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00 챕터

제71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윤서는 어안이 벙벙하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자신을 차단한 게 박태경일까, 아니면 서다빈일까?조금 전 서다빈이 전화를 받았으니 박태경이 그녀에게 카톡을 보여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첫 번째 메시지는 확인했는데, 두 번째부터 읽지 않는 걸 보면 심술이 나서 박태경을 달달 볶은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서다빈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차단한 걸까?하지만 그녀가 꾸민 짓이든, 박태경이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랴.어쨌거나 서다빈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그저 자신과의 연락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수작일 뿐이었다.문득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눈치 없이 연락한 그녀 때문에 서다빈이 잔뜩 토라져 있고, 박태경은 그런 여자를 품에 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주는 모습이...강윤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씁쓸한 조소를 흘렸다.두 사람의 눈물겨운 사랑에 감동해야 할지, 아니면 지난 세월 동안 마음을 잘못 내준 스스로를 비웃어야 할지 몰랐다.진작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 미련했다.더는 처량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던 강윤서는 깔끔하게 미련을 털어내기로 했다.침대에 누운 그녀는 앨범을 열어 권하람의 영상을 보고 나서야 착잡한 감정을 비로소 가라앉힐 수 있었다....강윤서는 아침 일찍 약재 테스트를 위해 해온 연구센터를 찾았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낯익은 벤틀리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박태경이 매너 있게 차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서다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강윤서는 시선을 돌려 곧장 다른 동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박태경이 직접 서다빈을 배웅하러 온 게 불 보듯 뻔했다.따라서 다정한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제삼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연구센터에서 데이터 시트를 챙겨 나오던 길, 강윤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통화 중이던 박태경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그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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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예전에 박태경을 대할 땐 감히 상상도 못할 태도였다.그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태경아, 네 마누라 완전 여우주연상 급이네?”박태경은 눈을 내리깐 채 라이터만 똑딱거렸다.이내 별 대꾸 없이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외할아버지의 구순을 앞두고, 강윤서는 잔치를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다.원래 집안에 사람이 귀하다 보니, 노인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어떻게든 북적북적하고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드릴 참이었다.초대한 손님들을 다 합쳐봐야 겨우 한 테이블을 채울 정도였다.하객 수가 너무 적다 보니, 그녀는 아쉬운 대로 공연 팀이라도 불러서 잔치 분위기를 띄워볼 계획이었다.그래서 예약해 둔 연회장도 크기가 꽤 큰 편이었다.그런데 잔치 전날 밤, 강윤서는 호텔 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최근에 예약이 폭주해서 확인해보니, 고객님께서는 20인용 테이블 하나만 예약하셨는데 연회장은 최고 등급인 대형 홀로 잡혀 있더라고요. 마침 하객 수가 훨씬 많은 다른 팀이 사용할 만한 큰 홀이 없어서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더 작은 홀로 변경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대신 죄송한 마음을 담아 비용을 12% 할인해 드리겠습니다.”강윤서는 이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비워달라면 비워주면 그만이지 싶었다.굳이 호텔 직원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흔쾌히 응했다.“그래요,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지배인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다음 날.강윤서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움직였다.요양원으로 가서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는데, 젊은 시절 엘리트답게 노년이 된 지금도 품위가 넘쳤다.게다가 오늘은 컨디션도 눈에 띄게 좋아 보이셨다.외할아버지는 멋스럽게 짙은 회색 정장까지 챙겨 입었다.“태경이는 왜 같이 안 왔냐?”강만호는 강윤서의 차가운 손을 따스하게 감싸 쥐며 물었다.강윤서가 시계를 확인했다.“일이 좀 바빠서 이따가 호텔에서 보기로 했어요.”“그래, 그래. 온 가족이 모여서 밥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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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강윤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왜요?”배건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옆 홀이 서다빈 남동생 생일 파티인가 봐.”굳어 있던 표정이 풀리기도 전에 강윤서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서진우?”강윤서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옆 홀은 그리 멀지 않았다.마침 그녀가 원래 예약했던 바로 그 연회장이었다.호텔 측에서 양해를 구하며 양보해 달라고 했던 곳.그리고 문 앞 안내판에는 서진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안에서는 한창 생일 파티가 진행 중인 듯했다.입구에서 서한수와 백영희가 나란히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강윤서를 본 순간, 서한수는 놀란 기색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몇 년 동안 못 본 서먹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윤서야, 정말 우연이네? 아빠가 마침 네 남동생 생일을 챙겨주고 있었는데, 이참에 홀을 하나로 합치는 건 어때?”강윤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우리가 그럴 만큼 친한가요?”십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대외적으로 위선적인 건 여전했다.서한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윤서야, 아빠도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태경이가 다빈이랑 인터뷰하러 갔거든? 조금 있으면 둘이 같이 올 거야. 오늘이 진우 생일이기도 하잖니. 네 외할아버지께서 그 연세에 애랑 주목받으려고 경쟁하실 것도 아니고, 이쪽으로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생일 케이크도 자르면 좋은 기운 나눠 받고 좋잖아.”나눠 받다니?분명 멀쩡하게 잘 치르고 있던 잔치였다. 그런데 졸지에 적선이나 구걸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강윤서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눈빛이 칼날처럼 매서웠다.“서 회장님은 자기 자식이 상간녀 짓을 하는 게 꽤 자랑스러우신가 봐요.”불 보듯 뻔했다.서한수는 그녀의 결혼 생활도, 박태경의 외도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연락 한번 없었고, 서다빈이 제 친딸의 남편을 빼앗은 것에는 내심 기뻐했다.서한수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말도 참 못되게 하네. 그래도 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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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배건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내가 호텔 측이랑 얘기해 볼게.”“행복아, 눈이 왜 빨개? 누가 너 괴롭힌 거야? 외할아버지가 가서 혼내 주마.”강만호는 흐릿한 눈으로 강윤서의 억지 미소를 알아채고는 안절부절못하며 휠체어를 타고 손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강윤서가 얼른 다가갔다.“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여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좀 없네요. 우리 오늘 돌아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요?”강만호는 원래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얼버무리기가 쉬웠다.강윤서는 최대한 외할아버지를 달랬다....옆 홀.백영희는 강윤서가 대든 것에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지, 싸늘한 얼굴로 투덜거렸다.“저 재수탱이! 시골에 처박아 뒀어도 그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가는군. 바락바락 대들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건 여전하네!”서한수가 한숨을 쉬었다.“자기 엄마를 쏙 빼닮아서 통 양보라는 걸 모른다니까.”“그 와중에 팔자는 또 더럽게 좋아서, 기어코 판을 뒤집고 박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다니. 대체 얼마나 잔머리를 굴린 거죠?”백영희가 미간을 찌푸렸다.박태경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비켜주지 않는 강윤서 때문에 그녀 역시 골치가 아팠다.그때, 묘수가 문득 떠올랐는지 눈동자를 굴리더니 서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다빈이랑 태경이 오늘 인터뷰한 거, 조만간 언론에 다 깔리겠죠?”서한수는 곧바로 백영희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침묵을 지켰다.딱히 말리지도 않았다.어차피 강윤서는 제구실도 못 하고 ‘사모님’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굳이 시간과 재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백영희가 비열하게 미소를 지었다.“호텔 지배인 좀 불러 봐요. 시킬 일이 하나 있으니까.”...배건하는 빠르게 차를 대기시켰다.강윤서가 강만호를 휠체어에 태워 연회장 밖으로 나가던 찰나, 홀 안의 대형 스크린이 갑자기 환하게 켜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이미 호텔 측에 오늘 연회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했으니, 그 어떤 영상도 틀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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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강윤서는 얼이 빠진 서진우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오냐오냐 자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꼬맹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조금 전에도 정확하게 나불대는 아이의 주둥이를 가격했다.서진우는 태어나서 맞아본 적은커녕, 혼나본 적도 없는 게 분명했다.아니면 왜 한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눈만 커다랗게 뜨고 강윤서를 쳐다보고만 있겠는가.입 주변이 화끈거리며 통증이 밀려오자, 강윤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녀석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하지만 강윤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서진우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그러고는 통통한 몸을 이끌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배건하의 대처도 빨랐다.그녀가 서진우를 끌어냄과 동시에 강만호의 휠체어를 밀고 반대편 출구를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다.질질 끌려가던 서진우는 그제야 악을 쓰고 울어댔다.조금 전까지 ‘방치’되어 있던 아수라장에 갑자기 백영희가 튀어나왔다.그녀는 다짜고짜 다가와 강윤서를 밀쳤다.“강윤서! 너 제정신이야? 애가 뭔 죄가 있다고 손을 대?”어디선가 나타난 서한수의 눈빛에 실망이 가득했다.“넌 정말 양심도 없구나. 그래봐야 아직 어린애야. 다 큰 어른이 애를 상대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강윤서의 귓가에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서진우의 울음소리와 서한수, 백영희의 비난이 뒤섞여 윙윙거렸다.그녀는 이 가증스러운 가족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아, 부모가 있긴 하네요? 전 다 죽고 없는 줄 알고 대신 가정교육 좀 시켜준 건데.”서진우가 남의 연회장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외할아버지를 자극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었다.그러다 제 자식이 한 대 얻어맞고 나니까 쏜살같이 나타난 것이다.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애들이 뭐 알고 그랬겠니? 그걸 못 참아서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게 말이 돼? 나잇값 좀 해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넌?”백영희는 이죽거리며 강윤서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강윤서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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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강만호에게 막 물을 한 컵 따라준 참인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강윤서는 의아한 얼굴로 걸어갔다.“벌써 사 온 거예요?”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입가에 남아 있던 희미한 미소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박태경이 서서히 눈을 내리깔았다.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계속 밖에 세워두려고?”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강윤서는 당장이라도 그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안방에서 이미 강만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행복아, 누구 왔냐?”문고리를 부서질 듯 꽉 쥐었던 손가락이 힘을 잃고 스르륵 풀렸다.힐끔 쳐다보니 박태경은 빈손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있었다.박태경은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옆을 지나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그리고 강만호의 앞에 멈춰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강만호의 눈빛이 잠시 흐릿해지나 싶더니,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나서야 기억이 난 듯했다.“태경이냐? 오늘은 안 바빠?”강윤서는 뒤따라 들어서자마자 외할아버지의 환한 얼굴을 마주했다.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박태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저한테는 할아버지 생신이 가장 중요한걸요. 일이야 나중에 하면 되죠.”그녀는 박태경의 옆모습을 슬쩍 곁눈질했다.이 부분만큼은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박태경이 작정하고 비위를 맞추려 든다면, 그 매력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건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가게 디저트예요. 당도는 낮췄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니까.”박태경이 들고 온 상자 중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오냐, 오냐. 다 너희들 말 따르마.”강만호는 기분이 무척 좋아진 듯,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이것도요. 할머니 작품을 늘 그리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몇 점 구해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박태경이 이어서 다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을 확인한 강윤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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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강윤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박태경의 이런 점이 제일 싫었다.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게 핵심을 짚어내곤 했다.다행히 강만호는 방금 한 말도 금세 잊어버릴 만큼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그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작품을 품에 안고 소중히 어루만질 뿐이었다.“자식이 있는 게 좋지. 애들이 많아야 나중에 서로 의지할 형제자매도 생기는 법이야. 우리 행복이처럼 어디 기댈 곳도 없이 외롭지 않게 말이다.”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하는 외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강윤서는 가슴이 아려왔다.외할아버지가 지금 가장 마음을 쓰는 대상은 결국 그녀였다.손녀가 어디 가서 피해를 볼까, 억울한 일을 당할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이 없어 외롭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고 계셨다.박태경 역시 강만호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래서 방금 노인이 뱉었던 ‘둘째’라는 단어를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이내 한 걸음 다가가 강만호의 손이 닿는 곳에 그림을 전부 내려놓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네, 저희가 노력하겠습니다.”그 뻔뻔한 모습에 강윤서는 실소가 터질 것 같았다.박태경의 가식 하나만큼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이윽고 배건하가 돌아왔다.박태경을 발견하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들어오며 한마디 건넸다.“박 대표님, 이제는 좀 한가해지셨나 봅니다?”대놓고 무안을 주려는 뉘앙스가 역력했다.하지만 박태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쳤다.“할아버지 생신인데,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배건하는 슬쩍 강윤서의 눈치를 살폈다.조금 전 서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도발해 왔는지를 전부 목격한 터였다.설령 지금 박태경이 왔다 한들, 그 장면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본래라면 겪지 않아도 될 수모였다.결국 강윤서는 마지못해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호텔을 나와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했다.이 모든 게 서씨 가문의 횡포 때문이라는 사실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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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강윤서는 잔에 담긴 독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번지는 쌉싸름한 맛을 음미했다.오히려 잘된 일이었다.박태경이 서다빈을 끔찍이 아끼고 편애해 주는 덕분에 권하람의 존재를 철저히 숨길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그가 서다빈에게 가야만 권하람과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태경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더냐? 아주 중요한 일인 게야?”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강만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강윤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안 가면 제 명에 못 살 만큼.”배건하는 마치 남 일 보듯 무덤덤한 강윤서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강윤서는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롯이 권하람에게 쏠려 있었다.이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양육권만 확실히 쥐여준다면, 박태경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무관심했다.박태경이 떠나자마자, 강윤서는 권지율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번호를 막 누르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먼저 연락이 왔다.강윤서가 급히 전화를 받았다.“지율아, 하람이 데리고 출발...”“윤서야, 큰일났어. 나랑 하람이, 교통사고 났어.”순간 강윤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강만호가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는 배건하에게 요양원에 남아 외할아버지의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그러고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지구대로 향했다.권지율이 전화를 걸었을 때, 이미 경찰에 인계된 뒤였다.다급히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늘진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권지율의 실루엣이 보였다.그 옆에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도 함께였다.마치 도자기로 빚어낸 듯 뽀얀 얼굴에,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이 보석처럼 빛났다.쌍꺼풀 라인마저 인형처럼 정교했고, 어린 나이임에도 콧날이 오뚝했다.이목구비가 어찌나 또렷한지, 지구대 경찰들마저 틈만 나면 다가와 간식을 쥐여줄 정도였다.다만 아이는 기운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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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강윤서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완벽히 파악했다.결국 박태경이 급하게 달려간 이유가 고작 이거였단 말인가?“그쪽은 차에 치였다고 하던데?”“환장하네, 진짜!”권지율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내가 얼마나 기를 쓰고 핸들을 꺾었는데! 그 뚱보 놈이 자기 집 앞마당인 줄 알고 도로를 무단횡단한 거란 말이야. 걔 피하려다가 이 사달이 났는데 어디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게다가 서다빈 그 계집애는 내가 과속했느니, 뺑소니를 치려고 했느니 아주 소설을 쓰더라? 심지어 손찌검까지 했다면서 경찰에 신고했어. 안 그랬으면 지구대 올 일도 없었어.”당시 권지율은 서진우 때문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권하람을 겨우 달래놓고 차에서 내려 합의를 보려는데, 서다빈이 다짜고짜 다가와 그녀를 밀쳤다.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권지율이 아니었기에 똑같이 갚아주었다.그저 가벼운 실랑이가 오갔을 뿐인데, 서다빈의 입을 거치면서 순식간에 ‘폭행’으로 둔갑한 것이었다.거칠게 욕을 내뱉다가 뒤늦게 권하람이 곁에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아차 싶어 머쓱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두 귀를 막아주었다.권하람은 새까만 눈을 깜빡이더니, 권지율을 향해 눈꼬리가 휘어지게 활짝 웃었다.순간, 권지율은 심장이 말랑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강윤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서다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마치 중상이라도 입은 듯 기어코 박태경을 불러내더니, 실상은 이 모양이라니...“지금 경찰들이 CCTV 확인하러 갔거든? 근데 서다빈은 무조건 100% 내 과실이라고 우기면서 법대로 처벌하겠다고 난리야.”권지율은 아이 앞이라 차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배어 나오는 분노만큼은 숨기지 못했다.그 개차반 같은 꼬맹이만 아니었어도, 권하람이 놀라서 열이 펄펄 끓고 머리에 혹까지 생길 일은 없었을 텐데.“피해자분들이 병원에 상해 진단서 끊으러 갔거든요. 아주 큰 사고는 아니니까 웬만하면 서로 잘 합의해 보세요.”경찰이 다가와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강윤서의 미간이 찌푸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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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강윤서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휴게실 안, 권지율의 품에 안겨 있는 권하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박태경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닙니다. 애가 저 없으면 안 된다고 울고불고 난리라, 가기 힘들 것 같아요.”순간, 강윤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니, 참 눈물겨운 정성이었다.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 참 지극하기도 했다.만약 나중에 박태경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오늘의 잔인한 결정 때문에 제 친딸을 영영 놓쳤다는 걸 후회나 할까?하지만 이제는 대답을 들을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다.강윤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메마른 눈동자에 처참한 조소가 서렸다.이내 수화기를 향해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나 지금 지율이 데리고 여기서 나갈 거예요. 서다빈은 알아서 해결해요. 아니면, 내가 직접 처리할 거니까.”권하람을 더는 여기 묶어둘 수 없었다.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했다.아이를 위해서라면, 박태경과 파국을 맞는 것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았다.강윤서가 돌연 끼어들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그녀의 말속에 담긴 ‘협박’을 박태경 역시 알아들었을 것이다.대중의 시선을 받는 서다빈에게 진흙탕 싸움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끝에 전화가 뚝 끊겼다.더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었다.매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태도에 강윤서는 수치심이 차올라 온몸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이것이 바로 박태경의 대답이었다.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권지율이 있는 쪽으로 가서 권하람의 상태를 살폈다.머리에 생긴 혹이 그새 더 부어올라 있었다.아프고 불편할 텐데도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만 그렁그렁 맺혀 있을 뿐,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그 지나친 의젓함이 도리어 강윤서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웠다.그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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