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Chapter 41 - Chapter 50

164 Chapters

41. 물을 흔들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서윤은 붓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한씨가 몇 번이나 그것을 보려 했지만, 서윤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길을 조금 피했다.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월령은 그 작은 변화가 두려웠다.서윤은 창밖을 보며 웃고 있었다. 웃음은 아직 서툴고 너무 밝았다.누군가 자신만을 보아 주었다는 기쁨이 아이의 뺨에 옅은 홍조로 올라와 있었다. 월령의 눈에는 그 붓이 칼보다 무거워 보였다."서윤아."서윤이 돌아보았다."예, 언니.""그 붓은 예쁘구나."서윤의 눈이 환해졌다."마마께서 주신 것입니다.""응. 그러니 더 조심히 두어야겠다."서윤의 웃음이 아주 조금 굳었다."언니는 제가 받은 것이 싫으세요?"그 물음은 너무 빨랐다.상처가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월령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차 바퀴가 돌길 위를 굴렀다. 창밖의 붉은 담이 멀어지고 있었으나, 그 색은 아직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었다."싫지 않아."월령이 천천히 말했다."다만 궁에서 받은 것은, 예뻐도 무겁더라.""저는…"서윤은 붓을 더 꼭 쥐었다."저도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습니다."어른스러운 말투였으나, 손은 아이처럼 떨렸다.월령은 그 손을 보았다.덮어 주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덮으면 서윤은 빼앗긴다고 느낄 것이다.월령은 손을 거두었다."그래. 그러면 손이 아프지 않게 들어."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자녕궁 안쪽에서는 숙비가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흰 잔에는 아주 희미한 금빛이 남아 있었다.누가 얼마나 마셨는지, 누가 입술을 대지 않았는지, 누가 손수건 너머로 받침을 들었는지 — 궁녀들은 이미 보고를 마쳤다."심월령은 차를 마시지 않았습니다."곁의 궁녀가 낮게 말했다."그리고 심서윤은 붓을 받았습니다."숙비는 작은 붓이 놓였던 자리를 보았다."달은 물 위에 비칠 때 가장 잘 흔들리지."그녀의 목소리는 느렸다."허나 달을 움직이려 들면, 하늘이 먼저 눈치챈다."창밖으로 자녕궁 연못의 물빛이 희게 흔들렸다."먼저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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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다림

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 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이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듯했다.서윤은 붓을 손에 들었다.붓대는 차고 매끈했다.그토록 가벼운데도 손바닥이 묵직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곧장 물건을 내려 준 적이 없었다.어머니 한씨는 늘 말했다.얌전해라, 월령 언니보다 먼저 나서지 마라, 웃음을 낮추고 말을 줄여라. 서윤은 그 말을 모두 외웠다.외우면 사랑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집 안의 모든 길은 이상하게 월령에게 먼저 닿았다.고운 비단도, 어른들의 칭찬도, 심도윤의 짧은 눈길도. 거울 앞에서 그 눈빛과 목소리를 몇 번이고 따라 해도, 돌아오는 말은 늘 달랐다.어린것이 벌써 꾀를 부린다. 얌전한 듯해도 속이 많구나.자녕궁에서는 달랐다.숙비마마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글씨를 배웠느냐 물었고, 부끄럽다면서도 손은 곧다고 했다.누군가 처음으로, 월령이 아니라 서윤에게서 먼저 쓸모를 본 것 같았다.서윤은 붓을 꼭 쥐었다.*그날도, 다음 날도 자녕궁에서는 아무 소식이 오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자 서윤의 방에는 먹 냄새가 짙어졌다.그녀는 아침마다 붓을 닦고, 물그릇을 바꾸고, 벼루를 갈고,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흰 종이를 폈다가 다시 접었다. 한씨는 처음에는 그것을 기특하게 보았다.딸이 숙비의 은혜를 소중히 여긴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닷새가 되자 한씨의 눈 밑이 조금씩 어두워졌다.한씨의 말이 부드러워질수록 서윤의 손은 더 굳었다. 서윤은 웃고, 예를 갖추고,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자꾸 동쪽 대문 쪽으로 미끄러졌다.다시 불러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령은 서원당에서 어머니의 탕약을 식히며 그 변화를 보았다."령아."유씨가 낮게 불렀다.월령은 숟가락을 멈췄다."서윤이를 미워하니?"탕약 위로 김이 얇게 흔들렸다. 월령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미워한다, 그렇게 말하면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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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내지

문상궁은 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얇은 긴장이 남았다.옷은 먹빛에 가까운 청색이었고, 소매 끝에 가는 금선이 한 줄 놓여 있었다. 걸음은 느리지 않았으나 서두르는 법도 없었다.심가의 하인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숙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랬다.오래 갈린 예법 앞에서, 사람은 명령보다 먼저 몸을 낮추었다. 문상궁은 유씨에게 먼저 예를 갖췄다."숙비마마께서 심 부인의 차도를 물으셨습니다.""마마의 은혜가 과합니다."유씨가 몸을 낮췄다."마마께서는 과한 은혜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문상궁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웃음도 위협도 없어, 도리어 피하기 어려웠다.그녀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비단 상자의 각을 손끝으로 맞추었다. 봉인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궁녀의 소매가 상자에 닿지 않았는지 차례로 살피는 손이 지나치게 익숙했다.문상궁은 뒤따르던 궁녀에게 눈짓했다. 궁녀가 낮은 비단 상자를 내밀었다.안에는 흰 내지 스무 장과 작은 먹 하나, 비단 끈으로 묶인 봉서가 놓여 있었다."자녕궁 내지입니다."그 말에 한씨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조심스러워졌다.서윤은 숨을 멈췄다.월령은 내지의 가장자리를 보았다.평범한 종이 같았다.흰빛이 지나치게 곱고, 표면이 매끄러웠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의 네 모서리에 아주 가는 선이 있었다.낮에는 보이지 않고, 등불 아래에서야 살아날 금빛이었다. 궁의 종이는 글씨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손끝의 물기와 지워진 망설임까지 오래 붙잡았다."마마께서 심 소저의 글씨를 곱게 여기셨습니다."문상궁의 시선이 서윤에게 닿았다. 서윤은 그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졌다.월령은 그 붉어짐을 보며 속이 서늘해졌다. 숙비는 다시 부르지 않았다.대신 부름보다 오래 남을 물건을 보냈다.문상궁은 봉서를 열었다."마마께서 자녕궁에 걸 새 계절문을 고르십니다. 심 소저께서 이 글귀를 정서해 올리시면, 마마께서 친히 보시겠다 하셨습니다."한씨가 숨을 삼켰다.친히.그 말은 꿀처럼 달고 칼처럼 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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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초고

그날 저녁, 심가 안쪽 작은 서실에서 흰 종이 스무 장이 사람의 숨을 조금씩 낮추었다.서윤은 붓을 들었다.월령은 곁에 앉아 먹을 갈았다. 먹이 벼루에 닿을 때마다 낮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둥글게 갈린 먹물이 천천히 깊어졌다. 서윤은 첫 장을 펴고도 한참 글자를 쓰지 못했다."천천히 해도 돼."월령이 말했다."묘시 전까지라면 밤은 길어.""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세요."서윤이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붓끝이 종이 위에서 작게 떨렸다."하지만 언니는 언제나 먼저 해내시잖아요."먹물 한 방울이 붓끝에 맺혔다. 떨어지기 직전의 검은 물방울이었다.월령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먼저 해낸 것이 아니었다.너무 늦게 배운 것이 많았고, 너무 늦게 알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나도 많이 늦어."월령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언니가요?"서윤의 눈이 올라왔다."응."월령은 웃었다."그러니 네가 쓰는 동안 나는 먹을 갈게. 급하면 글씨가 먼저 다친다."서윤은 잠시 월령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고마움과 의심이 함께 스쳤다.한쪽은 손을 내밀고 싶어 했고, 다른 한쪽은 그 손이 제 붓을 빼앗으러 온 것인지 재고 있었다. 월령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그저 먹을 갈았다.서윤이 첫 글자를 썼다.꽃.획은 곧았으나 힘이 조금 과했다. 다음 글자는 흐렸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손이 풀렸다.완성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문제는 초고였다.글씨를 쓰기 전, 서윤은 빈 종이 한쪽에 작은 글을 적었다가 지웠다. 처음에는 계절문인 줄 알았다.그러나 월령은 먹을 갈다 말고 그 글자의 일부를 보았다.언니는 궁을…다음 글자는 먹으로 덮였다.왕부…그 아래도 검게 지워졌다.월령의 손목이 작게 굳었다. 서윤이 급히 종이를 접으려 했다."그건…""초고야."서윤의 목소리가 빨랐다."어차피 같이 올리라 하셨잖아요."월령은 종이를 빼앗지 않았다. 지금 빼앗으면 서윤은 다시 문을 닫는다.그러나 그대로 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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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손끝

문을 열자 윤백이 손바닥만 한 납작한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강무진은 조금 뒤 회랑 그림자 안에 있었다.오늘도 아무것도 보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그가 선 자리는 서실을 지나는 모든 하인의 시선을 막고 있었다."왕야께서 보내셨습니다."윤백은 아주 공손했다.서윤의 눈이 월령과 상자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또 언니.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들리는 듯했다. 윤백은 그 시선을 눈치챈 듯, 한 박자 늦게 상자를 조금 낮췄다."심가 두 아가씨께 필요한 물건이라 하셨습니다."그 말에 서윤의 얼굴에서 날이 조금 빠졌다. 윤백이 먼저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얇은 비단 장갑 두 켤레와 작은 사기병 하나, 손수건보다 작은 흰 천 조각이 있었다."내지에 손을 대기 전 쓰라 하셨습니다."윤백이 말했다."자녕궁 내지의 금선은 종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답니다. 오래 누른 손과 지운 자리의 소매 끝에 옮는다고요. 물로 씻으면 번지는 것이 있고 기름으로 닦으면 붙는 것이 있으니, 먼저 마른 천으로 누르라 하셨습니다.""이 병은 무엇입니까?"월령이 사기병을 보았다."쌀뜨물을 가라앉혀 위의 맑은 물만 받은 것입니다. 독은 아니고, 향도 없습니다."윤백은 아주 엄숙하게 덧붙였다."맛도 없습니다."강무진의 헛기침이 들렸다.서윤이 눈을 깜빡였다.월령은 이런 때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 끝이 조금 흔들렸다."왕야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은 짧습니다."윤백이 자세를 고쳤다."손끝에 남는 것이 가장 늦게 들킨다."그 말이 먹 냄새 위로 내려앉았다. 서윤은 뜻을 다 알지 못해도 표정이 굳었다.월령은 알았다.자녕궁 내지, 금선, 초고, 손끝. 위지헌은 이 방에 없는데도 붓끝에 맺힌 먹물의 무게까지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두려웠고, 동시에 믿고 싶었다. 그 두 마음이 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것이 더 두려웠다."고맙다고, 왕부에 전해 다오."월령이 말끝을 골랐다.윤백의 눈이 아주 잠깐 웃었다."왕부에 전하겠습니다."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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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막지 마라

밤이 완전히 내렸을 때, 월령은 혼자 후원으로 나왔다.살구꽃은 많이 졌다.꽃이 진 자리에 작은 푸른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 단단하고 떫을 열매였다.봄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기척이 났다.월령은 놀라지 않았다.그 기척을 이미 아는 것 같았다. 측백나무 그림자에서 위지헌이 걸어 나왔다.먹빛 장포가 밤과 거의 같은 색이었다. 그는 등불을 들지 않았는데도 길을 틀리지 않았다."손은?"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월령은 손을 숨기려다 멈췄다.숨기는 편이 더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손끝에 아주 희미한 금빛이 남아 있었다.장갑을 꼈는데도 초고를 펼칠 때 묻은 모양이었다. 위지헌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그 노여움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월령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많이 묻었습니까?""아직은 적다."그가 가까이 왔다.감송향이 밤공기 아래로 낮게 깔렸다. 살구꽃이 거의 지고 없는데도, 꽃잎이 다시 숨결 끝에 걸리는 듯했다.위지헌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다만 제 손수건을 펼쳐 월령의 손끝 아래에 받쳤다."손가락을 펴라."명령이었으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월령이 손가락을 폈다.위지헌은 사기병의 맑은 물을 손수건 끝에 묻혔다. 물기가 손끝에 닿기 전, 그가 잠시 멈췄다."차갑다."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차가울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는 일.그런 작은 예고가 왜 이토록 다정하게 들리는지 월령은 알지 못했다. 물 젖은 천이 손끝을 눌렀다.차가운 감각이 먼저 오고, 그 뒤로 위지헌의 손등에서 옮아 온 낮은 온기가 따라왔다. 그는 손가락을 문지르지 않았다.누르고, 떼고, 다시 누르는 방식으로 금빛을 천천히 걷어 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살피는 그 느린 손길 아래에서, 월령의 숨이 자꾸 얕아졌다.위지헌은 그 얕아진 숨을 들었다. 들으면서도, 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오히려 한 박자 더 느리게, 손끝 마디를 따라 천을 눌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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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길목을 바꿔라

"그대로 올립니까?""아니. 문은 닫지 말고, 길목을 바꿔라."위지헌은 그녀가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했다."바둑에서 상대가 네 돌을 보고 들어오면, 그 돌을 치우는 것이 늘 답은 아니다. 치우면 상대는 다른 곳을 본다. 두면 그 돌만 본다. 대신 그 돌 뒤에 네 집을 지으면 된다."월령은 천천히 이해했다."초고를 완전히 숨기지 말고, 자녕궁이 보고 싶어 할 만큼만 남기면 되겠군요."위지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정말?"낮은 물음이었다.월령의 심장이 한 박자 엇나갔다."제가… 잘못 알아들었습니까?""아니."그가 손끝의 마지막 금빛을 눌러 걷었다."너는 너무 빨리 알아듣는다."꾸지람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차게 말하는데, 월령은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위지헌은 손수건을 접었다.금빛이 묻은 면이 안으로 들어갔다."네 숨이 흔들렸다는 말은 남기지 마라. 왕부라는 두 글자도. 숙비가 보아야 할 것은 네 마음이 아니라, 서윤이 붓을 쥔 채 오래 망설였다는 흔적뿐이다."그가 그녀의 손을 놓았다.놓고서야 월령은, 그가 아주 잠깐 제 손가락을 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그 아이가 너무 아프지 않겠습니까."월령이 작게 물었다.위지헌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차가워, 월령은 또 무른 말을 했다고 여겼다.그러나 다음 말은 뜻밖에 조용했다."아프지 않게 데려오는 길은 없다. 다만 죽는 길과 아픈 길이 있으면, 아픈 길을 남겨야지."월령의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는 잔인한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잔인하게 들리면서도 믿을 수 있었다."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요.""살릴 것이다."너무 단정한 확답이었다."정치적인 이유로요?"월령이 작게 물었다.위지헌의 시선이 멈췄다.밤공기 속 감송향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가 한 걸음을 좁히자, 두 사람 사이에 늘 있던 한 뼘이 그대로 남았다.넘지 않았다.다만 그 한 뼘 안에서, 낮게 잠긴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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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림자만

다음 날 묘시 전, 자녕궁으로 올라간 것은 완성본 한 장과 초고 열아홉 장이었다.완성본은 깨끗했다.서윤의 글씨는 밤새 몇 번의 떨림을 지나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계절문에는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기 전의 비 냄새가 담겼고, 마지막 획은 지나치게 힘주지 않아 보기 좋았다.초고에는 지운 흔적이 남았으나, 월령의 이름만은 어디에도 없었다. 왕부라는 글자도 없었다.대신 한 장의 가장자리에 작은 먹 번짐이 있었다. 오래 망설인 사람이 붓을 들었다 내린 흔적.숙비가 준 붓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 애쓴 아이의 조심스러움. 누군가에게 처음 선택받은 기쁨을 놓치기 싫어 밤새 종이를 지킨 마음.자녕궁이 보고 싶어 할 그림자만 남긴 흔적이었다. 문상궁은 비단 끈으로 묶인 종이 묶음을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떠나기 전, 월령의 손끝을 보았다.아주 잠깐.월령은 소매 안으로 손을 감추지 않았다. 손끝에는 아무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문상궁의 가마가 대문을 나서고 나서야, 서원당 쪽마루에 앉아 있던 서윤이 일어섰다.밤을 새운 아이의 눈가는 얇게 부어 있었다. 그래도 등은 곧았다. 제 글이 궁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 아이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하는 모양이었다."언니."서윤이 월령을 보았다."이제 되었을까요.""글은 네 몫을 다했어."월령은 그렇게만 답했다.되었는지 아닌지는 글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정한다. 그 말은 삼켰다. 아이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끝낸 일이었다. 그 끝을 남의 눈치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그날 저녁, 자녕궁에서는 등불이 조금 늦게 꺼졌다. 숙비는 완성본을 먼저 보았다.글씨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그래서 오래 보지 않았다.그녀가 오래 본 것은 초고였다. 금선이 든 내지는 등불 아래에서 희미하게 속을 드러냈다.지운 글자는 없었다.그러나 종이의 가장자리에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붓을 들었다 내린 자리, 먹을 머금었다 삼킨 흔적, 누군가 끝내 쓰지 못한 말의 그림자.숙비의 손끝이 그 그림자 위에 멈췄다."누가 곁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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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공문

자녕궁에서는 칭찬도 꾸짖음도 오지 않았다. 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나도,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윤은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가 부르는 말에 답하려다 말고. 날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밴 버릇처럼 굳어 갔다.월령은 서원당 처마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낮았고, 살구나무 가지의 푸른 열매는 아직 손톱만 했다."아가씨, 서윤 아가씨께서 또 동문 쪽을 보십니다."청아가 낮게 말했다."보게 두어."월령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기다리는 눈은 억지로 감기면 더 오래 아파."청아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느질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바구니에는 어머니의 속저고리와 월령의 흰 장삼, 서윤이 지난번에 소매를 뜯어 놓은 하늘빛 치마가 함께 있었다."이 치마는 서윤 아가씨께 돌려드릴까요?""아니. 오늘 안에 꿰매서 보내 다오. 손이 제일 야무지잖아."월령이 옅게 웃었다."실은 너무 조이지 말고.""예?""찢어진 자리에 실을 너무 세게 당기면, 천이 운다."청아는 그 말을 오래 생각하는 얼굴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정오 무렵, 동쪽 대문이 다시 술렁였다. 서윤은 이번에도 고개를 들었다.그러나 들어온 것은 자녕궁의 부름이 아니라, 호부의 낭관이 보낸 공문이었다. 누런 겉장에 호부의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심도윤은 아직 북문군 진영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둘째 숙부 심도현이 먼저 문서를 받았다. 그의 얼굴은 처음에는 무심했으나, 두 번째 줄을 읽는 순간 굳었다."북문군 군량 장부를 다시 올리라?"한씨가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지난달 남운로에서 올라온 조운 곡식 수량과, 북문군이 받은 수량이 맞지 않는다는 게요. 호부에서 사흘 안에 심가 보관 장부를 대조해 올리라 했소."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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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오색실

호부의 공문이 지나간 뒤에도 자녕궁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다음 날 아침, 문상궁이 보내온 것은 부름이 아니라 작은 칠합이었다.칠합 안에는 오색실이 놓여 있었다.청, 홍, 황, 백, 흑.다섯 빛의 실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으나, 햇빛을 받자 저마다 다른 얼굴로 빛났다. 푸른 실은 물처럼 차가웠고, 붉은 실은 막 피어난 석류꽃 같았으며, 누런 실은 햇곡식의 껍질처럼 부드러웠다.흰 실은 손대기 어려울 만큼 희었고, 검은 실은 오래 갈아 가라앉힌 먹빛과 닮았다."마마께서 초여름 장명결을 준비하십니다."문상궁은 이번에도 향을 쓰지 않았다."심가 두 아가씨의 손이 정갈하다 들으시고, 오색실 몇 묶음을 내리셨습니다. 자녕궁 향낭에 맬 결입니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그러나 느슨하지 않게 매라 하셨습니다."서윤의 눈이 실 위에 붙었다.또 직접 부르지는 않았다.그러나 손을 다시 쓰게 했다. 그 작은 차이가 아이의 숨을 더 가늘게 만들었다.월령은 실을 보았다.종이가 아니었다.이번에는 정말 사람을 보려는 수였다. 누가 먼저 어떤 색을 집는지, 누구의 손이 떨리는지, 매듭이 느슨한지 지나치게 조이는지.자녕궁은 글씨보다 더 오래된 것을 — 사람의 버릇을 — 보려 했다. 그것은 가장 숨기기 어려운 글이었다."상궁마마."월령이 조용히 불렀다."서원당 처마 아래가 밝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보실 수 있으니, 그곳에서 매듭을 지어도 되겠습니까?"문상궁은 잠시 월령을 보았다."그리하십시오."거절하지 않았다.그 말만으로 충분했다.자녕궁은 어두운 방에서 몰래 흔들리는 손보다, 밝은 곳에서 감추려 애쓰는 손을 더 좋아했다.*서원당 처마 아래에 낮은 상이 놓였다. 청아가 실이 바닥에 닿지 않게 흰 천을 깔았고, 하인들은 멀찍이 물러났다.어머니는 침상에서 조금 몸을 일으켜 두 딸을 보았다. 한씨는 서윤의 뒤에 앉아 손수건을 쥐었다.손수건 모서리는 오늘도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서윤은 먼저 붉은 실을 보았다.그러다 황색 실로 눈을 옮겼고, 마지막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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