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금요일 아침, 날씨가 궂어 그런지 창밖은 온통 낮게 가라앉은 서늘한 침묵뿐이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대표실 내부에는, 오직 두 개의 대형 모니터가 일정한 주기로 내뿜는 푸르스름하고 인공적인 빛만이 고요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카페인 부족 탓이었을까. 관자놀이를 잘게 짓누르는 고질적인 두통이 밀려왔다. 차준호는 미간을 꾹 누르며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킨 채, 서류의 다음 페이지를 거친 손길로 넘겼다.
공간의 적막을 깨고, 저만치 소파 테이블 위를 분주하게 정리하던 허기찬의 감탄 섞인 웅얼거림이 툭 치고 들어왔다.
“와······ 대표님, 우리 신 비서를 진짜 아끼시나 봐요.”
그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차준호는 서류 검토를 하던 펜 끝을 딱 멈추었다
난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오늘 내가 그와 도달하고자 했던 대화의 방향은, 그가 깔아놓은 이 달콤한 비단길이 아니었다.어서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냥 꿈속을 헤매던 이 순간,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현실을 떠올렸다.“대표님.”나는 그가 내미는 반지를 향해 손을 뻗는 대신, 반대로 그의 단단한 손을 밀어냈다.“왜?”차준호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반지는 넣어두세요.”나는 당혹감이 서린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주의 차가운 아침 바람이 그와 나 사이를 서늘하게 가로질렀다.“왜 그러지?”나는 턱을 슬그머니 치켜들고, 오만한 시선으로 그를 정면에서 꿰뚫었다.오늘 새벽 그의 품에 안겨 무방비하게 신음하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내 목소리는 차갑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난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아주 어둡고 슬픈 비밀 말이에요.”차준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증발해 버렸다.“난 네게 떳떳해.”그의 눈동자가 맹수처럼 가늘어지며 나를 서늘하게 옭아맸다. 압도적인 위압감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거칠게 휘어잡고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물론 당신은 내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죠. 대신 진실도 언급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당신의 그 어두운 비밀을 풀어낼 해결책은, 이제 내가 쥐고 있으니까.”차준호의 거친 숨결이 내 코끝에 아찔하게 닿았다.“신하늘, 그건 비밀도 아니야
수평선 너머에서 마침내 아침의 첫 빛이 피어나고 있었다.작은 옥탑방 창문 너머로, 붉고 일렁이는 태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곳 제주에 내려와 열흘도 넘게 지냈지만, 이 고요한 일출을 눈에 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아득한 검은 바다가 짙은 오렌지빛으로 온통 물들어 가고, 하늘과 물이 맞닿은 경계선에서 태양은 세상을 품어 안듯 천천히 올라서고 있었다.빛이 창가를 넘어 쏟아져 들어오자, 곁에 있던 차준호가 미간을 천천히 찌푸렸다.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건장하고 묵직한 상체가 이불 바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남자가 이토록 무심하고 나른하게 내 곁에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일 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조만간 거대한 전쟁의 그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남자의 온기가 온전히 남아 있는 이 짧은 평화가 찰나의 꿈처럼 아련하고 소중했다.“······저, 선물 받는 기분이네요.”내 나직한 중얼거림에 차준호가 피식,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선물 안 줬는데······.”둘은 동시에 쿡-, 하고 낮은 웃음을 뱉어냈다. 차준호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짙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그리고 커다랗고 뜨거운 손을 뻗어 내 턱 끝을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어디 주스 없어?”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내게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기 위한 핑계로
조용하고 작은, 고미주가 운영하는 카페의 옥탑방.이곳은 외부에서 바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이 있어, 조용히 차준호를 내가 머무는 방으로 이끌 수 있었다.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갑자기 시야가 흔들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슈트 깃을 억세게 붙잡았다.“아, 죄송해요. 오랜만에 밖에 나왔더니 현기증이 나네요.”그러자 차준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미주의 집을 올려다보았다.“여기서 열흘이나 갇혀 있었다니. 쯧.”혀를 차는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아주 안전했고, 보호받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철저하게 불청객이었죠.”그를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는 다리에 겨우 힘을 싣기 위해 뱉어낸 말이었다.“선우현이 애썼다면서. 그건 고맙게 생각해.”그는 그리 말하며 내 손목을 꼭 쥐고, 다시 옥탑방으로 향하는 계단 위로 나를 이끌었다. 마치 제 집에 나를 초대하는 주인처럼,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차진철 회장님은요?”마지막 이성을 붙잡고 물었다. 그가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알면 그 회장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가뜩이나 내가 마땅치 않은 터에, 그가 더더욱 꼴도 보기 싫은 길을 택할 것이 분명했다.차준호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서늘하게 식어내렸다. 하지만 이내 더 깊은 열기로 나를 옭아매 왔다.“법의 심판에 맡겼어.”나는 놀라 순간 발걸음을 멈칫거렸다. 좁은 철제 계단 한복판에서 나누기엔 너무도 거대한 이야기라,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법의 심판이라니. 그 말이 품은 진짜
꿈일까. 그의 등 뒤 저 멀리, 한밤의 어둠을 찢고 헤드라이트를 훤히 밝힌 세단이 바다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그 마법 같은 광경마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예쁜 거짓말쟁이 신하늘. 오랜만이야.”나를 발견한 순간, 그 남자의 서늘했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정을 철저히 압축해 넣은 듯한 그 한마디가 단단히 닫혀 있던 내 일상에 균열을 내며, 열흘간 간신히 버텨온 마음의 둑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있었다.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내뱉은 내 이름은 제주의 파도 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가장 힘들 때, 가장 보고 싶을 때.그가 이렇게 나타나 주었다.“······너무해요.”보고 싶었다고, 내 앞날이 너무 무섭고 힘든데 나타나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역시 내 입에서는 원망부터 튀어나왔다.“그래, 내가 너무한 남자지. 하지만 신하늘도 마찬가지야.”서울에 있어야 할 차준호가 자신의 모든 세계를 던져두고 이곳 제주의 문턱을 넘어 내게 닿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올 한 해 이렇게 궁지에 몰린 것에 차준호의 지분도 꽤 있었기에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날 이렇게 만든 건 대표님 때문이에요.”유리 조각이 굴러가는 듯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주의 바람이 목구멍을 스치며 미세한 떨림마저 씻어내는 듯했다.차준호는 지금 내 그림자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실루엣은 움직임을 거부한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알아. 신하늘 인생을 송두리째 잡고 휘
“네, 오빠. 말씀하세요.”과연 도국이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화기 너머로 나직하게 스며드는 그의 숨소리가 세나의 가슴을 지그시 눌러왔다.-······등급이 어떻게 돼?그게 그리도 중요한 걸까.“저는 아직 SS클래스가 되려면 까마득해요. 겨우 A클래스인걸요.”고작 그걸 묻기 위해 국제 통화까지 건 것인지, 덜컥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따지려다 세나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이 찰나의 순간에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하지만 도국은 집요했다.-혹시 너, 문제 풀다가 막힌 거라도 있어?세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어깨를 움찔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였다.“미션을 받긴 했어요. C게임을 20까지 레벨업해야 등업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전화기 너머로 도국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오빠?”-최기범 실장의 우정이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차준호를 돕다니.읊조리는 도국의 말을 들으며 세나는 그렇게도 연결이 되나 싶어 픽 웃음을 터뜨렸다.“친구 사이라면 서로 잘되길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오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그때, 수화기 너머로 도국의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맞아. 나 역시 아준이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함께 가줄 수 있지.이아준의 이름이 신하늘보다 먼저 등장했다.“그런데 오빠, 대체 왜 이런 걸 물으신 거예요?”도국이 가볍게 받아쳤다.-미안.
순간 나지란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오만함마저 완전히 휘발되어 버렸다.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비굴함과 추악한 눈물로 지저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듯 고개를 조아리며, 이왕춘을 향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살려주십시오! 아버님! 전 그이도 없이 홀로 이 차가운 집안에서 며느리로 버텼습니다! L그룹의 본가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김희주와 손을 잡아야만 했어요! 앞으로······ 앞으로 아준이에게도 잘하겠습니다!”“할아버지! 제발 저와 엄마 구속만 안 되게 해주세요! 이제 회사 지분 따위는 절대로 탐내지 않을게요! 이아준도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네?”[하늘 보육원]에 불을 질렀냐는 직구에 느닷없는 동문서답이라니.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죄를 덮기 위해 허겁지겁 불쌍한 척을 연기하는 두 모녀의 꼴을 보고 있자니 가소로움에 기가 찼다. 대체 뭘 잘하고, 누굴 돌보겠다는 것인가.“제가 던진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죠. 김희주와 결탁해서,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알면서도 [하늘 보육원]에 불을 지른 겁니까? 역시 처음부터 진짜 타깃은 나였습니까? 내가 죽으면 다 잘될 줄 알았냐고요.”이아준의 낮고 서늘한 일갈이 응접실의 공기를 단칼에 베어냈다. 정적이 질식할 듯 가라앉았다.“어멈아. 대답해라.”이왕춘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으나, 그 음성에는 무간지옥의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대하고 서늘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아버님! ······아준이를 죽이려던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