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비에 심가의 약한 곳이 하나씩 드러났다. 들뜬 기와, 배어 오른 창호지, 물이 고이는 장독 뚜껑.비는 집이 감춰 둔 틈부터 적셨다. 월령은 그 비를 등지고 서고 앞에 서서, 밤새 굳힌 봉인을 살폈다.붉은 봉랍은 잘 굳어 있었다. 소금을 조금 섞은 자리에는 흰 점이 별처럼 박혔고, 심가의 인장이 종이 끝과 문짝을 함께 물고 있었다.누가 문을 열려 하면 종이가 먼저 찢어질 것이다. 문지기 늙은 하인이 두 손을 모으고 섰다."밤새 아무도 오지 않았느냐.""예, 아가씨. 둘째 나리께서도 오늘은 들지 않으셨습니다."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비가 세니 서고 앞 마루에 물이 들지 않게 해 다오. 물이 닿으면 종이가 먼저 운다."하인은 대답하면서도 눈을 내렸다. 열여섯 아가씨가 군량 장부 봉인을 살피는 일은 낯설었을 것이다.그러나 누구도 크게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중이라는 명분이, 월령의 작은 움직임에 조용한 그늘을 씌워 주었다.그 명분이 고마웠고, 또 서글펐다.청아가 달려왔다.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뛰어온 탓에 머리칼 몇 올이 뺨에 붙어 있었다."아가씨, 동문에 호부에서 사람이 또 왔습니다. 이번에는 공문 두 통이라 해요. 둘째 나리께서 정청으로 드셨고, 둘째 부인께서도 부르셨습니다."비 냄새가 조금 무거워졌다. 공문은 종이 한 장으로 오지 않는다.처음 온 것은 문을 두드리는 손이고, 두 번째 온 것은 그 문이 어디로 열리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정청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둘째 숙부 심도현은 젖은 봉서를 펼쳐 말리고 있었고, 한씨는 손수건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서윤은 어머니 옆에 섰다.어제보다 얼굴빛이 맑지 않았고,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앉았다. 그러나 옷차림은 누구보다 단정했다.연한 백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 작은 진주 비녀 하나."언니."월령이 들어서자 서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는 곱고 얌전했으나, 그 안에 밤새 다듬은 듯한 단단함이 있었다."호부에서 봉인을 풀 필요는 없다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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