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51 - Chapter 60

105 Chapters

#50. 기대, 위험하게 휘둘려

나는 물끄러미 내게 다정하게 구는 차준호를 보며 순간 바보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강소희와 만남을 이어가며 그토록 차갑게만 굴던 남자가, 지난 12월 24일 이후 최초로 부드러운 눈길을 건네오다니. 상처를 준 그가 너무 야속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치를 떨어놓고는,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스스로가 정말 속도 없다 싶었다.“대표님, 혹시 기억이······.”나도 모르게 성급하게 말을 내뱉다 이내 뒷말을 삼켰다. 예전에 내가 입사 지원서에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적었던 것을 기억하고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 사주었던 그였다.찰나의 감상에 젖어 들기가 무섭게, 차준호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날카롭게 휘어진 눈썹 아래로 시니컬한 눈빛이 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옭아맸다.“기억이라니 무슨. 신하늘, 나한테 뭐 기대했어?”역시나, 그럼 그렇지. 착각해 버린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잔인하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혹시 과거의 나는 비서라는 상전을 모시고 살았던 건가? 이런.”차준호의 변화를 기대했던 스스로가 민망해, 손등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아, 죄송합니다.” “이거 허 실장이 준비한 거야. 내 취향은 해산물 같은 게 절대 아니거든.”차준호의 말투는 여전히 가시가 돋친 채 나를 비꼬고 있었다.“네, 아주 잘 알겠습니다.”사람 무안하게. 뭐가 되었든 간에 이제 두 번 다시 차준호와 마주 앉아 밥은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초밥을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음식을 씹는 순간 목울대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입안이 까끌거려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던 그 순간, 차준호 역시 젓가락을 들고 초밥을 집어 올리며 툭 한마디를 건넸다.“신하늘, 내일부터 게임 개발실로 출근해.” “컥!”밥알이 목구멍에 걸린 듯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절대 안 보내준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던가? 쿨럭거리는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 그가 생수를 건네주며 덤덤하게 설명을 이었다.“놀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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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거짓 속에 감춘 치명적인 친절

머릿속 경고등과 달리,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키스는 걷잡을 수 없이 짙어졌다. 도국 역시 피가 도는 남자였기에, 자신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어여쁜 여자를 안고서 몸이 달아오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은밀한 본능이 아래서부터 뜨겁게 동했다.멈춰야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정말 사고인데.이윽고 젖은 숨을 토해내며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세나가 도국의 붉어진 목덜미를 매만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오빠. 저 이용하세요. 기꺼이 휘둘려 드릴게요.”그 치명적인 도발에 도국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이번에는 세나가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먼저 입술을 부딪쳐왔다.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얽히고 뜨거운 호흡이 깊숙이 섞여 들며, 방 안은 순식간에 짙은 체온과 음란한 정적으로 채워졌다. 이미 불이 붙어버린 본능을 멈출 방도는 없었다.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하얗게 타버리던 그 순간.‘신하늘······, 이아준······.’불현듯 두 친구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찬물이 확 끼얹어지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새벽.결국 도국은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하여 선을 넘기 직전 겨우 브레이크를 잡았다. 뜨거워졌던 몸을 가라앉힌 게 천만다행이었다. 도국은 별도의 게스트룸을 찾아 세나에게 내주었다.이른 아침, 샤워기 아래 선 도국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내가 잠시 미쳤던 게 분명해.’세나가 너무 헌신적이라 쳐내지 못한 걸까, 눈앞에서 귀엽게 구는 통에 충동적으로 몸이 동했던 걸까. 사실 스킨십이라면 셀 수 없이 경험해 봤다. 첫 키스는 성인이 되자마자 출연했던 드라마 파트너 강소희와 한 것이었다. 당시 연하남 역할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실력파 배우로 발돋움했고, 글로벌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커리어에 날개를 달았었다.하지만 지금껏 어떤 여자와 키스할 때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어제는 이상하리만치 특별했다. 신하늘과 이아준의 존재가 의식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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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경고, 내 마음에서 나가!

저 문 너머의 차준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의외였다. 어제는 허기찬이 준비한 거라며 건넸던 초밥인데, 사실은 차준호가 직접 주문해 내 책상 위에 밀어 넣어준 것이었다니. 다정함이라고 치부하기엔 가슴 언저리가 기묘하게 욱신거렸다.나는 다시금 의미심장한 기분에 휩싸여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원래 자기중심적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라 생각할수록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그는 늘 나를 뒤흔드는 유일한 존재였다.“신 비서,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허기찬이 내 안색을 살피며 슬쩍 운을 뗐다. 지난 3년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본 그는 나와 차준호 사이에 흐르는 이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기류를 눈치챘을까.불현듯 늘 망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며 괴롭히던 차준호의 잔인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연애 안 하니까, 고백도 하지 말라며 잔인하게 선을 긋던 그 경고가 떠올랐는데.괜히 말을 꺼냈다간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마음과 달리 씁쓸한 말이 툭 흘러나왔다.“대표님이 기억을 잃으신 뒤로 영 혼란스럽네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요.”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푸념에 허 실장이 털털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하하, 난 또 뭐라고. 신 비서, 사실은 이게 대표님 원래 모습이야. 그동안 봤던 다정한 모습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신기한 일이지. 어쨌든 대표님도 요즘 머리가 꽤 아프실 거야.”원래 모습이 저렇게 차갑고 오만한 인간이었다니. 그러게 누가 제멋대로 사고가 나랬나. 강소희와는 왜 비밀 여행을 떠나서 그런 꼴을 당하고 돌아왔는지 속상하고 얄미웠다. 당연히 기억을 잃었으니 머리가 아프겠지, 생각하며 속으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때 허기찬이 슬그머니 목소리를 더 낮추며 비밀스러운 한마디를 얹었다.“이 와중에 회장님은 결혼하라고 사방에서 숨통을 조이시는 모양이더라고. 역시 재벌 3세 삶도 겉만 화려하지, 속은 편하진 않나 봐.”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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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큰 그림을 그리는 정글의 포식자

CH 그룹 대표실과 비서실 사이에 놓인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방금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준호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흐려지듯 제 머릿속도 뿌옇게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좁힌 채 신하늘을 바라보았다.짝사랑했다가 포기했다니. 그래서 저런 표정인가.“신하늘, 감정 정리 잘 끝냈으면 일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신하늘은 차준호에게서 급히 고개를 돌리며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저 신하늘만 데려오면 최기범이 일을 하겠다니. 재미있군.’학창 시절부터 최기범은 지독할 만큼 성실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등교하던 녀석은 지금도 오전 7시면 어김없이 출근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출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최기범은 허언을 뱉는 성정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건설회사 오너인 최승현 회장의 외아들이었기에 당연히 경영인의 길을 걸을 줄 알았으나, 녀석은 컴퓨터공학을 택했다.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단칼에 진로를 바꾼 녀석이었다.정치인 어머니와 갈등을 빚을 때도 중학생 때부터 독립해 세종동에 혼자 살았고, ‘잠깐 해외나 다녀오겠다’더니 유학 가서 보란 듯이 석·박사 통합 학위까지 따서 돌아왔다. 한 번 결심하면 미련 없이 패를 던지고 떠나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차준호로서도 가차 없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신하늘을 TF팀 일원으로 보내줄 테니까 빨리 와.]미끼를 던지자마자 최기범에게서 즉각적인 답신이 날아들었다.[신하늘을 게임 개발과장 발령 공고문 내. 그럼 즉시 출근하겠어.]다들 왜 이리 제멋대로인지. 3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상태에서 이 인간들을 상대하려니 속이 하얗게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신하늘 대단하네. 최기범을 쥐락펴락하다니.”온 우주가 자신을 향해 지옥을 걸으라고 힘을 합친 것만 같았다. 앞으로 병원이나 다녀야 하는 몸뚱아리, 부친 차진철의 무거운 기대, 그리고 뻔뻔하게 달라붙는 강소희.‘그리고······ 신하늘.’짝사랑했다가 포기했다는 그녀의 고백이 왜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걸까.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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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계약 남녀, 잠깐 한눈 좀 팔게

인수인계도 그렇고 연초라 회사 일도 많아 깜박 하다 보니 벌써 밤 9시가 가까워져 왔다. 서둘러 백팩을 정리를 하고 외투를 입은 뒤 전원을 하나하나 꺼나갔다.차가운 겨울 공기가 비서실의 유리창에 차단된 탓에 눈발이 창문에 부딪치고 있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되었다. 내리는 눈은 커다란 꽃송이가 되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크리스마스의 그 밤도 이랬는데.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이 눈처럼 쌓여 결국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 가슴을 짓눌렀다. 차근차근 차준호와 멀어질 단계를 밟아가기 위해 애를 쓴 스스로에게 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인생에 정답은 없고 남녀 관계 공식도 없지 않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비서실을 정리하면서도 하나하나 이곳에 스민 기억들도 버려낼 각오를 다졌다.그때 비서실 문이 두드려졌다. “네, 들어오십시오.”문을 열고 들어온 건 그도 퇴근하려는지 외투까지 차려입은 최기범이었다.“신하늘 씨, 퇴근이 늦었군요.” “아, 최 실장님. 이제 가려고요. 뭐 도와 드릴까요.”나는 메려던 백팩을 내려놓고 이 시각에 찾아온 그를 바라보았다.차준호가 외근 중이라는 걸 메신저로 확인했을 텐데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게임 개발실로 오게 된 것 환영합니다. 이제 내가 신하늘 씨의 직속 상사니까 말 놓을게.” “네. 그러세요.”최기범은 언제나처럼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선 나를 향한 은근한 배려가 묻어났다.차준호가 일방적으로 통보했지만, 어차피 게임 개발부 이동을 결심했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결심해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3월 1일까지는 근무하는 것이 계약 조건이라 현실적으로 판단했어요. 계약서도 살벌하더라고요.”최기범은 그런 것도 있냐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비서직 특성상 대표의 스케줄에 종속되어 휴일과 출퇴근 기준도 모호했으며, 정규직이라도 매년 재계약을 해야 했다.위약금 같은 돈 문제도 있고 비밀 엄수에 관한 강력한 제재에 복무 특별 조항까지 대충 에둘러 설명도 덧붙였다.그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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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우리는 그렇고 그런 남녀 사이

[오빠,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별것도 아닌 문자인데. 나름 이게 뭐라고.[그래, 너도]이거면 되었나. 하지만 도국은 요즘 부쩍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세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이렇게 50일 동안 의무를 다하게 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었다.잠시 뒤, 김훈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다시 나타났다.“대표님이 마침 복도에 계시지 뭐야? 당연히 콜 하셨어! 하하, 아이디어도 좋다면서!”다시 바삐 일을 보러 나가려는 김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도국은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김훈의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살짝 윙크를 건넸다.“이걸로 유모차 한 대 사세요.” “아이고! 도, 도, 도국아!”봉투 속에는 빳빳한 천만 원권 수표가 들어 있었다. JW 엔터테인먼트에서 김훈과 친해 둬서 나쁠 것이 없었기에, 그의 아내가 곧 출산이라는 소식을 듣고 인사치레를 건넨 것이었다.이 회사는 본래 연예인 출신이 아닌,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 지효진이 세운 곳이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에 소속사를 설립해 실력파 가수를 육성하겠다는 꿈을 품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뛰어들었다. 운 좋게 화수분처럼 루키가 연이어 나타나 모두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지효진은 결국 업계의 거대 자본과 분위기에 휘둘려 우후죽순 아이돌을 양산해 내다 순식간에 무너졌다. 극비리에 파산 신청을 해야 할 수준으로 벼랑 끝에 몰려 극단적인 시도까지 할 정도였다.그 절체절명의 파국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바로 성공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이 주원형과 김훈이었다. 그때부터 김훈은 주원형의 오른팔로 자리매김하며 회사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러니 김훈을 가장 가까이 두면 회사 내부의 분위기를 단번에 읽어낼 수 있었다.“별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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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상일까, 벌일까. 이런 젠장

왜 지금 차진철 회장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나는 똑바로 선 채 고개부터 정중히 숙였다.“안녕하십니까, 회장님.”차진철 회장의 매서운 눈빛이 내게 닿으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차진철 회장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집요하게 훑어내렸다.“단정하게 입었는데 옷 타령은. 쯧!”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나는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중압감에 숨이 막혀 고개를 아래로 더 떨구었다. 그때 차진철 회장이 내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신 비서, 들어와. 할 말이 있으니.”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할 말이라니. 식은땀이 순식간에 손바닥을 적셨다. 예전에도 차진철 회장이 대표실로 찾아와 나를 은밀히 호출한 적이 있었다. 오늘도 그때처럼 나를 상대로 체스를 두려는 걸까.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목례로 응답했다. 방으로 향하려다 나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차준호와 시선이 얽혔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가 마지막 경고를 내리는 듯한 순간이었다.***대표실 창가로 오후의 둔탁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차진철 회장이 들어서자마자 유리창에 맺힌 서리가 깨지듯 공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아침부터 가동된 온풍기 탓에 훈기가 돌 법도 한데, 차진철 회장의 표정만큼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듯 냉기만 가득했다. 그는 왜 오늘 이곳에 왔으며,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 시간에 불쑥 방문한 걸까.나는 숱한 의문을 누른 채, 마지막이지만 비서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손을 바삐 움직였다. 차진철 회장이 따로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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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그대와 나, 의무가 ‘덫’이라면

토요일 저녁이 되었다.황금 같은 주말에 차진철 회장의 호출이라니, 어깨가 납덩이를 얹은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고를 친 아들의 뒤치다꺼리를 잘해 주어 고맙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렇다고 주말에 본가로 불러 밥까지 먹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CC그룹 선우현 비서실장이 직접 운전하는 검은 세단에 올라 한남동 자택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금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과한 배려가 되레 부담스럽게 다가왔다.“토요일까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신 비서님.”당연히 고생 중이다. 빈손으로 가기가 영 껄끄러워 오전에 백화점을 돌며 20만 원 상당의 고급 과일 바구니를 준비했음에도, 밀려드는 긴장감에 손끝이 자꾸만 떨려왔다.“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을 보필하는 비서실장답게, 선우현에게선 나와는 차원이 다른 투철한 직업 정신이 묻어났다. 가슴이 옥죄어와 차마 더 입을 열지 못하고 과일 바구니 손잡이만 만지작거리자, 선우현 실장이 미러를 통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오늘따라 분위기가 참 화사하시군요.”오늘은 차준호가 예전에 사주었던 단아한 연보라색 원피스를 흰색 코트 안에 받쳐 입은 상태였다. 늘 메고 다니던 백팩까지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으니, 편하기는커녕 불편함만 가득한 복장이었다. 이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지 고민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흐린 날씨는 내 기분만큼이나 빠르게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그런가요. 기분 전환 복장이라서요.” “이해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즐기십시오.”과연 즐길 수나 있으려나.이태원역 인근에 접어들며 지독한 교통체증이 시작되자, 차라리 이대로 가벼운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 저녁 식사 일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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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어

숨 막히는 긴장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날 위해 차려졌다는 식사는 거대한 연회장을 방불케 할 만큼 화려했고, 평소에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산해진미가 넓은 상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가 가득했다. 본래 재벌들은 매일 이렇게 호화롭게 먹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확실히 눈은 호강하고 있었다.하지만 내 위장은 돌덩이라도 삼킨 듯 얹혀서, 음식이 입안으로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상석에 앉은 차진철 회장, 그리고 그 오른쪽에 앉은 차준호. 준호의 맞은편인 왼쪽 자리가 바로 내 위치였다. 정작 의외인 것은 그 커다란 대리석 식탁의 가장 먼 끝자리에 고미주와 차진아가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 대조적인 배치는 마치 두 사람이 이 집안의 진짜 가족이 아니라, 눈치를 보며 얹혀사는 고용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신 비서, 많이 먹어. 요즘 젊은이들은 격식 따지는 거 싫어한다면서?”차진철 회장의 묵직한 한마디에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자리의 중압감을 이겨내려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 좋아하는 새우튀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삭한 식감이 고급 일식집의 그것처럼 제대로 튀겨져 맛이 일품이었다.“아버지, 신하늘은 이제 비서가 아니라니까요. 신 과장이에요.”“알았다, 이놈아. 요즘 네가 유독 해산물을 자주 찾는다기에 특별히 신경 쓰라 했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물끄러미 차준호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초밥은 취향이 아니라면서. 뭘 또 해산물만 찾는다니.나와 비밀리에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늘 내 식성에 맞춰 해산물을 군말 없이 먹어주곤 했었는데. 기억을 잃었어도 몸이 그 식성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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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당신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한남동 저택이 차준호의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차진철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고미주는 입술을 깨물며 차준호를 안고 있는 나만 노려보았고, 차진아는 울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차준호의 목이 조여드는 듯 숨이 가빠졌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음소리를 토했다.어수선하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차진철이 소리부터 질렀다.“준호야! 준호야!”난 눈물이 뺨을 적시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응급처치 방법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대표님! 제가 구해드릴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작년 초겨울, 그가 똑같은 증상으로 쓰러졌을 때도 나는 그가 어떻게 될까 봐 공포에 떨었다.지금 이 순간도 그를 살리기 위해 모든 신경을 차준호에게 집중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때 병원에서 교육받은 대로 실천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119에 신고부터 해주세요!” “제가 바로 전화했습니다!” 다행히 선우현이 상황을 지금 설명하면서 누군가 이미 통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차진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차준호의 손발을 붙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준호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며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혹시 여기에 대표님을 위한 약품이 있나요? 주치의 선생님께 받은 것 없으신가요?”차진철은 고미주를 보며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우리 준호 지병 있는 거야?”고미주와 차진아는 눈빛이 흔들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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