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71 - Chapter 80

107 Chapters

71화. 황폐한 땅의 구원자

제국의 내륙은 처참했다.악의 황제가 마탑의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대지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인 탓에, 한때 풍요로웠을 들판은 먼지만 날리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마을 곳곳에는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황제가 파견한 수탈병들이 매질을 하며 가축과 곡식을 빼앗고 있었다.“이게 불로장생을 원하는 황제가 만들고자 했던 제국인가?”탄식이 새어 나왔다.길가에 쓰러진 아이를 보며 멈춘 걸음.아이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었다.카일은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으며 검자루를 쥐었다.“악의 황제에게 백성은 소모품일 뿐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마탑 꼭대기에서 누리는 영생과 권력뿐이죠.”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조금씩 돌아오는 신성 덕분에 온기가 흘러나와 아이 메마른 신체로 스며들었다.창백했던 뺨에 핏기가 돌며 생기를 찾은 아이.이를 본 제국 백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성녀다... 왕국에서 성녀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소문 속 마녀와는 다른 자애로운 모습에 백성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같은 평범한 인간입니다. 경배는 신께 하십시오.”높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잰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올 때였다.지평선 너머.제국의 최정예 부대 흑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은 흑마법으로 육체를 개조당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 기사들이었다.“성녀라 자칭하는 계집을 죽여라. 돕는 자 또한 모두 반역자로 간주하겠다.”흑기사단 단장.도끼를 휘두르며 내게 돌격했다.뒤따르는 수백 명의 기사들.그들이 내뿜는 살기가 대지를 진동시켰다.카일이 호위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았다.“마리안, 백성들 뒤로 물러서십시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카일의 등 뒤로 마력이 폭발하듯 솟구쳤다.제국의 개조 실험을 이겨낸 그.천계의 천사장다운 광채가 주위를 밝게 했다.카일의 검과 단장 도끼의 부딪침을 시작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흑기사단이 우르르 공격을 시작했다.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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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악몽

제국의 수도는 이미 도시 기능을 상실해 있었다.황제의 최후 발악으로 도시 전체 생명력을 흡수하는 마법진을 가동했기 때문이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땅은 마력의 저주로 타들어 갔다.드디어 마탑의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기다렸다는 듯 열린 문.“카일,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해요. 흑마법은 물리적인 힘보다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 능숙하니까요.”내 경고가 끝나기도 전.마탑 안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안개가 우리를 덮쳤다.카일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손끝에 닿은 건 서늘한 기운뿐이었다.깊은 절망 속에 갇혔다.다시 눈을 떴을 때.나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목에는 무거운 칼날이 스쳤고 손목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성녀를 처형하라! 아들을 죽이고 나라를 판 마녀를 처단하라!”군중들 야유와 증오 섞인 함성.숨이 멎는 것 같았다.이곳은 회귀 전.바로 그 단두대였다.“마리안, 기분이 어때? 다시 그날로 돌아온 기분이. 하하하!”익숙하고도 잔인한 목소리.고개를 들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비올렛이었다.그날처럼 단상 위에서 와인 잔을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이건 환상이야. 나 자신이 만든 허구일 뿐이야.”소리치며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자, 비올렛은 비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단두대 옆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카일.차갑게 식어버린 루미엘의 사체가 나타났다.“환상이라고? 하하! 아니, 이건 네가 바꿀 수 없는 진실이야.”“아니야. 환상이야. 난 깨어나야 해.”“마리안, 넌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게 만드는 저주받은 시녀일 뿐이야. 네가 감히 성녀를 연기하고 신의 어머니를 자처해? 가소롭구나.”비올렛이 다가와 내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그녀 눈동자 속에 쌓인 질투와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결국 또 이렇게 되는가…?흘러내리는 눈물.죽은 아이의 모습은 내 영혼을 찢어놓기에 충분했다.하지만.그 슬픔의 심연 속에서.아주 미세하지만, 선명한 빛의 진동이 느껴졌다.“어머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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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빛의 시대

마탑 천장 또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비올렛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그녀 육체는 검은 점액질과 흑마력으로 뒤엉킨 형상으로 변해갔다.마탑 전체의 마력을 강제로 흡수한 대가였다.“마리안…. 너만 없었으면! 그 신성한 아이가 네 배 속이 아니라 내 안에서 태어났어야 했어.”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그녀 입에서 터져 나왔다.휘두른 흑마법 채찍이 석조 기둥을 무너뜨렸다.내 등에 다시 펼쳐진 날개.카일을 안고 날아올랐다.“카일, 비올렛은 이미 자아를 잃었어요. 그녀의 질투가 형상화된 찌꺼기만 남은 것뿐이에요.”의외로 담담해진 나.비올렛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까지 질투했던 비올렛의 마음.누군가를 향한 온전한 사랑이라 믿었던 그녀의 사랑 또한 그것을 가질 수 없었기에 파괴하려던 가련함이었다.“카일, 이제 끝내야 해요. 아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야죠.”대사제 지팡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순간, 세 가지 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세 가지 힘이 하나로 합쳐지자, 신물인 지팡이는 태양보다 더 눈 부신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둠을 걷어내고 질서를 세우는 창조의 지팡이였다.“카일, 이제 갑시다. 우리 집으로!”“마무리는 깨끗이 하고 갑시다.”외침과 함께 카일은 번개처럼 파고들어, 흑마법의 심장부.마력이 집중된 제단 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하얀빛과 함께 제국 수도 전체가 사라졌다.비올렛의 처절한 비명은 빛의 해일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었다.그녀의 검은 마력들이 하얀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빛이 걷힌 마탑 잔해 속.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소멸해 가는 비올렛을 마주했다.비올렛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마리안…. 결국 너는 끝까지….”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비올렛.수십 년을 이어온 잔혹함이 사라졌다.허무하게….그녀의 이룰 수 없었던 열망과 함께.비올렛이 소멸하자, 제국을 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거짓말처럼 걷히기 시작했다.메말랐던 들판에 단비가 내렸고 비올렛의 저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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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왕관의 무게

마탑이 무너진 지 한 달.왕국은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으나.그 평화는 오직 루미엘 희생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하루 종일 옥좌에 앉아 신하들의 보고를 들어야 했던 루미엘.그의 신성은 대륙의 기근을 해결하고 있었지만, 그 대가로 아이의 생명력은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다.“폐하, 동부 영지의 가뭄이 심각합니다. 다시 한번 기적을….”“폐하, 제국 잔당들이 국경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벌을 내려주소서.”신하들은 루미엘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만 대했다.루미엘의 은빛 눈동자는 무심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지만,그 작은 손은 왕좌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있었다.아들이 신으로 추앙받을수록, 인간으로서의 루미엘은 사라져 갔다.“그만 하세요! 루미엘은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입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 들 가세요.”단호하게 외치자, 신하들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물러났다.모두가 나간 뒤.루미엘은 그제야 옥좌에서 내려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어머니…. 졸려요. 빛을 내보내는 건 너무 피곤해요.”아이를 꽉 껴안았다.아이 몸의 열이 들끓었다.과도한 신성 사용으로 육체가 쉼을 원하고 있었다.한편, 제국 마탑 잔해를 조사하던 카일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분명 소멸한 비올렛.그녀가 사라졌던 자리에 검은 수정들이 돋아나 있었다.“이것은…. 인간의 마력이 아니야.”카일이 검을 휘둘러 수정을 내리치자, 검이 튕겨 나갔다.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수정.흑마(黑魔) 탈리온의 돌이었다.루미엘이 발산하는 강한 신성을 흡수하며 진화하고 있었다.비올렛의 소멸로 발생한 저주의 흑마력이 탈리온에게 스며들며 그자 또한 신성과 마력을 동시에 소유한 자가 되었다.비올렛의 소멸 상황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제국 황제.그가 탈리온이었다.여러 모습으로 인간계에 잠시 머무는 그.비겁자 이거나 전략가일 것이다.아니…. 신의 벌을 받는 것인가….“고맙구나, 그 아이 신성이 커질수록, 나는 거대한 어둠이 되어 부활할 것이다.”급히 왕국으로 말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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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보랏빛 안개 숲

잠든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렸다.“카일, 저는 단두대에서 살아남는다면 왕국을 무너뜨리고 내 아들이 왕좌를 차지하게 하려고 했어요. 그게 잘못이었음을 이제 깨달았어요.”“마리안, 루미엘이 왕좌를 차지하는 건 신의 뜻이기도 해요. 당신이 원한다고 차지할 수 있는 왕좌는 아니에요.”“신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의 행복을 신께서도 원하지 않을까요?”“허허! 제가 빨리 가서 여쭤봐야겠네요.”“카일, 농담이어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네? 아…. 네!”“지금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내 아이가 평범하게 자라는 것이에요. 지금 저 옥좌는 루미엘의 영혼을 갉아먹는 괴물일 뿐이에요.”“일단, 당신의 뜻에 따르겠소. 이 또한 신께서 주시는 광야의 과정이겠지요.”“광야?”“네! 광야!”비밀 통로를 통해 왕궁을 빠져나왔다.등 뒤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묘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루미엘을 안고 왕궁을 빠져나올 때도 들었던 종소리였다.그래.루미엘의 행복을 위해 탈출하는 거야.왕궁에서 지켜야 할 왕좌의 무게는 의무가 아닌 끊어내야 할 굴레처럼 느껴졌다.루마레스 숲의 금지된 땅.루마레스 동굴.신이 인간에게 신성을 물려주고 잠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루미엘 신성의 시작점.그곳에 가면 신성을 제어하거나 봉인할 유일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보랏빛 안개의 숲이라 불리는 기괴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었다.루마레스 숲에서 처음 보는 장소.숲을 열어 놓으며 인간계의 욕심이 스며들어 변질된 곳이었다.우리는 서둘러 숲에 남아있던 정령들과 요정들을 모았다.“마리안 사제님, 무슨 일인가요? 왜 다시 루미엘님을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루미엘의 신성이 폭파될수록 아이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어요.”“네…?”“숲을 다시 닫아야겠어요. 안개의 숲인 이곳부터 정화할게요.”“네! 그럼, 숲의 문을 우리가 닫겠습니다.”숲의 정령들과 요정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사제님, 숲의 문이 닫히질 않아요. 너무 오랜 기간 인간계 기운이 이곳을 차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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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더 깊은 곳으로

앞을 가로막은 바위산.무작정 그곳을 오르기 시작했다.숲이 보호받지 못하는 지금.더 깊은 곳으로 가야만 했다.한참을 올라가자, 기슭의 작은 동굴이 보였다.“카일, 찾았어요. 그곳과 비슷하지요?”“네. 그런데…. 이곳은 조금 더 오래된 동굴 같습니다.”동굴로 들어서자, 찬란한 은빛이 새어 나왔다.왕궁에서 본능적으로 주변의 부정한 기운을 밀어내려는 신성을 뿜어낸 루미엘.그것은 동시에 주변 흑마수들에게 신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내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같은 시각.왕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어린 왕과 사제 그리고 총사령관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소식에 귀족들은 공황에 빠졌다.“사제와 총사령관은 이미 죽었고 그들의 탈을 쓴 흑마수들이 분명하다.”“맞습니다. 흑마수들이 우리 왕을 납치한 겁니다.”후작을 두둔했던 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나를 흑마수로 몰아세웠다.그들은 왕국 최정예 추격대인 기사단을 소집했다.“왕을 찾아라. 그리고 그를 끌고 간 흑마수들을 처단하라!”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루마레스 숲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나는 품 안에서 뒤척이는 루미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래의 눈을 펼쳤다.내 눈에는 더 이상 자비만이 아닌 적을 압도하는 서늘한 투지가 서려 있었다.어느새.내게 돌아온 신의 능력.이상한 것은 신성과 함께 마력 또한 사라지지 않고 내 속에 능력으로 자리 잡았다.마수 공격의 대가는 참혹했다.기괴한 보랏빛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돋아났고, 숨을 쉴 때마다 서늘한 냉기가 폐부를 찔렀다.“마리안, 제발 쉬십시오. 당신의 몸이 그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카일이 이마를 닦아주며 애타게 말했다.하지만 고통을 참으며 옆에서 곤히 잠든 루미엘 손을 꼭 쥐었다.신기하게도 마수의 공격을 흡수한 이후.루미엘 신성 과부하 증세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괜찮아요, 카일. 내가 이 독을 품고 있는 동안은 루시앙이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아들을 위해서라면 악마의 힘조차 견뎌낼 수 있었다.그때,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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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잊힌 신들의 무덤

왕국 추격대를 뿌리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거대한 절벽이었다.생명이 살 수 없을 만큼 신의 손길이 멈춘 장소였다.몸은 갈수록 위태로워졌다.피부 아래를 기어다니는 보랏빛 혈관.이제 목덜미까지 차올랐고, 내뱉는 호흡마저 힘에 겨웠다.“마리안, 여기서 더 가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카일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등에 업힌 루미엘 온기를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카일, 저는 이미 돌아갈 길을 잃었어요. 왕국은 저를 마녀라 부르고, 제국은 저를 원수라 부르죠. 지금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들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곳 뿐이에요. 그것이 지옥이라 할지라도요.”계곡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중력이 수십 배로 무거워진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그때, 바위 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온몸이 낡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눈 대신 푸른 안광만이 감도는 자였다.“신성을 품은 아이와, 독을 흡수한 여자 그리고 명예를 버린 천사장인가?”소름 끼치는 음색이었다.카일이 검을 뽑자, 그가 비웃듯 손가락 하나를 까닥였다.그러자 카일 발밑에서 돌덩이들이 솟아올라 그의 사지를 결박했다.“이곳은 무력으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아니다. 이곳은 신이 버린 곳이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잠든 무덤이니까.”비틀거리며 앞으로 다가갔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안개.푸른 안광과 충돌하며 소리를 냈다.“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내 아들 안에 있는 이 거대한 빛을 잠재울 방법을 찾으러 왔어요. 이 아이가 신으로 타 죽기 전에,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그자가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심장 근처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둠과, 그것을 억누르는 처절한 모성을 읽어냈다.“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되돌리겠다니…. 그것은 신에 대한 반역이다. 하지만 재미있군. 마력을 품고도 이성과 신성을 유지하는 인간이라니.”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은 그.순간 내 전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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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거울의 늪

카일이 경고하며 내 눈을 가리려 했으나, 자석에 이끌리듯 암벽을 응시했다.암벽 속에는 수천 명의 내가 있었다.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마리안.아들을 빼앗기고 미쳐버린 마리안.그리고 시녀 시절 비올렛 발아래서 피를 흘리며 구걸하던 마리안.그 환영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속삭였다.“너는 결국 죽을 운명이야. 네가 아들을 살린다고? 너 때문에 저 아이는 괴물이 될 거야.”환영들 사이에서 가장 선명한 형체 하나가 암벽을 뚫고 걸어 나왔다.그것은 현재 내가 아닌 회귀 전 처참하게 죽었던 시녀 마리안이었다.목에 깊은 자상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내 목을 조여 왔다.“왜 너만 행복해지려 해? 왜 너만 기회를 얻었지? 죽어간 우리 아들은 어떡하고.”망령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갔다.카일이 검을 휘둘러 망령을 베어 넘기려 했지만, 칼날은 닿지 않았다.칼로 벨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그것은 내 심장 깊은 곳에 뿌리 박힌 죄책감이었다.“카일, 멈춰요…. 이건 나와의 싸움이에요.”망령의 피 묻은 손을 피하는 대신 오히려 그 손을 맞잡았다.“맞아. 하지만 나는 너를 잊은 적이 없어. 목이 잘리던 그 차가운 감각도, 아이를 잃고 울부짖던 그 절망도 모두 나야.”눈에서 눈물이 흘러 망령의 손등에 떨어졌다.신기하게도 눈물이 닿은 자리에 검은 낙인이 하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시녀가 아니야. 나는 미래를 선택한 어미지. 네가 겪은 그 모든 지옥을 내가 안고 갈게. 그러니까 이제는 편히 쉬어.”망령을 따뜻하게 끌어안자, 비명을 지르던 수만 개의 환영이 일제히 고요해졌다.늪 전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삶 전체를 긍정함으로 끌어낸 승화였다.내 몸 안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비올렛에게서 흡수했던 보랏빛 어둠과, 루미엘이 준 은빛 신성이 심장에서 하나가 되었다.빛도 어둠도 아닌.모든 것을 포용하는 오로라가 전신을 감쌌다.“이건…. 신성도, 마력도 아니야.”카일이 경탄하며 중얼거렸다.손을 뻗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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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소멸의 계약

그녀가 손을 펼치자, 샘물 수면 위에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비쳤다.겪지 못한 또 다른 세계.내가 비올렛을 죽이고 여왕이 되었으나 루미엘이 폭주해 대륙이 멸망한 세계.카일이 나를 지키다 죽임당한 세계.수백 번의 회귀 속에서 카일과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이, 비극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마리안, 네가 아이의 신성을 받아낸다면, 아이는 평범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너는 형체를 잃고 이 샘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들게 된다.”고통받는 수많은 나를 보았다.루미엘을 품에 안았다.그리고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가장 좋아하던 산딸기 열매였다.“어머니 달콤해요.”“기억하렴. 이 달콤함, 바람의 시원함, 그리고 네가 앞으로 만날 수많은 사람. 그게 네가 가져야 할 진짜 힘이야. 신의 빛도 좋지만….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건 바로 너 자신이야.”아이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겼다.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아이 인장에 닿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내 손등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갑자기 하늘에서 벼락 치듯 번쩍이는 광채가 나를 덮쳤다.루미엘 몸에서 빠져나온 은빛 신성이 내 육체에 투명하게 스며들었다.머리카락이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다.다가온 카일.내 허리를 꽉 껴안은 그.손끝에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사라지게 두지 않아…. 절대로!”카일은 자신을 내 영혼에 고정하기 위해 영혼 각인을 새기기 시작했다.“당신을 지키겠소. 당신이 잠든다면 내가 당신 꿈속으로 들어가 당신을 깨우겠소. 소멸 대신 우리가 이 땅의 수호자가 되어 루미엘 미래를 담보합시다.”카일의 외침.샘이 거세게 요동쳤다.그녀 눈에 처음으로 경이로움이 서렸다.정신이 혼미해지며 카일의 따뜻한 품과 루미엘 울음소리가 들렸다.내 몸에 천계의 상징인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정적만이 감돌았다.여인은 사라지고 나무 아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잠든 나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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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빈손의 축복

계곡을 빠져나온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황무지였다.화려한 왕궁도, 풍요로운 영지도 아닌 척박한 땅.등에 업힌 루미엘을 내려놓았다.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인간 아이가 된 루미엘.신성을 빼내자, 해맑은 미소를 되찾았다.“카일, 우린 모든 걸 잃었네요. 신분도, 재산도요. 그런데…. 나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묵묵히 땔감을 모으며 대답하는 카일.얼굴에 행복이 묻어 나왔다.“나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이제 오직 서로만 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리안, 당신은 루미엘에게 신성 대신 생명을 준 겁니다.”내 심장에 꿈틀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루미엘에게서 옮겨온 꿈틀대는 신성.아이를 대신해 짐을 지는 대속의 무게였다.그날 밤.꿈속에서 다시 한번 늪의 여인을 만났다.신성을 내게 옮겨준….“마리안, 너는 네 아들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느냐?”“네, 제가 죽어서 아이가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그것이 바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란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어,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 네 아들의 신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의 순종을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것이다.”고난은 벌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배우기 위한 광야인 것을.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을 때보다 낮은 곳에서 신의 모습을 알게 됨을 깨닫기 시작했다.나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을 만났다.배고픔에 잠에서 깬 루미엘.울먹이며 내게 다가왔다.우리에게 남은 식량은 마른 빵 한 조각뿐이었다.긴 한숨과 기도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그때, 지나가던 가난한 유랑민 무리가 다가왔다.그들 역시 쫓겨난 자들이었고 가진 것이 없었으나, 아이를 보고 자신들의 소중한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왕궁에서 먹던 진수성찬보다 이들이 건넨 따뜻한 수프가 훨씬 맛있었고 소중했다.내 등 뒤에 돋아난 날개는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상처받은 자들을 덮어주고, 길 잃은 자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라는 긍휼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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