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강윤서는 박태경이 아직 병원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온갖 바쁜 일정을 다 밀어내고 별 탈도 없는 서다빈의 남동생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박태경 덕분에 굳이 그를 따로 찾아 나설 수고는 덜었다.권하람은 링거를 맞고 있었다. 머리의 찰과상도 소독이 끝난 상태였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고 강윤서는 조용히 이불을 여며 주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가슴이 그제야 조금씩 온기를 되찾았다.김명희가 같은 층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돌려 소리 없이 병실 문을 빠져나왔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맨발로 절뚝이며 걸었다. 막 병실을 나서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박태경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의 눈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려가다 강윤서의 맨발에서 멈췄다. 이내 시선은 병실 쪽으로 옮겨갔다.“대표님. 파출소 쪽은 정리됐습니다. 그쪽에서도 일을 크게 키우지 않겠다고 했고요.”전승우의 보고가 통화 너머로 흘러 들어왔다.박태경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병실 쪽을 바라보다 불쑥 발을 뗐다.“다친 사람은 없어?”“그게...”전승우가 잠시 망설였다.“권지율 씨 차에 아이가 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자리를 떴고요.”박태경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권씨 가문의 아이야?”“사모님께서 데려갔다고 합니다. 차 안에서 다쳐서 치료부터 해야 한다고 바로 이동했다고요.”그때 박태경은 마침 병실 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옆으로 시선을 던지며 방을 바라보고 손을 문손잡이 위에 얹었다.“그래.”통화를 끊고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살짝 열리며 가느다란 틈이 생기는 순간 등 뒤에서 불쑥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태경 씨. 얘기 좀 해요.”박태경의 손이 굳었다. 뒤를 돌아보니 급히 뛰어온 듯한 강윤서가 서 있었다. 낮게 틀어 올렸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맨발로 달려오는 사이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가늘고 희던 발가락에는 피가 배어 있었다. 붉게 번진 핏자국 때문에 발등의 피부가 더 눈부시게 하얘 보였다.강윤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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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고작 석 달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이제 와서 이 소란스러운 일을 일찌감치 끝내버리는 것이 뭐가 나쁘겠는가.’박태경의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는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깔아 서류봉투를 한 번 훑더니 다시 강윤서를 바라봤다.“고작 권지율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강윤서는 웃음이 나왔다.‘고작?’마음은 이미 수없이 상처 입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의 눈에는 그 모든 시간이 ‘고작’ 한마디면 설명되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역시 그도 알고 있었다. 서다빈이 제멋대로 날뛰며 남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자신이 방치해 왔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국 누구의 목숨도 서다빈의 기분 하나보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그것만이 아니었다. 결혼 안에서 무너진 것들은 사소한 일들이 하나씩 쌓여 생긴 것이었다.처음에는 참을 만한 작은 가시였던 것이 어느새 가슴을 꿰뚫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편파적인 두둔 때문에 권하람이 자칫 크게 다칠 뻔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 이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사람의 이혼은 애초부터 정해진 결말이나 다름없었다.“그렇게 생각해도 돼요.”강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태경 씨. 두 사람, 잘 되길 바랄게요.”‘새로운 사랑이 활짝 열리길.’그녀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를 지나쳐 병실 안으로 들어간 뒤 상대가 따라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단호하게 잠가버렸다.박태경이 몸을 돌렸다. 차갑고 가늘어진 눈으로 그 문을 응시했다. 강윤서가 그와 진지하게 이혼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히스테리도 없었고 무너지거나 아쉬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그는 다시 손을 들어 서류봉투를 내려다봤다. 서둘러 열지 않고 천천히 성큼성큼 간호사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당직 간호사는 박태경을 보자 눈이 번쩍 뜨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무엇을 도와드릴까요?”박태경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물었다.“2013호 병실. 그 아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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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노형준도 마지막 서명란의 공백을 발견했다. 박태경이 이혼 협의서 조항들을 훑어보는 동안 그도 옆에서 따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노형준이 픽 하고 비웃었다.“그러게 말이야. 강윤서가 무슨 배짱으로 이혼을 요구하나 했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조항을 써놓고 누가 도장을 찍겠어.”“이런 조건들 직접 쓰면서 웃음도 안 나왔겠지?”몇 가지 조항이 유독 눈에 띄었다.1조. 박태경은 이혼 성립과 동시에 재산의 50%를 강윤서에게 분할한다.2조. 이혼 후 10년 동안 박태경은 서다빈과 혼인할 수 없으며 서다빈에게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그에 준하는 명분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서다빈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출산하게 해서는 안 된다.3조. 박태경은 강윤서와의 사이에 자녀를 가져야 하며 강윤서가 임신한 이후 양측은 이혼신고를 진행한다.노형준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이게 간절하게 이혼하고 싶은 사람 태도야?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어.”“어차피 네가 이 협의서에 서명 안 할 거 뻔히 알고 저렇게 큰소리친 거 아니야?”박태경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 이혼 협의서는 명백히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낸 산물이었고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걔, 너랑 진짜 이혼하고 싶은 게 아니야. 네가 절대 이 협의서에 서명 안 할 거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어.”노형준이 결론을 내렸다.강윤서는 박태경 재산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모를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절반을 달라니 배짱도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게다가 박태경이 서다빈과 결혼하지 못하게 막아놓았다.‘서다빈의 청춘을 그냥 갉아먹겠다는 건가.’심지어 박태경이 자기 아이를 만들어줘야 이혼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강윤서의 속셈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일까.’진짜로 아이라도 생기면 강윤서가 이혼할 리가 없었고 아이를 빌미로 더 단단히 눌러앉을 것이 뻔했다.“설마 진짜로 상대해 줄 생각은 아닌 거지?”“그럴 한가한 시간 없어.”박태경의 눈빛은 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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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눌러두기만 하면 됐다.“그래도 서명된 이혼 협의서 두 장은 이미 확정된 거잖아요. 게다가 7년 전에 전 회장님이 직접 처리하신 건데 석 달만 지나면 결국 이혼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김명희가 핵심을 짚었다.최혜란의 미간이 좁아졌다.김명희가 서류봉투 안을 슬쩍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최혜란이 은근히 확인해 본 결과 박태경은 이혼 협의서에 이미 서명까지 끝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이혼 협의서 건은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최혜란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일단은... 하루라도 더 끌 수 있으면 끄는 거지.”김명희는 어르신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서다빈이 들어오는 걸 막고 싶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강윤서를 붙잡아 두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강윤서가 저렇게까지 완강하게 나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도련님 같은 남편을 두고 무엇이 불만이라는 건지.’강윤서가 좋은 집안으로 시집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박태경 주변에 여자가 좀 따른다고 해도 저 정도 위치의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고 강윤서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지 못한다면 결국 손해 보는 건 본인뿐이었다.“혹시 사모님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건 아닐까요?”김명희가 불쑥 말을 꺼냈다.상황이 이혼 외에는 답이 없을 만큼 절박한 것이 아니라면 강윤서가 저토록 여지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밀어붙일 이유가 없었다.불상을 향해 염주를 굴리던 최혜란의 손이 멈췄다.평소 온화하고 자애롭던 얼굴에 순간 날카로운 불쾌감이 스쳤고 차가운 시선이 김명희를 향했다.“박씨 가문은 가풍을 해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아. 앞으로는 말조심해.”김명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최혜란은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결국 다시 불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윤서 주변에 최근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아봐.”강윤서가 병실로 돌아온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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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법원에 도착한 강윤서는 두 개의 홀을 천천히 둘러봤다.혼인신고 창구 쪽은 한산했다. 반면 이혼 접수창구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묘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후련하게 들떠 있었다.홀 안에서는 몇몇 부부가 얼굴을 붉힌 채 고성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떤 부부는 나란히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원망만큼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듯했다. 또 어떤 부부는 이미 모든 감정이 타버린 사람들처럼 곧 해방될 날만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와 박태경은 어떨까.’강윤서는 그 질문에 거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떠올렸다. 아마 두 사람은 너무 담담해서 부부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잠자리만 함께했던 사람들이 관계를 정리하는 순간과 다를 바 없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육체적인 관계만 이어졌을 뿐 끝내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 한 조각도 섞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 생각이 들자 강윤서는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웃음 속에는 자조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한창 싸우던 부부들까지 일제히 그녀를 돌아봤다.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강윤서는 슬쩍 표정을 가다듬었다.“죄송해요. 남편이 유부녀랑 바람을 피워서요.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네요.”막 이혼 서류를 받고 나오던 여자들이 곧바로 공감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신 분통을 터뜨렸다.“이렇게 젊고 예쁜데 그 남편은 눈이 멀었대요?”강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밖에 있는 건 뭐든 더 좋아 보인다니까.”강윤서가 맞장구를 쳤다.“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데 어쩌겠어요.”“그런 양심 없는 놈들은 언젠가 꼭 천벌 받아요.”여자들이 입을 모아 욕을 퍼부을수록 점점 더 신이 났다.어느새 은근히 욕을 얻어먹고 있던 남자들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험악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순식간에 홀 안은 온갖 독설과 고성이 뒤엉킨 난장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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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권하람이 사고를 당한 일은 결국 장시원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권하람 퇴원 수속을 막 마쳤을 때, 장시원이 황급히 달려왔다.권하람의 머리에 감긴 붕대 자국을 보자 노인은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그러면서도 권하람이 몰래 나왔다는 사실을 차마 나무라지는 못했다.결국 화살은 강윤서에게 향했다.“네가 고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봐라!”경위는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남의 일인 그가 봐도 속이 시리고 치가 떨렸다. 강윤서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하람이는 당분간 우리가 데리고 있겠다. 원래도 기력이 약한 아이인데 이번에 크게 놀라기까지 했고 열도 나고 다치기까지 했으니 한동안 푹 쉬어야 해.”장시원이 권하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강윤서는 잘 알고 있었다. 권하람이 조금이라도 다치면 스승의 가슴에 칼이 박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네...”감히 반대할 수 없었다.장시원은 경원에 자리를 잡은 지 꽤 됐다. 나라에서 배정해 준 집으로 보안과 경호가 가장 철저한 빌라 단지에 살고 있어 강윤서도 비교적 마음이 놓였다.어차피 아직 집도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권하람을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게 할 필요가 없었다.권지율이 머리를 긁적였다.“이건 제 잘못이에요. 제가 부주의했어요...”장시원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뭘 책임져. 내가 보기엔 다른 놈이 문제야!”“할아버지, 누구한테 화난 거예요?”권하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궁금한 듯 물었다.장시원이 강윤서를 흘끗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못된 남자 얘기야. 하람이는 크면 눈 똑바로 뜨고 사람 잘 골라야 해, 엄마처럼 사람 잘못 만나서 인생 힘들어지면 안 돼.”강윤서는 속으로만 외쳤다.‘그만, 그만 하세요.’권하람이 눈을 깜빡이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우리 아빠요?”강윤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권하람은 눈치도 빠르고 총명하기 짝이 없어 얼른 부정하려 했다.“아...”권하람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설명 안 해도 돼요. 우리 아빠 죽었잖아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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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맑고 또렷한 어린 목소리가 그 자리에 내리꽂히자 모든 시선이 동시에 내려간 차창으로 쏠렸다. 박태경의 검은 눈동자는 그 작은 여자아이에게 단단히 고정됐다.아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칠흑 같은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바람을 맞아 핏기가 가신 강윤서의 얼굴이 담겼다.세상이 소리를 잃은 것 같았다. 강윤서는 반응하는 것조차 잊을 뻔했고 온몸의 피가 이 순간 역류하는 듯 머리끝까지 치솟아 온몸이 믿기 어려울 만큼 굳어버렸다.그때, 권지율이 성큼 뛰어나와 권하람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았다.“어머, 우리 아가 착하지. 일단 집에 가서 쉬어야지. 다 끝나면 놀이공원 데려가 줄게, 응?”권지율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박태경의 날카로운 시선을 가로막았다. 원래 강윤서에게 응석을 부리며 같이 자자고 하려던 권하람은 말을 끊긴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대신 영상통화 해줘야 해요.”권지율은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느라 눈가가 굳어버렸다. 차창이 다시 올라갔다.장시원도 더 남아서 욕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강윤서가 아직 박씨 가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장시원은 재빨리 차에 올라 기사에게 출발을 지시했다.권지율이 안도하며 몸을 돌리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애들은 아프면 엄마 찾잖아. 아무한테나 엄마라고도 하더라.”강윤서는 그제야 손톱으로 손가락 끝을 꾹 눌렀다.“그러게. 애들은 다 그렇지.”박태경의 시선은 여전히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에 서 있는 강윤서에게 머물러 있었다.서다빈이 그 시선을 알아채고는 입술을 한 번 꾹 다물더니 박태경의 팔짱을 꼈다.“태경 오빠, 윤서 씨 아이를 진짜 원하는 것 같네...”말 속에 담긴 의미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노형준도 물론 이해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태경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아이 가져서 그걸로 발목 잡히는 일은 없으니까.”서다빈은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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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강윤서는 뻔뻔하게도 자신과 박태경의 미래를 망치려 하고 있었다.그 생각에 박태경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감정의 흔들림 하나 없는 눈빛이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그럴 일 없어.”짧은 한마디였다.하지만 그 말만으로도 서다빈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역시 그럴 줄 알았다.박태경은 이미 강윤서에게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혹시라도 아직 부부 관계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결국 강윤서 혼자서 어떻게든 박태경을 붙잡아 보려 발버둥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자신을 마치 상품처럼 내세우다니.’‘정말 이렇게까지 값싸 보일 수가 있을까.’“매형. 그 나쁜 여자 언제 쫓아내요? 지금 당장 우리 언니가 매형 집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서진우가 불쑥 물었다.그러면 매형의 큰 집에서 살 수 있을 테고 장난감도 방 하나 가득 사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부러워할 게 분명했다.서다빈은 가볍게 동생을 타일렀다.“진우야. 함부로 그런 말 하면 안 돼.”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박태경을 바라봤다.박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괜찮아.”장시원의 자택은 경원에서도 보안 수준이 가장 높은 고급 빌라 단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일대에는 대부분 고위 공직자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계 인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강윤서가 그곳에서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지만 배건하의 연락을 받고 곧장 회사로 향했다.“강씨 집안 가보들 중에 팔려 나간 게 꽤 많잖아. 모레 골동품 프라이빗 감상회가 열리는데 같이 가볼래?”강윤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골동품 가게가 서한수 손에 넘어간 뒤로 많이 팔렸어요. 혹시 관련 루트가 있나요?”배건하는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 두 장을 집어 들었다.“국내 5대 제약사 가운데 육씨 가문의 한결바이오 알지? 이번 자리는 거기서 주최하는 행사야. 나는 한결바이오 육진혁 대표를 만나볼 생각이고 너도 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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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박태경은 강윤서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잠시 머물렀다가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눈빛에서는 부부 사이의 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서다빈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배건하에게만 인사를 건넸고 강윤서에게는 아예 말을 걸지도 않았다.어차피 지금 박태경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었으므로 그녀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강윤서는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웠다. 본처에게 남편의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자리라니, 그런데 정작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다못해 내연녀가 누렸던 명분조차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그때 차민석이 이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걸어왔다. 그는 육진혁과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말했다.“소개 안 해도 돼. 강윤서 씨는 박 대표랑... 그리고 박 대표 여자친구랑도 아는 사이야. 나중에 청첩장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차민석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눈빛은 한없이 가볍고 흐트러져 있었다.그는 육진혁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다. 게다가 육진혁의 누나가 그의 사촌형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이제 사돈 관계로까지 얽혀 있었다.자연히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강윤서가 몇 번이나 자신에게 독설을 퍼부었지만 차민석은 강윤서가 언제 폭발할지 구경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그 한마디에 박태경도 차민석을 향해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쓸데없는 장난은 적당히 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서다빈은 오히려 미소를 더 짙게 지으며 거만한 시선으로 강윤서를 바라보면서 차민석의 농담을 받아쳤다.“제 결혼식에 강윤서 씨가 시간 내서 와줄 수 있으면 좋죠.”강윤서는 서다빈의 눈을 마주했고 그 깊은 곳에 깔린 우월감과 경멸을 느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죠. 근데 아무리 시집가고 싶어도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요. 박 대표님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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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육진혁이 서다빈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최근 뉴스와 인터뷰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여러 번 본 터였다. 그는 박태경과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박 대표님 복도 많으시네요. 서다빈 씨가 작년에 해외에서 수상했다고요?”서다빈은 강윤서의 비꼼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었지만 육진혁이 자신의 이력을 언급하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저는 참여만 했을 뿐이에요. 주요 개발 멤버라고 할 수는 없어요.”강윤서가 아무리 말재주가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그 시간에 자신의 성과를 따라잡을 방법이나 고민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그러나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시야가 그 정도로 좁아 결국 쪼잔하게 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겸손하시네요. 박 대표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뛰어나시죠.”배건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슬쩍 눈을 돌리며 말했다.“서다빈 씨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죠.”서다빈은 잠시 망설였다. 배건하가 칭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이번에는 박태경이 무심한 시선으로 배건하를 바라보았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높이 평가하며 여성을 칭찬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요.”배건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박태경의 말은 어딘가 답답하게 들렸고 마치 서다빈을 두둔하기 위해 억지로 좋은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때 육진혁이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배건하를 바라보고 솔직하게 물었다.“배 대표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강윤서 씨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그 한마디에 순간 주변은 살짝 고요해졌다. 차민석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박태경을 바라보았고 박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 기쁜지 화난 지 전혀 알 수 없었다.서다빈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없고 믿기지 않았다.자신이 강윤서보다 수백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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