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91 - Chapter 100

106 Chapters

#90.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회사에 출근한 뒤, 나는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오전 내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흔한 메신저 하나 오지 않아, 오롯이 내게 주어진 업무에만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그리고, 메신저 이름에 불이 계속 꺼져 있는 차준호 덕분이기도 했다.어차피 그와 내가 머무는 층수부터가 달랐고, 일개 과장급인 내가 회사의 최고 머리인 대표와 사적으로 마주칠 일 따위는 없었으니 자연스레 거리감이 생겼다.차라리 잘된 일이었다.그렇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는 미련 따윈 정말 단 1도 없었다. 더 정이 들면 나만 힘들어질 뿐이고, 그가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결국엔 잔인한 희망 고문이 될 터였다.‘언젠가 흐지부지되겠지.’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하며 묵묵히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시각이 되었다.***회사 생활의 꿀맛 같은 점심시간. 일단 무료로 제공해 주는 카페테리아지만, 매일 두유만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 1층 편의점이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챙겨 일어났다.혹시나 하고 기사나 검색할까 하며 화면을 켜자마자 단연 눈에 띄는 핫이슈는 역시나 강소희와 차준호의 이야기였다. 인터넷 여론은 이미 두 사람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그래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강소희가 방송에서 그런 뉘앙스로 말하진 않았을 텐데.’여론의 반박 기사에도 불구하고 차준호의 이름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계 인사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자극적인 추측성 기사들까지 우후죽순 쏟아지는 상태였다.가슴 한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려왔다. 차준호에 대한 생각을 끊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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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내 감정이 머리를 배반할 때

붕어빵과 바닐라 라떼라니.최기범의 뜻밖의 센스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봉투 안에서 따스한 붕어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텅 빈 위장을 자극하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며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내가 통화를 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편히 전화를 나누라며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간 그의 뒷모습에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때, 수화기 건너편에서 도국이 빠르게 말을 이어 붙였다.- 하늘아, 제대로 챙겨 먹고 일해.역시 오랜 친구는 달랐다.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 침을 삼키던 찰나였는데, 녀석의 천리안은 거의 수준급이었다.“알았어. 고마워.”혼자 산 지 오래되다 보니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게 어느새 나쁜 습관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비서실에서 일할 때는 늘 흐트러짐 없는 옷 태만 신경 쓰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식사에는 소홀하곤 했었다.내가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살이 빠진 건 아닐까 염려하며,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양손 가득 먹을 것부터 사 들고 오곤 했었는데.-이따 저녁에 뭐 좀 배달 시켜 줄까?멀리서도 이리저리 신경을 써주는 다정함이 그리 감사할 수가 없었다.“와, 우리 도국이가 애인인 사람은 참 좋겠다. 진짜 매일이 행복할 것 같아.”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차 싶은 순간 이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내 몸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친구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드린 것 같았다.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도국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한참 동안 서늘한 침묵만이 돌아왔다. 나는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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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폭군의 선물이 쏟아져 내려

차준호는 신하늘에게 잘 먹었냐고 말을 하려다 그냥 멈추었다.도국에게 비호를 받고 그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를 터.차준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마치 안갯속에 잠긴 미로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것들마저 낯설게 느껴져 그의 판단을 주저하게 만들었다.“허 실장, 내가 지금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지금도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차준호는 미간을 좁혔다.허기찬은 입을 한번 삐죽거리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그리고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듯 노트북에 있는 다른 영상을 클릭하면서 잘 들여다보게 각도를 맞춰 주었다.“어휴, 대표님.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호수처럼 고요해 보이시네요. 저 같으면 드러누웠을 것 같은데요. 이건 시작도 아닙니다. 각오하세요. 몸도 멘탈도 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허기찬의 눈빛엔 차준호가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 스쳤다.뭘 시작도 안 했다니. 차준호의 어깨는 마치 세상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 듯 축 늘어졌다. 당장이라도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그 욕망을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우리 회사 CCTV 몇 대 더 설치해.”그때 허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메모를 했다.“네, 알겠습니다. 참 이건 다른 회사 영상입니다.”차준호는 다른 화면으로 시선을 보낸 다음 허기찬의 설명을 들었다.어지간히도 하나에게 실망스러운지 허기찬은 입을 삐죽거렸다.“여기는 JW 소속사라고 하네요. 하나 그것이 참 엉큼한 애였더라고요. 요즘 그곳도 드나든다고 하네요.”차준호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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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유리구두가 그녀에게 선사될지도

차진철 회장은 2월 달력이 넘어가자마자 CC그룹의 임원단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정신없이 회의를 끝내고 회장실로 돌아와 무거운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어도, 가슴을 짓누르는 갑갑한 잡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고미주로 인해 차준호가 쓰러진 게 아닌지 골머리를 앓느라, 허송세월만 덧없이 보낸 꼴이었다.결국 고미주를 내보내고 난 저택은 텅 빈 고요함만이 맴돌았다.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술독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고미주와 가까워진 것도 딱 그 무렵이었기에, 차진철은 그때의 방종했던 자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자신을 느닷없이 떠났던 고미주가 3년 전 갑자기 나타나, 차진아가 아프니 제발 도와달라며 눈물로 매달렸을 때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사정을 차준호에게 털어놓자마자,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 호텔로 가버렸었다.차진철은 고미주와 차진아에게는 평생의 죄인이었고, 차준호에게는 더없이 못난 아버지였다. 텅 빈 거실 주방에서 홀로 식사할 때마다, 녀석의 빈자리가 뼈아프게 실감 나곤 했다.집안 분위기가 이토록 흉흉해진 것도 벌써 3년째였다. 그 무뚝뚝하던 녀석이 올해 들어 뜬금없이 연예인과 열애설이 터지질 않나, 교통사고에 이어 식사 도중 발작 증세까지 보이니 말이다. 이 모든 비극이 전부 제 업보 같아, 요즘 들어 빳빳하게 당겨오는 목덜미를 짚어내는 날이 부쩍 늘었다.“회장님, 약은 드셨습니까.”“그래. 날 이리 챙겨주는 사람은 선우현 실장밖에 없군. 그나저나 우리 준호 건강도 걱정이고.”선우현은 차진철의 깊은 고뇌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는 듯,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약과 물을 대령했다. 오랫동안 곁을 지키며 알아서 제 도리를 다해내는 선우현이야말로, 이 무거운 속내를 유일하게 털어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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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자꾸 선을 넘으려 하다니

같은 시각, 달리는 차 안.인터넷상에는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온갖 억측이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연초부터 계속되는 JW 관련 소음 탓에 대중은 서서히 피로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CH의 주가가 승승장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JW는 걷잡을 수 없이 출렁거리며 시장의 불안감을 자극했다.오늘 예정된 예능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러 가던 도국은, 차 안에서 이아준과 통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바쁘게 화면을 두드리며 폭락한 JW의 주식을 무서운 기세로 쓸어 담고 있었다.- 우리 도국이 전문 투자자 다 됐네? JW에 무슨 일이 터져도 금방 회복될 거야. 네가 버티고 있는데 뭔 걱정이냐?사실 대외적인 리스크라고 해봐야 강소희가 헛소리를 하고 다닌 것 정도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주가가 이토록 기이하게 영향을 받는 이유를 도국 역시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다.“아준아, 주식 판은 점쟁이도 모르는 법이야.”그나마 최근 뜬금없는 스캔들이 터져 주가가 이상 과열되었을 때, 타이밍 좋게 일부를 처분해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둔 도국이었다.-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CH가 더 건재해. 조만간 그쪽에 대형 호재가 터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JW에만 올인하지 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아준의 충고에, 도국의 단단한 입매가 일순간 차갑게 굳어버렸다. 안 그래도 최근 신하늘이 제게 주식 계좌 관리를 전적으로 위탁했는데, 그 계좌 안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CH-컴퍼니가 더 우량주이기는 한데······.”도국은 화면에 띄워진 신하늘의 주식 계좌 상세 내역을 다시금 매섭게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을 아꼈다. 화면 속, [수증 동의 대기] 탭 아래로 신하늘의 이름 앞으로 배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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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감히 나를 길들이려고?

금요일 아침, 날씨가 궂어 그런지 창밖은 온통 낮게 가라앉은 서늘한 침묵뿐이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대표실 내부에는, 오직 두 개의 대형 모니터가 일정한 주기로 내뿜는 푸르스름하고 인공적인 빛만이 고요하게 깜빡이고 있었다.카페인 부족 탓이었을까. 관자놀이를 잘게 짓누르는 고질적인 두통이 밀려왔다. 차준호는 미간을 꾹 누르며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킨 채, 서류의 다음 페이지를 거친 손길로 넘겼다. 공간의 적막을 깨고, 저만치 소파 테이블 위를 분주하게 정리하던 허기찬의 감탄 섞인 웅얼거림이 툭 치고 들어왔다.“와······ 대표님, 우리 신 비서를 진짜 아끼시나 봐요.”그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차준호는 서류 검토를 하던 펜 끝을 딱 멈추었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미간은 이미 지울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버린 후였다.“신 과장이야. 직급 바뀐 지가 언제인데.”낮게 내리깔린 차준호의 지적에 허기찬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아이고, 신 비서라는 호칭이 워낙 입에 착 붙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에, 신 과장을 단숨에 CH-컴퍼니의 대주주로 만들어 버리다니요. 아무리 특별 성과급 명목이라지만, 이건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어마어마한 규모인데요?”허기찬이 태블릿 화면 가득 띄워진 주식 무상 증여 명부와 지분율 수치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 경악 어린 시선에도 차준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허공에 멈추었던 펜을 다시 움직여 서류 위로 서명을 갈겨쓰며 낮게 읊조렸다.“그동안 고생했잖아. 받을 자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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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안개 속에서 헤매는 바보 같은 나

카페테리아에 들어서자, 탁 트인 창가 쪽 테이블에는 이미 먼저 내려온 나정아 대리와 한은숙 대리가 마주 앉아 식사를 즐기던 중이었다.“어, 신 과장님! 이쪽이에요, 어서 오세요.”“이것 좀 같이 드세요. 한 대리님이 집에서 챙겨오신 샐러드가 아주 별미네요. 제 김밥도 몇 개 맛보시고요.”그들의 살가운 환대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는 아침에 싸 온 도시락 통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위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번져 나갔다. 따끈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들고 테이블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붉은 양념이 잘 배어든 소박한 김치볶음밥. 화려하진 않지만, 숨 가쁜 사내에서 가장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 같은 식사였다.“아, 별거 아니지만 제 것도 같이 좀 드세요. 일부러 넉넉하게 볶아왔거든요.”커다란 밀폐용기에 가득 담아온 볶음밥을 테이블 한가운데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두 사람은 “오호, 대박!” 하고 눈을 반짝이며 비치된 종이컵에 밥을 조금씩 덜어 갔다.“어머, 윤기 흐르는 것 좀 봐. 김치볶음밥은 언제 먹어도 진리죠. 잘 먹겠습니다, 과장님!”“우와, 반찬으로 곁들여 오신 파김치도 진짜 제대로 익었네요. 빛깔 좀 봐.”새빨갛게 잘 익은 파김치를 보는데, 뜬금없이 심장 한구석이 쿡 찔려왔다.‘예전에 대표님도 파김치는 좋아하던데······.’또, 또! 틈만 나면 온통 차준호 생각만 하는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불쑥 튀어나온 그의 잔상을 억지로 몰아내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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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도대체 그 남자의 욕망이 뭐길래

고민이라. 나의 고민을 눈치챈 걸까.아니면 이아준 본인에게 무슨 고민이 있어서 먼저 운을 뗀 것일까. 어쨌든 내 입장에서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든 환영이었다.녀석은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 덜 추운 곳에 있다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굳어 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가벼운 손놀림으로 아준에게 안부 답장을 보냈다.[고민이야 항상 많지. 아준아, 타지에서 고생이 많구나. 나도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한가해. 수다는 언제든 환영이야.]지금 여기가 한창 점심시간이니, 그곳은 늦은 저녁 시간일 터였다. 서로 통화하기에는 편한 타이밍이겠다 싶을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 화면이 반짝이며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하하, 우리 하늘이. 점심은 뭐 맛있는 거 먹고 있어?“그냥 김치볶음밥 먹는 중이야. 다들 연예인 구경하러 우르르 나가 버려서 나 혼자 아주 한가해.”내 심드렁한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이아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이해되네. 우리도 맨날 도국이 구경하는 재미로 살잖아. 아, 나도 진짜 바쁘지만 않으면 너희랑 맨날 게임이나 하고 집에서 뒹굴거릴 텐데.“아준아, 너는 돈도 그렇게 많으면서 왜 그렇게 매일 일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거야?”나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을 법한 순수한 의문이었다. 툭 던지듯 건넨 질문에, 이아준은 이내 진중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변을 건넸다.- 하늘이 너도 차준호 대표의 비서 해봐서 잘 알잖아. 거대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건 정말 살인적인 업무량을 동반하는 일이야. 아, 또 차준호였다.하긴, 그 남자가 워낙 일중독자처럼 바쁘게 움직였기에 비서로서 곁에 붙어 있던 시간도 길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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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구차하고 지독한 악취미

“아준아, 미안. 지금 누가 와서 이제는 끊어야 할 것 같아.”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내가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자, 수화기 너머의 이아준은 특유의 영민함으로 곧장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래. 누가 왔나 보네. 하늘이 너도 주말에 너무 무리해서 회사 일에 봉사하지는 말고.“응, 그래. 주말에 눈 오고 추워질 것 같아. 봉사는 적당히 할 거야. 신경 써줘서 고마워.”그렇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 화면이 검게 꺼지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 서 있던 최기범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다. 조금 전 이아준과의 정략결혼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은 걸까. 나는 최대한 동요를 감추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저도 뭐······ 가끔은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누기도 하죠. 최 실장님도 그러실 거 아니에요.”내 인위적인 질문에 최기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난 못 그러는데.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느라 바빠서 말입니다.”하긴 강소희나 차준호라면 그러고도 남아 보였다. 능청스러운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짓던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해외 일정을 입에 올렸다.“이번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덕분입니다.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왔죠.”최기범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으며, 이내 장난기를 지운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그나저나······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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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그 여자의 겨울, 그 남자의 봄

시계 바늘이 이미 저녁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금요일이라 다들 서둘러 퇴근한 바람에, 텅 빈 사무실에는 규칙적인 키보드 타자 소리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바짝 마른 내 뺨을 피로하게 비추었다.뻐근해진 목을 뒤로 젖히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마음 한구석을 채운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주말에 정말 눈이 오면 피곤해질 터였다. 날씨 예보 앱을 켜자 주말 내내 폭설이 예보되어 있었다.이번 주말에는 서쪽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이 예정되어 있는데.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온몸으로 뛰며 짐을 나르고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눈까지 쏟아진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했다.그렇다고 나보다 더 바쁜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그 대단한 녀석들의 시간을 고작 내 사소한 의무감 때문에 뺏는 건, 아무리 친구라 해도 미안한 짓이었다.스스로 동선을 짜고 시간표를 재점검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밀려드는 막막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습관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날씨 점검을 하던 손가락이, 순간 사진첩의 한 구석에서 멈춰 섰다.화면 가득 떠오른 것은 이제 보고 또 봐서 마르고 닳을 것만 같은 차준호의 얼굴이었다.***휴대폰을 덮고 다시 남은 일을 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오류 파일들을 전부 전송하고 나서도 머릿속에는 방금 본 그 사진이 내내 맴돌았다. 이 정도 되면 병이지 싶었다.최기범까지 합세하여 내 자취방 보일러 상황을 점검하겠다며, 셋이서 함께 웃으며 수제비를 떠먹던 날의 기록이 대체 뭐라고 이토록 대단하게 감각을 지배하는 걸까.퇴근을 위해 택시 앱을 열어 예약을 건 다음, 휴대전화를 덮으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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