“아, 그게… 중화궁에만 머물다 보니, 너무 답답하여……”“이곳은 대연제국 황제폐하께서 거니시는 승명전의 금원이오. 폐하의 윤허 없이는 감히 드나들 수 없는 곳인데, 대막국에서는 이런 예법조차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아란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잘못한 것은 본인이었으니 함부로 대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속살을 드러낸 차림으로 금원을 돌아다니다니…….”초영황후의 두 눈에 새파란 불꽃이 일렁였다.“공주는 경무왕과 국혼을 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폐하의 후궁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초영황후의 날카로운 말은 아란의 정곡을 정확히 찔렀다.동시에 가장 감추고 싶었던 속내마저 들킨 듯한 수치심이 그녀를 파고들었다.“뭐라고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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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아란은 당돌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좀처럼 입을 다물 줄 몰랐다.“아란공주.”“예, 폐하.”아란은 자신을 불러주는 연각을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황제의 여인이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네.”“예?”“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려면 황제의 여인이 될 수 없어.”“하지만 금원을 거닐었다고 황후마마께서 저를 쫓아내셨단 말이에요! 중화궁에서 나가 화양대장공주부로 거처를 옮기라고 명하셨다고요!”“잘했군.”“폐하! 전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중화궁에 머물고 싶어요!”아란은 말릴 틈도 없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하아.”연각은 서첩을 내려놓더니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렀다.“황후의 명은 곧 내 명이다. 초영황후는 대연의 국모이니, 아란공주도 그 명을 따라야 할 것이야.”“폐하, 저는!”“서충.”연각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아란의 말을 끊었다.“마마, 이만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시지요.”서공공이 공손히 한 손을 내밀며 아란을 안내했다.아란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연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왕부로 시집가기 전이니 옷차림에는 조금 더 신경을 쓰시오.”아란이 뒤를 돌아보자 연각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웃었다.“새 신부의 속살을 내가 먼저 봤다는 소문은 듣고 싶지 않군.”아란은 저 능글맞은 황제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웃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서공공이 다시 한번 공손히 재촉했다.“마마, 이만 나가시지요.”하는 수없이 아란은 원망 어린 눈빛만 남긴 채 승명전을 나섰다.연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머리만 박으면 다 숨은 줄 아는 꿩 새끼 같군. 저렇게 대놓고 안달을 부리니 황후가 금원까지 찾아오는 것 아닌가.”잠시 입가에 웃음이 머물렀다.“재밌어. 생각보다 색다른 맛이 있군. 아주 멍청한 백치미가.”연각의 눈빛에 묘한 호기심이 스쳤다.“밤에는 또 어떠려나.”***태어나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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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대장공주는 순진한 아란의 질문에 혀를 차고 말았다.“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네 마음이 정해졌다면, 그 길로 밀고 나가야지.”“전… 어떤 길이 더 나은지 모르겠어요.”아란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구나. 괜히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 생각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려무나.”화양 대장공주는 더는 이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예…….”아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황제폐하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공주부로 초대해야겠구나.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이도 저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네? 왜요?”“경무왕이 너와 혼인할 뜻이 없는데, 기다린다고 국혼이 성사되겠느냐?”“하지만 이미 성지가 내려졌고, 대막국에서도 호시와 각창을 준비하느라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대막국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서두르는 것이지. 설령 이 국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대막국은 잃을 것이 없다. 너야 돌아가 정혼자든, 다른 이와든 다시 혼인하면 그만 아니냐?”아란은 대장공주의 현실적인 말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정신 바짝 차리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의 품에 안겨야 한다.”하지만 아란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아, 그리고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대장공주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폐하께서는 선황폐하를 닮아 성정이 차갑고, 매사 독단적이시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시고, 감히 정면에서 맞서는 자를 가장 싫어하시니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하지만 제가 다가가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으시는걸요.”아란은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쯧쯧. 대체 친정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온 것이냐. 또 쓸데없는 비약이나 쥐여 주고, 교태나 부리는 얄팍한 재주만 가르쳐 보낸 것이더냐?”대장공주의 신랄한 말에 아란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현숙한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나 까는 네 어미의 말은 잊어버리거라. 대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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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화양 대장공주는 시침을 떼고 사가 들린 척 헛기침을 하면서 주섬주섬 일어나 떠날 채비를 차렸다. “밖에 오래 나와 있었더니 목에 무리가 오는가 봅니다. 이제 폐하의 시간을 더 빼앗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겠지요. 이만 돌아가 연회 준비를 해야겠습니다.”화양 대장공주는 안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연각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돌아가 쉬십시오.”연각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걸고 그녀를 배웅했다.화양 대장공주의 모습이 승명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빌어먹을 늙은 여우 같으니.”연각은 낮게 이를 갈았다.“감히 누구를 떠보며 사람을 쥐락펴락하려 드는 것이냐.”자꾸만 자신이 짜 놓은 판이 어긋나는 상황에 연각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맛있는 요리일수록 급하게 주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지. 천천히, 여유 있게 조금씩 음미하는 것이 천하일미를 대하는 태도렸다.’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억지로 유지하던 차가운 미소도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수려한 얼굴 위로 잔혹한 본성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마치 오랫동안 가면 뒤에 숨겨 두었던 추악한 본색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틀 뒤.만개한 보름달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가운데, 황궁 못지않게 웅장한 화양 대장공주부의 후원은 화려한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연회를 앞두고 비단 장막을 덧대고 향기로운 술과 진귀한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오갔다.화양 대장공주는 본채 난간에 기대어 활기로 가득한 후원의 풍경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자신의 뜻대로 빈틈없이 움직이는 공주부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반면, 그 뒤에 서 있던 아란공주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연의 방식대로 눈부시게 치장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오늘 그녀에게 허락된 역할은 단 하나.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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