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Bab 71 - Bab 80

105 Bab

#70.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

시계가 정오를 가리킬 즈음, 찾아오는 무기력함이 어깨를 짓눌렀다.아침에 도저히 머리가 아파 타이XX을 하나 먹었는데. 속도 쓰리고 약기운이 떨어지자 얼굴에 열도 오르고 있었다. 빈속에 또 약을 먹기는 부담스러워 화장실에 가서 세수부터 했다.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난방이 잘된 사무실이 포근하게 느껴져 차라리 야근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뭐라도 먹고 약을 먹기 위해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정아가 도시락을 꺼내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어머, 과장님. 스타일이 또 바뀌었네요.”나정아가 쪼르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스타일이 좋다는 둥, 모자를 쓰고 오니 전혀 다른 사람 같다는 둥 재잘거렸다. 비서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장인데, 이곳에서는 용납될 것 같아 저지른 만용이었다. 민망하긴 했지만 그럼 어쩌겠는가. 보일러를 안 틀고 자는 바람에 물이 얼어 씻지도 못하고, 감기 기운까지 돌아 이판사판인 것을.“아, 머리를 안 감아서 모자 썼어요.”“그래서 지금 세수하고 오셨구나. 와, 생얼! 이쁜 사람은 뭘 해도 다르네요. 하하. 멋져요, 멋져. 힙하다 힙!”힙은 무슨.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온장고에서 따뜻한 두유를 꺼내며 내 모습을 훑었다.“이거 드세요. 늘씬한 분은 뭘 입어도 예쁘네요.”이런 칭찬은 참 어색한데. 난 그래도 두유가 반가워 병을 열며 싱겁게 웃었다.“잘 마실게요. 고마워요.”한두 모금 마시다 보니 편안하게 잘 넘어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한 병을 다 비워냈다. 달콤하고 따뜻한 온기가 몸 안 가득 퍼지자 기분 탓인지 보약을 먹은 듯했다. 그러자 나정아는 세상 신기한 생물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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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반전, 뜻밖이잖아?

세나는 주말 내내 복잡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 오늘 스케줄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회사로 향했다.여자의 직감은 무시 못한다고.도국과 통화한 사람이 ‘하늘’이라고 하던데. 세나는 신하늘이 도국의 첫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요즘 세나 자신이 대세 여자 아이돌이면서 도국과 스캔들이 났다는 사실을 분명 저 여자도 알 텐데. 사실 소속사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고, 자신을 스카우트한 것도 신하늘이라 인사 못할 이유도 없었다.늘 원피스 차림만 봤는데, 오늘은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후드티에 면바지, 모자까지 눌러쓴 모습은 평소 세련된 비서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그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65에서 168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슬림한 체형, 화장기 없는 청순한 이목구비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도국 오빠는 화장품 냄새를 싫어하는데.’가까이 다가가 보니 방금 세수를 했는지 완벽한 민낯에서 맑은 비누 향만 솔솔 풍겼다. 메이크업 없이도 빛나는 외모라니, 세나는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느꼈다.조금 전에도 도국과 통화를 한 것 같았으니, 이건 100퍼센트 확실했다.“혹시 신 비서님, 도국 오빠를 아시나요?”갑자기 왜 도국을 언급하냐는 듯, 신하늘은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다.“그걸 왜 물으시죠?”“아, 제가 요즘 도국 오빠와 말이 돌고 있어서요. 그냥 친구분이시면 인사나 드리고 싶어서요.”신하늘은 세나의 질문에 당황한 듯 표정을 굳히고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러다 &l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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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노골적인 정면승부

“직장 적응할 만합니까?”최기범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나직하게 물었다.이제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말을 얹기는 민망했지만, 마음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편한 게 사실이었다.“네. 덕분입니다. 매 순간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충동적으로 사직서까지 던지려 했던 것을 떠올리면,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뼈가 굵은 베테랑들로 가득 차 있어 나는 그저 햇병아리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묘한 고양감이 일었고, 더 의욕적으로 일을 배울 맛이 났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세종동, 거긴 집이 너무 낡았던데. 보일러는 괜찮습니까?”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몸이 움찔 굳었다. 하필이면 오늘 아침, 보일러가 차갑게 고장 났는데. 정곡을 찔린 당혹감에 난 캡모자를 더 질끈 눌러쓰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네, 뭐. 그럭저럭요.”“그 동네 워낙 노후되어서 겨울나기 힘들 텐데······.”최기범이 서류를 정리하며 다정하게 눈길을 건넸다. 무뚝뚝한 얼굴에 담긴 다정함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컸다.사실 세종동 사정은 그곳 주민이니 잘 알 터였다. 물론 그는 동쪽 동네에 살고 있지만, 매일 서쪽 사정은 마주할 테니 말이다.“······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출근길에 태워달라거나, 퇴근할 때 데려다달라고. 그리고 나 나름 공대 나온 남자니까, 집에 뭐 고장 나면 편하게 불러도 좋고.”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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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Warning Notice(그대를 위한 경고)

차준호는 엔터 분야에 있어서 어지간한 톱 연예인들의 러브콜은 거절했었다.신인을 키우고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는 것이 즐겁지, 이미 대성한 연예인을 거금을 주고 데려오는 건 별로였기 때문이었다.업계 정점에 선 톱스타가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고 경쟁사 대표의 개인 라인을 직통으로 뚫으려 하다니. 도국의 이 무모하고 저돌적인 접근이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황당했다.-대표님, 그래도 도국 씨와 통화는 한번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허기찬이 인터폰 너머로 끈질기게 설득해 왔다. 인맥 관리 차원에서라도 선을 대두면 무조건 유리하다는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논리였다. “그래도 난 도국이랑 엮일 생각 없는데.”단호한 거절에 허기찬의 짙은 한숨 소리가 인터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일이 아닌 다른 목적일 수도 있어서 그럽니다. 신 비서님이랑도 각별한 사이잖아요. 다른 회사들은 도국이랑 한 번 만나보려고 줄을 선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3년 전과는 완전 달라졌어요.시대가 바뀌었다며 허기찬은 장황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류 열풍은 가히 신드롬 그 이상이었고, 막대한 자본의 흐름은 물론 연예인 한 명의 브랜드 파워가 기업의 국익마저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다. 지난 3년이란 공백기 동안, 한류 스타의 영향력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거대한 권력이 되어 있었다.그러나 정작 차준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내린 단어는 따로 있었다.신하늘이라니. 정말 도국이 비즈니스가 아닌 다른 목적을 품고 제게 접근하는 걸까. 차준호의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가 느리게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면, 그 오만한 톱스타가 바라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기는 했다.“알았어. 연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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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본능적으로, 로그인

업무용 메신저 우측 하단에서 단발성으로 깜빡이는 게 아니었다. 붉은 빛을 내뿜으며 계속해서 점멸하는 긴급 메시지의 정체는, 뜻밖에도 반전이었다.[삐뽀! 삐뽀! 홍보실 한은숙 대리님이 신 과장님 생각나서 샌드위치 엄청 많이 싸 오셨대요! 또 두유로 대충 때우거나 점심시간 놓치지 마시고 빨리 같이 먹어요!]나정아였다.‘아, 나를 위해 준비해 준 샌드위치라니.’티타임을 가질 여유 따윈 없어서 곧장 거절하려던 찰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제야 몸이 지독한 허기를 인지해 왔다. 그러고 보니 새벽부터 정신이 없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잠시 쉬어갈 겸 답장을 보냈다.[아, 감사하네요. 그럴까요.][점심시간인데 밖에 나가기 너무 춥잖아요. 구내식당 내려가기도 귀찮으니까 오늘은 이걸로 해결해요!]점심시간?“이런.”시계를 보니 벌써 12시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오전 한나절이 통째로 증발해 버린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직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비운 채였다.***나정아, 한은숙과 함께 짧지만 유쾌한 점심시간을 보내고 온 나는 타이xx을 다시 챙겨 먹은 뒤 모니터 앞으로 복귀했다. 한 번 탄력이 붙은 작업은 무서운 속도로 진척을 보였다.직원들이 하나둘 가방을 챙겨 퇴근할 무렵인 저녁 즈음, 까다로운 오류 하나를 추가로 해결했다. 이로써 최기범 실장이 던져준 미션도 벌써 절반이나 달성한 셈이었다. 한결 여유가 생겨, 그 뒤로는 팀원들과의 협업 프로세스를 구상하며 남은 오류들을 정밀 분석해 나갔다.그렇게 다시 지독한 몰입 속으로 빠져들었던 그때, 키보드 위에서 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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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OFFLINE, 도망쳐야 하는데

차준호는 망설임 없이 과거 대화 이력을 검색했다.일반 직원들과 주고받은 로그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원체 텍스트 소통을 귀찮아하고, 비서를 통한 대면 보고만을 고집하던 인간이었으니까.그러나 신하늘과의 대화창은 완전히 달랐다. 스크롤을 올릴수록 업무적인 딱딱함 이면에 숨겨진 묘한 감정의 파고와 은밀하고도 의미심장한 기류들이 그의 눈길을 집요하게 사로잡았다.남자의 직감이 거세게 경고음을 울려댔다. 오늘은 차가운 모니터 화면 따위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 날것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이 뒤틀린 감정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침없이 자판이 두드려졌다.[신하늘, 퇴근 준비해. 데려다줄게.]이윽고, 이번에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칼답이 돌아왔다.[괜찮습니다. 메신저 종료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감히 먼저 도망을 치다니. 이 새벽에 무슨 수고를 더 하라고.차준호는 기가 막혀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황당함과 동시에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호승심이 그의 거대한 몸을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차준호의 과도한 호의는 목을 조여오는 사슬처럼 옥죄어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직도 옷 자락 속에 감춰져 있는 그가 준 목걸이를 초조하게 더듬었다.갑자기 메신저를 보내 퇴근을 종용하더니, 이 새벽에 데려다주겠다고?어차피 지금 집에 가봤자 최악의 상황이라 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와 고작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기가 완전히 빨려나간 듯 현기증이 일었다.나는 곧장 메신저를 로그아웃해 버린 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즉에 꺼놨어야 했다. 앞으로 밤늦게 남을 때는 메신저 상태부터 숨김으로 돌려놔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오류 코드를 보고 또 보고.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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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들켜버렸어, 어쩌지?

‘아, 이 남자 귀신인가. 뭘 다 알아챈 거지.’난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경비하시는 분들 기다리게 할 셈이야?”차준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경호원도 경비원도 제발 협조해 달라는 눈치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신 과장님, 오늘 야근 신청 안 하셨죠?”“다음부터 퇴근 시각 이후에는 ID 카드를 사무실 입구에 다시 태그하고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아, 그런 절차가 있었던가. 내가 지금 폐를 끼친 거였다.“아, 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졸지에 기세등등하던 나는 모두를 향해 사과를 한 뒤, 서둘러 보고서를 최기범 실장에게 전송하고 컴퓨터를 껐다. 오늘 오후부터 최 실장이 출장을 간 탓에 미뤄둔 중간 보고를 급하게 처리했다.차준호는 경비원에게 주변 정리를 지시하더니, 내 패딩과 백팩을 자연스럽게 직접 낚아채 들었다.“자, 그럼.”차준호는 그 뒤로 말이 없었고, 난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그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말문이 막혀 일단 입을 다물었다. 단둘이 남겨져서 그런 걸까. 무거운 정적 탓에 사방의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잘게 떨게 만들었다.이대로 어쩌나 고민하던 차에 23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했다. 버튼을 누르자 문이 곧장 열렸고, 내부에 들어서고 나서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대신 사방의 거울 속에서 우리 둘의 시선이 얽혔다. ***그의 눈빛은 이미 어떤 결단을 마친 듯 명확해 보였다.차준호는 대표 전용 주차장이 있는 지하 3층 버튼을 누르며 중얼거리듯 말문을 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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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그가 머무는 호텔로 가는 길

아, 이건 재앙이었다.이 새벽에 회사 대표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가 직원들에게 들키다니. 완벽한 스캔들의 서막이었다. 그것도 실랑이를 벌이며 손까지 잡혀 있는 모습을 보였기에, 현기증을 넘어서서 이제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그리고 하필 세나의 앞이라 왜 이토록 더욱 민망한지 절로 몸이 쭈뼛거렸다. 난 차준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꿈틀거렸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내 손을 더 꼭 잡아 쥐더니 의연하게 그들에게 말까지 걸었다.“그쪽은 누구?”본사를 비롯해 지사와 하청 업체에 근무하는 인원만 천 명이 넘었으니, 차준호는 일일이 모를 수도 있었다. 나 역시 엔터 쪽 임시직들은 잘 모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얼핏 안면이 있어 차준호에게 소개해 주었다.“대표님, 저분은 객원으로 안무 지도를 해주러 온 서태환 팀장이십니다.”차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태환의 눈가에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그리고 차준호의 눈치를 살피며 서태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 시각까지 대표님께서 고생 많으십니다. 그리고 신 비서님도요.”네 명의 멤버들은 모두 차준호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마지막에는 맞잡은 두 손에 시선을 멈췄다. 회사 로비를 벗어나기도 전에 터무니없는 소문이 피어오를 판국이었다. 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망할 차준호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파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이젠 어쩌나. 또 차준호 위주의 스캔들이 터지겠지.그런데 그 순간, 차준호는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직원들을 느긋하게 둘러보며 말했다.“다들 입단속하는 게 좋을 거야.”그의 목소리엔 경쾌한 권위가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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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여자의 밤 그리고 남자의 밤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거실 통유리 앞에 선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손님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로브를 걸친 채 차준호를 기다리는 동안,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왔다. 피로가 밀려와 시야가 흐려졌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불과 한 달 전. 이곳에서 나는 그와의 천국을 꿈꾸었지만, 그는 내게 지옥을 안겨주었다. 오직 나만이 간직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기억을 잃은 그에게는 퇴원 후 낯설어진 공간일 테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그와 처음을 맞이한 장소이자, 마지막 아픈 상흔이 남은 곳.그리고 지금, 차준호의 말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와의 봄날을 꿈꾸던 내 마음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 사랑받는다는 착각이 깨진 자리엔 차가운 현실만이 남았다. 눈 내리던 날, 저 아래 거리에서 올려다보던 호텔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이 머리를 더욱 뜨겁게 짓눌렀다.“신하늘. 감회가 새로워? 내가 고백했다며. 거절한 남자의 침실로 다시 온 소감이 어때?”빙글빙글 웃으며 나타난 차준호는 약 쟁반을 내게 건네주며 얄밉게 속삭였다. 거짓말을 하니 이래서 곤란했다. 그러니 말을 아낄 수밖에.“타이XX 좀 주세요. 볼일만 끝내고 잠 좀 자게요.”그는 한쪽 입매를 쓱 올리더니 진통제를 내게 건넸다. 차준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평소보다 약을 한 알 더 삼켰다. 냉수를 마셔서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갑갑한 이건 또 뭘까.“그 로브 잘 어울리네. 젖은 머리도 자극적이고.”저런 가벼운 말도 잘하던 남자였나. 나와 관계를 맺을 때도 그런 말은 잘 안 했는데. 난 물끄러미 로브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목걸이도 반짝거리며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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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우리의 운명은 시한부인 것을

세나는 도국의 문자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가슴이 벅찼다. 마음을 전부 쏟아내고 싶었지만, 도국이 질려할까 봐 차마 감정을 담은 글은 쓰지 못하고 생각을 멈췄다. 그런데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세나야, 지금 차에서 내려. 보고 싶으니까.]세나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끝이 정해진 관계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국이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 주고 있었다. 너무 행복하고 짜릿해서 멤버들에게 들킬까 봐 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뒤를 따르는 고급 독일제 신형 검은색 SUV 한 대가 보였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이런 게 눈이 먼다는 걸까.[오빠, 그럴게요!]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내자 온몸의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무엇에 홀린 듯 바로 안전벨트를 푼 세나는 서태환에게 소리치며 손짓했다.“팀장님! 저 여기서 내려 주세요!”“에? 세나야? 왜?”멤버들은 뜬금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세나를 응시했다.“뭐? 여기? 너 미쳤어?”“어머, 애가 왜 이래?”하나와 두나가 황당하다는 듯 한마디씩 던졌고 나나 역시 지금 내려서 어쩌려느냐고 물었지만, 세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네! 바로 부탁드려요!”그저 이 차 뒤를 쫓아오는 SUV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차준호는 와인잔을 입에 댄 채 소파에 깊숙이 파묻혔다. 창밖의 야경이 눈동자에 맺혔지만, 머릿속은 병원에서 신하늘을 처음 만난 날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충동적이었지만, 그런 상황이 다시 온대도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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