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운명이지만 너는 인질: Chapter 11 - Chapter 20

21 Chapters

EPISODE 11

“유진! 점심 먹으러 가자”유진은 새로 사귄 과 친구들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학생회관 카페테리아로 향했다.수행비서의 엄호도 최고급 세단의 에스코트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유진이 학생회관 입구를 통과해 카페테리아에 등장하는 순간 넓은 식당 안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 듯 고요해지더니 이내 사방에서 거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쟤다. 재! 이번 경영학과 1학년 신입생… 서유진!”“와… 진짜 예뻐… 완전 여신…”“저 얼굴에 저 몸매면… 아이돌이 맞는 거 아니냐? 근데 수석 입학이라고? 미쳤네…”“이번 수능에서 의대 프리패스 할 점수 맞고 굳이 문과 경영대로 간 애는 아마 재가 유일할 걸? 선택 과목도 미적분에 물2 화2 나형이었다던데… 이건 완전 뇌섹녀잖아!”“근데 쟤 아이돌 카린 닮지 않았냐?”“야! 우리 카린이랑 누구를 비교 해?”“솔직히 카린보다 낫지 않냐? 내가 본 여자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하기사… 카린은 화면 밖에서 보면 은근 부자연스러운데 쟤는 완전 생얼인데도 광채가 나는데?”“쟤도 어디 고쳤겠지”“성형을 했던 안했던… 쟤도 아이돌처럼 풀 착장하면 카린과 비교해도 어나더 (Another) 레벨 아니냐?”“완전 괴물이 들어왔네”주변의 압도적인 시선과 찬사에 유진의 과 친구들이 괜히 자신들의 어깨를 으쓱거리며 유진에게 팔짱을 꽉 꼈다.“역시 서유진! 너 딱 보자마자 이럴 줄 알았어. 우리 대학 역사상 레전드 여신이 될 거라고”“혹시 남친 있어? 우리 동아리 선배들이 너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인데”쏟아지는 질문에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나직하게 대답했다.“응. 미안. 남친… 있어”“진짜? 하기사 네 외모에 남친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혹시 우리 학교 다녀?”“아니. 일본에… 있어”“와… 롱디(장거리 연애-Long Distance Relationship) 야?”“…응”“잘 생겼어?”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오늘 아침 그 남자의 샤프한 얼굴을 떠올렸다.“뭐… 잘생기기는 했어”“부럽다. 너 다 가진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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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강의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그리고 강의실 입구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던 에구치의 시선 역시 웅성거리는 주위 분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했다.그리고 다시 마주친 그녀.에구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황급히 거두어 노트북 화면으로 얼굴을 처박았다.쿵. 쿵. 쿵.멀리서 들려오는 베이스 음처럼 귓가를 때리는 거친 심장 소리.굳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죄를 지은 것처럼 온 몸의 신경이 빳빳하게 긴장됐다.[아… 같은 학교였구나. 뭐…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쫄 필요는 없는 거잖아?]그는 당황함으로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자신을 간신히 추스리려 눈에 힘을 주며 강의실 앞 화이트보드와 교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하지만 이성이 내리는 명령이 무색하게 자꾸만 그의 눈길은 강의실 구석에 앉은 가녀린 그녀의 옆모습으로 향했다.그는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숨기려 애꿎은 노트북 키보드의 버튼을 의미 없이 누르고 지우기를 바보처럼 반복했다.**다음 날 오전 유진은 알람 소리도 울리기 전에 번쩍 눈이 떠졌다.어제 오후 대형 강의실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의 깊고 진한 시선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그녀는 초조함에 온종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그리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막 시작된 공사현장으로 찾아 갔다.“아… 아가씨… 무슨 일로…”“저… 혹시 제 화단 담당 하셨던 키 크고 젊은 남자분…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유진의 질문에 현장 반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아… 오늘 출근 안했는데… 혹시 화단에 문제라도”“아… 아니에요. 그냥 확인 차… 혹시 언제 출근하시죠?”“그 놈… 여기 아르바이트 하던 대학생이라 주말에만 나오는데요. 급한 일이시면 제가 말씀 전달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급한 건 아니라서 다음에 기회되면 확인하겠습니다”유진은 괜히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오다 정원 한구석에 있는 자신의 로즈마리 화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주중이라 출근도 하지 않았다는 남자의 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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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3

[의대생이었구나. 09학번이면… 23살?]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후로도 유진의 머릿속은 자꾸만 정원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의 잔상으로 가득 찼다.그리고 침대 모서리에 멍하니 앉아 턱을 괸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였다.[근데 본과 3학년이면 숨 쉬고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주말 내내 먼지 구덩이인 공사장에서 거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거기다 매일 아침마다 여기 와서 내 로즈마리 화단까지 돌보고 가면……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엄청 뺏길 텐데…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무척 빠듯한 모양이지? 바보같이 내가 따로 페이 챙겨준다고 할 때 그냥 넙죽 받지… 그래야 내 마음도 조금 덜 미안했을 텐데]*“아가씨! 저녁식사 안 드시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으로 깨작거리는 유진의 모습에 곁을 지키던 유모가 한소리를 했다.그럼에도 유진의 정신은 이미 딴 데로 아득히 가 있었다.루즈한 블랙 항공 점퍼에 받쳐 입은 핏한 블랙 티셔츠…거칠게 물 빠진 그레이 빈티지 진과 깊게 눌러쓴 블랙 비니 너머로 빛나던 카리스마 가득한 눈빛…야생마처럼 섹시하고 조금은 와일드하게 느껴지던 첫인상…그리고 커다란 키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탄탄한 근육질의 잘 빠진 몸매까지.[공사장에서 험한 일을 해서 그런가… 하루 종일 책만 파고든 유약한 의대생 분위기는 완전 아니었는데… 외모만 보면 꼭 검도나 유도 같은 격렬한 무술 종목을 할 것 같은… 아! 맞다. 사무라이!]그의 날것 그대로의 거친 외모와 묵직한 아우라를 떠올린 순간 유진의 하얀 뺨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발그랗게 상기되었다.그리고 심장이 조금씩 찌릿하게 간질거렸다.“아가씨!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요? 어디 아파요? 아가씨!”“어? 아니야. 그냥 대학 입학하고 첫 주라 그런지 좀 피곤해서”“생각보다 직접 운전해서 통학하는 거 꽤 피곤하죠?”“응”“학교 생활은 어때요? 한국 학생들이랑 처음인데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아요?”유모의 다정한 질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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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4

오전 10시.일요일 아침 늦게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 위에서 부비적거리고 있던 유진의 등 뒤로 불쑥 낯선 온기와 함께 단단한 팔이 허리를 스윽 감겨들었다.“악!”숨막히는 공포에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지듯 베개맡에 놓인 인형을 내던지고 일어났다.그 격렬한 반응을 보며 침대 위로 벌러덩 굴러 떨어진 불청객이 배를 움켜쥐고 눈물까지 흘리며 깔깔거렸다.“하하하! 야! 너… 류 회장인 줄 알았지? 아직도 이렇게 자지러질 정도면… 진짜 그 결혼 할 수 있겠어?”“언니!!! 심장 마비로 애 떨어질 뻔했잖아!”“애? 너... 류 회장이랑 그 정도로 뜨거운 거야?"유경의 장난 섞인 말에 유진은 어제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샹티의 레드 가터벨트가 생각나 얼굴이 화끈해졌다. 류라는 이름이 주는 숨 막히는 압박감에 유진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언니!!! 무식하게 속담도 모르는 거야? 근데 소식도 없이 대체 왠 일이야?"“서운하다. 내가 내 동생 집에 오는데 검문검색이라도 받아야 해?”프랑스 파리에 유학 중이어야 할 사촌 언니.특유의 화사하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유정이 유진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족다운 온기를 주던 사람.스위스 보딩스쿨 시절부터 유일하게 숨통을 트여주던 유경의 등장에 유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냥 동네에서 마실 온 것도 아니고… 파리에서 왔으면 최소한 하루 전에 연락은 주고 와야 공항으로 배웅이라도 갔을 거 아니야”“서프라이즈!”“미친!”“매일 같이 밥 먹던 내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비행기 탔어. 엄마도 몰라. 나 한국에 온 거”“호랑이 이모 알면 언니 그 자리에서 호적 파일 텐데… 미친 거야? 학기 중에 한국을 왜 와?”“그니까… 쉿!”“아! 그럼 유모부터 입 단속 해야 하는데…”유진이 다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자 유경이 자신의 명품 백을 톡톡 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걱정 마. 유모 입은 이미 내가 파리에서 공수해 온 한정판 명품 백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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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5

씁쓸한 농담에 유진의 시선이 다시 창 밖 화단을 정리하던 한 남자에게 멈췄다.헐렁한 작업복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어깨…땀방울이 맺힌 날카로운 턱선…“저 남자… 누구? 완전 섹시한 게 내 스타일인데?”유정의 호들갑에 유진이 작게 웃었다.“나도 저 남자 보자마자 언니 생각 했는데… 언니 맨날 빠져서 보는 무슨 일본 만화에 나오는 퇴폐미 넘치는 사무라이 같아서”“사이토!!! 맞아!!! 한국에 저런 피지컬에 저런 분위기 흔치 않은데… 야! 나 몰래 한국 귀국하길 잘 했다. 이렇게 눈호강도 하고 근데 좀 아깝다. 이런 막노동 같은 거 하기에는”“우리학교 의대생이야. 본과 3학년”“뭐? 저렇게 섹시한 의사쌤이면 나 맨날 꾀병 만들어서라도 아플래. 아! 그럼 혹시 아까 말한 nobody가 저 남자?”“응. 어쩌다보니 오다 가다 여기서 날 봐서… 근데 막 떠벌리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아”“그래? 그럼 됐네. 우리 오늘 뭐 할래?”“언제까지 몰래 여기 있을 거야?”“최대한 오래?”“뭐…야? 무슨 사고 친 건데?”“나… 자퇴했어”“뭐?”“미술 사학… 나랑 안맞아. 미술관에만 가면 가슴이 답답해. 공황 장애 올 것 같단 말이야”“우리나라 최고 미술관 관장 자리를 물려 받을 사람이 미술관이 싫으면 어떻게?”“그러니까 나 뭐 할까? 엄마 알면 나 쫓겨날 거고… 혼자 먹고 살 신박한 방법 어디 없을 까?”“쫒겨나기만 하면 다행이지. 근데 혼자… 자신 있어?”“아직은 모르겠어. 근데 그냥 먼저 질러보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유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신용카드를 건넸다.“일단 계획 세울 때까지 버텨보자. 이모 눈치 못 채게”“역시 내 동생!”“여기선 정 실장에게만 안 걸리면 되는데… 아! 어떡하지? 주말에 류 회장 여기서 지낸다고 해서 아무래도 그 여자 집 안 데코며 손님 접대 준비 한다고 여기 드나들 것 같은데”“다른 데 숙소 얻으면 되지 않을까? 그냥 호텔 가 있을 게. 일주일이면 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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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

“죄송해요. 저희 언니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무례한 부탁을 했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가셔도 돼요. 언니! 미쳤어?”유진은 당장이라도 에구치를 보쌈해 갈 기세인 유정을 반강제로 끌고 집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문이 닫히자마자 유정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야! 가만 있어 봐. 지금 저 남자 말고 더 좋은 대안 있어? 네 말대로 nobody! 저 남자 때문에 우리가 들킬 가능성도 제로! 들킨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고 거기다 네 비밀도 지켜준다는데 비밀을 여기저기 지레밭처럼 뿌려놓느니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낫잖아”“아무리 그래도… 이건 생판 모르는 남에게 민폐야”“거하게 저녁이나 사면 되지 않을까?”“저 남자가 우리랑 밥 먹고 싶다고 했어?”유진은 대책 없는 유정을 잠시 째려봤다.“머리 아프니까 보채지 말고 잠깐 있어 봐. 생각 좀 해 볼 테니까”결국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아무래도 부산 가자”“엥? 부산?”유정은 여전히 동생이 못 미더운 듯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거대한 여행 가방을 유진의 차 트렁크 깊숙이 밀어 넣었다.“진짜… 부산 리조트는 안전한 거야?”“류 회장 여기서 지낸다고 했으니까 내가 직접 가서 부산 리조트 관리자분께는 부산에서 지낸다고 거짓말 하면… 어쩌면?”“너… 부산까지 운전 가능하겠어?”“몰라. 해봐야지”“그냥 깔끔하게 기차 타는 건 어때?”“당일인데 자리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내 카드로 KTX 예매 하면 어떨 것 같아? 서울 시내 안에서는 어떻게든 내가 감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부산행을 끊으면… 바로 비서실에서 연락 올 걸? 무슨 일이냐고?”유진이 한숨을 쉬며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순간 사이드 미러에 꼿꼿이 서 있는 에구치의 길고 단단한 실루엣이 비쳤다.그는 미동도 없이 유진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것을 포착한 유정이 조수석에서 비명을 질렀다.“유진! 잠깐 세워!”“응?”유진이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유정은 잽싸게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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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7

청담동의 한 중고 명품 숍.유진은 자신이 가진 에르메스 켈리 백 컬렉션 중 하나와 반클리프 아펠 목걸이를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팔아치웠다.솔직히 평생 가격표를 보고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유진은 그 제품들의 가격도 제대로 몰랐다.그리고 거의 사용도 하지 않은 제품을 팔면서 숍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보여준 금액이 맞는 금액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손에 쥐어진 현금 뭉치가 생각보다 큰 금액이어서 차로 돌아오자마자 유진은 폰으로 중고 시세를 검색해 보았다.그리고 이내 이마를 짚었다.“아… 너무 싸게 팔았네”“뭐야? 우리 청담동 한복판에서 대놓고 호구 당한 거야?”“그러니까 대책도 없이 이렇게 서두르니까… 암튼 담부터는 국물도 없어”“알았다. 대신 크게 갚을 게. 사채이자로”유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어느 호텔로 갈래?”“글쎄… 반얀으로 갈까? 아님 깔끔하게 신라?”두 자매가 세상 물정 모르는 화려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뒷좌석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구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화에 훅 끼어 들었다.“얼마나 가출할 예정인 가요?”“최대한 오래? 하지만 안 들키고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6월 말에 다음 학기 등록금이 비서실에서 지불될 테니까. 그럼 대략 3개월?”유정의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에구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럼 그 다음은 요?”“이제 계획 세워 봐야 줘”“지금 버짓 (Budget)이 얼마 죠?”이번엔 유진이 백미러로 에구치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현금으로 대략 2천만원. 중간 중간 생활비는 내 카드로 결제하면 되니까… 3개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유진의 말에 에구치가 폰 화면을 슥슥 넘기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검색해 보니… 말씀하신 호텔 비용만 한달 3천인데 3개월 가능하겠어요?”“그럼…”순간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유정과 유진은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수천만 원짜리 명품 백은 가볍게 던지면서도 정작 한 달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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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8

“어디… 대안이라도…”유진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묻자 에구치가 뚝배기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제가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 마침 방이 하나 남거든요. 안 그래도 월세를 셰어할 룸메이트를 구하던 참이었습니다. 일단 와서 보시고 괜찮으시면 들어오셔도 됩니다”“괜찮으시겠어요? 동성이 아니라 불편할 텐데”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류하려 하자 에구치가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아… 불편하신가요? 요즘 기숙사도 거의 유니섹스라 괜찮으실 줄 알았어요"유정이 반색하며 끼어들었다.“전 괜찮아요. 파리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유니섹스 기숙사에 놀러가 본 적 있어서… 어떤 지는 대충 알아요. 근데 괜찮으신 거죠? 괜히 저희에게 휩쓸려서 무리하시는 거 아니시죠?”“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빈 방에 예전 룸메이트도 여자였습니다”“어머! 진짜요? 그럼 우리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당장 한번 가볼까요?”“잠깐만! 언니! 나랑 얘기 좀…”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유진은 유정의 팔목을 낚아채듯 끌고 순대국밥집 식당 밖으로 허겁지겁 나왔다.매서운 밤 바람이 뺨을 스쳤다.“언니! 이게 맞아?”유진의 다급한 다그침에 유정은 평소의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저 남자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경제적 독립 해야 하고 그게 아님 집에 복종 해야 하는 게 맞잖아”“언니! 나 저 남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좋은 사람인지 아닌 지도 모르고… 심지어 이름도 몰라. 그런데 저 남자와 같이 살겠다고?유진은 유정의 어깨를 꽉 쥐며 협박하듯 말을 이어갔다.“이거 이모가 알면… 진짜 정신병원에 감금될 거야. 농담 아니고 이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고? 만약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거 언니에게 괜한 구설수만 줄 수도 있어”“그 정도 각오도 없이 사고 쳤을까 봐? 대책은 없었지만 각오는 했어. 그리고 룸 세어 찾으면서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 사적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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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9

그의 집에 오자마자 유정은 집도 둘러보지 않고 유진의 차 트렁크에서 거대한 여행 가방을 낑낑거리며 꺼내 와 텅 빈 작은 아파트에 냅다 짐부터 풀었다.화려한 대저택에 비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좁고 소박한 아파트였다.벽에 비스듬히 기댄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얆은 티셔츠 너머로 풍기는 짙은 수컷의 체취가 좁은 임대 아파트 벽면에 부딪히며 묘하게 야릇하고 밀폐된 긴장감을 자아냈다.“이 방인데… 둘러 보세요”싱글 침대 하나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에 187cm의 단단하고 거대한 에구치의 체구가 들어서자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훅 밀려들며 비좁아졌다.“여기 지내기 괜찮겠어요?”에구치가 방문 틀에 기댄 채 묻자 유정이 침대 매트리스에 털썩 앉으며 화사하게 웃었다.유정의 얼굴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감돌았다.“네. 딱인데요. 제 마음에 쏙 들어요”“그럼 한달에 50만원. 공과금 포함해서 주면 됩니다”“저 혼자 쓰는 비용인 거죠?”“네”“그럼 월세를 100 드릴게요. 그럼 유진이 여기서 맘껏 있어도 될까요? 여기 유진이 학교 바로 앞이고 저랑 유진이 한 몸이라 계속 붙어 다닐 것 같은데”에구치는 탁자 위의 현금 뭉치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하게 대꾸했다.“공간이 크지 않아서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면 70만원만 주시죠”“아니요. 100 드릴게요. 그래야 저도 유진이도 맘이 편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공용공간에서 생활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할게요. 불편하시지 않게”“전 상관없어요. 집에서는 잠만 자니까…”에구치의 무뚝뚝하면서도 배려 깊은 태도에 유정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근데 호칭은 어떻게 정리할까요?”“맘대로 하세요. 편한대로”“그럼 오빠? 어때요?”“저 죄송한데… 먼저 일어나 볼게요. 언니! 나 갈게”“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집에는 이미 안 들어간다고 했는데 왜?”“그건 부산 갈 줄 알았으니까 그런 거고 언니도 피곤할테니까 그냥 혼자 편히 쉬어”유진은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좁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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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새벽 5시 30분.유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유진은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정원 한편의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묵묵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잠시 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친 유진이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허리를 숙여 흙을 만지던 에구치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유진은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어제 저희 언니가 밤늦게까지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죠?”“네. 괜찮습니다”“다행이네요. 워낙 대책 없는 스타일이라 걱정했거든요”“그럼… 다음에 뵙죠”에구치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 하자 유진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을 뻔하다가 허공에서 손을 거두며 외쳤다.“저! 제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 드릴 게요”“네?”에구치의 짙은 눈동자가 유진을 향했다.유진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여기…지대가 높아서… 아래 정류장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고 힘드니까”“괜찮습니다. 바이크로 와서…”에구치가 헬멧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리고 정원 한 편에 서 있는 블랙 색상의 바이크가 눈에 보였다.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묵직한 바이크 시트 위로 무심히 걸쳐지는 순간…엔진이 거칠고 와일드한 배기음을 토해내며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매캐한 가솔린 냄새와 에구치의 묵직한 잔상이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유진은 자신이 선의로 베푼 호의가 단칼에 베어나가자 가슴 한구석이 쌉싸름했다.마치 자신과 친해지기를 꺼려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정중했다.어제 저녁 순대국밥집에서 유정의 엉뚱한 궤변을 들으며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그 남자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온도감.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서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전공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유진의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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