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Kabanata 81 - Kabanata 90

101 Kabanata

81화

가회안의 표정에는 여유로움과 함께 확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나설 것입니다.”가회안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보기엔 그 계집아이도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경무왕이 직접 포목점을 차려주고, 사람을 붙여주고, 뒤를 봐준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지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그런 사람이 황궁으로 끌려와 폐하의 후궁이 되는 것을 경무왕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지 않겠습니까.”초영황후의 얼굴에도 조금씩 안도감이 번지기 시작했다.“그렇다면......!”“예.”가회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일은 우리가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경무왕이 먼저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초영황후가 조심스럽게 묻자 가회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사천대에 길일을 요청하고 기다리십시오. 하필 이번 달이 갑오월이니, 폐하께 길한 날을 잡으려면 적어도 석 달은 지나야 할 것입니다.”“석 달이요?”초영황후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하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요.”“예. 그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가회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경무왕에게는 제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언질을 해두겠습니다.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니, 뜻만 전해도 알아들을 것입니다.”“정말 그럴까요?”초영황후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혹시라도 실패하면 어떡하지요?”“그렇다 해도 차선책은 있습니다.”가회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아마 그전에 해결될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다만…….”“왜 그러세요?”황후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가회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 계집아이의 미모가 생각보다 뛰어난 모양입니다. 요즘 사람들 입에 제법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폐하께서 괜한 흥미를 가지지 않으시기만을 바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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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설아를 언급하는 설연목의 눈가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제는 거의 왕부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그러나 송부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그녀는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여인의 마음을 얻는 일도 본디 어려운 법인데, 그 아가씨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지 않습니까.”송부인의 목소리에 근심이 스며들었다.“소낭자 본인의 마음도 마음입니다만, 경북후부와 얽힌 일도 있고, 황궁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앞으로 꽤 골머리를 앓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특히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구중심처에 있는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단순히 다녀간 정도가 아니었다.설아를 향한 관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설연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호사다마라 하지 않습니까.”그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좋은 분을 모시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련도 함께 따라오는 법이지요. 게다가 벌써부터 황궁의 시선까지 끌고 있으니, 오히려 그 자체로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뜻 아니겠습니까.”“그 말씀은 맞습니다만…….”“무엇보다 우리 왕야께서 마음을 두신 분입니다.”설연목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분께서 평범한 여인을 눈여겨보실 리가 없지요.”설집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은은하게 퍼지는 차향을 음미하고 있었다.그러던 그때.평소와 달리 심각하게 굳은 얼굴의 진평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두 분께서 이것을 먼저 보셔야 할 듯합니다.”그의 손에는 검은 철패 하나가 들려 있었다.검은 철 위에 가느다란 은실로 문양을 새겨 넣은 은입사 철패.그것을 본 순간 송부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이것은 헌국공부의 철패가 아닙니까!”놀란 그녀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은입사 철패는 사용할 수 있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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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진평의 물음에 설집사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가능성은 낮네.”그는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만약 폐하께서 직접 마음을 정하고 벌이신 일이라면, 포목점에 다녀오신 뒤 궁으로 돌아가신 다음에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야 하네. 하지만 이 일은 폐하께서 포목점으로 출발하신 뒤에 벌어졌지.”“아...!”진평의 눈빛이 번뜩였다.설집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즉, 누군가 폐하의 행적을 빌미 삼아 서둘러 일을 벌였다는 뜻일세. 황후마마께서 반대하고, 가태부께서 은밀히 경고를 보내올 정도라면 황후마마조차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분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남지 않지.”송부인과 진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설집사의 추리에는 빈틈이 없었다.“이제 남은 것은 왕야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는 것뿐이겠군요.”송부인이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설집사는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그렇지요.”그는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해결할 방도는 있으십니까?”진평의 질문에 설집사는 빙그레 웃었다.“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봄세.”그 말에 진평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저 얼굴은 분명 이미 무언가를 생각해 둔 사람의 얼굴이었다.벌써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며 봐 온 설집사였다. 저렇게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면 대개는 이미 서너 가지 대책쯤 마련해 둔 뒤였다.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얄밉다면 얄미운 노릇이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진평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방 안에 남은 송부인은 다시 한번 은입사 철패를 내려다보았다.검은 철 위에 새겨진 은빛 문양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왕야께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걱정이 한 겹 더해진 목소리에 설집사는 피식 웃었다.“소낭자의 이름까지 들으셨는데 어찌 서두르지 않으시겠습니까.”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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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서둘러 서신을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연백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쾅!그는 결국 편지와 함께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묵직한 소리가 승경각 안을 뒤흔들었다.“연각, 이 애송이가 드디어 미쳐버린 모양이군. 감히 나에게 이런 도발을 하다니!”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연백리의 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도드라졌다.그러나 설집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애석하게도 폐하께서 이번 난리의 주모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뭐?”“정확히는 원인 제공자 정도겠지요.”연백리의 살기등등한 시선이 설집사에게 꽂혔다.“근거는?”설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서신을 보낸 곳은 헌국공부입니다. 바로 초영황후의 친정이지요.”그는 탁자 위의 은입사 철패를 가볍게 두드렸다.“즉,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정말로 소낭자를 후궁으로 들이기로 마음먹고 친히 성지를 내리셨다면, 황후마마께서 감히 이런 방식으로 움직일 이유도 없었겠지요.”“그렇다면.”연백리가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었다.“이 일을 벌인 주동자는 그 멍청한 태후란 말인가?”설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보셨습니다.”연백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이내 서신을 다시 내려다본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어처구니가 없군.”비웃음과 황당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평생 내 어머니를 이기지 못해 발악을 하더니, 이제는 그 그림자에까지 시비를 걸고 있단 말이지.”그는 서신을 탁자 위에 툭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나이를 어디로 처먹은 건지 모르겠어.”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연백리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설집사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연각이 포목점에 나타난 이유는?”“호기심 정도였을 겁니다.”설집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지금껏 측비 하나 들이지 않고 홀로 계신 왕야께서 직접 신경을 쓰는 처자 아니겠습니까. 평민도 아니고 경북후부의 둘째 따님이라면 한 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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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설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도 직접 움직이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왕야의 손을 빌려 가장 깔끔한 방법으로 처리하고 싶은 것이겠지요.”“그렇다면 우리도 최선을 다해줘야겠군.”연백리는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이 사실을 각궁의 외척들에게 모두 알리도록 하라. 당장 상소문을 올리게 해.”그리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오늘 가장 먼저 상소문을 올릴 것이다.”“명 받들겠습니다.”설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승경각 안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진 가운데, 연백리는 문득 피식 웃음을 흘렸다.“연각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후궁들이 뒤통수를 맞는 표정을 직접 봐야 하는데 말이야.”그는 혀를 차며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오직 황상의 총애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정작 자신의 차례가 오기도 전에 새로운 꽃을 꺾겠다고 먼 길을 마다않고 나서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게 생겼으니.”송부인은 애써 웃음을 참았고, 설집사는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하지만 연백리의 표정은 금세 냉혹하게 돌변했다.“그런데 말이야.”연백리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그게 내 꽃이면 안 되지.”순간 연백리의 두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이 버릇없는 자식을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어.”서신을 움켜쥔 그의 주먹에 뼈마디가 희게 질리더니,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파사삭.그 서슬에 손안에 구겨져 있던 서신이 버티지 못하고 탁자 위로 잘게 부서져 내렸다.마치 누군가의 목을 비틀어 꺾기라도 한 것인 양, 승경각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향이 정해지고 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설집사는 곧장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했고, 연백리는 몇 군데 문구만 수정한 뒤 재가를 내렸다. 왕부의 인장이 찍히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전령이 가장 빠른 말을 타고 황궁을 향해 달려 나갔다.그렇게 통정원에 접수된 상소문은 여러 절차를 거쳐 다음 날 새벽 승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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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황후를 보면 가끔 이 나라의 황제가 누구인지 헷갈리곤 한다니까.”연각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내가 궁을 비운 그 잠시를 못 참아서 친히 내 후궁까지 점지해 두셨으니 말이야. 드넓은 은덕에 황공하여 내 어찌 황후의 얼굴을 똑바로 보겠소?”그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대체 그 넓고 기특한 혜안은 어디서 배워온 걸까? 이것도 헌국공부에서 배워온 가르침인가?”연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차갑게 내뱉었다.초영황후는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더 이상 시치미를 떼고 버틸 상황이 아니었다.그녀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바닥에 엎드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폐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떨리는 목소리가 내전에 울렸다.“신첩이 어찌 폐하의 후궁을 멋대로 들이겠다고 결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아, 황후가 그런 게 아니다?”연각은 헛웃음을 흘렸다.“그럼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설마 모후께 떠미는 것은 아니겠지?”“폐하!”초영황후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제가 태후마마의 명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겠사옵니까!”“정신 나간 짓이라......”연각의 눈썹이 비틀리듯 치켜 올라갔다.“그렇다면 모후께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명하시는데도, 직언은 못 할지언정 거들기까지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말인가?”초영황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억울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분명 자신은 어떻게든 일을 수습해 보려 했건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질책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변명할 때가 아니었다.무슨 말을 하든 연각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초영황후는 끝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폐하, 부디 태후마마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신첩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옵소서.”“아하.”연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황후는 모후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며느리 노릇을 하고.”그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나는 부제 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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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연각은 한동안 태후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다과상 위로 내던졌다.탁!상소문이 찻잔 옆으로 굴러떨어지며 겨우 멈추었다.“황상! 이게 무슨 짓입니까?”태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상소문부터 읽어보시지요.”연각은 차가운 눈빛으로 태후를 내려다보았다.“모후께서 제게 무슨 짓을 하셨는지 직접 확인하시란 말입니다!”현정태후는 찻물이 튄 상소문을 집어 들었다.대충 넘기려던 얼굴이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미묘하게 굳었다.“이것은...... 경무왕?”“모후께서는 늘 선황후 타령을 하셨지요.”연각은 냉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평생 그 여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든 지워버리려고 애쓰셨지만, 어쨌든 죽은 사람 아닙니까?”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태후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지만, 연각은 멈추지 않았다.“그런데 저는 다르단 말입니다.”연각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달라요.”그는 태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선황후의 아들인 경무왕은 살아 있으니까요.”그는 태후가 들고 있는 상소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그래서, 이렇게 보시는 것처럼 제게 상소문을 들이밀면서 기어오르고 있는 겁니다.”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의궁 안을 울렸다.“왜 저 자식이 기어오를 빌미를 주십니까?”연각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예? 대답해 보세요.”현정태후는 상소문을 손에 든 채 연각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연각은 그런 태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이젠 변명도 안 하시는군요.”그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태후의 맞은편에 털썩 걸터앉았다.그러고는 한쪽 다리를 세운 채 팔을 걸치고 태후를 올려다보았다.황제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세였다.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노골적인 반항이었다.“자, 어쩌시겠습니까?”연각은 마치 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기울였다.“제가 어떻게 할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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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시간은 점점 흘러 어느덧 한 시진에 가까워졌지만, 황제가 모습을 드러낼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기다리다 못한 외척 가운데 한 사람이 조심스레 연백리에게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귀띔했다.“왕야, 폐하께서 이리 기미가 없으시니 조방으로 옮겨 기다리심이 어떠하겠습니까?”연백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어제에 이어 오늘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고민하시느라 조회에 늦으실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말을 마친 연백리는 자신이 내뱉은 말 그대로 대전에 머무르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각을 기다렸다.경무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어느 누가 선뜻 먼저 몸을 뺄 수 있겠는가.결국 다른 대신들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함께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다만 오래 서 있기 어려운 일부 연로한 대신들만 조용히 조방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골치가 아프겠지. 나 혼자가 아니라 각궁의 외척들까지 상소를 올렸으니 말이야. 어차피 본인이 해결하지도 못할 텐데... 누가 구원병을 자처하며 나타날지 궁금하군그래.’연백리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삼켰다.그 명장면을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끝내 자리를 지킨 채, 미동도 없이 연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한편, 폭풍 전 고요로 가득한 승명전.당연하게도 연각은 조회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어제에 이어 오늘도 밀려드는 상소문이 책상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하나같이 부제 대례를 앞두고 후궁을 들이는 것은 대불효라는 내용뿐이었다.총관태감 서공공은 조심스레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폐하, 아무리 그러하셔도 조회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게 내가 벌인 일도 아닌데, 왜 내가 감당해야 하지? 태후마마를 모셔오거라!”서공공은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대답을 잇지 못했다.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조회를 더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 사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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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연각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자 대전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렸다.그러나 연백리의 얼굴에는 오히려 차가운 미소가 번져 갔다.입매가 슬며시 올라간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그게 사실이라 해도 이 조회에서 언급할 일은 아닙니다, 폐하.”잠시 말을 멈춘 연백리는 연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과거 신과 혼인첩이 오가던 처자들을 연이어 후궁으로 들이신 폐하께서, 이제 와 사사로운 정을 논하시는 것은 정녕 무안한 일이지 않습니까.”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다.“두 번의 우연도 모자라 타인의 사람을 또 탐내시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연백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전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에 휩싸였다.대신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옥좌만 바라보았다.연각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이를 악물자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 하얗게 질려 버렸다.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었다.연각은 치솟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애꿎은 옥좌의 손잡이만 부서져라 움켜쥐었다.연백리는 그런 연각의 모습에 슬며시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머금는 것이었다.그 순간, 대신들이 늘어선 반열 사이에서 누군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예부상서 위의청.바로 현귀비 위서란의 아비였다.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서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아뢰기 시작했다.“폐하, 황실의 가장 엄숙한 법도인 부제 대례를 앞두고 고작 후궁의 거취로 조정을 이리 어지럽히는 것은 정녕 조상들께 불효라 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부디 대례의 신성함을 지키시고 조정의 안위를 위하여, 이번 간택령을 잠시 거두어 주심이 가한 줄 아옵니다.”위의청의 말이 끝나자 대전 안은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연각은 옥좌 위에서 위의청을 내려다보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붉게 달아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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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각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용포 자락을 크게 휘날리며 도망치듯 대전을 빠져나가는 걸음은 급하기 짝이 없었다.누가 보아도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아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었다.그렇게 연각의 모습이 대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가까스로 참고 있던 대신들의 원성이 둑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어찌 모든 책임을 황후마마께 돌린단 말이오!”“이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이냐!”순식간에 대전은 황망함과 분통함이 뒤섞인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그러나 그 난리 속에서도 헌국공이자 태부인 가회안만은 처음과 다름없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연백리는 그런 가회안의 모습을 놓치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른 아침.초영황후는 아침잠마저 설친 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오늘 아침 조회의 안건이 바로 후궁 간택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밤새 뒤척인 끝에 더는 침상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찻잔을 들어도 차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창밖을 바라보아도 마음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과연 어떤 결말이 내려질 것인가.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렇게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조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상궁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전 안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들어 왔다.“황후마마!”다급히 무릎을 꿇은 상궁이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방금 조회에서 태후마마의 교지가 내려졌다 하옵니다!”초영황후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내용이 무어라 하더냐?”“그, 그게......”상궁의 입술이 떨렸다.감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운 내용이었다.“당장 고하지 못할까!”황후의 호통에 상궁은 흠칫 몸을 떨더니,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황손을 보지 못해 태후마마께서 걱정 끝에 생각해 내신 일이며... 이 모든 책임은 황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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