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91 - Chapter 100

109 Chapters

91화. 가면 쓴 자들의 성소

“두 분께서 너무 예민하시다. 저들은 귀한 선물도 가져왔는데….”광장에 모인 자들의 웅성거림.현자 우두머리를 응시하는 은빛 눈동자.루미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심장에서 뽑아낸 검은 씨앗이구나.”루미엘 시선이 그곳에 머물자 열린 상자.잿빛 씨앗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영혼 파괴자.악의 심장 한 조각이 공중에 떠올랐다.두려움에 휩싸인 백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꽃들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 갔다.“신의 아들 성역을 더럽힌 죄, 영혼으로 갚아라!”분노 섞인 사제의 선언.신물인 붉은 돌이 악의 심장을 조각내 버렸다.악령의 본질을 소멸시키는 천계의 단죄였다.현자로 위장했던 자들은 본모습을 드러냈다.살점 없이 뼈와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악의 사도들.최후 발악으로 루미엘에게 저주를 퍼부으려 다가왔다.“빛의 사도들이여! 깨어나라.”선포와 함께 자치령 전체에 진동이 일어났다.악의 사도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하얀 재가 되어 흩어졌다.정화의 빛은 검은 독기를 모두 거두어 루미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손바닥에 모인 독기.대륙에서 오고 있는 어둠의 파편이었다.“저들은 시작일 뿐이에요. 동쪽 검은 산맥이 깨어나고 있어요.”소동이 가라앉은 후.카일은 루미엘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했다.“저들의 간계를 미리 막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아니요, 어머니 붉은 돌과 사부님 검이 없었다면 정원은 이미 무덤이 되었을 거예요.”루미엘 맑은 눈을 보며 뜨거운 불꽃이 가슴에 타오른 카일이었다.다가올 대전쟁.미래의 눈이 그곳으로 날 데려갔다.끔찍한 형상들이 모두 일어난 형국이었다.피할 수 없는 그날.전의를 다지며 동쪽 하늘을 주시했다.불길한 보랏빛 번개가 소리 없이 번뜩이고 있었다.“어머니, 그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둠의 심장으로 가야 할 때가 왔어요.”자치령은 겉보기에 평화로웠으나, 루미엘 눈에 비친 세상은 달랐다.백성들은 루미엘과 카일 그리고 내 위엄 앞에 더욱 깊은 신뢰를 보내게 되었다.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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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성검 아라의 새벽과 통곡의 계곡

루미엘 신성이 카일 육체를 타고 흘러 거룩한 형체를 완성했다.“시험해 보시겠습니까?”카일이 검을 휘두르자, 은빛 잔상이 남았다.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는 루미엘.“아름다워요, 카일 사부님. 이 검의 이름을 아라의 새벽이라 부릅시다. 가장 어두운 밤을 끝내고 아침을 불러오는 검이죠.”완성된 아라의 새벽.긴 여정의 길잡이였다.자치령 백성들은 성문 앞에 모여 떠나는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루미엘님, 가셔야만 합니까?”백성들 애원과 흐느낌으로 가득 찬 성문.루미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여러분, 제가 떠나는 것은 여러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맞이할 내일에서 어둠을 걷어내기 위함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지켜주세요.”루미엘 축복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성검 아라의 새벽을 등에 멘 카일.루미엘 한 걸음 앞에서 길을 열었다.“어머니, 이제 시작이에요.”“그래, 우린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동쪽 검은 구름이 괴수 형상으로 우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유난히 빛나는 아라의 새벽.어떤 어둠도 침범할 수 없는 선명한 이정표였다.자치령 푸른 숲의 끝자락.눈앞에 펼쳐진 것은 생명이 거부당한 통곡의 계곡이었다.검게 타버린 채 갈라진 대지.이름 모를 짐승 뼛가루가 먼지처럼 떠다녔다.수백 년 전 대전쟁 당시 학살당한 원혼이 떠도는….대륙에서 가장 불길한 곳이었다.“루미엘, 이곳은 지독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구나.”“...”조용히 주위를 살피는 루미엘.카일이 다시 앞장섰다.“성검이 인도하는 길 뒤에서 따라오십시오.”카일이 성검 아라의 새벽을 뽑아 들었다.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는 카일.원혼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들려왔기 때문이었다.“저들은 적이 아니에요. 그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길 잃은 아이일 뿐이에요.”루미엘은 가슴 아픈 표정으로 잿빛 먼지를 바라보았다.계곡 깊은 곳.검은 연기가 솟구치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과거 왕국 정예병이었으나 지금은.그림자 기사단이었다.육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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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검은 산맥

바위에 새겨진 붉은 문자가 경고하고 있었다.신을 버린 자들의 영토.“버려진 것이 아니라, 잊힌 거겠죠. 제가 기억해 주러 왔습니다.”루미엘의 속삭임이었다.마주한 곳은 하늘조차 먹구름으로 뒤덮인 불모지였다.공중에 머물러 있는 물기둥.땅은 날카로운 수정 조각들이 솟아난 곳이었다.“이곳은 대륙 마력 흐름이 완전히 끊긴 곳입니다. 제 성검조차 힘을 쓸 수 없습니다.”카일이 성검 자루를 꽉 쥐며 경계했다.실제로 성검의 찬란한 빛도 흐릿해져 있었다.이곳에서 빛을 발하는 유일한 것.루미엘 은빛 눈동자뿐이었다.어둠만이 지배하는 낯선 곳.“사부님, 신이 이들을 버린 게 아니라, 이들이 자신을 스스로 가둔 곳이에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 아이 방 같아요.”거대한 수정 성채와 수십 명의 로브를 쓴 자들이 우릴 가로막았다.공허의 현자라 불리는 자가 공중에 있었다.소용돌이치는 눈을 한 그자.“신의 아들. 은빛 아이! 너의 그 가식적인 빛은 절대적 허무 앞에서 한낱 촛불에 불과하다.”우리 앞에 나타난 커다란 검은 구멍.모든 걸 빨아들이는 공허의 늪이었다.아라의 새벽과 붉은 돌이 굉음과 함께 우리를 호위하며 주위를 맴돌았다.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무(無)의 힘을 다루는 공허의 현자.그가 만든 거대 구멍 또한 파도를 만들어 신물에 대항했다.거센 대항앞에 그 자신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그를 향해 루미엘이 조용히 걸어 나갔다.“공허의 현자, 멈추세요. 당신은 허무 뒤에 숨은 것뿐이에요. 당신 심장은 크게 울고 있어요. 무섭다고, 외롭다고….”“닥쳐라! 신은 우리가 학살당할 때 침묵했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공허를 발견했고, 그것이 세상의 진리임을 깨달았다. 빛은 결국 꺼지지만, 어둠은 영원하다.”외침과 함께 생명력을 갈아 넣은 공허의 현자.폭풍을 소환했다.“루미엘, 안 돼. 공허의 구멍으로 그림자라도 들어간다면, 너의 존재는 무(無)로 돌아가게 돼.”나는 루미엘을 감싸 안으며 폭풍을 견뎠다.그런 나를 보호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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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오만의 추락

카일의 성검과 오만의 흑철검이 맞부딪히며 발생한 충격.산맥의 지형을 바꿔놓았다.카일은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발밑으로 갈라진 대지의 틈새가 깊게 패었을 뿐.그의 시선은 오직 오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신의 아들을 모욕한 죄, 너 같은 괴물에겐 자비조차 아깝다.”카일의 서늘한 목소리.루미엘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자를 처단하는 신의 판결문을 대독하는 집행자였다.성검은 오만의 흑마력을 집어삼키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카일 검술은 더 이상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다.신의 권능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카일의 모든 감각은 초월적 영역에 닿아 있었다.오만의 모든 궤적은 느리고 단조로운 장난질에 불과했다.자신만만하던 오만의 붉은 눈동자에 비로소 당혹감이 서렸다.자신의 힘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을 넘어, 오히려 억누르며 밀어붙이는 압도적인 위압감.“건방진 놈, 감히 이 오만을 상대하려 하다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오만의 절규와 함께.수만 개 검은 송곳이 카일을 향해 빗발치며 살기가 전장을 뒤덮었다.하지만.그것들은 카일에게 닿기 전, 바닥에 나뒹굴어졌다.카일 발밑에서 은빛 오라가 별 무리처럼 솟구쳤다.흑마력 송곳들은 빛에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오른 카일.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그의 등 뒤.루미엘의 신성한 빛이 날개처럼 펼쳐졌다.“이것이 천계에서 내리신 아라의 새벽이다.”카일 성검이 오만의 투구를 정확히 갈랐다.흑갑주 어둠을 태워버렸고, 오만은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오만.이름에 걸맞지 않은 처참한 몰락이었다.전투가 끝난 산맥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거둬들였다.“카일, 당신 다친 거예요?”흐르는 피.그의 갑옷을 얼룩지게 했고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졌다.옅은 미소를 짓는 카일.떨리는 손으로 카일의 피 묻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내 손끝에서 따뜻한 빛의 파동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그 온기는 카일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날카로운 상처를 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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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질투의 속삭임

나 또한 착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천한 시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루미엘.어미의 천함으로 아들의 신성이 빛이 바래지는 건 아닌지….내가 천계의 존재였다면 아들이 신성을 더욱더 인정받지 않았을까…?늘 내 마음속 소리였다.내가 질투하던 존재는….바로 천사들이었다.미안함과 불안함이 독처럼 퍼져 나갔다.질투는 교묘하게도 우리의 가장 아픈 환부를 찔러 서로를 분리하려 했다.“너희들 속마음은 얇은 유리 같단다.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나버리지.”카일이 환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성검을 바닥에 떨어뜨리려던 때.나는 그의 거친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서로의 체온을 의지한 채.질투에 침식되지 않고 무사히 착각의 늪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카일과 내 곁으로 다가온 루미엘.우리 손을 겹쳐 잡은 아들의 소리가 비로소 들려왔다.“사부님, 아니… 카일 천사장님! 나를 보세요. 환각 속의 가짜가 아니라, 지금 당신 손을 잡은 저를 보세요.”루미엘의 목소리.카일의 정신을 꿰뚫고 들어갔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신성이 파동이 되어 끈적한 보랏빛 안개를 밀어냈다.환각이 걷히고, 카일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진짜 루미엘을 발견했다.“질투는 타인의 빛을 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죠. 하지만 카일 천사장님, 당신은 내 빛을 훔칠 필요가 없어요. 영혼 자체가 빛을 지탱하는 힘이니까요.”신의 아들의 엄숙한 선언을 마친 루미엘은 이어 내 손도 꼭 잡았다.온기가 차가워진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어머니, 당신의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이 빛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괴물이 되었을 거예요. 어머니는 누구보다 고결한 분이십니다. 신께서 당신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그 고결함 때문이에요.”질투의 마법이 깨지자, 비명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수많은 거울 파편으로 이루어진 추악한 본모습이 드러났다.“말도 안 돼! 인간 마음속 의심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 리 없어. 너희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해야 해. 증오해야 한단 말이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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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끝없는 허기

“저자의 위장은 끝이 없습니다. 마법도, 검기도 모두 먹어 치우는 자입니다.”카일이 성검을 휘둘렀으나, 그 빛마저 씹어 삼키며 놈은 기괴한 트림을 내뱉었다.놈의 몸집은 빛을 먹을수록 더욱 비대해졌다.겹겹이 쌓인 살점 사이로 수천 개의 눈이 번득였고, 굶주림에 미친 입들은 쉴 새 없이 타액을 흘렸다.“배고파…. 더 줘.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난다.”폭식의 수십 개 입이 동시에 중얼거렸다.놈의 시선이 우리 일행을 훑었다.“아! 저기 은빛 아이가 있구나. 맛있겠다.”놈은 이제 루미엘을 향해 돌진해 왔다.대지가 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요동쳤다.자신의 공격이 놈을 키워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카일.망설임 없이 검을 거두고 방패를 고쳐 잡았다.놈의 잇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생명력을 통째로 갉아먹는 폭식의 냄새였다.“루미엘, 뒤로 물러나! 놈의 입에 닿지 마라!”나의 다급한 경고와 함께.놈의 거대한 앞발이 덮쳐왔다.카일이 어깨로 그 육중한 무게를 받아냈다.꽈직.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갑옷 이음새가 비명을 지르며 입가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하지만.그는 단 한 뼘도 물러서지 않았다.놈의 기세에 밀려 대지가 깊게 패 나갔지만.루미엘과 나를 보호하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오직 뒤에 선 우리를 위해.자기 생명을 촛불처럼 태우며 버티고 있었다.그 처절한 광경 속에서 루미엘이 앞으로 나섰다.“이제 고통을 멈추세요.”차분하지만 묵직한 힘이 실려 있는 루미엘 목소리.폭식의 입 앞에 선 루미엘.놈은 당장이라도 아들을 한입에 삼킬 듯 거대한 아귀를 벌렸다.그 끔찍한 입 속.수많은 생명의 잔재들이 비명처럼 엉켜 있었다.그 순간.루미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마치 길 잃은 아이를 보듯 안타까운 눈빛이었다.“당신은 배가 고픈 게 아니에요. 영혼이 텅 비어 있는 거죠. 무엇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건, 당신이 삼킨 것들에 죄의식도 없기 때문이에요.”루미엘 심장에서 눈부신 천상의 성찬이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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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멈춰버린 시간, 게으름의 늪

갑자기.굴러 내려오던 눈덩이가 사라졌다.완만해진 산맥 경사.따뜻하고 나른한 향기로 가득 찼다.한 걸음을 떼는 것이 천 근의 추를 매단 듯 무거워졌고 모두 잠든 듯 조용했다.“갑자기 눈꺼풀이 무겁구나. 잠시만…. 잠시만 쉬어가는 게 좋겠다.”카일이 성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댔다.영혼을 갉아먹는 무력감.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루미엘….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가야 하니? 여기서 멈춰도 세상은 잘 돌아갈 텐데…. 어차피 해치울 적이라면 우리를 그들이 먼저 찾아오지 않을까?”무기력에 빠져들 때.침실에 비스듬히 누운 형상의 게으름이 나타났다.그는 무기를 들지도, 살기를 내뿜지도 않았다.그저 나른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하품을 내뱉을 뿐이었다.“애쓰지 말라, 어린 신이여. 네가 세상을 구한다고 해서 세상이 고마워할 것 같냐? 어차피 인간은 다시 죄를 짓고, 어둠은 다시 찾아온다. 그 끝없는 굴레를 도는 것보다, 이 안락한 침묵 속에 잠드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겠느냐?”게으름의 목소리.파도처럼 밀려와 우리의 투지를 씻어내렸다.카일 손에서 검 자루가 미끄러졌고 눈에는 삶의 목표를 잃은 허무함이 서렸다.나 또한 계속되는 강행 속.삶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너무 힘들게 달려와서 그런지 이제 지치는구나.”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기 전.루미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게으름, 당신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포기예요. 포기는 살아있는 자의 가장 슬픈 죽음이죠.”루미엘 심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피어올랐다.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불꽃이었다.“카일 천사장님. 약속했잖아요. 내가 옥좌에 앉는 그날까지 곁에 있겠다고. 그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어머니, 단두대에서 신께 울부짖던 그 마음 잊으셨어요? 이제 우리 앞에 갈망이 보이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잖아요.”루미엘의 외침.불꽃이 카일과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카일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검 자루를 부서질 듯 꽉 쥐었다.다시 투기가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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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분노의 심판

“카일 천사장님, 멈추세요. 그 불길에 당신을 던지지 마세요.”루미엘 주변은 신기하게도 열기가 닿지 않는 서늘한 공간이었다.폭주하기 직전인 카일 가슴에 손을 얹은 루미엘.“분노는 자신을 태울 뿐이에요. 우리 심장은 파괴가 아니라 수호를 위해 뛰어야 해요.”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정신을 차린 카일.그의 눈에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금 고고한 광채가 돌아왔다.이제 그는.분노에 동요하지 않았다.폭풍 속 바위처럼 고요해졌다.분노가 광기에 도끼를 휘둘렀지만, 카일은 그 파괴의 궤적을 흘려보냈다.“네놈의 분노는 크지만, 지켜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지팡이를 들고 섰다.그동안 왕과 왕비 그리고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적.분노와 맞서고 싶었다.“분노를 품은 마음으로 신의 이야기를 잇는 것은 불가능하다. 난 신의 사제이며 루미엘의 어미다.”지팡이의 푸른 빛이 붉은 분노의 몸을 가르는 순간.그를 지탱하던 화염 마력이 얼어붙으며 정지했다.자신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는 분노.이내 거대한 얼음 석상이 되어 산산조각이 났다.분노가 사라지자 끓어오르던 용암도 서서히 굳어갔다.“어머니, 어머니의 차가운 이성이 분노를 이겼습니다.”“모두 아들이 있어서 이 어미가 용기를 낸 거예요.”이제 남은 죄악은 단둘.하늘 높이 솟은 흑마법 성.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탐욕스럽고 비대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굳어버린 용암 대지를 딛고 성문 앞에 섰다.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추악한 여섯 번째 죄악.탐욕과 마주섰다.분노의 열기가 식은 자리.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흙과 돌 대신 순금으로 도금된 대지가 나타났고, 길가에는 꽃 대신 눈부신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인간이라면 평생을 바쳐도 얻지 못할 재물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곳.바로 탐욕의 전당이었다.“눈을 현혹하는, 빛에 속지 마십시오. 이 보석들에서 생명이 아닌, 타인의 고혈을 쥐어 짜낸 비린내가 납니다.”카일이 성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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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탐욕의 무게

탐욕은 미친 듯이 바닥의 먼지를 긁어모으며 발악했다.환상이 깨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탐욕.자기 몸을 황금으로 박제하기 시작했다.그의 피부가 차가운 금속으로 변해가며 비명을 질렀다.황금으로 변해가던 탐욕의 육체.거대 폭발과 함께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탐욕이 사라진 자리.오직 차가운 돌바닥과 그리고.그 위를 묵묵히 걷는 우리의 발소리만 남았다.길가에 떨어진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어 루미엘에게 건넸다.“루미엘, 탐욕이 준다는 보석들보다 이 꽃 한 송이가 훨씬 아름답구나.”“맞아요, 어머니.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요.”뚜벅뚜벅 걸어 도착한 곳.정상의 검은 성문 앞이었다.마지막 죄악.그리고 모든 악의 근원인 흑마왕이 기다리는 곳.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것은 이전 죄악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색욕이었다.무력이 아닌,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왜곡된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다.탐욕의 전당을 지나 마침내 흑마왕이 머무는 본성(本城) 앞에 다다랐을 때.우리를 맞이한 것은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었다.장미 넝쿨은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꿈틀거리며 발목을 휘감아 왔다.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진한 향기.그 정원 한가운데 한 여인, 색욕이 앉아 있었다.연민과 색정이 뒤섞인 묘한 빛을 띤 그녀.세상 모든 육체적 사랑을 한 몸에 담은 듯.처연하면서도 치명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가여운 영혼들. 험난한 길을 오며,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니? 이제, 그만 서로를 놓아주렴. 너희가 가진 그 사랑이라는 게 사실은 상대를 갉아먹는 독이라는 걸 내가 알게 해 줄게.”색욕이 나직이 속삭이자, 손끝 붉은 실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카일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실들이 닿는 순간.카일 눈동자는 붉게 물들며 이성을 잃고 흔들렸다.카일의 뇌리에 금기된 생각이 스쳤다.“카일, 저 늙고 초라한 마리안 대신 내가 당신을 편히 쉬게 해 줄게요. 내가 당신을 황홀경으로 보내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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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흑마왕의 독백

거대한 흑철 성문이 열리고 드러난 곳.지옥이 아니었다.루미엘이 태어났던, 그리고 내가 처형당했던….산청과 광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광장은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두던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바람은 없었지만, 처형장에 매달린 깃발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고,돌바닥에는 오래전 말라붙었어야 할 피가 아직도 검붉게 스며 있었다.발끝이 떨렸다.죽음 직전의 공포와 절망까지 그대로 되살려내는 기억의 감옥.숨이 막혀 왔다.하지만.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예전의 나라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나는 두 번의 삶을 지나 이곳까지 왔다.중앙 옥좌에는 흑마왕이 앉아 있었다.역시….저자가 모든 원흉이었구나.흑마왕이 입을 열자, 소름 끼치는 익숙함.수많은 원혼과 흑마력이 뒤섞인 불협화음이었다.“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왕궁에서 도망친 비천한 시녀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저주받은 신의 핏줄이.”목소리와 함께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더니,수백, 수천 개 기억들이 허공에 떠올랐다.흑마록에 기록된 과거의 잔영들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왕비 비올렛이 흑마왕과 결탁.루미엘을 수장시키고 모르가나가 강력한 악의 형상을 소환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그것만이 아니었다.왕궁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시녀들.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졌던 아이들.탐욕 때문에 서로를 죽이던 귀족들.절망 끝에 스스로 악을 택했던 수많은 인간들….모든 죄가 검은 연기처럼 흑마왕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은 한가지.저 괴물은 태어난 게 아니다.인간들 죄악이 쌓이고 또 쌓여 거대 악을 만든 것이다.“마리안, 네가 단두대에서 죽던 그날, 네 아들의 신성을 두려워한 왕비가 나를 불러들였다. 나는 그녀의 탐욕이 빚어낸 그림자였다.”“탈리온, 왜 네 책임을 회피하려 드느냐? 네가 바로 악의 원흉인 걸 안다.”피식 웃는 흑마왕.그 웃음엔 조롱보다 깊은 허무가 담겨 있었다.“탈리온? 난 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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