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81 - Chapter 90

106 Chapters

#80. 아주 많이 늦어버린 아침

창밖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새벽빛이 스며들 때까지,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그리고 아침이 되었다.차준호의 시선이 신하늘의 백지장 같은 피부에 머물렀다. 침대에 파묻힌 그녀의 실루엣이 마치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많은 생각을 머금고 이 상황을 지켜보느라 차준호 역시 제대로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자신을 떠나 다른 부서로 갔으면 보란 듯이 잘 지낼 것이지.피로감에 절어 있다가 긴장이 풀린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지난번 허기찬이 받아온 카드 명세서에 그 목걸이 브랜드 지출 내역도 확인한 터였다.목걸이까지 받은 사이인데 스캔들 뒷수습도 홀로 감당해야 했을 터였다.한 달 사이에 모든 일이 폭풍처럼 몰아쳤으니 체력이 버텨낼 리 없었다.열이 오른 것도 문제였지만, 점점 야위어 가는 몸도 이제야 눈에 밟혀 거슬렸다.혹시나 싶어 병원 의사에게 급하게 잠시 들러달라 부탁했던 그였다. 단순한 탈진이라 깊은 늪에 빠진 듯 미동도 없이 잠에 침잠함을 차분하게 기다려 주기로 하였다.그때, 문득 모든 화살이 최기범에게로 향했다.왜 자신은 녀석에게 이토록 짜증이 치미는 걸까.그는 충동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무심한 최기범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최기범. 나야.”-······왜?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선지 최기범의 투덜대는 뉘앙스가 귓가에 고스란히 와닿았다.괜히 심사가 뒤틀린 차준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날이 섰다.“신하늘에게 무슨 업무를 지시했지?”-당연히 신작 게임 관련 일이지. 잠깐만 기다려 봐.갑자기 최기범의 주변으로 부산스러운 소음이 섞여 들었다.이내 자판을 두드리는 어수선한 소리가 이어졌고, 잠시 후 최기범의 짧은 탄식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신 과장이 메신저로 보고서를 올렸네. 출시 예정작의 치명적인 오류를 세 개나 잡아냈어.“설명해.”-내가 다음 주까지 해결 안 해도 되니까 오류 네 개를 분석하라고 던져줬거든. 3월 1일 론칭을 맞추려면 다들 불철주야니까. 그런데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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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과연 누가 거짓말쟁이일까?

이럴 수가. 지금 난 과거 비서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뭐 하시는 거예요?”“뭐 하긴, 호의를 베푸는 중이지. 식사부터 해.”차준호가 내 옷을 준비해둔 것도 놀라운데, 갓 끓인 전복죽이 김을 뿜어내며 유혹의 손길을 뻗어왔다. 거실 가득 퍼지는 바다 내음에 내 위장은 요동쳤다. 하지만 차준호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일 위인은 아니었음에, 망할 차준호는 사람 휘두르는 재주는 확실히 있어 보였다.“신하늘, 나까지 굶길 셈이야? 나도 바빠. 본가 가야 해. 그리고 옷도 똑같은 거 입고 가면 소문날걸?”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거부할 수 없게 또 분위기를 몰아갔다.원래도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갖다 대어서 결국 제 뜻대로 하는 능력은 아주 탁월했다.“저 당황해하는 모습 보니 즐거우시죠?”또 쓰러지지 않으려면 식사가 필수적이란 말과 더불어 집에 들렀다 출근하면 일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그럴듯한 설명까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덫이 되어 발목을 붙잡았다.***난 결국 그가 준 옷도 입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전복죽을 먹으며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죽을 휘저어 식혀서 내게 건넨 그는 온화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난 진심이야. 그동안 내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해서 도의적인 친절을 베풀고 있어.”그렇게 효율적으로 날 괴롭히면서 그는 좋아해서 이런 건 아니라는 듯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나를 순순히 따르도록 이끌었다. 하긴 그간의 충성을 생각하면 이 정도 호의는 당연한 보상일지도 몰랐다.“그럼요. 어련하시려고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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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동상이몽, 사람 놀라게

최기범은 신하늘이 방금 전 제출한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움 없이 혼자서 이 모든 걸 척척 해내다니, 입가에 절로 감탄이 스쳤다.비서실이 아니라 진작 게임 개발실에서 3년 동안 굴렀다면 벌써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을 인재였다. 신하늘이 과장으로 합류한 이후 눈에 띄게 진척되는 업무 속도를 보며, 최기범은 내심 안도했다.하지만 고생 끝에 그녀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상사로서 미리 챙기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못내 마음을 찔렀다. 오늘도 저녁까지 굶어가며 모니터에 매달려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훤해, 미리 초밥부터 주문해 둔 참이었다.똑똑.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신하늘을 확인한 순간, 최기범은 흐음- 하고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지금 차준호와 함께 다시 지내다 왔노라고 온몸으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심지어 옷 스타일마저 예전 병원에서 스치듯 보았던 그 화사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자,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신 과장, 차준호 용서한 겁니까?”자신이 그녀의 남자 친구도 아니면서, 이런 사적인 질문을 던지다니. 멋대로 놀아난 입술에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아니나 다를까, 그 한마디에 신하늘의 얼굴이 단숨에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더니 짐짓 퉁명스럽게 말문을 열었다.“용서는 무슨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 오해하셔도 뭐 상관은 없지만요. 저는 떳떳하니까요.”역시나 날이 바짝 선 반응이었다.수고했다고, 많이 아팠냐고,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평범하게 운을 뗐어야 했는데. 괜히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해 상황을 민망하게 꼬아버렸다. 스스로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생각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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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가질 수 없기에 욕망하는

나도 모르게 손에서 젓가락을 떨어뜨렸지만, 맞은편 최기범의 얼굴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다.차준호 같은 남자의 정략결혼이야 재벌가에선 당연한 수순 아닌가. 그런데 나와 최기범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일단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 나는 젓가락 끝으로 초밥을 툭툭 치며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강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게 무슨 소리야?”- 기사가 떴어! CC그룹이 정치권이랑 혼인으로 손잡는다고!지역, 학벌, 파벌, 그리고 정치적 이념까지. 뭐 하나 중립을 지키기 쉽지 않은 이 나라에서 대기업인 CC그룹이 유력 정치 가문과 엮인다는 건 득이 될 수도, 혹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차진철 회장은 결국 그룹의 더 큰 도약을 위해 정치계 쪽과 연을 만들려는 걸까.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마치 그의 침대에서 나온 후 살결에 남았던 온기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것처럼, 어서 그의 인생에서 꺼져주어야 할 이물질이 된 기분이었다.“난 또 뭐라고. 아직 확정된 것도 없잖아. 기자들 속성 몰라? 일단 설레발부터 치고 보는 거.”최기범 역시 분명 동요하고 있었지만, 상처받았을 강소희의 심기를 헤아려 일부러 덤덤하게 에둘러 말하는 듯했다. - 어머, 그런가?“너도 예전에 스캔들을 이용하려 했었잖아.”정치인 어머니와 기업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최기범이었기에, 무심히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묘한 무게감이 실렸다.- 역시, 기범이 네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 된다.어느새 강소희는 한결 가벼워진 웃음소리를 내며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통화 말미에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는 흔한 빈말을 던진 최기범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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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불쑥, 마음이 들쑤셔져

세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머릿속에는 신하늘을 떠올렸다.차준호가 풍기는 그 느낌은 영락 없이 좋아하는 여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는데.그렇게 몸만 즐기고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한다고? 잠시 검색해 보니 이미 차준호를 올해 안으로 결혼시킨다는 뉘앙스로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심지어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총선도 다가오는 봄이기에 이미 정치 뉴스는 선거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어쩌지······.’차준호의 정략결혼 소식을 도국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세나는 이 짧은 시간에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당분간은 함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그 사실을 전했다가 도국의 마음만 사납게 들쑤셔질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그와 딱 50일만 사귀기로 약속했던 기한은 다가오는 봄이 되면 끝이 난다. 한시적인 연애라는 걸 알기에 하루하루 감질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깝고 또 아까웠다. 마치 모래시계의 얇은 목을 지나 거침없이 떨어지는 모래알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모자란 시간인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혹시 몰라. 오빠가 내게 완전히 푹 빠져버리면······.’50일이 아니라 100일 1년으로 기한이 연장될지도.세나는 씁쓸하게 퍼지는 불안을 감추려 입술을 더욱 질끈 깨물었다.비록 지금 도국의 품에서 부서져 사라질 덧없는 별빛에 불과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다고.그리고 꼭 신하늘과 차준호가 잘 되기를 바라며 뭐라도 다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결국,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야근을 잘 마무리 되었다.밀린 업무를 모두 끝내고 나니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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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나만 질척이는 수라장인가

따뜻하게 데워진 거실 바닥과 공간을 채운 훈훈한 열기.보일러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말끔히 수리된 데다 차준호가 기름까지 채워준 덕분인지, 문을 열자마자 포근한 온기가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내 뒤를 이어 좁은 거실로 밀고 들어오는 두 남자가 있었다.“신하늘, 집이 따뜻한지 확인만 하고 갈 거야.”“차준호, 이 시각에 부하 여직원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니. 참 대단한 오너십이군.”사사건건 으르렁거리는 최기범의 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본인 역시 대체 왜 남의 집 거실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온단 말인가. 정말이지 도통 낫지 않는 두통이 더 심각하게 도질 지경이었다. 날 위해 보일러를 고쳐준 차준호와, 우연히 퇴근길에 들렀다는 최기범. 둘 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청객임이 확실했다.“자, 보셨죠? 집이 아주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하니까 확인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밤이 깊었으니 어서 가라고 현관문 쪽으로 손짓을 건네며 축객령을 내렸다.“신하늘, 보일러까지 손수 고쳐준 사람에게 차 한 잔 대접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분명 작동 여부만 확인하고 쿨하게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기범이 등장하자마자 차준호의 태도는 변덕스러운 여름날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게 뒤바뀌고 있었다.“신 과장, 그러고 보니 아까 초밥 먹은 게 그새 다 소화됐는지 입이 좀 궁금하긴 하군요.”최기범마저 거들고 나서다니.하, 한밤중에 다들 왜 저러나 싶었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당장 두 남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머리로는 뭘 대접하나 고민하는 모순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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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그림자 속에 갇힌 바보

“거실에서 먹죠.”텔레비전을 계속 보고 있던 그들을 위해 난 만든 음식들을 소파 테이블로 옮겼다.냉장고에 있던 감자와 달걀, 밀가루를 털어 서둘러 수제비를 끓여 냈다. 곁들일 반찬이라곤 파김치와 배추김치뿐인 조촐한 상을 차린 뒤 두 사람에게 수저를 건넸다.얼떨결에 음식을 내어 오자, 차준호와 최기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신하늘, 재주꾼이네.”“오, 국물 맛도 좋습니다. 다시 봤습니다, 신 과장.”어떻게 그 짧은 새 음식을 뚝딱 완성했냐는 듯, 두 남자가 신기한 눈으로 테이블을 들여다보았다.그동안 날 어떻게 봤길래. 연신 이 둘은 감탄만 자아냈다. 차준호의 대저택에서 보았던 화려한 식탁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해 민망했지만, 이게 내 최선이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최기범은 입에 잘 맞는지 국자로 수제비를 연신 냄비에서 대접에 덜어갔다. 차준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수제비를 즐기는 듯 보였다. 평소 이들이 즐길 만한 부류의 음식은 아니었지만, 깨끗이 비워 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김치도 제대로네.”“이웃 어르신께 얻은 거예요.”차준호가 파김치를 집어 먹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3년을 그리 가까이 지내면서도 이런 소박한 음식을 삼키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픈 날 걱정해 주고, 보일러까지 고쳐주는 남자.하지만 몸은 가까이하면서 마음은 단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고, 과분한 물건을 안겨 주면서 정작 좁혀질 여지는 냉정히 거부하는 잔인한 사람. 무엇이 진짜 차준호일까.그렇게 평범한 식사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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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사각틀 속에 갇힌 정지된 추억

제일 놀란 건 물론 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 함께 셀카를 찍자는 뜻인가?“진짜요?”“너 갑자기 왜 이래?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맞구나?”천하의 차준호가 사적인 기록을 남기겠다니, 최기범 역시 진심으로 경악한 눈치였다.“내 머리가 정상은 아니잖아. 오늘을 또 잊어버릴까 봐.”대꾸하는 차준호의 눈동자에 평소와 다른 망설임이 아주 잠깐 스쳤다. 당연히 끝을 앞둔 사람과 사진이 웬 말이냐고 밀어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사진 찍으면, 저한테도 보내주세요.”오늘이 정말 그와의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난 3년간의 추억이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새어나가 버리자, 무의식중에 아쉬움이 덜컥 삐져나온 모양이었다.“그래.”차준호 역시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길게 뻗었다. 그 짧은 찰나에 우리 세 사람은 하나의 좁은 프레임 안에 갇혔다.“그럼 나도 보내줘.”“알았어.”셋이 한데 모여 찰칵.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역사적인 순간이 휴대전화 속에 박제되었다.이별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밤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배웅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실 한구석, 켜져 있던 텔레비전 화면에 강소희가 등장했다.***[역시 여배우는 극한 직업이에요. 저도 관리하느라 늘 다이어트를 달고 살거든요. 드레스 실루엣에 무조건 몸을 맞춰야 하니까요.]강소희의 조목조목한 발언에 진행자는 ‘천상의 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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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그대를 벗어날 수 있을까?

·주말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잔인하리만치 무심한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청바지에 투박한 롱패딩. 지극히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차림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동안 거리 곳곳 거대한 빌딩 전광판마다 걸려 있는 강소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다.지난 토요일, 차준호와 최기범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던 기억. 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 멍하니 지켜보았던 강소희의 인터뷰 프로그램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 텔레비전 속에서 생글생글 웃던 강소희의 집요한 눈빛은 마치 차준호의 서늘한 뒷모습만을 좇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내 코가 석 자지.’실소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오만하고 도도한 남자가 내 비좁은 집에 드나들며 수제비나 얻어먹을 위인은 아니지 않은가. 조만간 이 나라 경제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설 차준호였다. 그의 곁에는 그에 걸맞은 정치계 뒷배를 둔 대단한 여자가 서게 될 터.그러니 나와는 애초에 상관이 없어야 했고, 앞으로도 상관없을 일이었다.문제는 마음이었다. 머리로는 명확히 아는 사실이 가슴에는 통 닿지 않았다.신호등을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어제 내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던 사진 한 장. 우리 세 사람이 어색하게 모여 찍은 사진이 갤러리 한구석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화면 속 차준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가 남긴 잔인한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늘 끝내야 한다고, 이 관계는 가짜일 뿐이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노래를 불렀건만, 막상 그의 기습적인 선언으로 마침표를 마주하니 이별은 생각보다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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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욕망과 반항의 온도 차

관계가 시작되기 전, 강소희의 옷을 벗기던 주원형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흉흉하게 말을 뱉었다.“너의 그 가벼운 입방정 때문에 오늘 아침 날아간 주가가 얼마인지 감이나 잡아?”결국 또 돈.강소희는 속으로 냉소했다. 이 바닥에서 구른 지 10년이 넘어가니, 어느새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 그저 움직이는 매물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JW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자신은 도국에게 서서히 밀려났고, 최근 이렇다 할 흥행작도 없으니 당연한 취급이었다.주원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자, 강소희는 천천히 단추를 풀며 감정 없는 밀랍 인형처럼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 대표님. 제가 인터뷰에서 누구라고 정확히 밝힌 것도 아니잖아요? 차준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가 있으니까 CH 주가는 건재한 거 아니겠어요?”“······제발 그 입 좀 조심해.”기다리지 못했는지 슬슬 옷자락을 난폭하게 헤집는 주원형의 손길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강소희 역시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오히려 그의 목덜미를 유연하게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달콤한 교태를 부렸다.“도국이 스캔들 터졌을 때 대표님 톡톡히 이득 보셨잖아요. 이번에 하락장 온 김에 재투자하셔서 다시 메우면 되죠, 안 그래요?”돈, 그리고 돈.그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돈 이야기를 미끼로 던지면 개처럼 누그러질 것을 알았다. 과연 주원형은 그 파렴치한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칠게 짓누르던 손길의 악력을 은근히 늦췄다. 고압적이던 방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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