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164 Chapters

31. 손은 늦게

한씨의 숨이 작게 들떴다.서윤의 입술은 하얗게 질렸다. 심도윤의 눈매는 낮아졌고, 위명서의 내관들은 이미 목격자가 될 준비를 마쳤다.그 순간 월령의 손이 움직이려 했다. 분노가 판단보다 빨라, 상자를 닫거나 돌려주려는 손끝이 먼저 비단 끈을 향했다.그 끈에 닿기 직전, 옆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손은 늦게 내밀어도 된다."위지헌이었다.월령은 멈췄다.어렵지 않은 말이었다.네가 만지는 순간 네 것이 되고, 네 것이 되는 순간 돌려주는 일도 사건이 된다. 만지지 않으면 아직 저들의 물건이다.월령은 손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위지헌의 시선은 상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손끝까지 보고 있었음을 그녀는 알았다.심도윤이 그 짧은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칼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는지 몰라도, 딸의 숨이 어디에서 걸렸는지는 아는 사람이었다."삼전하의 은혜가 과합니다."심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를 닮은 말이었으나, '과하다'는 두 글자가 문턱에 섰다."심 장군께서 나라의 북문을 지키셨으니, 이 정도 병문안이 과하겠습니까."위명서가 부드럽게 웃었다."심 부인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바랄 뿐입니다."따뜻한 목소리였다.따뜻해서 더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위지헌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약재는 의원이 본 뒤 들이면 되겠지."그 말에 내관의 손이 멈췄다. 위명서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당연한 말씀입니다, 숙부.""비녀도 의원이 보나."정적이 얇게 갈라졌다.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몇몇 친척은 웃어도 되는지 몰라 입가를 굳혔다.그러나 위명서의 눈 안쪽은 웃지 않았다. 위지헌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덧붙였다.낮고 느린, 적에게 쓰는 말투였다."병문안이라 하여 약 상자를 보았더니, 소문까지 같이 들었군."말은 예의의 모양을 했으나 속은 칼이었다. 병문안이라는 명분에 규방의 장신구를 끼워 넣은 허점을 정확히 찔렀다.누구도 삼황자가 심월령에게 사사로운 물건을 주려 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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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밑단

예물 검사는 대청 옆 작은 방에서 이루어졌다. 유씨에게 직접 올릴 수 없다며 심도윤이 선을 긋자, 한씨의 얼굴에 잠깐 균열이 갔다.그녀는 유씨의 병세를 걱정하는 말로 그 균열을 덮었으나, 이미 늦었다. 심도윤은 한씨를 보지 않았다.장군이 누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의심은 말보다 오래갔다. 월령은 방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들어가 상자 안을 직접 확인하고, 비녀 밑에 숨은 것이 있는지 보고 싶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참았다.손은 늦게 내밀어도 된다 —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대신 그녀는 열린 문 바깥에서 사람들의 발을 보았다.내관의 신발 끝, 심가 의원의 낡은 가죽신, 왕부 의원의 검은 신, 그리고 문가에 비스듬히 선 윤백의 흰 신코. 윤백은 월령이 문 가까이에 선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자연스럽게 몸을 반쯤 틀어, 방 안에서 비녀를 꺼내는 장면이 월령의 시야에 직접 들어오지 않도록 막았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우연히 그 자리에 선 사람처럼 말했다."가루가 날릴 수 있습니다."비녀에서 무슨 가루가 난단 말인가. 그 말투가 지나치게 근엄했다.청아가 옆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했다. 어제까지 죽음과 독과 향으로 숨이 막히던 심가였는데, 이 사소한 장면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살게 했다.왕부 사람들은 정말로 이상했다. 위지헌의 명을 과할 만큼 성실하게 수행했고, 그 과함 때문에 숨기려는 것이 도리어 더 잘 보였다.월령은 그것이 마음인지, 명령인지, 정치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방 안에서 왕부 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약재는 깨끗했다.향도 독도 없었다.예상대로였다.위명서는 오늘 독을 보내지 않았다. 독이 없다는 사실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 깨끗한 약재 앞에서 월령이 조금이라도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면, 그 표정이 곧 소문이 되었을 터였다.마지막으로 비녀 상자가 열렸다.긴 침묵.월령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 이번에는 위지헌이 곁에 없었다.대청에서 위명서와 심도윤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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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뒤뜰의 손

위명서는 물러날 때까지 예를 잃지 않았다. 심도윤에게 유씨의 쾌유를 빌고, 한씨의 걱정을 위로하고, 서윤에게는 큰어머니를 잘 보살피라 다정하게 일렀다.마지막으로 월령에게 짧은 시선을 주었다. 짧았으나, 그 안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 너는 달라졌다, 그러나 달라진 길도 길이다, 나는 다시 찾아낼 것이다.월령은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은 위명서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그가 보면 보이는 사람이 되었고, 그가 부르면 불린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는 시선도 늦게 내밀었다.행렬이 대문을 빠져나간 뒤, 심가에는 늦게 숨이 돌아왔다. 한씨는 제 처소로 돌아가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서윤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그 아이는 울지 않았다.오히려 울지 않으려 애쓰는 쪽이 더 아프게 보였다. 오늘 위명서가 월령을 다시 보았고, 비녀가 월령의 이름을 품고 왔으며, 그 비녀마저 위지헌의 한마디에 문턱에서 멈췄다 — 서윤에게는 모든 것이 같은 결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또 언니.월령은 그 마음을 읽었으나 다가가지 않았다. 오늘의 서윤에게 위로는 독이 된다.미움받는 줄 알면서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못 건드리면 더 깊게 비틀린다.*서원당 뒤뜰에는 햇살이 조금 더 짙었다. 월령은 잠시 혼자 그곳으로 나왔다.몸은 아직 온전치 않았고, 머리는 지나치게 맑았다. 맑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였다.비녀, 독고가 상단의 인장, 위명서의 깨끗한 손, 위지헌의 한 걸음 — 그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졌다. 심가의 누명은 위명서 혼자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갚아야 할 이름도, 한 사람일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번에는 손이 빨라지지 않았군."위지헌이었다.월령은 돌아보지 않았다.이상하게도 그가 오는 것은 늘 먼저 공기로 알 수 있었다 — 바람이 낮아지고, 그림자가 조금 짙어지고, 세상의 소리가 한 겹 뒤로 물러났다."전하께서 늦게 내밀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요."말하고 나서야 조금 원망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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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가릴 것은 가린다

너무 쉽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월령은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았다.위지헌은 햇살 아래 서 있었지만, 빛을 먹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검은 장포, 낮은 눈빛,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그 단단함 속에서 오직 그녀를 보는 시선만 온도를 달리했다. 느릿한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월령은 제 숨이 한 박자씩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럼 가려 주실 겁니까."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지켜지는 것이 고맙고, 동시에 두려웠다.그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언젠가 그 안에서 길을 잃을까 봐. 한때 그녀는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제 판단을 통째로 맡겼다.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위지헌은 그 마음까지 읽은 듯했다."가릴 것은 가린다."그가 천천히 말했다."그러나 네 눈을 닫지는 않는다. 추한 것은 내가 먼저 보겠다. 네가 봐야 할 때가 오면, 네가 다치지 않을 만큼만 남겨 두지."쉽게 말했다.어려운 정치도, 독고가 상단의 인장도 잠시 뒤로 물러나고, 남은 것은 단순한 말이었다 — 너를 모르게 두겠다는 뜻이 아니라, 네가 찢어지지 않게 순서를 정하겠다는 뜻.월령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안 되었다.너무 믿고 싶어지니까.위지헌이 손을 내밀었다.이번에는 손목을 잡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월령의 소매 끝에 닿아, 말려 들어간 천을 아주 조금 펴 주었다.살갗은 닿지 않았는데도, 맥 위를 짚힌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손을 숨기는 건 좋다."그가 낮게 말했다."다만 너무 세게 쥐면 네가 먼저 아프다."월령은 그제야 자신이 손바닥을 아프도록 쥐고 있었음을 알았다. 손가락을 펴자 손톱 자국이 하얗게 남았다.위지헌의 시선이 그 자국에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그는 만지지 않았다 — 만지고 싶은 것을 참는 사람처럼.눌러 둔 그 절제가, 노골적인 어떤 손길보다 월령의 숨을 더 낮게 만들었다. 멀리서 윤백의 목소리가 들렸다."왕야. 약갑은 봉했습니다. 향지는 따로 두었고요."잠시 뜸을 들인 뒤, 아주 조심스럽게."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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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다음 문턱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위명서는 비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상자는 닫힌 채였다.그 안의 비녀는 월령의 손에 닿지 못했고, 비단 밑에 숨겨 둔 독고가 상단의 인장도 왕부의 손에 걸렸다.겉으로 보면 실패였다.그러나 위명서는 실패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았다. 실패는 길이 닫혔을 때 쓰는 말이고, 오늘은 길이 바뀌었을 뿐이었다.그는 월령이 손을 거두던 순간을 떠올렸다. 손가락은 분명 비단 가장자리를 향해 낮게 풀렸고, 숨은 얕게 흔들렸다.그러나 숙부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그 손은 찬물에 닿은 살구꽃잎처럼 움츠러들었다. 두려움은 자신을 향해 있었고, 그 두려움을 멈춘 것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순종이라기에는 아직 경계가 남았고, 거절이라기에는 너무 조용히 따랐다. 그 애매한 틈이 위명서의 속을 느리게 긁었다.그 틈 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문이 있었다.심서윤.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어른의 얼굴을 흉내 내던 아이. 언니라 부르면서도 월령의 그림자가 제 발등까지 덮치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사촌.인정받지 못한 자리에서 서윤은 가장 고운 말을 배웠고, 동시에 가장 가는 바늘을 품었다. 위명서는 그런 마음이 어디로 열리는지 잘 알았다.그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붉은 궁담을 보았다. 궁은 외로운 곳이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다만 외로움은 사랑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권력이 빈 곳을 메우고, 사람이 그 권력의 빈 곳을 메운다.그는 심가를 원했다.심도윤의 군권, 심각의 충성, 심가가 지방 무장들에게 갖는 상징성.그리고 심월령.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다 — 심가의 문장이고, 아직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은 대답이며, 숙부의 차가운 눈을 흔드는 유일한 이름이었다.그런 여인을 섭정왕의 그림자 안에 둘 수는 없었다. 위명서는 비녀 상자를 가볍게 쓸었다."숙비마마께 문안을 넣어라."내관이 고개를 숙였다."심가 여인들을 궁의 다과에 모시면 어떻겠느냐고 여쭈어라."내관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위명서는 웃지 않았다.숙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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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무향

숙비의 초대장에는 향이 없었다. 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어제와 다르지 않던 아침의 소리들이 반 박자씩 늦어졌다. 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댄 채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죽간에는 자녕궁의 금니 봉인이 붙어 있었다. 향낭도, 향지로 감싼 흔적도 없었다.향을 빌리지 않고도 누구의 것인지 모두 알게 하는 봉인이었다. 심도윤은 그 봉인을 오래 보았다.북쪽 전장의 군보를 읽을 때보다 얼굴이 더 굳어 있었다. 칼과 화살은 방향을 보였으나, 궁에서 온 초대는 방향을 숨겼다."자녕궁에서 다과를 내리셨다."그가 낮게 말했다."심 부인과 둘째 부인, 두 아가씨를 함께 들라 하셨다."함께.그 한마디가 비단 위에 얹힌 얇은 칼날처럼 놓였다.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은 차라리 간단했다 — 불복하면 죄가 된다.그러나 초대는 웃는 얼굴로 문 앞에 선다. 거절하면 불효가 되고, 받아들이면 발이 안쪽으로 묶인다."어머니 몸이 아직 온전치 못하십니다."월령의 말은 반은 진심이고 반은 방패였다.유씨가 월령을 보았다.어머니의 눈빛은 오래된 물처럼 깊어, 말끝에 숨은 떨림을 먼저 알아보았다."령아. 궁에 드는 것이 두려우냐."방 안이 조용해졌다.한씨의 손수건 끝이 살짝 움직였고, 서윤은 고개를 더 숙였다. 심도윤은 말이 없었으나 칼집을 잡은 손등에 굵은 힘줄이 올랐다."소녀가 어찌 감히 두려움을 입에 올리겠습니까."월령은 웃음의 가장자리를 붙들었다. 너무 부드러워, 도리어 다친 곳을 감싸는 대답이었다.유씨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월령의 손등 위에 마르고 따뜻한 손을 얹었다."그럼 같이 가자. 궁의 찻잔이 아무리 희어도, 네 손이 닿기 전에는 그저 빈 그릇이니."월령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빈 그릇 — 비어 있는 자리는 늘 누군가의 색을 기다렸고, 궁은 사람에게 색을 입히는 일을 누구보다 잘했다.*낮이 기울기 전부터 안채는 작은 전장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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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궁문

궁으로 가는 길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심가의 마차가 대문을 나서자 경안의 소리가 밀려왔다.골목 끝에서 두부 장수가 더운 김을 피웠고, 포목점 앞에는 남운로에서 올라온 비단 꾸러미가 쌓여 있었다. 한 상인은 올해 동해 염로의 세가 또 올랐다고 투덜댔고, 맞은편 곡물상은 북문군 군량이 늦으면 쌀값부터 오른다며 혀를 찼다.궁의 다과 한 자리와는 먼 이야기 같았다.그러나 월령은 알았다.쌀값과 군량, 염로와 상단, 붉은 담과 흰 찻잔이 모두 같은 손끝에 걸려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약값 때문에 독을 타고, 딸의 자리 때문에 손수건을 적시고, 군량 한 줄 때문에 장군의 이름이 모함으로 바뀌었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창밖만 보았다. 오늘은 옅은 연두색 치마를 입었다.한씨가 고른 옷일 것이다.어린 잎처럼 연약해 보이는 색이었다.예뻤고, 또 안쓰러웠다."서윤아."월령이 불렀다."비녀가 조금 기울었다."서윤은 물러서려다 멈췄다.마차가 돌길의 얕은 홈을 지나며 흔들렸다. 그 사이 월령의 손끝이 서윤의 머리 가까이 닿았다.서윤의 숨이 얕아졌다.월령은 비녀를 고쳐 꽂고 곧 손을 거두었다. 일부러 더 오래 만지지 않았다."됐다. 이쪽이 더 곱구나."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언니는…"말은 거기서 끊겼다."왜."월령이 물었다.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었다."아닙니다. 궁 앞에서 흐트러지면 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실 테니까요."그 아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언제나 한씨였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궁문 앞에 이르자 바람의 냄새가 바뀌었다. 장터의 기름내가 물러가고, 젖은 돌과 오래 닦은 청동, 사람의 숨이 낮게 눌린 공기가 들어왔다.붉은 담이 눈앞에 섰다.월령은 소매 속 손수건을 쥐었다. 심가 문양이 손바닥을 눌렀다.그 작은 실의 결이 아니었다면, 잠시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잊었을지도 몰랐다. 금군이 예를 갖추자 갑옷 부딪는 소리가 짧게 났다.그 소리 사이로, 아주 낮은 향이 스쳤다.감송향이었다.위지헌은 회랑 끝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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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흰 잔

자녕궁에는 향로가 비어 있었다. 향 한 줄기 사르지 않은 방인데도 공기는 차고 말끔했다.창틀에는 먼지 한 톨 앉지 않았고, 바닥의 검은 돌은 사람의 얼굴을 흐리게 비출 만큼 닦여 있었다. 찻상의 백자에는 물기 자국 하나 없었고, 과반에 놓인 다식은 자로 잰 듯 줄을 맞췄다.궁녀들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찻잔을 놓을 때도, 과반을 돌릴 때도 손끝에 군더더기 선이 없었다.그 자리에 든 사람은 누구든 절로 숨을 낮추었다. 제 옷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궁은 사람을 이렇게 길들였고, 월령은 그 가지런한 움직임 뒤에 얼마나 많은 숨이 끊기는지도 알았다. 숙비는 창가의 낮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회백색 비단옷에 금실 자수가 아주 옅게 놓여 있었다. 멀리서는 무늬 없는 옷 같았으나, 빛이 기울 때마다 소매 끝에서 비늘 같은 무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손에는 반지가 없고, 손톱도 길지 않았다. 사람을 찢는 손은 굳이 날카로울 필요가 없다는 듯이."심 부인."숙비의 목소리는 낮았다."몸이 아직 온전치 않다 들었다.""마마의 은혜로 날마다 차도를 보입니다."유씨가 몸을 낮췄다."은혜는 하늘의 것이지. 본궁은 그저 차 한 잔을 내릴 뿐이다."자애로운 말이었으나, 누구도 편히 숨 쉬지 못했다. 숙비의 시선이 월령에게 닿았다."네가 심월령이냐.""예, 마마. 소녀가 심월령입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올렸다."이름이 맑구나."숙비가 천천히 웃었다."허나 달은 물이 있어야 비친다. 너무 높은 곳에만 있으면 사람 손에 닿지 않지."칭찬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소녀가 감당하기에는 과한 말씀입니다."월령은 고개를 숙였다."감당하지 못할 말은 오래 품지 않는 것이 좋다."숙비의 손끝이 찻잔 받침을 가볍게 밀었다."차가 식는다."월령 앞에는 무늬 없는 흰 잔이 놓였다. 눈처럼 희고, 아무 색도 문장도 없었다.그래서 도리어 묻고 있었다. 너는 누구의 색을 입을 것이냐고.월령은 손을 뻗지 않았다.잔 안쪽으로 창밖의 빛이 내려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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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꽃을 세는 일

위명서가 들어왔다.오늘은 옅은 청옥색 장포를 입었다. 병약하다는 소문에 어울릴 만큼 얼굴빛은 희었고, 웃음은 봄볕처럼 얕았다.향 없는 자녕궁의 공기 속에서도, 그는 부드러운 향처럼 사람들 사이로 번졌다. 월령의 목 안쪽이 마른 듯 조여 왔다.젖은 소매를 털 듯 올라가던 그 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받침을 내려놓았다."마마."위명서가 예를 올렸다."심가 부인들과 아가씨들이 들었다 하여 인사를 빌렸습니다.""네가 다과 자리를 좋아하던가."숙비가 물었다."마마의 차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요."위명서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낮아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의 시선이 월령 앞의 흰 잔에 닿았다가, 월령에게로 올라왔다."심 소저께서는 차보다 향을 먼저 보시는군요."방 안의 공기가 얇게 조여졌다.월령은 고개를 들었다."소녀가 아직 궁의 예를 깊이 알지 못합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나긋한 말이었으나, 잔은 여전히 내려놓은 채였다. 위명서의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실수라니요. 살구꽃이 피기 전에도, 봄은 향으로 먼저 오지 않습니까."살구꽃.그 한마디가 깨끗한 공기 속에 떨어졌다. 월령의 숨이 한 박자 멎었다.보이지 않을 만큼 짧게.그러나 위명서는 보려 했고, 숙비는 이미 보고 있었다. 그때 회랑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꽃을 세는 일은 한가한 자의 몫입니다."위지헌이었다.그는 궁녀가 걷어 올린 발 사이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서자 방 안의 온도가 한 자락 낮아졌다.향로 없는 자녕궁에서 감송향이 더 선명했다. 마른 뿌리와 차가운 약재의 기운이 흰 잔 위에 낮게 깔렸다.위지헌은 숙비에게 예를 갖췄다. 무릎은 꿇지 않았으나, 예는 어긋나지 않았다.그의 예는 늘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굽히지 않았는데 무례라 할 수 없고, 높아 보이는데 책잡을 곳이 없었다."섭정왕."숙비가 느리게 말했다."다과 자리까지 발걸음이 닿았구나.""병부 군보가 자녕궁 문안 문서와 함께 올라왔습니다. 길이 겹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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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붓

다과는 다시 이어졌다.숙비는 유씨의 병세를 묻고, 한씨에게 살림의 수고를 치하했다. 그 말마다 한씨의 얼굴은 반쯤 안도하고 반쯤 굳어졌다.위명서는 때때로 부드럽게 말을 보탰고, 위지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닫을수록 방 안의 길은 바뀌었다.월령의 잔이 다시 채워지려 할 때, 윤백이 어느새 궁녀의 동선을 막아섰다."마마께서 내리신 차가 아직 식지 않았습니다."예의 바른 말이었다.궁녀는 멈췄다.회랑 밖에서는 강무진이 금군 하나의 시선을 그림자 속에서 막고 있었다. 명령은 없었으나, 왕부 사람들은 이미 길을 아는 사람처럼 움직였다.그들의 보호는 따뜻해서가 아니라 정확해서 무서웠다."심 소저."숙비가 문득 서윤을 불렀다. 서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예, 마마."그 목소리는 너무 고왔다.고우려 애쓴 아이의 목소리였다."글씨를 배웠느냐.""부끄럽지만 조금 배웠습니다.""부끄럽다면서 손은 곧구나."숙비의 시선이 서윤의 손가락에 머물렀다.하얗고 가느다란 손이었다.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딸이 되려고 바늘땀과 필획을 오래 연습한 손."붓을 잡으면 말보다 먼저 마음이 보인다."숙비가 곁의 궁녀에게 눈짓했다. 궁녀가 작은 붓 하나를 가져왔다.붓대는 희고 가늘었으며, 끝에 아주 작은 금실 매듭이 묶여 있었다.화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자녕궁에서 나간 물건은 화려함보다 무거운 이름을 가졌다."가져가거라."서윤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가, 천천히 돌아왔다.기쁨이었다.두려움과 섞인 기쁨.누군가 처음으로 자신만을 가리켜 준 사람 앞에서, 아이가 감추지 못하는 밝음이었다.월령은 그 얼굴을 보았다.가슴 한쪽이 아팠다.그 기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 순간의 서윤을 미워할 수 없었다. 서윤은 늘 월령의 그늘 바깥에서 어른의 말을 연습하던 아이였다.한씨의 걱정을 흉내 내고, 유씨의 품위를 흉내 내고, 월령의 다정함을 흉내 내다가 끝내 제 마음의 모양을 잃어버린 아이. 그 아이에게 숙비의 붓은 선물이 아니라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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