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의 모든 챕터: 챕터 101 - 챕터 106

106 챕터

#100. 하얗게 쌓여가는 거짓말들

2월 첫 주 토요일 날이 밝았다. 눈이 펑펑 오는 토요일 아침이지만 출근한 차준호는 그래도 허기찬과 웃음 꽃을 피워냈다.일의 성과가 뚜렷하고, 회사가 잘 되면 바로 성과급으로 보상하니.회사 직원들의 애사심이 날로 커지는 건 바라던 바였다.오늘도 여기저기 활기차게 주말이지만 일하러 나온 직원들은 상당했다.“하하! 대표님, 기억 돌아오신 거 맞죠?”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쥐고 있던 볼펜으로 책상을 가볍게 탁, 탁, 내리쳤다.“무슨 사람이 개연성이 없어? 뜬금없이.”순식간에 머쓱해진 허기찬이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예전에는 토요일 칼같이 쉬시더니, 요즘은 다시 밤낮 주말도 없이 일하시니 그렇죠.”예전에는 신하늘이 주말에 바빴기에 그리 시간을 비워주려 했던 것도 이제는 생각나는 그였다.기억이 전부 돌아온 건 아니지만 문득문득 단편적인 사건들은 이제 떠오르는 그였다.“우린 일하는 것이 변동성이 잦잖아. 대신 휴가도 한 달씩 쓰게 해주고.”의외로 차준호는 신하늘에게 맞춰서 일을 했던 것도 생각나니 허탈하게 웃음만 나왔다.‘···그러니, 신하늘에게도 그런 계약을 채웠겠지.’인사 기록과 계약서를 보면, 과거의 자신이 그녀를 마치 깨지기 쉬운 고급스러운 유리잔처럼 다루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언제든 산산조각 나 흩어질 것 같은 신하늘을, 경제적인 사슬로 단단히 묶어두려 했던 것이 본질적인 진실이었다.신하늘의 계약 만료 예정일은 다가오는 2월 말. 현재 그녀는 IT 계열인 CH의 과장으로 근무 중이니, 이 경력을 인정받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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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유리같이 아슬아슬한 우리들

이 아침에 대체 누가 찾아온 걸까.현관 쪽을 살피며 거실로 나와보았지만 사위는 그저 조용했다. 잘못 들은 걸까. 초인종을 달랑 한 번만 누르고 사라지는 사람은 없겠지 싶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진짜 도와줄 사람 불렀어?수화기 너머로 이아준이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어, 그러니까 걱정 마.”대충 둘러대며 설거지를 빠르게 마무리 짓고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냈다.- 너 병나면 어르신들이 더 속상해하셔. 제발 몸 좀 살피면서 해.“알았어. 그런데 이제 여기서 봉사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내 나직한 말에 아준이 잠시 침묵했다. 실제로 동네 어르신들 중 많은 분이 이주를 하거나 세상을 떠나, 이제는 고작 몇십 가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10년 전만 해도 친구들과 달라붙어 이틀 내내 매달려야 했던 봉사였는데, 지금은 혼자서 해도 하루면 충분히 끝날 정도였다.- 그래, 버틸 만큼 버텼지···. 올해 넘기기 힘들 거야.이아준의 말대로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재개발이 빠르게 추진되는지 골목마다 이주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고,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대형 광고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다가오는 봄이 되면 나 역시 언제까지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순리대로 살아야겠지. 아준아, 그럼 오늘 밤에 게임에서 만나.”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다정한 인사가 오간 뒤 통화가 종료되었다.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이아준이 머무는 곳이 따뜻한 나라라서 참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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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급발진하는 남자들, 왜?

택배조차 가기 꺼리는 좁디좁은 골목길.나는 점심도 거른 채 어르신들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한 집 한 집 건네며 구슬땀을 흘렸다. 미로처럼 어지럽게 꼬인 골목길은 마치 내 복잡한 삶을 닮아 있었지만, 발걸음이 닿는 골목 구석구석마다 어린 시절의 따스한 웃음 조각들이 반짝이고 있었다.봉사를 하는 동안만큼은 나라는 사람도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늘 몸은 고되어도 힘든 것보단 마음의 보람이 훨씬 컸다. 다만, 요즘은 차준호 때문에 정신이 너무 없었던 탓에 물품을 풍족하게 준비하진 못했다. 죄송한 마음에 대신 용돈 봉투를 조금씩 따로 챙겨 다음 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계셨다.“···하늘아. 이 추운 날 우리 집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눈이 더 많이 올 것 같아. 어서 가.”할머니의 말대로 한낮인데도 사방이 어둠침침했고 먹구름이 하늘 가득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돌아야 할 집이 이십 군데는 더 남았기에 발걸음을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나는 카트에서 라면 한 박스와 쌀 5킬로그램 한 포대, 그리고 방한 조끼와 생필품 세트를 꼼꼼히 전달하며 집안 형편을 살폈다.“할머니, 내일 제가 창문에 문풍지랑 뽁뽁이 좀 새로 덧발라 드릴까요?”“어? 그러면 너무··· 좋지. 내가 테이프로 대충 붙였는데 요령이 없어서 말이야···. 그런데 실은 화장실이 문제야.”나는 휴대폰을 켜서 '10번째 집, 창문 뽁뽁이 작업 필요'라고 재빨리 메모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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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눈 속에서 등장한 불청객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도국의 손에는 무언가 묵직하고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늘 그렇듯 나를 위해 음식을 사가지고 온 것 같았다.“하늘아, 고생했어.”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녀석이 이 시간대에 장까지 봐서 찾아오다니. 놀란 내 입가에서 새어 나온 하얀 숨결이 옅은 한숨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어떻게 시간을 낸 거야?”“그냥 와봤어. 그런데··· 저 직장 상사분은 왜 여기 계셔?”도국의 날선 시선이 최기범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뜬금없게 최기범 역시 다가오는 도국을 보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렸다.“도국 군. 내가 연장자이니 말 편하게 하겠습니다. 그쪽은 워낙 유명인이니까 주변을 좀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최기범이 나름대로 도국을 염려해 건넨 말이었지만, 도국은 그 배려가 외려 불쾌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카롭게 받아쳤다.“그쪽이야말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왜 온 겁니까?”날도 춥고 눈보라가 치는데.두 남자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말려야 하는데. 최기범은 한 걸음 더 도국에게 다가가더니 바로 말을 뱉었다.“갈비탕 얻어먹으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겁니다. 도국 군이야말로 연예인이 여자 혼자 사는 집 주변에 이렇게 함부로 드나들면 안 되지 않습니까?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초대하지도 않은 남자 둘이서 대낮에 남의 집 앞 골목을 장악하고 대체 뭐 하는 짓들인지. 둘이 옥신각신 입씨름을 벌이는 사이, 나는 카트 속 물건들이 한쪽으로 쏠려 엎어지지 않게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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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흐려지는 경계가 두려운 순간

내가 정차하려던 차를 빤히 바라보자, 그 차는 그저 갈 길을 가기 위해 골목을 바로 벗어나는 지나가던 차량일 뿐이었다.누가 더 올 사람이 있다고.사실 설마 하는 마음에 차준호의 차가 아닐까 생각한 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하늘아, 서둘러.”“어, 그래.”칼바람이 뺨을 아리게 에었지만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모든 집을 다 돌고 나서도 두 사람은 뭐가 아쉬운지 다시 몇몇 집을 재방문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마음이 안 놓였던 모양인지, 근처 마트로 전력 질주해 자재들을 사 와서는 덜덜 떨리는 창문에 뽁뽁이를 새로 붙이고 욕실과 주방의 부서진 곳까지 뚝딱 보수해 주었다.방문한 집마다 사진을 찍어두고 스마트폰에 보수가 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꼼꼼히 기록하며, 다음에도 또 올 것처럼 구는 두 남자의 모습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두 분 덕분에 어르신들 한파 걱정을 많이 덜었어요. 감사해요.”내 인사에 최기범은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꽤나 뿌듯한 기색이었다.“신 과장, 나 이래 봬도 공대 출신입니다. 다음에도 날 불러 주십시오.”“하늘아, 너도 고생 많았어.”사실 아침에 믹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채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모든 일과가 끝나고 그제야 아찔할 정도로 허기가 밀려왔다. 자연스럽게 카트를 밀어 마당을 지나 집 안까지 들여다 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이대로 그냥 돌려보내자니 너무 미안하고, 그렇다고 집 안으로 초대하자니 묘하게 어색했지만, 살벌한 추위 속에서 고생한 이들을 그냥 모른 척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다들 잠깐 들어와서 요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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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술잔 속에 스며든 진실

차준호는 프라이빗 룸의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즐기며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떠올렸다.예전에는 늘 허기찬과 함께 다녔던 곳이었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신하늘과도 함께 왔던 일들이 이제야 조금씩 되살아나는 그였다.“내 기분 같아서는 한두 달 만에 다시 온 것 같군.”“그건 대표님 입장이시고요, 전 무려 3년 만입니다. 그전에는 맨날 신 비서랑만 여기서 저녁을 드셨으니까요. 이제 기억이 대충은 돌아오신 것 맞죠?”허기찬은 참 집요했다. 여전히 요즘의 그는 기승전결이 모두 기억 타령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그 말 좀 그만해. 기억이 있고 없고가 허 실장하고 무슨 상관이야?”핀잔을 주자 역시나 허기찬이 발끈하고 나섰다.“그거 만능 치트키처럼 하실 말씀 없으면 남발하시던 사람이 누구시더라? 어휴, 됐고요. 저 술 시켜도 되죠? 요즘 하도 힘들어서 이 정도 술은 얻어먹을 자격이 차고 넘치는 것 같거든요.”허기찬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차준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정종을 주문했다.차준호 역시 잔을 기울이며 깊어가는 방 안의 편안한 공기에 몸을 맡겼다. 정갈한 음식과 그윽한 술이 곁들여지자, 토요일 밤은 빠르게 무르익어갔다.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허기찬의 목소리가 낮아졌을 때, 비로소 마음속 깊은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었다.***“아, 대표님···. 신 비서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새 비서를 남자로 뽑겠다는 차준호의 지시에 따라 이제야 겨우 채용 공고를 올린 상태였기에, 그간의 업무 공백은 고스란히 허기찬의 몫이었다.“사람 그리 쉽게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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