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61 - Chapter 70

107 Chapters

61화. 가시 돋친 왕좌

비올렛이 북쪽으로 도주한 뒤.왕궁에 남겨진 것은 찬란한 승리가 아닌 수습해야 할 난장판이었다.앙리 시신은 서늘하게 식어 신전에 안치되었고, 루미엘은 갑작스러운 신성 발현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마리안 님, 원로회 의원들이 소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로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거울 속에 비친 나.더 이상 루마레스 숲의 소박한 사제가 아니었다.엘레나가 남긴 흰 예복을 입고, 가슴에 붉은 돌을 브로치처럼 달았다.“기다리라고 해요. 그들은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권력을 기다리는 것이니 서두를 필요 없어요.”차갑게 대꾸하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숨길 수 없는 적의를 들어내는 노회한 귀족들.기름진 냄새와 독한 향수로 얼룩진 자들로 가득했다.“성녀라 칭송받으시니 몸이 무거워지신 모양이군.”원로회의 수장이 삐딱하게 앉아 찻잔을 달그락거렸다.비올렛 시절에도 줄타기 하며 살아남은 노파.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인사가 늦었군요. 국왕 폐하 장례 절차와 왕세자 안위를 살피느라 지체되었습니다.”상석에 앉으려 하자, 원로회의 수장이 지팡이로 상석 옆 의자를 가리켰다.“그 자리는 왕족이나 섭정의 자리지. 시녀 출신 사제에겐 걸맞지 않은 자리야.”순간 회의실에 싸늘함이 감돌았다.등 뒤에 서 있던 카일 손이 검 자루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카일을 눈짓으로 제지한 뒤.오히려 우아하게 웃으며 상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후작님, 제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앙리 왕께서 내게 주신 칙서, 그리고 내 아들 루미엘이 가진 신성이 저를 이 자리에 앉혔죠. 불만이 있다면 신께 직접 따지시겠습니까?”가슴에 붙인 붉은 돌의 기운이 미세하게 흘러나와 회의실을 비추었다.찻잔 속 물이 파르르 떨리자, 귀족들 눈동자도 함께 떨렸다.“말씀이 지나치시군! 신성함은 존중하나, 국정은 별개의 문제요. 지금 당장 북부 국경에서 비올렛 왕비가 제국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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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제국 사절단

루미엘 침실.코키투스 같은 냉기와 용광로 열기가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아이의 하얀 셔츠 너머로 비치는 검은 꽃.줄기를 뻗치며 루미엘 목덜미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루미엘, 내 목소리 들리니?”떨리는 손으로 아이 이마를 짚었다.손바닥이 델 듯 뜨거웠다.붉은 돌의 기운을 끌어모아 아이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평소라면 순순히 스며들어야 할 내 신성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안 돼…. 이럴 리가 없어.”“마리안, 뒤로 물러서십시오.”카일이 나를 잡아끌며 검을 뽑았다.검은 꽃 속 액체.형체 없는 괴수로 변해 우리를 위협했다.비올렛이 도망치며 루미엘 신성 내부에 심어둔 흑마력이었다.아이 힘이 강해질수록 그 힘을 먹고 자라는 지독한 기생 괴물이었다.이를 악물었다.비올렛,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흑마법 저주가 아이 심장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사악한 비올렛이 심연의 마석을 루미엘 심장에 던진 여파가 회귀 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그렇게 신의 시간은 회귀 이전과 이후 모두.동일선상에 있었다.“카일, 검으로는 안 돼요. 저건 실체가 아니에요. 생명력을 인질로 잡은 흑마력 덩어리예요.”지팡이를 바닥에 박고 무릎을 꿇었다.내 생명을 깎아서라도 아이를 구해야 했다.붉은 돌이 내 심장을 옥죄어 오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신이시여,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회귀가 아들의 고통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차라리 제 목숨을 다시 가져가소서.”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듯 붉은 돌이 진동하며 검은 꽃을 억누르기 시작했다.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검은 기운이 잠잠해지며 아이 호흡이 돌아왔다.하지만 꽃은 사라지지 않았다.그저 꽃봉오리를 닫고 다른 먹잇감을 기다릴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채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외무관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마리안 님! 제국에서…. 제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사절단? 비올렛이 도망친 지 사흘도 안 됐는데?”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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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새벽의 출정, 금지된 문

제국 사절단이 남기고 간 오만함은 왕궁에 독처럼 퍼졌다.귀족들은 이미 짐을 싸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고, 성 밖 백성들은 전쟁의 전조를 감지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하지만 가장 잔인한 현실은 침상 위 신음하는 아들이었다.“어머니,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저는 왕이 싫어요.”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신성을 가진 아이 몸이 흑마력에 잠식당하는 고통은 일반인 병보다 수만 배는 처참했다.아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애써 미소 지었다.“조금만 참으렴, 엄마가 곧 약을 찾아올게. 숲의 요정들도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아이를 잠재운 뒤.별궁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일과 마주했다.그는 이미 흉갑을 갖춰 입고, 허리에는 앙리가 살아생전 하사한 보검을 차고 있었다.북부 국경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전군의 총사령관.그가 가야 할 곳은 승리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전장이었다.“꼭…. 지금 가야 하나요?”내 목소리가 끝내 떨렸다.카일은 내게 다가와 따뜻한 손길로 뺨을 감싸 쥐었다.“제국의 선발대가 이미 강을 건넜다는 첩보가 왔습니다. 제가 나가서 시간을 끌지 않으면, 그들이 이 왕궁까지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마리안, 당신과 루미엘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하지만 제국군은 마수(魔獸)를 부린다고 들었어요. 인간의 힘만으로는….”“잊으셨습니까? 난 천계의 천사장입니다.”카일이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나는 밖에서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안에서 루미엘님을 살릴 방법을 찾으세요. 당신이 기적을 일으킬 거라는 걸 믿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갈 수 있습니다.”카일은 내 손에 작은 단검 하나를 쥐여주었다.자신의 가문을 지켜온 호신용 단검이었다.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이 깔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잠시 후, 성문을 나서는 수천의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카일을 보낸 뒤, 곧장 왕궁 지하 깊숙한 곳.역대 국왕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금지된 서고로 향했다.그곳은 초대 왕이 흑마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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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붉은 눈물, 흑마법의 독

서고의 공기는 점차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처럼 탁해졌다.내 손에 들린 금서(禁書)에서 검은 실 가닥이 내 손목을 타고 기어올랐다.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영혼의 서약.“마리안 님, 제발 멈추세요.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로사가 울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루미엘의 가녀린 신음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보단. 훨씬 참을 수 있을 거야.”“마리안 님….”“로사, 나는 처음부터 이 아이를 위해 다시 태어난 거야. 내게 남은 삶을 모두 내 아들에게 준다 해도 아까울 게 없어.”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순간, 붉은 돌이 미친 듯이 튀어 오르며 열기를 내뿜었다.“으악!”루미엘 몸속에 흑마법 독이 내 심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수천 개 달궈진 바늘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눈앞이 붉게 물들며 누군가의 기억 조각이 파편처럼 스쳐 갔다.차가운 단두대의 감촉.나를 조롱하던 군중의 외침.그리고 비올렛의 비웃음 소리.저주는 내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며 무너뜨리려 했다.‘포기해, 마리안. 네가 죽어야 이 아이가 진정한 신이 된다.’환청 속, 비올렛 목소리.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다잡았다.붉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금서 위로 떨어졌다.그때였다.붉은 돌이 흑마법 독을 거칠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어미의 의지가 돌의 권능과 저주를 결합시켜 몸 안에 봉인했다.루미엘 몸에서 빠져나온 흑마법 독은 내 왼쪽 쇄골 아래.불길한 문양으로 자리를 잡자, 바닥에 쓰러진 나.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신이시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그때.신의 부름을 받아 천계로 올림 받는 착각이 일었다.정신을 차렸을 때.루미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아이는 몰라보게 좋아졌고 평온한 호흡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마리안 사제님, 다행입니다. 루미엘님은 위기를 넘기셨어요.”로사가 수건을 적셔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하지만 그녀 눈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무언가 숨기는 것이 분명했다.“로사, 무슨 일이야? 국경에서 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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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얼어붙은 대지

한쪽 팔을 잃은 젊은 장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왕궁의 화려한 예복은 이미 넝마가 되었고, 얼굴엔 검은 재가 묻었지만….눈빛만은 살아있었다.“카일 총사령관은 어디 있지?”“그게…. 죄송합니다. 총사령관께서는 제국의 흑마수와 절벽 아래로 추락하셨습니다.수색대를 보냈지만, 밑은 제국군이 점령한 흑마수들 둥지라 접근할 수 없습니다.”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멀리서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제국의 2차 공격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제기랄, 벌써 또 오는군! 전원 전투 준비!”병사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그들의 눈빛엔 이미 희망이 없었다.수십 마리의 늑대 흑마수들이 침을 흘리며 기지로 달려들고 있었다.사제의 기적을 기대하는 병사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그러나.내 손끝에선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았다.‘제발! 한 번만 더 힘을 주세요.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하셔야 합니다.“붉은 돌을 쥐고 간절히 기도했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폐를 찌르는 듯한 저주의 통증뿐이었다.흑마수 한 마리가 내 코앞까지 달려들어 거대한 입을 벌렸다.죽음이 눈앞에 닥친 순간.내 안의 저주가 반응했다.‘힘을 원해? 그럼 나를 더 받아들여.’내 안에 검은 꽃이 피어나며, 내 왼팔을 타고 문신처럼 번져 나갔다.나는 본능적으로 마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신성이 아닌, 흑마력 파동이 마수 머리를 그대로 날려버렸다.기지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사제 손에서 나온 것이 성스러운 빛이 아닌.비올렛이 쓰던 불길한 흑마력 이었기 때문이었다.“사제님이…. 흑마 법을?”병사들 눈에 경외심 대신 공포가 서렸다.떨리는 검은 손을 숨기며 일어섰다.사람들 시선 따위 중요치 않았다.이 힘이라도 써서 카일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그때.절벽 아래 제국군 점령지 쪽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폭발음과 함께 솟구친 불길은 북부 설원을 붉게 태웠다.병사들의 두려움 섞인 시선을 뒤로한 채.절벽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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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금기(禁忌)의 포옹

“안 돼, 놓치지 마라! 저 계집을 생포해서 황제 폐하께 바쳐야 한다.”루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제국군이 일제히 활을 치켜들자, 하늘에서 보라색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폭발의 충격으로 기절한 카일 몸을 감싸 안았다.차가운 철 갑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페가수스! 지금이에요.”내 외침과 함께 사자로 변신한 페가수스가 제국군의 포위망을 들이받으며 길을 냈다.카일을 부축해 일어섰지만, 왼쪽 쇄골 아래 검은 문양이 이제 턱밑까지 차올라 숨 쉴 때마다 역겨운 냄새가 났다.“하아, 하아…. 조금만 참아요, 카일. 곧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줄게.”내 안의 흑마력을 쥐어짜 발밑에 검은 안개를 피워 올렸다.추격자들의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었다.사제의 빛이 아닌 마녀의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기분.혀끝에 재처럼 씁쓸했다.우리가 도착한 곳.깎아지른 절벽 안쪽 숨겨진 고대 사제의 기도실이었다.오래전 버려져 이끼가 가득했지만.사제들이 남긴 성결한 기운 덕분에 제국의 흑마력이 닿지 않는 유일한 사각지대였다.페가수스가 동굴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은 뒤에야 카일을 바닥에 눕힐 수 있었다.“마리안, 너…. 얼굴이….”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는 페가수스.동굴 안 작은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은 참혹했다.왼쪽 눈동자는 이미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고, 피부 아래 흑마력이 혈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저주가 내 육체를 잠식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난 괜찮아요. 그것보다 카일의 이 장치를 떼어내야 해요.”카일의 가슴 중앙.제국의 흑마력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그의 신경계를 강제로 장악해 살인 병기로 만드는 저주.내가 손을 대려 하자, 흑마력 핵에서 뿜어 나온 줄기가 내 손가락을 검게 태웠다.“으윽!”“건드리지 마! 그건 자폭 장치가 연결된 거다. 잘못 건드리면 이 녀석 심장이 터진다고.”페가수스가 말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내 신성이 온전했다면 정화할 수 있었겠지만.지금 내게 남은 건 오염된 흑마력뿐이었다.문득 깨달았다.루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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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거꾸로 흐르는 시간

“자기가 힘을 잃으면 루마레스 숲 제단으로 가야 한다고.”“루마레스 숲?”“맞아. 분명히 그랬어. 거기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카일은 망설임 없이 나를 등에 업었다.자기 몸도 제국의 실험으로 만신창이였지만.내 체온이 점점 식어가는 것을 느끼자, 초인적인 힘이 솟구쳤다.설원을 가로지르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뒤편에는 루나가 조종하는 마수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오고 있었다.카일은 등에 업힌 내가 떨어지지 않게 가죽끈으로 제 몸과 나를 단단히 묶었다.“마리안, 기억나? 당신이 내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그랬잖아. 다시는 피 흘리지 않게 해주겠다고.”카일이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마수의 목을 쳤다.제국의 병기로 개조되었던 그의 몸.이전보다 더 빠르고 파괴적이었지만, 힘을 쓸 때마다 그의 몸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이번엔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당신이 사제든, 마녀든…. 상관없어.”그때.내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신음이 흘러나왔다.“카일….”“그래, 나야. 정신이 들어?”간신히 눈을 떴지만, 한쪽 눈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나는 내 상태를 직감했다.“내 안의 저주가…. 당신까지 먹어 치울 거예요.”“헛소리하지 마. 당신을 버리는 건 내 영혼을 버리는 거야.”카일은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 가파른 빙벽 위로 몸을 날렸다.뒤에서 날아온 흑마력 화살이 카일의 허벅지를 스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그 순간,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주변 나무를 말라 죽게 했다.저주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대로 있으면 카일에게 흑마법 저주가 옮겨 갈지도 모른다.있는 힘껏 카일을 밀어냈다.“카일, 저리 가요.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몰라요.”“그럼 죽여! 당신 손에 죽는다면 그것도 내 운명이겠지.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은 절대 혼자 어둠 속에 두지 않아.”카일은 폭주하는 흑마력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를 더 꽉 껴안았다.그의 갑옷이 내 저주에 닿아 검게 부식되기 시작했지만.카일 눈빛만은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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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숲의 심판

솟구쳐 오른 나무뿌리.후작의 사지를 결박하고 그를 숲의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으아아아! 마리안, 살려 다오.”숲의 정적 속으로 사라진 후작.그는 죽음보다 더한 영원한 감옥.숲의 고목 안에 갇혀 나무의 영양분이 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주인 잃은 사병들과 왕궁 병사들은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갑자기 주저앉은 카일.내 저주를 검으로 받아낸 그의 팔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마리안, 이제 저 제단만 가면….”“카일, 당신 팔이….”고통을 나눠 가진 우리는 숲의 심장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멀리서 루나의 마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적어도 왕국 내부의 가장 큰 가시 하나는 완전히 뽑아낸 뒤였다.루마레스 숲의 심장인 신전 제단 앞에 도착한 우리.이끼 낀 돌기둥들이 원형을 그리며 서 있는 이곳.엘레나 대사제 기운이 보존된 성소였다.카일이 나를 제단 중앙 바위 위에 눕혔다.대사제가 승천했던 바로 그곳에….가쁜 호흡을 겨우 붙잡고 있는 나.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 같았다.카일은 내 손을 꼭 쥐고 기도문을 외웠다.제단 주위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며 내 의식을 과거로 끌어당겼다.회귀 전,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었다.빨래터.궁에 들어가기 전.인적없는 곳에서 실컷 울면 마음이 편해졌던 때였다.내 옆.또 한 명의 아이가 울고 있었다.어린 시절 비올렛 이었다.“너 왜 여기서 울고 있어?”“넌 왜 우는데?”“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이제 세상에 나 혼자야.”“뭐…? 슬프겠다.”“응! 근데 넌 왜 울어?”“우리 오빠가 끌려갔어.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한테.”“나쁜 사람들이구나.”어릴 적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던 오빠.두 살 차이지만 부모님처럼 날 돌봐주었다.할머니께서 은전 몇 냥 받고 검은 제복 입은 자들에게 팔아넘겼다.그날 이후로 우리 둘은 매일 저녁 그곳에서 만나 놀곤 했다.외로운 둘은 서로를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우리는 서로의 자그마한 품에 안겨 위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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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회색의 사제

내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눈부신 백색도.불길한 흑색도 아니었다.차갑고 고결한 회색빛이었다.“사제 마리안 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사제님, 붉은 돌의 기운은 그대로인데…. 사제의 푸른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숲의 이끼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엘레나 대사제께서도 잠시 그런 빛을 띠고 계신 적이 있었어요.”“완전한 사제가 되기 전 시험 기간이라 했었지?”“응. 대사제님도 얼굴에 흉측한 뱀의 형상이 새겨진 때가 있었어.”엘레나도 회색 기간이 있었다고…?그랬다.흑마(黑魔) 탈리온은 신과 인간을 이간질하는 자였다.더구나 신의 사제라면 더욱 잔혹하게 술책을 부렸을 것이다.루마레스 숲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보호해야 할 루미엘이 인간계로 나갔기 때문이었다.모든 이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흑마법사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제단 근처까지 들이닥친 루나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그녀가 부리는 마수들도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으르렁거렸다.천천히 제단에서 내려왔다.한쪽 눈은 여전히 보라색이었으나, 광기 대신 서늘한 이성이 깃들어 있었다.“루나, 비올렛에게 전해라. 내게 던진 진흙이 이제는 나를 지키는 갑옷이 되었다고.”손을 뻗자, 바닥에서 회색 가시가 솟아올라 달려들던 마수들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정화의 힘과 파괴의 힘이 동시에 작용하는 기적이었다.“카일, 준비됐나요?”내 각성과 동시에 그의 몸 안에 남아있던 제국 흑마력 덩어리도 회색빛에 순화되었다.제국의 꼭두각시가 아닌, 사제의 연인으로 회복했다.“당신이 가는 길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길을 내겠습니다.”카일의 검술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빨랐다.“뭣들 하는 게야?”루나가 흑마법 검을 휘두르자, 커다란 공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피하지 않았다.한 손으로 움켜쥔 후. 부숴버렸다.“흑마법은 결핍에서 오는 힘이지. 하지만 내게는 지켜야 할 아들이 있다. 네 주인의 증오 따위로 내 결의를 뚫을 수 없다.”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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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신의 어머니, 검을 들다

국경의 밤은 차갑다 못해 시렸다.하지만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박동이 요동치고 있었다.루미엘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었다.“아이 호흡이 내게 닿고 있어요.”손을 뻗자, 손끝에서 황금 입자들이 날아올랐다.카일은 뒤에서 묵묵히 어깨에 두꺼운 망토를 둘러주었다.“후작의 잔당들은 빛을 마주하며 실명하거나 미쳐버렸다고 합니다. 이제 왕국은 안전합니다.”“인간계를 통치하며 인간이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 루미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죠. 하지만. 아이가 펼칠 성군의 길에 작은 얼룩은 남겨두고 싶지 않아요.”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더 이상 자비만을 베푸는 가짜 사제가 아니었다.반신반인의 어머니.아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각오가 된 수호자였다.마주한 제국의 국경 요새.거대한 마수의 입처럼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수천 명의 제국군과 비올렛이 연금술로 빚어낸 병사들이 성벽을 메우고 있었다.“사제 마리안! 이곳에 네 발을 들여놓는 순간. 영혼은 갈가리 찢길 것이다.”성벽 위에서 제국 병사들이 소리쳤다.하지만 카일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그의 검에는 회색의 마력과 루미엘 은빛 가호가 섞여 기묘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카일, 길을 엽시다.”우린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인간의 속도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낙엽처럼 쓰러졌다.카일의 검과 내 지팡이 검기가 폭발하며 제국 철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인간이 아니다. 마수다. 당장 쏴라!”성벽 위 수백 명의 흑마법사가 일제히 얼음송곳을 쏟아부었다.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자, 거대하고 투명한 돔이 형성되었다.“루미엘 이름으로 명하노니, 부정한 힘은 무릎을 꿇어라.”전장에 퍼진 목소리.제국 흑마법사들이 쏘아 올린 마법들이 맥없이 흩어졌다.신이 부여한 권능 앞에서 흑마법 따위는 먼지에 불과했다.요새 중심부에 도달했을 때.안개 속에서 기괴한 형체들이 나타났다.그들 모두 나와 똑같은 흰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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