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164 Chapters

51. 서고

그날 밤, 월령은 서고 앞에서 멈췄다. 군량 장부는 심도윤이 돌아올 때까지 봉해 두기로 했으나, 서고 안에서 이미 촛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문틈 아래로 빛이 얇게 흘렀고,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월령은 청아를 뒤에 세우고, 문고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손은 늦게 내밀어도 된다 — 위지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문밖에서 물었다."누가 안에 계십니까?"종이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안에 있던 사람은 둘째 숙부 심도현이었다. 그는 놀란 얼굴을 빠르게 거두었다."아가씨께서 이 시각에 서고에는 어쩐 일이오?""빛이 새어 나와서요."월령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공문 뒤 장부는 봉해 두기로 하지 않았습니까.""봉했지. 다만 오래된 장부의 곰팡이를 살피러 왔을 뿐이오. 장마가 오면 종이가 먼저 상하니."틀린 말은 아니었다.경안의 장마는 종이를 잘 먹었다. 그러나 심도현의 손끝에는 먼지가 없었다.장부를 오래 만진 사람의 손이 아니라, 문고리만 오래 쥔 사람의 손이었다. 월령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제가 약방에서 말린 창포를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장부장에 넣으면 습기가 덜합니다.""그럴 필요까지는…""아버지 장부입니다."월령의 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소녀가 걱정이 많아 그렇습니다."심도현은 웃었다."아가씨가 요즘 부쩍 집안일을 많이 살피는구려.""어머니께서 아직 병중이시니까요."월령은 눈을 내리깔았다.심도현은 더 말하지 못했다. 월령은 청아를 시켜 창포를 가져오게 하고, 서고 문 앞에 앉아 장부장이 다시 닫히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촛불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나왔다. 황궁 침전의 향보다 덜 화려했으나, 월령에게는 더 무서웠다.향은 사람을 흐리게 했지만, 장부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아가씨."청아가 아주 낮게 속삭였다."섭정왕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윤백 나리인데… 이번에는 장독대 옆에서 아주 점잖게 기다리고 계세요."장독대 옆에서 점잖게 기다리는 왕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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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측백나무

밤이 더 깊은 뒤, 월령은 후원 끝 측백나무 아래에서 위지헌을 만났다. 그가 먼저 온 것인지, 늘 거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먹빛 장포는 밤과 섞였고, 허리의 옥패만 희미하게 빛났다. 감송향이 바람 아래로 낮게 깔려 있었다.월령은 그 향을 맡는 순간, 걸음이 잠깐 늦어졌다."장부를 보았느냐."위지헌이 물었다."아직 열지 않았습니다.""잘했다."그 짧은 말에 월령의 심장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칭찬이라기보다 판정을 들은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안심이 되었다."왕야께서는 숫자도 보지 않고 위험하다는 것을 아십니까?""숫자는 마지막에 속인다."위지헌은 그녀가 들고 있던 흰 실 한 가닥을 보았다. 낮에 매듭을 짓다 소매에 붙어 온 실이었다."실도 그렇다. 끊어지는 것은 끝이지만, 틀어진 것은 처음이다."월령은 그 말을 곱씹었다.위지헌은 어려운 말을 던져 두지 않았다.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장부를 고치려는 자는 숫자를 먼저 바꾸지 않는다. 봉인을 느슨하게 하고, 문을 열 사람을 만들고, 나중에 종이가 상했다 말할 틈을 남긴다.""그럼 오늘 서고 문을 연 사람은…""아직 죄가 아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았다."허나 다음에 같은 문 앞에 서면, 그때는 이유를 물을 수 있다."월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실을 너무 세게 당기지 말라는 말과 같군요."위지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정말?"그 낮은 물음이 또다시 월령을 곤란하게 했다."제가 틀렸습니까?""아니."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웃음이라기엔 희미했고, 한숨이라기엔 부드러웠다."네가 너무 쉽게 알아듣는 것이 문제지."밤바람이 뺨을 스쳤다.그가 가까이 다가왔다.다른 사람이라면 한 걸음 물러났을 거리였다. 월령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끝이 움직이지 않았다.감송향이 가까워졌다.그 향은 살구꽃을 덮지 않았다. 꽃이 진 자리에서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를 낮게 받쳐 주는 냄새였다.위지헌은 그 한 걸음에서 멈췄다. 늘 있던 한 뼘이 그대로 남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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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흰 실

다음 날 아침, 심가 서고에는 새 봉인이 붙었다. 봉랍에는 소금이 조금 섞였고, 붉은 인은 접힌 종이의 끝과 끝을 물었다.문지기는 이름을 남겼고, 서고 문 앞에는 창포 향이 희미하게 배었다. 심도현은 그 절차가 지나치다 했지만, 호부 공문 앞에서 지나친 조심은 허물이 되지 않았다.서윤은 그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오색실을 묶던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고 있었다.월령은 서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가고 싶었으나, 어제의 흰 실처럼 너무 세게 당기면 또 울 것이었다.대신 청아를 시켜 서윤의 처소에 꿀물을 들였다."아가씨가 보내셨다는 말은 하지 말고.""그럼 뭐라고 합니까?""방어멈이 남은 것을 돌렸다고 해."청아는 알겠다는 얼굴로 갔다가, 문턱에서 돌아보았다."방어멈한테는 뭐라고 합니까?"월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같은 말."*그날 오후, 자녕궁에서는 칠합이 열렸다. 숙비는 오색 매듭을 하나씩 보았다.화려한 것은 오래 보지 않았고, 지나치게 느슨한 것은 손끝으로 밀어냈다. 흰 실로 맺은 매듭 앞에서만 잠시 멈췄다."곧구나."문상궁이 고개를 숙였다."심서윤 아가씨가 맺은 것입니다.""너무 곧아."숙비의 손끝이 매듭 한가운데를 살짝 눌렀다. 매듭은 풀리지 않았으나, 중심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아직 풀리는 것보다 비뚤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구나."문상궁은 대답하지 않았다.숙비는 다른 매듭 하나를 집었다.연한 청색 실이었다.끝이 조금 남았으나, 당겨도 천천히 버틸 만큼 여유가 있었다."이것은 심월령인가.""그렇습니다.""손을 늦게 쓰는 아이야."숙비의 목소리는 느렸다."늦게 쓰는 손은 대개 오래 산다."그 말이 칭찬인지 경고인지, 방 안의 누구도 묻지 않았다. 잠시 뒤 문상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호부 쪽 공문도 심가에 닿았습니다.""삼전하는 빠르구나."숙비는 웃지 않았다."빠른 아이는 자기가 실을 당긴다고 믿지."등불이 낮게 흔들렸다.오색실의 그림자가 탁자 위에 가늘게 늘어졌다."하지만 실 끝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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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봉인

밤새 내린 비에 심가의 약한 곳이 하나씩 드러났다. 들뜬 기와, 배어 오른 창호지, 물이 고이는 장독 뚜껑.비는 집이 감춰 둔 틈부터 적셨다. 월령은 그 비를 등지고 서고 앞에 서서, 밤새 굳힌 봉인을 살폈다.붉은 봉랍은 잘 굳어 있었다. 소금을 조금 섞은 자리에는 흰 점이 별처럼 박혔고, 심가의 인장이 종이 끝과 문짝을 함께 물고 있었다.누가 문을 열려 하면 종이가 먼저 찢어질 것이다. 문지기 늙은 하인이 두 손을 모으고 섰다."밤새 아무도 오지 않았느냐.""예, 아가씨. 둘째 나리께서도 오늘은 들지 않으셨습니다."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비가 세니 서고 앞 마루에 물이 들지 않게 해 다오. 물이 닿으면 종이가 먼저 운다."하인은 대답하면서도 눈을 내렸다. 열여섯 아가씨가 군량 장부 봉인을 살피는 일은 낯설었을 것이다.그러나 누구도 크게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중이라는 명분이, 월령의 작은 움직임에 조용한 그늘을 씌워 주었다.그 명분이 고마웠고, 또 서글펐다.청아가 달려왔다.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뛰어온 탓에 머리칼 몇 올이 뺨에 붙어 있었다."아가씨, 동문에 호부에서 사람이 또 왔습니다. 이번에는 공문 두 통이라 해요. 둘째 나리께서 정청으로 드셨고, 둘째 부인께서도 부르셨습니다."비 냄새가 조금 무거워졌다. 공문은 종이 한 장으로 오지 않는다.처음 온 것은 문을 두드리는 손이고, 두 번째 온 것은 그 문이 어디로 열리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정청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둘째 숙부 심도현은 젖은 봉서를 펼쳐 말리고 있었고, 한씨는 손수건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서윤은 어머니 옆에 섰다.어제보다 얼굴빛이 맑지 않았고,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앉았다. 그러나 옷차림은 누구보다 단정했다.연한 백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 작은 진주 비녀 하나."언니."월령이 들어서자 서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는 곱고 얌전했으나, 그 안에 밤새 다듬은 듯한 단단함이 있었다."호부에서 봉인을 풀 필요는 없다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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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길을 남겨라

서원당 대청에는 젖은 바람이 들지 않도록 발이 내려졌다. 청아는 낮은 상에 흰 천을 깔고 먹과 벼루를 놓았다.새 먹은 향이 강해 궁에서 온 종이와 섞이면 무슨 흔적이 남을지 몰랐으므로, 서고에서 쓰던 묵은 먹을 골랐다."찻잔은 이쪽에…"청아가 말하다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먹 옆에 찻잔을 두면 안 됩니다. 지난번에 먹물 튄 걸 닦느라 반나절을 울 뻔했어요."서윤이 작게 웃었다.뜻밖에 맑은 웃음이었다.청아는 그 웃음에 의기양양해졌다."서윤 아가씨, 손목 아래에는 이 천을 대세요. 비 오는 날엔 종이가 손김을 먹습니다. 제 손은 따뜻해서 종이가 자꾸 울거든요.""네가 종이를 울리는 게 아니라, 네가 종이를 너무 자주 만져서 그렇겠지."월령이 조용히 말하자 청아가 입술을 내밀었다."아가씨께서는 소인 편을 드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으세요.""네가 양쪽 말에 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렇지."청아가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서윤은 이번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그 짧은 웃음에 대청의 공기가 한 뼘쯤 느슨해졌다. 월령은 그 느슨함을 오래 붙잡고 싶었다.서윤이 늘 이런 아이였다면 — 어머니의 손에 떠밀리지 않고, 궁의 칭찬에 목마르지 않고, 월령의 뒤에서 제 몫의 빛을 훔치려 애쓰지 않았더라면.저 아이는 바느질을 잘하고, 시를 외우다 말끝을 틀리고, 청아의 엉뚱한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촌으로 남았을 것이다. 오래 끓은 마음이 어느 날 쓴 냄새를 내기 시작했을 뿐, 사람은 처음부터 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등초본은 두 장의 목록으로 시작했다. 북문관 본창, 동령 보급고, 흑령산 제삼 초소, 남운로 경안 입고분.이름만으로 먼 길의 흙냄새가 묻어나는 곳들이었다. 곡식 가마 수, 말먹이 단, 염장 고기 통, 겨울 외투용 면포.서윤은 처음엔 아주 조심스레 썼다.획은 곧고 간격도 고왔다.다만 너무 반듯해 숨이 모자랐다. 글자가 종이 위에 살짝 떠 있는 듯했다."서윤아."월령이 먹을 갈며 말했다."이 목록은 호부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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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첫 돌

대청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침상에 기댄 어머니는 이따금 기침을 삼키며 서윤의 글씨를 보았다.한씨는 딸이 한 줄을 끝낼 때마다 눈으로 칭찬했다. 그 눈빛이 부드러울수록, 서윤의 어깨는 줄마다 더 곧아졌다."잠시 쉬자."월령이 말했다."저는 괜찮습니다."서윤이 웃었다."이런 일쯤은 할 수 있어요. 저도 심가 사람이니까요."월령의 손이 멈췄다.한씨의 눈빛이 아주 잠깐 깊어졌다.심가 사람.그 말은 서윤에게 방패이자 칼이었다."그래."월령은 낮게 말했다."그러니 더 다치지 않게 해야지.""제가 다칠 일을 하는 건가요?"서윤의 입가가 굳었다."서윤아."한씨가 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서윤은 곧 고개를 숙였다."송구해요. 제가 또 말이 앞섰습니다."그러나 이미 나간 말은 대청 바닥에 얇은 물기처럼 남았다. 월령은 그 위를 밟지 않았다.침상 쪽에서 유씨가 낮게 기침을 삼켰다."서윤아."부르는 목소리는 얇았지만 부드러웠다."글씨가 아주 좋아졌구나. 작년보다 획이 깊어."서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큰어머니께서 보아 주셨어요?""아픈 사람은 누워서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단다."유씨는 웃었고, 그 웃음 끝에 옅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대청의 공기는 한 뼘쯤 부드러워졌다.칭찬은 한씨의 눈빛이 빨랐고, 유씨의 말이 느렸다. 느린 쪽이 더 오래갔다.오후가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등초본이 반쯤 끝났을 무렵, 윤백이 회랑 끝에 나타났다.비를 거의 맞지 않은 얼굴이었다. 처마 밑으로만 걸었는지, 비가 그를 피해 갔는지 알 수 없었다."잠시만."윤백은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 세우고 예를 갖춘 뒤, 월령에게 작게 접은 밀지를 건넸다."왕야께서 먼저 확인해 달라 하셨습니다. 급히 펼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남들이 보기 전이면 됩니다."급하다는 말이었다.월령은 밀지를 소매에 넣었다. 서윤의 시선이 아주 짧게 그곳을 스쳤다.윤백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청아에게 말했다."창포는 젖으면 향이 죽습니다.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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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우산

그날 밤, 월령은 다시 측백나무 아래로 갔다. 비는 약해졌으나 그치지 않았다.나뭇잎 끝마다 물방울이 매달렸고, 흙은 낮 동안 밟힌 발자국을 검게 품었다. 등불은 멀리 있었고, 후원 끝은 세상에서 한 걸음 비켜난 듯 조용했다.위지헌은 오늘도 먼저 와 있었다. 검은 우산이 어깨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우산살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두드렸다.그는 젖지 않았다.비조차 그의 곁에서는 허락을 받고 내리는 듯했다. 월령은 그 생각을 하다 스스로 놀랐다.이런 생각은 위험했다."순서를 바꾸었느냐."위지헌이 물었다."예. 숫자는 그대로 두었습니다.""잘했다."늘 짧은 말이었다.그런데 오늘은 그 짧은 말이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다."정말로 이것만으로 알 수 있습니까?"월령은 손을 소매에 숨겼다."정말?"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묻고 싶은 것이 그것뿐인가."월령은 숨을 고르다 말했다."예?""네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지."위지헌은 우산을 조금 기울였다. 그제야 월령은 제 어깨 끝에 비가 닿고 있었음을 알았다.우산의 그늘이 그녀 쪽으로 넘어왔다. 감송향이 비 냄새 사이로 낮게 번졌다."묻고 싶은 것은, 서윤을 다치게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느냐는 것 아닌가."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는 너무 쉽게 짚었다.월령이 숨긴 말까지.누군가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다정한 일이면서, 동시에 숨을 곳이 줄어드는 일이었다."정말?"위지헌이 낮게 물었다."내가 틀렸나."월령의 귀 끝이 조금 뜨거워졌다."틀리지 않으셨습니다.""그럼 이렇게 보아라."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오늘 만든 종이는 서윤의 죄가 아니다. 숫자를 바꾸지 않았고, 없는 것을 적지 않았고, 봉인을 풀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한 일은 집안 공문을 정서한 것뿐이다.""하지만 누군가 그 종이의 길을 훔쳐 가면요.""그때는 훔쳐 간 자의 죄다."위지헌은 머뭇거리지 않았다."칼을 쥔 손과, 칼집을 닦은 손은 다르다. 네가 구분해야 하는 것은 그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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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흰 실의 밤

서윤은 제 방으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따뜻한 물이 손끝의 먹빛을 천천히 풀었다.검은 물이 그릇 안에서 얇게 번졌다. 아무리 문질러도 손톱 밑에는 아주 작은 먹빛이 남았다.그것이 싫지 않았다.오늘 제 손은 집안일을 했다. 어머니가 보았고, 둘째 숙부가 보았고, 언니도 칭찬했다.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비어 있었다. 칭찬을 받았는데도, 누군가의 눈은 여전히 언니를 먼저 보았다.왕부 사람은 언니에게만 접은 종이를 전했고, 언니는 서윤이 모르는 말을 알고 있었다. 심가의 장부도, 궁의 종이도, 왕부의 소식도 모두 언니의 손끝을 지나갔다.서윤이 젖은 수건을 내려놓을 때, 화장대 위에 흰 실이 보였다. 아침 정청에서 바닥에 떨어졌던 것과 같은 빛의 실이었다.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실은 작게 접힌 종이 조각을 묶고 있었다.종이는 빗물 한 방울에도 찢어질 만큼 얇았다.서윤은 방문 쪽을 보았다.아무도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실을 풀었다. 종이 안에는 세 줄뿐이었다.반듯한 매듭을 보았다.기다리는 손은 오래 버려두지 않는다.서쪽 편문, 비 그친 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삼전하의 이름도, 자녕궁의 인장도 없었다. 그러나 이름이 없어 더 깊이 들어왔다.칭찬은 출처가 없어도 따뜻했고, 기다림은 답이 없어도 사람을 끌었다.한씨에게 말해야 한다.언니에게도.그렇게 생각했으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언니에게 말하면 언니는 부드럽게 막을 것이고, 어머니에게 말하면 어머니는 기뻐하면서도 겁낼 것이다.그러면 자신은 또 누군가의 뒤에 서게 될 것이었다. 서윤은 흰 실을 손가락에 감았다.너무 세게 감아 손끝이 조금 붉어졌다.*비는 자정 무렵에야 그쳤다. 심가의 서쪽 편문은 평소 거의 쓰지 않는 문이었다.담장 밖에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었고, 비가 오면 뿌리 근처에 물이 고였다. 하인들은 흙이 질어 발이 빠지는 그 길을 싫어했다.서윤은 그 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등초본을 들고 오지는 않았다.그럴 용기는 없었다.다만 오늘 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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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흰 실의 아침

비가 그친 새벽, 심가의 서쪽 편문 빗장 끝에 흰 실 하나가 묶여 있었다. 밤새 젖었으나 끊어지지 않은 실은 새벽빛을 받자 더 희게 떠올랐다.회화나무 잎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곁의 흙을 작은 구멍처럼 팠고, 문밖 웅덩이에는 누군가 멈춰 섰다 돌아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기윤은 담장 그림자 안에서 눈을 내리깔았다.밤새 움직이지 않았다.뛰어들어 손목을 꺾는 일보다, 눈앞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일이 더 오래 숨을 눌렀다. 저 흰 실이 장군가 어린 아가씨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순간부터는 더 그랬다.문은 닫혀 있었다.그 하나가, 아직 아이를 죄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다만 실은 문밖을 향해 있었다.알려 주려 한 흔적만으로도 사람은 이미 위험에 닿았다. 담장 밖 회화나무 아래로 삿갓을 깊게 눌러쓴 장정 하나가 지나갔다.비 그친 뒤 물길을 보러 나온 하인이라기엔 발끝이 너무 조심스러웠고, 도둑이라기엔 허리 매듭이 지나치게 단정했다. 그는 흰 실과 닫힌 빗장을 차례로 확인한 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웅덩이 가장자리를 돌아 사라졌다.기윤은 바로 쫓지 않았다.손끝으로 작은 돌멩이를 굴렸다. 돌멩이가 서쪽 담 밖 풀숲으로 사라지고, 잠시 뒤 멀리서 풀잎이 한 번 흔들렸다.왕부의 다른 눈이 그 사내에게 붙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기윤은 편문으로 다가갔다.흰 실은 그대로 두었다.다만 빗장 아래 진흙에 남은 얇은 발자국을 기름종이에 옮겼다. 발끝이 깊고 뒤꿈치가 얕았다.성급한 사람이 천천히 걷는 척할 때 남는 자국이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심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를 시작했다. 부엌 하인들은 젖은 장작을 솥 밑에서 말렸고, 약방 어린 종은 창포 묶음을 햇빛 드는 쪽으로 옮겼다.늙은 문지기는 서쪽 길은 오늘도 질다며 혀를 찼다. 월령은 막 어머니의 약그릇을 받아 들고 있었다.약은 전보다 묽었다.계피를 줄이고 맥문동을 더한 탓에 매운 기운보다 부드러운 풀내가 먼저 올라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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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자

서윤의 방에는 아침빛이 늦게 들었다. 서쪽 담장과 가까워 처마 그림자가 길었고, 비 온 다음 날은 눅은 냄새가 오래 남았다.서윤은 세숫대야 앞에 앉아 있었다. 손은 씻었으나 손끝이 붉었다.밤새 흰 실을 감았던 자리였다. 실은 이제 없었지만, 눌린 자국은 남았다.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었으나, 서윤은 그 자국만 보았다."아가씨, 서원당에서 따뜻한 물을 보내셨습니다."금지가 조심스레 말했다."언니가?"서윤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오히려 건조했다. 서윤은 물 위로 손을 담갔다.따뜻했다.손끝의 붉은 자국이 물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언니는 알까.알고도 모른 척하는 걸까.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다정한 걸까.어느 쪽이든 숨이 막혔다.들켰다면 무서웠고, 들키지 않았다면 더 서러웠다. 거울 앞에서 금지가 머리를 빗는 동안, 서윤은 눈 밑의 그늘에 분을 조금 얇게 발랐다.너무 희면 아파 보이고, 너무 붉으면 들떠 보였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얼굴은 늘 그 사이에 있었다.서윤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거울 속 아이는 그 조건을 외운 사람처럼, 어른의 얼굴을 흉내 냈다.*후원 정자는 비가 그친 뒤라 나무 냄새가 짙었다. 젖은 기둥에서 오래된 송진 냄새가 올라왔고, 바닥에는 물기가 가늘게 남았다.청아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마른 천으로 몇 번이나 닦았다. 부엌 하녀들은 묽은 닭죽과 절인 매실, 데친 나물을 작은 상에 올렸다.서윤은 조금 늦게 왔다.연한 회색 치마였다.치맛자락 아래쪽에 아주 작게 마른 흙이 남아 있었다. 잘 털어 냈으나, 비 온 뒤의 진흙은 섬유 안쪽에 얇게 숨어 있었다.월령은 그것을 보았고, 보지 않은 사람처럼 웃었다."왔구나.""아침은 먹었니?"월령이 닭죽 그릇을 밀었다."비 온 뒤에는 속이 차가워져. 따뜻할 때 먹어.""언니께서는 늘 제 몸을 먼저 걱정하시네요."얌전한 말이었으나, 안쪽에 작은 가시가 있었다."네 몸이 네 마음보다 먼저 아플 때가 있거든."월령은 그 가시를 빼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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